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경북 예천 소백산 용문사(小白山 龍門寺)를 찾아서 ①
-일주문에서 회전문, 해운루, 보광명전까지-
지난 8월 23일, 오후 12시 40분에 봉정사를 물러나와 인근의 광흥사에 가려다가 하회마 을을 둘러보고 나서 용문사로 가기로 하여 방향을 하회마을로 잡고, 지도를 보며 하회마 을로 향했습니다. 약 50여분 만인 오후 1시 32분, 하회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날씨는 이 글이글 타는 듯했습니다. 여기는 주차료 2,000원에다 입장료가 3,000원이더군요. 하회 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에 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카메라 밧데리 3개 중 둘이 거의 소모가 되어 하나 남았는데 용문사를 감당할 수 있으려나 걱정되어 가 급적 사진을 자제했습니다. ^^
세계유산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
하회마을에 유명한 것은 하회탈춤인데 마침 2시부터 공연을 한다고 해서 1시간 동안 지켜 보았습니다. 무척 해학적이고 풍자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았습니다.
백정이 황소를 만난 장면
파계승이 부네에게 수작하는 장면
하회마을의 초가집 모습
600년 된 느티나무인데 어마어마하게 크더군요. 소원을 들어주는 삼신당나무라 합니다.
삼신당나무에서 인증샷
하회에서
하회탈춤공연을 1시간여를 보고 나와 하회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날씨가 더우니 매미소리도 거셌습니다. 점심은 어떻게 하다 보니 굶게 되었네요. 콘 하나씩 먹는 것으 로 허기를 달래고 4시 10분, 마지막 순례지 용문사로 향했습니다.
하회마을을 물러나 다시 34번 도로를 타고 달리다 예천읍내에서 928번 도로를 찾아 달리 니 용문사 이정표가 나와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갔습니다. 오후 5시에 용문사 경내에 도착 했으니 좀 늦은 감이 있으나 그래도 해가 긴 때여서 둘러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용문사에 윤장대가 유명한 것은 익히 들었으나 한 번도 가 보지 않아서 무척 궁금하여 찾고 싶었던 절인데 드디어 찾게 되어 무척 기쁜 마음으로 들어섰습니다. 좀 늦은 시간 이라 인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소백산 용문사(小白山 龍門寺)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첫문입니다. 그래서 일주문에 들어서면 마음자세를 가다듬게 됩니다. 일주문은 소백산 용문사와 같이 산명과 사명을 밝히고 있어 문패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기둥을 한 일(一)자 모양으로 세운 문이라고 해서 일주문이라 부릅니다. 이 일(一)의 의미 가 상징하는 것은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며, 진(眞)과 속(俗)이 하나이며, 만법(萬法)이 일심 (一心)임을 나타내고 있어 속된 생각과 삿된 알음알이, 분별심을 내면 안 됨을 말없이 웅변 하고 있습니다.
이 편액은 영주 출신의 명필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선생의 글씨입니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중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창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 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 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 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間包)와 두 개의 귀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앙서, 그리고 권비형(拳鼻形) 운공으로 이 루어져 있으며,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牌樓)와 닮았다.」 -용문사 홈피에서-
아, 여기는 발걸음을 못했습니다. 다음 기회에...
용문사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용문사길 285-30) 소백산(小白山) 줄기인 용문산 남단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입니다.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10년인 870년 두운(杜雲)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 다. 두운 선사는 풍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스님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龍門寺) 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明宗) 때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세자(世子)의 태(胎)를 묻고 사액(寺額)을 '용문산 창기사(龍門山 昌期寺)'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成佛山 龍門寺)'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文孝 世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小白山 龍門寺)'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 니다.
헌종(憲宗) 1년(1835)에 역파(櫟坡) 대사와 상민(尙敏)ㆍ부열(富悅) 스님 등이 소실된 보광 명전과 해운루를 중건하였습니다.
용문사는 고려시대에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하였다고 하는데, 여러 차례 외침을 당할 때마 다 '일만승제(一萬勝祭) 삼만승제(三萬勝祭)'를 올려서 국란 극복을 위해 기도하였던 곳입 니다. 또,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대부분 건물은 고려 의종(毅宗) 때 자엄대사(資嚴大師)가 초창한 건물이며 그 뒤 중 건과 중수 기록이 뚜렷이 남아 있었으나, 1984년의 대화재로 인해 보광명전과 해운루ㆍ응 향각ㆍ영남제일강원ㆍ요사ㆍ종무소 등이 소실된 바 있습니다.
용문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윤장대(輪藏臺)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제 용문사의 성보를 찾아 올라가 봅니다.
용문사의 두 번째 문은 회전문입니다.
회전문(廻轉門)
용문사에도 회전문이 있네요. 회전문으로 유명한 곳은 강원도 오봉산 청평사지요. 여기 서 다시 회전문을 대하니 반가운 마음입니다. 아주 예전에 청평사에 회전문이 유명하다 고 해서 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회전문이 왜 없지?' 하며 일행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중 에야 그 문이 빌딩의 문처럼 도는 회전문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회전(廻轉)이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준말입니다. 윤회의 원인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됩 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그릇된 행을 하게 되고, 그릇되게 인식하여 결국 잘못된 사견으로 분별하고 집착하여 온갖 행을 하게 되어 결국에는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계속하며 6도를 돌고 돌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죄질이 나쁘면 삼악도를 돌고 돌게 됩니다. 회전(廻轉)은 이를 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이 문에 들어서면 헛된 망상과 삿된 견해를 모 두 버리고 생사거래가 없는 해탈세계로 나아가야 하겠다는 굳건한 서원을 세우고 반야지 혜를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의 회전문은 사천왕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입니 다. 결코 삿된 무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서원이 굳건한 천신입니다. 불법의 세계는 회 전이 없는 해탈의 세계입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과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입니다.
사천왕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 보고자 합니다. 사천왕은 들어가면서 좌우에 두 분씩 배 치되어 있는데 사천왕의 배치는 법당쪽에서 볼 때 왼쪽 안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동방지국 천왕(東方持國天王),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북방다문 천왕(北方多聞天王)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천왕은 얼굴의 피부색과 지물에 따라 구별하기도 하는데, 청색은 지국천왕으로 비파를 들고 있고, 적색은 증장천왕으로 칼을 잡고 있으며, 백색은 광목천왕으로 용과 여 의주를 들고 있고, 흑색은 다문천왕으로 불탑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찰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천왕의 구분은 용문사 홈피에 있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사천왕은 욕계(欲界) 육천의 제일인 사왕천(四王天)의 주인으로 수미(須彌)의 사주(四洲) 를 수호하는 신을 말합니다. 이들은 도리천(忉利天)의 주인인 제석천(帝釋天)의 명을 받 아 사주(四洲)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을 살펴 이를 보호하는 신이라 합니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지국천왕은 건달바(乾闥婆), 부단나(富單那)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동주(東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부처님과 제석천이 지국천으로 하여금 동방을 수호하라는 명을 내렸 는데 지국천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로 지국천(持國天)이라 합니다.
지국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로는 대표적으로 비파입니다. 그러나 일정하지는 않습니 다. 지물(持物)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다라니집경(多羅尼集經)>에는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손을 구부려 보주(寶珠)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 는 왼손에 창, 오른손을 올려드는 형상이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如來琉 璃光七佛本願功德經)>에는 비파를 들고 있다 했습니다.
지국천의 발을 메고 있는데 부단나가 아닌가 합니다.
건달바(乾闥婆)는 식향(食香)ㆍ심향(尋香)ㆍ향음(香陰)이라 번역합니다. 제석천(帝釋天)의 아악(雅樂)을 관장하는 신을 말하며 향만을 먹는다고 합니다. 많은 왕과 이를 따르는 많 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불법수호(佛法守護)의 팔부중(八部衆)의 하나입니다.
부단나(富單那)는 취(臭)ㆍ취예(臭穢)로 번역하며 냄새나는 귀신인데, 건달바와 지국천의 권속으로 동방을 수호하는 귀신입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증장천은 구반다(鳩槃茶), 폐려다(薜荔多)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남주(南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증장천은 자타의 선근(善根)을 증진(增進)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증장천왕의 지물로는 대표적으로 칼을 잡습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은 펴서 칼을 잡 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는다 하고,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는 창을 잡고 오른손은 허리 에 댄다 하였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칼을 잡는다 하였습니다.
증장천의 권속인 구반다로 여겨집니다.
구반다(鳩槃茶)는 옹형귀(甕形鬼)ㆍ음낭(陰囊)ㆍ형란(形卵)ㆍ면사동과귀(面似冬瓜鬼)ㆍ염미 귀(厭眉鬼)라 번역하며, 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으로 머리는 말, 몸은 사람 모습이며 남방 증장천왕의 부하로 태장계 만다라 외금강부원에 있다고 합니다.
폐려다(薜荔多)는 범어 프레타로 비리다(卑利多)ㆍ피례다(辟荔多)ㆍ미례다(彌荔多)라 하기 도 합니다. 폐려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리는 아귀입니다. 아귀(餓鬼)ㆍ조부귀(祖父 鬼)라 번역합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광목천은 용(龍), 비사사(毘舍闍) 등 두 신을 지배하며, 서주(西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광목천은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치므 로 광목(廣目) 또는 악목(惡目)이라 하며, 여러 가지 웅변으로써 나쁜 이야기를 굴복시키 므로 잡어(雜語)이라고도 합니다.
광목천왕의 지물(持物)은 대표적인 것이 한 손에 용(龍)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의주 (如意珠)를 들고 있는 형태입니다.
광목천의 권속인 비사사(毘舍闍)로 여겨집니다.
용(龍 Nāga)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입니다. 나가(那伽)라고 음역됩니다. 인도 신화에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로서 인면사미(人面蛇尾)의 신입니다. 용은 큰 바다에 살면서 구름을 불러 비 를 내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경전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비사사(毘舍闍)는 범어 Piśāca로 전광귀(顚狂鬼)ㆍ식혈육귀(食血肉鬼)로 번역합니다. 일명 사람의 정기를 뺏는다하여 담정귀(噉精鬼)라 합니다. 용신(龍神)과 함께 광목천을 따라 서방을 수호하는 귀신인데 혹은 동방 지국천이 영솔한다고도 합니다.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
다문천은 야차(夜叉), 나찰(羅刹)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북주(北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 하여 수호합니다. 다문천은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옹 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합니다.
다문천의 지물(持物)은 대표적인 것이 불탑(佛塔)입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창(혹 은 방)을 잡아 땅을 짚고, 오른손에는 불탑(佛塔)을 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 손에 창, 오른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든다고 하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왼손에 막대(棒), 온른손에 불탑을 든다고 되어 있어 일정치 않습니다.
다문천의 권속인 야차(夜叉)로 여겨집니다.
야차(夜叉)는 약차(藥叉), 열차(悅叉)라고 음역하며, 능담귀(能噉鬼), 첩질귀(捷疾鬼), 경첩 (輕捷), 용건(勇健), 포악(暴惡) 등으로 한역됩니다.
인도 신화시대에는 북방 산악지대에 사는 구베라신(財寶神)의 권속으로서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신이었지만, 불교에 들어와서는 팔부중의 하나가 되어 나찰 등과 함께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 되 었습니다. 불법 수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북방의 수호 또는 재보(財寶)를 지키는 역할도 갖고 있습니다.
나찰(羅刹)은 범어로 락샤사(Raksasa)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이었는데, 불교에 들어온 이후는 악귀(惡鬼)의 총칭이 되었습니다. 가외(可畏)ㆍ속질귀(速疾鬼)ㆍ호자(護者)라고 번역합니다.
나찰 중에는 지옥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이들을 아방나찰(阿傍羅刹)이라고 합 니다. 그들은 바다 가운데의 섬에 나라를 이루고 산다고 합니다.
남성신은 나찰사(羅刹娑) 혹은 나차사(羅叉娑)라고 음사(音寫)하며, 여성신은 나찰사(羅刹斯) 또는 나차사(羅叉私)라고도 음사합니다. 남자는 추하고 여자는 아름답게 생겼으며, 언제든지 사람의 혈육(血肉)을 먹는다고 합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아주 빠르며, 무섭고 포악한 귀신이라고 합 니다.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외호신이 된 이후에는 야차와 함께 호법천왕인 사천왕 가운데 비사문천의 권속에 들어가 활동합니다. 소머리에 사람손을 가진 우두인수(牛頭人手)에 소발굽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힘이 세다고 합니다. 또는 말, 사슴, 양, 토끼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사천왕의 발아래 밟힌 사악하고 불순한 무리들
사천왕상을 보면 우람한 체격에 위풍당당하고 늠름합니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지물을 잡은 손은 억세게 보입니다. 한 쪽 발은 삿된 무리를 짓밟고 있는데 이는 삿된 무리를 결 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줍니다. 각 사천왕마다 사천왕의 다리를 들어 어깨에 멘 악귀들은 불법에 귀의하여 사천왕을 잘 받들어 모시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는 권속들로 여겨집니다. 장면마다 있는 저 권속들의 이름은 나름대로 적어 본 것입니다. ^^
해운루(海雲樓)에 소백산 용문사라는 사액이 걸려 있습니다
소백산 용문사(小白山 龍門寺) 편액 -송월(淞月) 스님 글씨-
갑술지추(甲戌之秋)라는 낙관이 있어 1994년 가을 스님의 고희 때 쓰신 글씨임을 알 수 있 습니다.
송월(淞月) 스님은 명필로 유명하신 분으로, 1925년 합천에서 태어나셨습니다. 21세 때인 1945년, 해인사에서 혼해(混海)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고, 47년에 해인사에서 상월 스님 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50년에 대교과를 이수하시고, 이후 제방선원을 돌며 10하안거를 마치시고, 명봉사 김용사 주지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셨는데, 특히 서예와 사군 자를 잘 하시기로 유명합니다.
전통의 맥을 잇고자 힘쓴 스님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선생의 아들 청강(晴江) 김영기 (金永基) 선생에게 서예를 사사 받으신 바 있습니다. 대한불교미술전람회 공모전에서 서예 ㆍ사군자 입선과 특선을 다수 받으셨고, 서예ㆍ사군자 개인전도 다수 가지신 바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용문사 대광명전, 해인사 범종각, 경주 기림사 관음전과 삼성각, 금릉 수도암, 영천 은해사 극락전과 약사전 등의 편액과 주련을 많이 쓰셨다고 합니다.
조망과 휴식공간인 해운루(海雲樓)
해운루 밑을 통과하여 마당에 서면 바로 보광명전(普光明殿)입니다.
보광명전 앞 마당 좌우엔 근래에 건립된 듯한 3층석탑과 5층석탑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그 전체 모습이 안 잡히어 옆에서 멀리 잡아 보았습니다.
동편의 3층석탑
서편의 5층석탑
이 3층석탑과 5층석탑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여 언제 건립되었는지 모르지만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보광명전(普光明殿)
용문사의 본전인 보광명전(普光明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입니다. 안에 는 삼존불을 모셨는데, 중앙에 본존인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이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그 좌우에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과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 타불(阿彌陀佛)을 모셨습니다.
이 보광명전은 고려 의종(毅宗) 20년(1166)에 자엄대사가 초창한 이래, 조선 중종(中宗) 24년(1529)에 혜공 스님이 중수(重修)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84년 화재로 전각이 불탄 후 재건한 건물입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용문사처럼 보광명전(普光明殿)이라 하기도 하지만 대적광전 (大寂光殿), 적광전(寂光殿), 비로전(毘盧殿)이라 하기도 합니다.
보광명전(普光明殿) 편액 -송월(淞月) 스님 글씨-
왼쪽 낙관을 보면 경오지춘(庚午之春)이라 쓰고 송월(淞月)이란 낙관을 했음을 봅니다. 경오년(庚午年)은 불기로는 2534년이요 서기로는 1990년입니다.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한 삼존불을 모셨습니다.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동방유리세계 약사여래불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을 하신 비로자나불을 크게 보시고 좌우의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 은 상대적으로 작게 모셨네요. 아미타불을 석가모니불로 보시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 <전통사찰총서>에는 석가모니불이라 써 있습니다. 그런데 용문사에서는 아미타불로 명 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미타불상에서는 조선 중종 10년인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지장탱화(地藏幀畵)
칠성탱화(七星幀畵)
신중탱화(神衆幀畵)
법당에 들어 먼저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지장단, 칠성단, 신중단을 향해서도 예를 올리고 난 후 법당 안을 두루 관찰하고 있는 있는데 몇몇의 보살님들이 법당에 들어오서는 촛불을 켜고 향을 꽂는데... 일지향이 아니고 저마다 많은 향을 꽂는 것이었습니다. 향을 가족의 수대로 꽂는지 향을 많이 꽂으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믿는지 하도 많이 꽂으니 법당이 자욱 할 지경이어서 비니초님이 옆으로 다가가 가만가만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향을 피우면 법당이 다 그슬러져요. 하나만 피우시면 됩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여쭈니, "여기 용문사 신도예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신도인지 칠성단에 놓여 있는 사탕을 내려 드시기도 하더군요.
보살님들이 예를 마치고 나가려 할 때 우리도 나가려는 참이라 법당의 촛불을 제가 끄려고 하니 촛불을 끄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켠 촛불을 끄면 안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단을 가리키며,
"여기 보세요. 법당을 나갈 때는 촛불을 끄라고 써 있잖습니까? 촛불을 그대로 켜 두면 화재 위험이 높아집니다. 절에 불나는 것은 촛불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자 수긍이 되었는지 앙앙히 나가더군요. 그러면서도 향에 미련이 많은지 "향은 끄지 마세요." 하고 다짐을 두더군요. 알았다고 이르고 촛불을 하나하나 끄고 있는데 밖에 나 갔던 보살님들이 미심쩍은 듯 다시 들어와 향을 끄는지 감시하러 왔더군요.
"향은 끄지 마세요!!!" "향은 안 끌 테니 염려 마세요! ㅎㅎㅎ "
스님들께서 아마도 향은 하나만 꽂고 다른 사람이 꽂았으면 꽂지 말라고 일렀을 터인데 일 부 보살님들에겐 그런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어느 절에는 향을 아예 피 우지 말라고 써 놓은 곳도 있습니다. 향을 많이 피우면 법당도 많이 그슬려 건물와 귀중한 성보들이 손상될 우려가 많습니다. 또한 그 속에서 염불하시는 스님이나 기도하는 신도들 의 건강에도 해를 끼치기 쉽습니다. 이 무지를 언제 각성을 하려는지... 흐흐흐 웃으며 물러나왔습니다.
다음 2편에서는 윤장대(輪藏臺)가 있는 대장전(大藏殿)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용문사는 가람배치도 잘 되어있고, 각 전각까지 차량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_()_
각 전각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도 아주 좋았습니다.
용문사에 처음 갔는데 그렇케 큰 도량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아름다운 절입니다. _()_
용문사주변으로만다녀지만 오늘잘보고갑니다
용문사 주변에 둥굴레가 많다고 했나요 약초를 캐기 전에 한 번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_()_
감사합니다.
하회마을과 용문사 순례기 제1편 잘 봤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
_()()()_
부군의 고향, 백화님의 고향인 예천에 갔을 때, _()_
용문사에 다녀오면서 화광님과 백화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