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임태식
화계장터를 지나 벚꽃 터널에 들어서면 녹음에 주눅 든 이곳 세상은 사뭇 음침하기까지 하다.
젊은 시절 오지탐험 같은 각오로 전라도 땅에서 여기를 찾아오기까지는 수월찮은 교통난을 겪었다.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탔던가. 십리 벗 꽃 길을 빠져나와 그런대로 공간을 확보한 마을동구 같은 분위기 속에 다리하나를 건너면 쌍계사다. 그곳에 들리면 고운 최치원의 쌍계석문, 혜강 김규진 선생의 일주문 현판에 담긴 예서, 또 금당에 걸린 김정희 어른의 추사체,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고운선생이 짓고 쓴 국보 47호인 진감선사 대공탑비도 볼 수 있지만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화계천, 지리산 주능선의 중간쯤인 벽소령방면에서부터 의신을 거처 흘러내린 본류와, 세석평전에서부터 대성동을 거쳐 흘러내리는 대성골, 그리고 화개재 아래 칠불암 방면에서 흐르는 목통골 지류가 합쳐 진 이곳 신흥 일대는 깊은 계곡과 넘쳐나는 수량으로 언제 찾아도 맑고 장쾌하고 그윽한 맛이 있어 누구에게든 함 부러 자랑하고 싶지도 않고 보여 주고 싶지도 않은 지리산 으뜸계곡이다.
화계천은 깊다. 수많은 계곡 길 중에서도 차량을 이용해 지리산 심장부까지 진입 할 수 있는 곳도 이 길이다. 국립공원 입장료 징수가 폐지된 이후로는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로의 막장에 닿으면 의신마을이다.
이십 여 년 전, 지리산에 홀려 이십 킬로그램의 배낭을 메고 이곳 오지에 들어서면 재 넘어 청학동과도 통하는 영화 동막골같은 세상이었다. 그즈음 나는 소설 태백산맥에 미쳐 있었고 그래서 대성동이나 거림을 거쳐 세석에 자주 올랐다. 이 일대가 태백산맥에서 상당히 비중을 차지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무엇에 끌려오는 몽롱한 정신으로 세석평전에서 야영을 하며 밤새 신열에 떨곤 하였다.
이 무렵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리산 하계등반대」를 조직하여 3박4일간의 일정으로 버스 한 대 분의 인원과 함께 3년째 지리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렇다가 세석평전에서 태풍 키드를 만났다. 40여명의 인원을 대피시켜야 할 책임이 막중하였다. 세석에서의 야영을 포기하고 대원들을 가장 빠르게 안전지대로 피할 수 있는 곳이 거림이었다. 바람보다는 비가 더 세찼다.
계곡물이 무섭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던 나는 대원들을 무섭게 닦달하고 다그쳐 초인적인 기록으로 무사히 하산을 했다.
거림골은 일순간에 물벼락을 맞았고 계곡은 급류에 찢겨나갔다. 우리가 방금 전에 건넜든 목재다리는 한 방에 부서져 쓸려가고 민박 촌에서 기르는 축사안의 가축들도 우리 눈앞에서 허망 없이 떠내려갔다. 우리가 도착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맞은 재앙이었다.
만신창이 된 대원 모두가 떨었다. 겁먹은 우리는 다음 날 천왕봉이고 뭐고 모든 일정을 다 취소 한 채 버스에 오르자마자 혼돈한 잠속에 골아 떨어져 저승의 문턱까지 구경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그해 가을 나는 다시 세석을 지났다. 이번에는 악몽 같은 거림이 아니라 음양수 조금 아래에서 우회전하여 대성동 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날은 혼자였다. 세 시간 삼십 여분의 가파른 하산 길이다.
산은 지난여름을 나면서 더 없이 살찌었고 온갖 결실을 서두르고 있었다. 한 모퉁이를 돌면 거기엔 들꽃의 딴 세상도 있었다. 대성동 물길이 가을 하늘 가을 산을 닮아가며 함께 붉어 흐르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이 일대에는 심심찮게 화전민 일가를 볼 수 있었다. 그날은 때맞추어 점심나절에 대성동에 도착했고 면식이 있는 노부부의 점심밥상머리에서 상추쌈을 달게 먹었다. 그리고 하산의 막바지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둘렀다.
여기서부터는 산길답지 않게 제법 바닥을 고른 오솔길이 열리는데 앞 모퉁이에서 아주 조용한 재잘거림이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토끼처럼 귀여운 두 아이가 책보자기를 낀 채 산모퉁이를 돌아 나오고 있었다.
오 이런! 얼른 보아도 남매인 것 같고 학교에서 돌아온 길임이 분명하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아무렇게나 거친 옷매무새하며 어느 것 하나 세련 된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순진무구 그대로다.
“애들아 잠깐만… 사탕 줄게” 그냥 지나치려는 두 아이를 반사적으로 붙들고 서둘러 비상식품인 초콜렛을 꺼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오빠는 운동화, 동생은 고무신(?)차림이다. “어느 학교? 의신분교요” “ 몇 학년? 저는 3학년 애는 1학년…” “둘이 형제니? 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얼마나 걸리니? 한 시간하고 더요” “비오는 날에는 학교 못가겠네? 네” 이것이 나의 인터뷰 전부였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 모퉁이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던 그 짧은 시간이 나와 그 애들과의 전부였는데 실로 오랜 인연의 끈으로 맺어진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자꾸만 내 마음을 파고 드는 것은 왜 일까.
우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마디만 했다. “동생 잘 다리고 다녀야 한다. 네!”
또록또록 대답하고 뒷도 없이 산길을 오르는 두 남매를 숲이 가릴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왜 그 아이들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산을 오를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아니면 누구와 아이들 얘기를 나 눌 때도 두 남매는 내 기억 속에 너무나 생생하게 각인 되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쯤 잘 자랐다면 둘 다 갓 삼십대 쯤 일터인데… 그날, 그 꼬맹이들이 내 곁에 가까이 닥아 설 때 풍기는 땀내인지 단내인지 분간이 안가는 끈적끈적한 인연으로 애들은 내게 평생을 지닐 소중한 문장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지극히 작은데서 지극히 큰 것을 보면 다 보지 못할 것이요, 지극히 큰데서 지극히 작은 것을 보면 분명하지 못할 것이다」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이다.
한 고을에 사는 누이 네가 여름휴가를 받았기로 그 들 내외와 함께 섬진강을 따라 화계에서 점심을 먹고 여기 대성동 의신까지 올라왔다. 사정이 허락되면 의신에서 빗점골을 볼 수 있으려나 싶어서이다.
빗점골, 소설 태백산맥 후반부에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지명이다. 빨치산의 전설적 인물 이현상, 한국전쟁의 한 중심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의 퇴로가 막힌 후 마지막 3년간 남부군 사령관으로 이곳 지리산 일대를 휩쓸고 다닌 그는 누구인가?
충남 금산에서 유복한 양반가의 막내로 태어나 일제치하의 6.10만세 사건 가담에서부터 오로지 일생을 혁명으로 불 지르다 꺼져간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이다. 이곳 의신에서 1.5km지점에 지리산토벌작전의 최후의 격전지가 있다. 지리산 주 능인 토끼봉과 명선봉, 그리고 연하천과 형제봉 줄기에서 흘러내린 세 계곡이 모아진 합수내가 있다. 그가 죽기 전날까지 은신했던 빗점골 아지트가 바로 그곳이다. 그는 죽어서도 지리산을 떠나지 못하고 화계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 졌다.
팔월 초순, 우리가 온 이날은 온 지리산이 비에 젖어 있었다. 그것도 폭우에 가까운 날씨였다. 우리는 비 때문에 빗점골을 들어가지 못했다. 산에서 만난 비를 피할 데가 없음을 알게 되는 순간 비로소 느꼈다. 비를 피하려는 나무는 단 한그루도 없다는 것을…
지리산은 늘 대책 없는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 어쩔 것이냐, 이제부터 어찌 살려하느냐?
그러나 미련한 중생이 그 끈질긴 물음에 오늘도 답하지 못한다.
광주에 가면 이현상평전을 사야겠다.
그리고 올 가을 단풍이 제 철일 때 다시 빗점골에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