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권득용 시인의 「문경을 쓰고 문경을 읽다」 47
봉서리 병암정
강상률
1
한적한 고요가 짙푸른 산을 지키는
산비둘기 숨어우는 봉서리 기슭에
세속의 그림자를 산정에 묻어놓은
한시대 스쳐간 바람의 언덕을 본다
2
영남파의 올곧은 절개와 풍류를 지닌
안동문중의 김현규옹이 경서를 읊은
병암거사 실학덕목 청자빛 하늘 되어
병풍바위 각자의 선명한 필체 보듬고
3
사백년 인고의 침묵 지켜온 낙락장송
성혈의 구멍돌 풍요와 다산을 빌었던
간절한 염원의 정성이 한결같은 마음
청산을 보는 꿈이 영강보다 푸르다
4
먼 적막에 묻힌 낯익은 고전의 정자는
그리움으로 채운 월방산 자락을 안고
용주벌 바라보며 구름의 세월 달래나
병암정 뜰엔 백리향 붉게 꽃피고 있네
병암정기(屛巖亭記)에 “누거암서(樓居岩栖, 산속의 훌륭한 집에서 사는 것)는 가히 사람의 성정을 아름답게 길러주고, 명창비궤(明窓備机, 밝은 창가에 책상이 있는 검소한 방)는 족히 정신을 떨치고 더욱 분발하게 한다…. 이 정자 또한 후일에 광채가 날 것이며 이태백의 산방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별서에 뒤질 것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 1738년(영조 14)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손들의 학문정진을 위해 조선중기 유학자 병암 김현규(1765~1842)가 1832년 지은 병암정은 경북유형문화재 308호이다.
시인은 조그만 차이로도 가를 수 없도록 병암정의 시중유화(詩中有畵)를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의 소리가 곧 그림이 되고 있다. 첫째연에서 봉황이 머무는 “세속의 그림자를 산정에 묻어놓은” 봉서리 병암정은 큰바위가 12폭 병풍으로 둘러쳐진 “한적한 고요”로 “한시대 스쳐간 바람의 언덕”이 된다. 바람은 자연의 소리로 목가적 풍경이지만 때론 우리네 삶에서 신기루 같은 희망이거나 꿈이 아니던가. 촘촘한 바람의 시간들이 서사의 아카이브가 된다. 둘째연에서 병암의 은거(隱居)는 “실학덕목 청자빛 하늘”이 된다니 도(道)를 강론하고 밝히는 규범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지성이었다. 그 지성이 세속의 비갠 뒤 먼 하늘 푸른색으로 청자빛이 된다. 이백의 파주문월(把酒問月)이 아니라 고려청자 학으로 환생하여 병풍바위에 병암(屛巖)을 새겨 보듬고 있다.
그 뿐이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초야에 산림종장(山林宗匠)하는 그의 덕행이 마치 “사백년 인고의 침묵 지켜온 낙락장송”의 기개로 성혈(性穴)의 암각화를 완성하면 화자는 “청산을 보는 꿈이 영강보다 푸르다”고 절창한다. “먼 적막에 묻힌 낯익은 고전의 정자”는 오랜 세월의 고요가 가득한 정면2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구름에 스친 달빛이 "그리움으로 채운 월방산”이 되어 옛 사벌의 “용주벌 바라보”면 “병암정 뜰엔 백리향 붉게 꽃피”어 선비를 기리는 애틋한 마음이 오히려 숙연하다. 이 시는 고답(高踏)한 풍경의 감성에 머무르지 않고 절제된 시어들이 미적 조형으로 역사의 사실과 정서의 풍경을 오브제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시각의 언어가 조형으로 뛰어나다.
------
강상률 (1946~ ) 시인
전우신문 진중문예 활동(1969), 한국예술협회 고문, 한국문협회원, 불교문학경북지부장, 문경새재문학부회장.
시집 ????북소리 들리는 아침????(1984) 외 5권
대통령상, 다산문학대상, 불교문학대상, 한국문예예술대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