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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해방
헌법(憲法) ‘일점일획’ 바꾸는 것이 참 어렵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니,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니 처음 제헌 의회가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남북 분단이 사실상 굳어지고, 주도적 정치세력 없이 논중(論衆)은 사분오열되었다. 심지어 첫 번째 총선에서 제주도 2석은 선출하지 못할 정도였다.
1948년 5월 10일, 총선 결과 제헌 의회 정당별 의석수는 무소속 85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석, 한국민주당 29석, 대동청년단 12석 등이다. 김구 선생의 한국독립당 등 단독정부 반대 세력은 선거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국회 운영규칙도 없어 미군정과 상의하며 개원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임기 2년으로 헌법을 제정하려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이어서 정부조직법, 반민족행위처벌법, 양곡매입법, 국가보안법 등 20여 법안을 제정하였다. 첫 임시의장은 최고령자 이승만이다.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1949년 당시 정권에 비판적인 국회의원 13명을 체포하였다.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이었다.
헌법은 요지부동처럼 견고하다지만, 1948-1987년 사이 9차례 개정이 있었다. 제헌 헌법의 요체를 흔든 개헌 과정은 누더기와 같아서 부끄러운 별칭으로도 불린다. ‘발췌 개헌’(1차), ‘사사오입’(2차), ‘소급입법’(4차), ‘3선 개헌’(5차), ‘유신헌법’(7차), ‘5공’(8차) 그리고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실로 대통령 5년 단임제, 직선제 부활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대폭 확대하였다.
독재와 민주화 와중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1항)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항)는 훼손되지 않았다. 헌법의 근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1970년대 사회책에는 “인민이 권력의 고삐를 쥐고 있다”는 단락도 있었다. 그 철학은 3.1독립운동 정신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3.1 운동과 임시정부는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옛 조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임금의 백성이기를 반대하였고, 봉건 체제 아래 신분사회도 거부하였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헌신적 참여와 근대 교육과 민주의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복음적 삶이었다.
자칫 호교론적 입장에선 그리스도인의 아전인수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화기뿐 아니라, 독립운동과 해방 후 정치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신앙인들의 역할은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제헌 의회 첫날, 개회 기도를 제안받은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인데, 누구도 목사의 기도에 이의가 없었다. 복음의 자유는 여야, 이념, 신분의 차별에 속박되지 않는다.
국회 속기록 제1호에 기록된 역사적인 기도문은 ‘국권 회복, 남북통일, 민생 안정’을 간구한다. “...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류형기 감독은 <회상기>에서 영변 동향인 이윤영 목사를 평가한다. “일제 말년에 화곡(정춘수) 총리에게 파면을 당한 약 50여 명 목사 중에 하나로 해방 후에는 정계에서 일했으나 교회에는 끝까지 충성하였다”(23쪽).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겨우 14%라니, 탄핵감이 아닌가? 지금 우리 안에서부터 목숨을 건 복음의 해방에 나설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