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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독립운동사를 친구들과 같이 공부한 적이 있다.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은 독립운동 인물의 행적과 사상을 살펴보았었다. 치욕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항쟁한 선조들의 모습은 다시는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그저 눈앞의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대로 휩쓸리고 있었다.
이번 새들교육문화연구학교에서는 역사를 주제로 공부한다. 첫 번째 시간은 수원지동벽화마을 역사현장탐방이었기에 토요일 오전, 참가자들과 함께 지동벽화마을을 방문했다. 먼저 수원제일교회에 있는 노을빛 전망대에 올랐다. 수원 화성이 한 눈에 들여다 보였고, 수원 시내 곳곳이 훤히 보였다. 밤이 되면 화성 성곽을 따라 불이 들어와서 야경은 더욱 멋지다고 한다. 높아서 바람이 불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안전장치가 보통 사람 신장보다 높기에 괜찮았다. 7층으로 내려오니 가운데 기둥에 만화 같은 큰 그림이 있었다. 전망대 올라갈 때는 못 봤던 것 같은데 아마 전망대를 얼른 올라가고 싶어 무심결에 지나쳤나보다. 그림 옆에 수수한 옷차림의 여성 한 분이 보였다. 바로 오늘 뵙기로 했던 유순혜 교수였다.
유순혜 교수는 옆의 큰 그림은 ‘수원 화성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수원 화성을 건축하던 당시에 정조 임금이 백성들을 얼마나 고려했는지를 집중하며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다양한 사람들은 잔뜩 신이 난 상태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모두의 신나는 표정이 비슷한 듯 달랐다.
그림에는 다양한 표정뿐만 아니라 상상과 회화가 담겨 있었다. 벽돌을 만들 때 어떤 이는 흙반죽을 피자 도우로 만드는 장면, 당시 군사들이 밤에 훈련을 받을 때 고된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 귀신놀이를 하는 장면, 왜적이 침입했을 것을 대비해서 훈련하는 장면 등 역사 기록에는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을 위한 마음이 담겨져 있어서일까. 화성 건축의 현장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덩달아 신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역사를 함께 일구고픈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 틔움을 느꼈다. 그런데 왜 전망대 올라갈 때 보지 못했을까 싶었다. 저 큰 그림을 지나쳐야 둘러서 지나가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색감이 없었다. 사람의 피부와 머리만 빼고.
유 작가는 노을빛 전망대를 기획했을 때 8층부터 13층까지 좁은 나선형계단을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게 7층부터 10층까지는 갤러리로, 11층에서 13층까지는 내부 전망대로 꾸몄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큰 작품에 색을 화사하게 입히면 갤러리의 다른 작품들에 묻히기에 피부와 머리에만 채색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은 언제든 볼 수 있으니 다른 작품들을 돋보이게 한 것이다.
계단을 갤러리와 내부 전망대를 꾸민 유 교수의 기획에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졌다. 실제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다음 층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했기에 좁은 계단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려한 실내 장식이 아닌 관람객을 고려한 정성과 배려가 사람의 마음을 참 편안하게 만드는 구나 싶었다. 아마도 유 교수가 평생을 사람을 그리면서 얻은 사람에 대한 집중과 공감 덕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수원 화성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보면 성벽 한 군데는 아직 건축 중이다. 유 교수는 그곳이 현재의 우리들이 만들어갈 역사라고 했다. 그림의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유 교수의 마음이 참 울컥 다가왔다. 역사가 그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어진 역사가 나를 말하고 있고, 나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을 잊은 채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면 방향을 잃고 남의 역사를 추종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장소를 이동하여 유 교수는 지동마을에 벽화를 그리게 된 역사를 들려주었다. 전망대가 완공될 즈음 벽화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시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지동마을은 화성이라는 문화재가 있어서 문화재 보호법이 적용되어 재개발이 금지된 지역이었다. 금세 쓰러져갈 허름한 집에 사시던 분들에게 재개발이 묶인 원망과 불만이 가득했다.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물 한 잔 얻을 수 없는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쳐야 했다. 게다가 막상 마을을 가보니 하수구 냄새가 심해서 책임 맡은 것을 후회했다. 전에 일하던 환경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환경을 마주하니 1년만 하고 적당히 하고 떠나려 했었단다. 그런데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지 5개월 쯤 아이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루는 엄마 손을 잡고 가던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가 저기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그러더니 막대 사탕 하나를 저에게 주는데 이게 뭐냐고 받았더니 막 뛰어가는데 엄마가 말해주길 우리 아이가 유치원에서 칭찬을 받아서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받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선생님에게 주고 가도 되냐고 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사탕을 받아 들고요. 주민들이 무슨 이 동네에 그림을 그린다고 그래 재개발이나 해줘! 라고 했던 생각이 나면서요. 이제 아이들이 다니면서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탕 하나를 주면서 기꺼이 주는 광경이 벌어지면서 그들의 마음이 열리는 걸 봤어요”
아이가 건네 준 사탕은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이었다. 지극히 순수한 마음에 문을 열었던 자신에게 우연이었을까? 우연 같은 필연일 테다. 결국 사람을 생각하며 끝까지 버틴 후에 온 선물이었다. 유 교수가 참 어른으로 다가왔다. 난 내 마음에 싫으면 그저 싫은 것만 생각하고 끝내 허물어지기 일쑤였는데 유 교수는 끝까지 마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다가오는 기회를 잘 붙잡았다. 역사는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끝내 인내하면 우연같은 만남이 다가오고 새 역사를 일궈갈 힘을 얻는다. 그저 쉽사리 포기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벗어버리는 것은 인내의 힘에서 온다.
이후, 주민들은 자기네 담장에는 언제 벽화를 그려주는지 물어왔고 자연스럽게 주민과의 약속이 생겨났다. 주민들이 유 교수의 마음을 알아주었고, 유 교수도 주민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지동마을의 변화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만나면서 시작했다.
깔끔하게 벽화를 그린 곳에는 쓰레기가 함부로 버려지지 않았다. 벽화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주민들은 스스로 집 주변을 치우게 되었고 집 앞의 눈도 쓸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벽화를 계속 그려가는 유 교수를 보면서 재개발이 안 되겠구나 싶어 스스로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재개발을 위해 집이 헐어도 일부러 수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유 교수가 기획한 벽화마을은 ‘아마추어의 한 땀, 한 땀으로 만든 명품 벽화‘이다. 자신이 그리면 금세 그릴 것도 붓 한번 잡아본 적 없는 할머니가 색칠을 하고, 동네 어린이집 친구들이 나비를 그렸고,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정성껏 벽화를 만들어 갔다. 마치 화성을 건축할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구해온 돌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던 것처럼 벽화는 주민의 손길로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벽화를 시작할 때 유독 신경 쓴 부분이 있었다.
“예전에 벽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색채가 너무 우울했어요. 그것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우울할까 싶어서, 그래서 지동벽화는 조금 유치하게 그렸어요. 알록달록하고 밝고 경쾌한 그림을 일부러 그렸습니다. 관강객을 위한 그림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그림인 것이죠. 관광객은 365일 중 하루만 오지만 주민들은 365일 1년 내내 보게 되기에 조금 멋이지 않아도 되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좋은 정서를 줄 수 있으면 오케이! 어르신들이 깨끗하고 예쁘게 그림 그린데다가 쓰레기 버리면 안 되겠네 하면 오케이! 그러나 관광객을 위한 그림은 매년 다른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래서 밖으로 나가봤다. 어떤 그림들이 마을 벽을 가득 채웠을까? 처음 방문한 곳은 ‘생태, 골목에 심다‘였다. 유 교수가 지동마을을 방문했을 때, 동네의 회백색 벽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고 한다. 1년 내내 회백색만 볼 것이 아니라 생태적 느낌을 주기 위해 사계절을 테마로 그렸다. 다음은 ’동심, 골목에 펼치다‘로 이동했다. 옆 동네 아이들이 벽화를 보러 놀러오기에 동화를 벽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 ’흥부와놀부‘를 소재로 만든 ’놀부의 곳간이 열리는 지동’이라는 제목의 벽화가 있었다. 흥부의 자식이 되면 놀부의 곳간이 열린다는 의미인데 지동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쏟아지겠구나 싶었다.
동네를 다니면서 만나는 어르신마다 유 교수와 정답게 인사했고 참가자들에게도 벽화 그리러 왔냐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벽화 곳곳에 새겨진 정성을 주민들이 알아주었기에 골목만 바뀐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도 변화되었다. 그 정성은 주민들을 향한 애정이었다. 마치 정조 임금이 화성이 축조될 때 백성을 생각했던 애민처럼 말이다. 그 애정을 잘 닮아가고 싶다. 근래 애정의 절실함을 많이 느낀다. 사람을 향한 애정이 부족해지면 그만큼 자신이 벽을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그 벽의 높이가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높이다. 이 마음으로 어떻게 역사를 만들 수 있겠는가. 벽을 허물고 원래 관계에 더욱 성실하고 정성껏 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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