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한 편의 시: 박일환 시인의 「귀를 접다」
김완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베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박일환 시 「귀를 접다」 전문, 시집 『귀를 접다』 중에서, 2023 청색종이.
박일환 시인은 오래전 해남 김남주 문학제에서 스치듯 잠시 본 적이 있습니다. 올 초에 제1회 길동무 아시아문학ㆍ역사 기행 – 베트남을 5박 7일로 함께 다녀오면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전 시집 『귀를 접다』 보내주어 시집을 읽기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 출근 시간이 늦을 정도로 푹 빠져 단숨에 읽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겨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말, ‘나이 육십을 넘긴 뒤부터 겨우 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말이 동시대를 사는 나에게 크게공감이 갔습니다. 시집의 표제시가 시집의 가장 뒤에 실린 경우도 처음 봅니다.
6연 20행의 잘 짜인 시입니다. 독서를 하다가 다시 보고 싶은 곳이나 읽었던 표시를 할 마땅한 도구 즉 책갈피 같은 것이 없을 때, 흔히 페이지를 접어둔 경험을 ‘귀를 접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특별한 해설이 필요 없는 술술 잘 읽히는 시입니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을 담담하게 그러나 조금 궁금해합니다. 물어보는 것처럼 말하지만 화자인 시인에게 스스로 묻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살아온 시간을 성찰합니다.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고 말합니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라고 합니다.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라며 “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족한 것을 더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겸손입니다. 논어 술이편 2장에 나오는 子曰 黙而識之 學而不厭, 묵묵히 사물을 인식해가고, 배우는 것에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마침내 도달했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는 인간이 그려볼 수 있는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순(耳順)을 거쳐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주장에도 귀가 열리는 것입니다. ‘나이 육십을 넘긴 뒤부터 겨우 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라는 시인의 말이 귀가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 귀(耳)가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처·공자·관운장·징기스칸입니다. 밀어붙이지 않고, 고집도 버리고 백성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고(以百姓心爲心) 백성을 섬기는 자연의 섭리를 따른 분들이라고 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짧지만 오래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4부 62편의 시가 편편마다 절창입니다. “오늘 또 몇 마리의 새들이 사라졌는지/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새들의 안부」 부분, “부르고 싶어도 불러줄 이름조차 없는 /축생의 참혹(慘酷)이여”-「김유신의 말」 부분, “내년 봄에 진달래나무는 한 뼘쯤 키를 늘리겠고, 진달래꽃 세입자는 몇 명 더 늘겠다”-「아름다운 일」 부분, “저 비둘기들도/제 터전을 떠나온 난민이겠구나 싶어/하필이면 비둘기 붉은 발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붉은 발」 부분 등에서는 시인의 따뜻한 사유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의 세계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스카이 라인」, 「돌아보는 마음」, 「풀밭이 장엄한 이유」, 「멈춤」, 「관평리 양치기」 등에서는 삶의 지혜와 태도를, 「하루」, 「반값」, 「오래된 나라」, 베트남 여행 중에 낭송한 시 「고군조 자1, 고군조 자2」 등은 시대의 아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시인의 기개를 볼 수 있습니다. 윤이상 기념관 앞에 서 있는 먼나무를 보며 쓴 시 「먼 나라」는 나라와 국가가 무엇인지 읽는 동안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는 절창입니다. 오랜만에 접한 휼륭한 시집입니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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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종이_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