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국에서 봉사하는 파독광부
며칠 전 한 파독광부의 자전적 글을 한 신문에서 우연히 읽어보게 되었다.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인 필자 전 파독광부는 몇 년 전 ‘국제시장’제작진이 영화를 만든다며 파독광부 시절 이야기를 취재해 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고 했다. 그는 “영화 ‘국제시장’ 첫 부분부터 나오는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는 바로 부부의 이야기와 같기 때문에 처음부터 영화(관람)에 몰입해 버리고 말았다‘고 털어놓았다.
관람하며 부부는 치열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잠겼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길이었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다. 40도에 가까운 지열과 탄가루가 가득해 매캐한 막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환경을 경험했고 ‘살아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볼모처럼 와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가족을 위해 매일매일 버티려고 고향에서 날아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동백아가씨는 매일 밤마다 들어야 잠이 올 정도였다.
필자는 전북 장수 시골 마을에서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막노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독광부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무작정 지원, 꿈 같이 합격, 마침내 독일광산에 도착하게 되었다. 독일인 체형에 맞춰진 무거운 탄광연장은 선발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왜 필요했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지하 수천 m 막장의 작업환경은 모든 움직임이 곧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하루 8시간의 근무는 마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인이 대단한 것은 추가 근무수당을 받아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 이런 위험을 무릎쓰고 근무 후에 휴식도 없이 또 다시 막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탄광업체와 다른 나라에서 온 광부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이런 집념과 노력은 왜 한국이 다른 저개발국들과 달리 독보적으로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풀었다.
크고 작은 사고를 무수히 겪으며 파독 광부 임무를 마쳤고 현지 지인의 추천으로 독일 국립사범교육대에서 공부도 할 수 었었다. 그 때 그 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독일 탄광은 힘든 광부 생활뿐 아니라 아내와 만날 수 있었고 대학교수가 될 기회를 준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손녀가 내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 이 손으로 석탄을 캤구나. 많이 아팠어? 딸은 아내를 꼭 끌어안으며 ’엄마, 고마워‘란 말을 속삭였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피땀과 밥은 못 먹어도 학교는 보내려고 희생했던 어머니들의 교육열로 이룩한 기적이다. 귀국해 한국교원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의 힘을 절감했던 나는 은퇴 후 교육을 통해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키고자 작은 힘이나마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 교육후원회를 이끌며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국으로 발전한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발전 경험은 수많은 개발도상국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1964년 12월 10일 육영수 여사와 함께 독일 탄광을 방문한 박대통령은 ‘...여러분 한 사람이 한 사람이 외교관처럼 열심히 일하고 독일 기술도 배워 우리 당대에는 못살더라도 후세들에게 부강한 나라를 물려줍시다!’ 누군가 애국가나 아리랑을 부르면 모두 감정에 복받쳐 울음바다가 되었던 그 날 그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나기도 한다.
입춘이 다가오며 화원에는 무늬동백나무, 왕벚나무 묘목 판매를 알리는 광고물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파독 광부들이 밤마다 수면제처럼 불렀다는 동백아가씨-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2015.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