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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hall overcome(우리 승리하리)
마태복음 7:24-29 2021/03/14 사순절 제4주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인 도종환이 쓴 <담쟁이>라는 시입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 마지막 시구가 큰 울림을 줍니다.
제가 늘 꿈을 꾸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것은 교회가 감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가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저것은 그리스도인이 감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모두가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감히 넘을 수 없는 벽을 결국 넘는 것처럼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말씀을 받아들인 우리 장정교회가 수천 개의 영혼을 이끌고 감히 넘을 수 없는 세상의 벽, 절망의 벽, 두려움의 벽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 결국 이르는 상상입니다.
저는 그 상상으로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갑니다.
또 다석 유명모가 기도했던 것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라는 높은 뜻을 여러분과 함께 품고,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오르는 꿈을 오늘도 꿉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문제는 꿈이 큰 만큼 좌절 또한 크다는 것입니다.
꿈이 큰 만큼 좌절도 크겠지요?
그래서 종종 멈칫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정말 가능할까?’
이런 의심이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그 때 저를 일으켜 세우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We shall overcome’입니다.
이 곡을 누가 처음 짓고, 노랫말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흑인들만 모이는 침례교회 찬송가로 1900년 초부터 교회에서 불러지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없습니다.
영어 가사의 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언젠가는
마음속 깊이 나는 믿는다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찬양이 인권과 자유를 노래하는 저항의 상징이 됩니다.
특히 1963년 8월 23일부터 저항의 노래로 굳혀지게 됩니다.
1963년 8월 23일입니다.
그날 목사 마틴 루터 킹은 워싱턴 대 행진에서 ‘I have a dream’이라는 전대미문의 설교를 통하여 감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습니다.
그렇게 20만이 참여하는 워싱턴 대 행진이 시작됩니다.
그 날 부른 노래가 ‘We shall overcome’입니다.
20만이 넘는 군중이 따라 부르면서 ‘We shall overcome’은 흑인 침례교 찬양에서 인권과 자유를 노래하는 저항의 상징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노래를 흑인 침례교인만이 부를 수 있는 소울(soul) 영혼의 찬양으로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또 이 노래를 인권과 자유를 노래하는 저항의 상징으로도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부르고,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말로 번역된 복음성가의 가사 때문입니다.
가사만 읽어 볼까요?
감히 넘을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의 장벽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떨 구고 있을 때.
그 장벽을 넘게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감히 넘을 수 없는 고난과 시련, 현실의 장벽이 우리 안생을 가로 막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We shall overcome’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승리를 반드시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첫 단어가 '그러므로'라는 종결 접속부사로 시작이 됩니다.
(새)마7: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7: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7: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할 것이다.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요약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계시된 말씀이 거룩한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들은 말씀 그대로 우리 몸으로 받들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증거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몸으로 (이 육체의 장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증인, 말씀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우려했던 현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그래서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새)마7: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율법과 예언서 즉 모든 성경의 본뜻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본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 몸부림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신앙에 안주한 이들, 그런 교회를 보면서 ‘씨앗의 설움’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이 이런 쓴 소리를 낸 것입니다.
예수는 말을 입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 했다. 그래서 자기 말 믿으란 말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했다. 그가 피땀 흘려 한 말씀을 몇 주일 교회에 가고, 몇 해 신학교에 건들건들 다니고는 제 것이나 되는 듯 팔아먹으려는 놈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제 딴으로 조금 얻은 것을 내세워 증거하고, 그 때문에 참이 뭔지 아는 민중이 조금 거기 귀 기울이는 것을 보면 제 편에서 저건 가짜라고 큰소리치는 놈들.
이 충고가 있는지 4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시원하게 변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언제나 그러듯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닮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괴리,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답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곧 로고스를 듣고도 그것을 그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몸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
곧 로고스를 그의 제자인 우리가 몸으로 부딪치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을 봅시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행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런데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행하지도 않고 가르치려합니다.
행하지도 않고 전도하려합니다.
누가 그 가르침에 누가 그 전도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결국 열심과 노력이 울리는 꽹과리 곧 소음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가 묵직한 것입니다.
결론이라서 묵직한 것이 아니라 많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기 때문에 묵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기 집을 짓는 두 건축주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짓는 건축주와
또 하나는 모래 위에다 자기 집을 짓는 건축주가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건축주라면 어디에다 여러분의 집을 짓겠습니까?
반석입니까? 모래입니까?
반석이겠지요.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집을 짓는다면, 반석입니까? 모래입니까?
역시 반석이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반석위에(돌덩이) 집을 짓는 사람 특히 믿음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반석 위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과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제의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계산해 보면 매력이 없습니다.
이상은 반석이지만 현실은 모래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상당한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돈을 내는 건축주라면 어디에 집을 짓는 것이 더 효율적일까요?
어디에 짓는 것이 건축비의 단가를 더 낮출 수 있겠습니까?
반석이 아니라 모래위입니다.
현실을 바로 직시 할 수 있는 감각만 있다면 굳이 반석위에 자기 집을 짓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고, 비용도 많이 들고, 해결해야 할 수고로운 일들이 이만 저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남들이 번듯한 집을 뚝딱 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반석(돌덩이)과 씨름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것입니다.
‘저러다가 언제 집을 짓지’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으로 다가오겠지요.
이처럼 반석위에, 돌덩어리위에 자기 집을 짓는 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고집이 없으면 할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언제입니까?
마태는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25절과 27절에서 네 개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비가 내리다'
'홍수가 나다'
'바람이 불다'
'그 집에 들이치다'
이 때 가장 치명상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화창한 날만 계속된다면 모래 위에 세운 집도 어연번듯해 보입니다.
문제는 그 날에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그 집에 들이치는 날, 즉 육체의 장막을 벗는 심판의 날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될까요?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에 그 무너짐이 엄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반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반석 위에 믿음의 집을 짓은 그리스도인.
반석 위에 참된 교회의 터를 세우는 교회공동체.
사실 이들의 손해는 현실에서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에 비해, 노력의 비해, 물질의 비해, 하나같이 모두가 손해입니다.
미련하다는 손가락질을 당할 만큼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We shall overcome’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우리에게 최후 승리를 안겨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특히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심판의 물이 들이찰수록, 그렇게 해서 육체의 장막이 위기와 절망 앞에 놓일수록,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정말 좋은 세상이 올까요?"
‘정말 정직한 교회와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승리하는 세상이 올까요?’
그렇게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첫째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오늘도 걸어가십시오.
둘째 계산하지 마십시오.
셋째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마십시오.
넷째 바람이 조금 분다고 휘뚝휘뚝 비틀거리지 말고,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면 묵묵히 그냥 해내십시오.
그러면 다섯째 ‘We shall overcome’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반드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슷한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람과 홍수에 빗대 설명했다면, 바울은 모든 것을 소명시키는 불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새)고전3:12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3:13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심판의 불, 소멸의 불, 멸망의 불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믿음의 업적이 있는가?
다시 말해 믿음으로 버틸 수 있는 '밑바닥 힘' ‘We shall overcome’ 그 믿음의 저력이 있는가?
저는 소망합니다.
그 '밑바닥 힘'을 반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