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칠맛 나는 멸치 요리의 추억
소정 하선옥
오늘은 쉬는 날이라 늦잠도 자고 점심도 대충 때우고 아주 오랜만에 낮잠도 한 시간쯤 잤나 보다. 그러다 보니 게으름이 슬슬 올라오며 저녁밥 짓기가 싫었다. 간단하게 밖에 나가서 한 끼 때워야겠다 하고 뒹굴뒹굴하고 있는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하고 나가보니 남동생이 멸치회가 먹고 싶어 덕포(德浦) 어장 막 저녁 물에서 샀다며 비닐봉지에 꽁꽁 싸맨 생선 포대를 내 발길 앞에 내려놓는다. 맨손으로 당장 포대를 끌려 보니 요즈음 보았던 중에서 가장 크고 통통한 멸치였다. 비린내가 진동하였지만 밥하기 싫다고 어깃장 놓았던 내 모습은 언제였던가 싶게 “그래 내가 알아서 멸치회 맛있게 만들어줄게.” 말하는 다정한 누이로 변했다.
한 손으로 멸치 대가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멸치 배를 갈라 뼈를 발라낸다. 그중 크고 싱싱한 놈들은 대가리하고 내장을 분리해서 일부는 구이용으로 일부는 찌개용으로 씻어서 소쿠리에 건져놓는 부지런한 손과는 달리 나의 머리 속은 옛날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초여름, 들판에 밀과 보리가 누릇누릇 익어가는 지금 꼭 이맘때쯤이었나보다. 내가 사는 동네는 반농 반어촌으로 선창에는 봄이 되면 만선의 깃발을 달고 출어를 기다리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열 척 넘었다. 이때쯤이면 멸치잡이 고깃배들은 전날 해 그름에 옥포만에서 그물을 놓아 잡은 젓갈용 멸치를 가득 잡아 싣고 만선 깃발을 올리고 포구로 들어온다. 부두에 들어오면 어부들이 그물에 걸려있는 멸치를 새벽부터 방파제에 한 줄로 널어서 그물코에 걸린 멸치를 틀기 시작한다.
세척에서 네 척 정도 들어와 멸치 그물을 털면 이쪽에서 허이야! 저쪽에서 허이야! 받아치면 노동요지만 구수하고 우렁차게 들린다. 그렇게 털다 보면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멸치는 우리 또래 아이들 몫.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워서 대소쿠리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온다.
화자도 바로 아래 남동생이랑 둘이 새벽부터 멸치 주우려 엎어지면 코닿을 부둣가로 내려간다. 재빠른 동생이 세 마리 주우면 나는 한 마리 주울까 말까 하지만 멸치 그물 터는 아저씨나 우리나 별반 다름없이 머리와 얼굴에 시커먼 생멸치 내장을 뒤집어쓰기 마련이다. 온 옷에 멸치 똥, 비늘 묻은 얼굴로 주워 담은 멸치 소쿠리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에는 우리를 기다린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가 척척 알아서 하신다. 우리가 주워 온 멸치를 손질해서 일부는 굵은 소금 뿌려 석쇠에 가지런히 눕혀 올려, 밥 지은 아궁이 불에 굽고. 일부는 막걸리를 발효시킨 식초에 고추장 듬뿍 넣고 무채 썰어 넣고 집에 있는 양념으로 회무침 만들고. 일부는 된장 풀어 넣고 찌개 끓여서 온 식구 도란도란 둘러앉아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동생이랑 나는 우물물 퍼서 비누로 대충 씻고 밥 먹고 학교 가고 멸치 배만 들어오면 멸치 주우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많이 줍는 날에는 남동생이 “누나야 퍼뜩 갖다 놓고 빈 소쿠리 들고 빨리 오이라”. 하면 나는 주운 멸치 들고 달음박질해서 집에다 부어놓고 다시 내려가고 하는 날에는 생멸치를 소금에 절여서 멸치 젓갈을 담그기도 했다
갑자기 떠오른 옛 생각에 내 손도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뼈를 발라놓은 멸치는 씻어서 물기를 꼭 짜 건져서 몇 년 전 포도주 담그다 설탕을 적게 넣어서 식초가 돼버린 포도 식초를 부어놓고 양파, 오이, 토마토, 풋고추를 채를 치러 넣고 갈아놓은 마늘과 초장을 넣고 버무려 동생이 먹고 싶어 안달인 멸치회를 만든다. 그중에서 큰놈들을 골라 소금 뿌려서 구이용으로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다음은 멸치찌개 요리다. 묵은지 꺼내 씻고 썰어서 냄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멸치 얹고 된장 좀 풀고 콩 간장 두어 숟가락 넣고 고춧가루, 마늘, 파, 땡 초 썰어 넣고 방아잎도 썰어 넣어 보글보글 끓여낸 멸치찌개와 갓 지은 밥 퍼서 함께 먹으니 어릴 적에 먹든 엄마가 해주신 그 맛이랑 비슷하다. 멸치회 한 젓가락 먹으며 “아 맛있다.” 구이 한 마리 먹으면서 “아 맛있다.” “찌개 한 숟갈 떠먹으며 이것도 맛있다.” 이렇게 맞장구치며 동생이랑 오랜만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이렇게 오늘 저녁은 맛난 멸치 정식으로 식도락을 즐겼지만, 내 뱃속 저 밑에서 뻗쳐 오는 피둥피둥 살찌는 소리. 엄마야 이럴 어짜노….
2024년 6월 11일 저녁
첫댓글 감사합니다
표현도 참 재밌어요.
그런데 지금은 이삭줍기가 어렵지요?
줍기를 허락하지도 않을 테고요.
냠냠 아침이나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