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는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필기류
고운당필기 제2권 / 장 부인의 무덤〔獐夫人冢〕
산송(山訟)은 두 집안이 서로 나무라고 욕하는 고질적인 풍습이다. 영남 개령현(開寧縣)은 옛날 감문국이라는 작은 나라였는데, 《동사》에 “크게 서른 명의 병사를 내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나라다. 고을에는 감문국의 금효왕릉(金孝王陵)과 장부인총(獐夫人冢)이 있다. 나는 〈회고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희 떠난 자리에는 들꽃만 향기롭고 / 獐姬一去野花香
땅에 묻힌 깨진 비석 옛 금효왕 것이라 / 埋沒殘碑古孝王
서른 명 용맹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 三十雄兵曾大發
달팽이 뿔 위에서 치열하게 싸웠다나 / 蝸牛角上鬪千場
하지만 또한 아득해서 상고할 수가 없다. 올봄에 그 고을 어떤 유생이 장 부인의 무덤 옆에다 무덤을 쓰려고 했는데, 고을 수령이 고적(古蹟)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하였다. 그 유생이 서울로 달려와 궐 밖에서 격쟁하여 하소연하기를 “장(獐 노루)이란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며 마침내 장 부인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말을 해 대니, 근무하던 관원들이 보고는 모두 포복절도했다. 장씨붙이에 대거리해서 욕하는 자가 없었으니, 슬프다 감문국이여!
[주-D001] 감문국(甘文國) : 삼한 시대의 소국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에 의하면, 231년에 이찬(伊飡) 석우로(昔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벌하고 그 지방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개령현〉의 고적(古跡) 조항에 따르면 개령현에 감문국의 궁궐 유지가 남아 있으며 현의 북쪽 20리에 감문국 금효왕의 능이라 하는 금효왕릉이 있고, 현의 서쪽 웅현리에 감문국 때 장 부인(獐夫人)의 묘로 전하는 장릉(獐陵)이 있다고 한다.[주-D002] 동사(東史) : 이종휘(李鍾徽, 1731~1797)가 지은 기전체의 역사서이다. 단군, 기자조선부터 발해와 고려까지 서술하였다.[주-D003] 회고시(懷古詩) : 유득공의 《영재집(泠齋集)》 권2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중 ‘감문(甘文)’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윤조 (역) | 2020
.......................
고운당필기 제2권 / 동명과 주몽〔東明朱蒙〕
《후한서》 〈부여전〉에 말하였다.
“과거에 북이(北夷) 색리국의 왕이 순행을 나섰는데, 그 궁녀가 왕이 출행한 뒤에 임신을 하자 왕이 돌아와 궁녀를 죽이려 하였다. 궁녀가 ‘지난번에 하늘에 마치 달걀 같은 기운이 있어 제게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은 여자를 가두어 버렸다. 마침내 사내아이가 태어나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했다. 동명은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그 용맹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사수(淹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은 무사히 강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위서》 〈고구려열전〉에 말하였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이고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라 하였다. 부여의 왕이 그녀를 방 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어 피했지만 햇빛이 또 따라와서 임신이 되었고 알 하나를 낳았다. 크기가 닷 되들이만 하였는데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자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장성하자 ‘주몽’이라고 불렀다. 그 나라 속언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의미다. 부여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고 했지만 다리가 없었다. 부여 사람이 바짝 쫓아오자 주몽이 강물에다 ‘나는 태양의 자식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달아나는데 추격하는 병사가 거의 따라잡을 듯하니 어찌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서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고구려’라 이름하였다.”
대개 난을 피해 달아나다가 강을 건널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준 일이 서로 비슷한데 동명은 본래 부여의 임금이고 주몽은 본래 고구려의 임금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 이름이 주몽이다.” 하여 처음으로 ‘동명’과 ‘주몽’을 합쳐서 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려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여에 ‘동명’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주-D001] 색리국(索離國) : 탁리왕(橐離王), 고리왕(櫜離王)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것이 고려, 혹은 고구려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217쪽》[주-D002] 큰 강 :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주몽이 북부여 출신이며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만나 건넜다고 하는데 엄리는 큰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217쪽》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3 〈동명왕편〉에는 현 압록강 동북쪽인 엄체수(淹滯水)라고 기록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윤조 (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