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도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한 곱사등이
1780-1802, 세례명 가롤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이경도(李景陶. 가롤로)는 이순이(李順伊,루갈다)의 오빠로, 곱사등이였다. 본관은 전주이며, 성호 이익의 외손자 이윤하와 권철신의 누이동생 권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오희(五휴)였으며, 서울 한림동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명망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가 연기 군수를 지내 ‘이 연기 댁’으로 불렸고, 아버지 이윤하는 남인계의 지도층에 속해 있었다. 그는 곱사등이였지만 양반 집에서 부모의 교육을 잘 받아 한문 교리서들을 혼자 읽을 수 있었으며,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점잖았다.
아버지 이윤하가 권철신과 권일신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독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이경도 역시 1791년부터 부모의 지도와 집에 있는 천주교 서적들을 혼자 탐독하면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2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장이었던 그는 상례를 유교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슬기와 용단으로 십계명에 저촉되는 어떠한 부당한 협력도 하지 않고 견디어 냈다.
그리고 열일곱 살 되던 해 결혼하였다.
샤를르 달레는《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가 세속을 멀리하며 양반들이 주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기생집 출입을 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곱사등이 행세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포도청 신문에서 "본디 곱사등이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보아, 태어날 때부터 곱사등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사영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홍재영, 홍백영, 이희영, 최필제, 최필공, 허속, 윤종백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 태어날때부터 곱사등이였던 이경도
그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경도는 곧바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포도
청의 신문에서. 마음이 잠시 흔들려 나라에서 천주교를 엄하게 금하기 때문에 교리서들은 모두 불태웠고 그 후로 믿지 않았다고 거짓 자백하였다.
그러나 곧 간절히 크게 뉘우치고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은 이경도는. 순교할 때까지 어떠한 혹형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형장으로 가기 전날 어머니에게 편지를 올렸다. 편지에서 이경도는 자신이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며 목숨을 바치게 된 것을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 ‘격외(格外)의 부르심’, ‘기은(奇恩)의 은총’ 등으로 표현하면서, 하느님께서 그 은혜를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하였다.
또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자식 노릇을 못하고, 순명하지 못한 일이 더욱 애달파 뉘우쳐도 미
치지 못하옵니다. 내일은 길게 떠나오니 자식 노릇을 할 날이 없삽고…어머님께서 영원한 복을 누리실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하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나서 1801년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니, 그때 나이 스물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