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병철신부님에 대하여.hwp 합덕본당 제2대 홍병철 루카 신부님에 대하여 홍병철신부님에 대하여.hwp
합덕본당 제2대 홍 신부님에 대하여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린<구합덕본당 100년사>1990년, 248쪽 이 洪秉喆 홍병철(1874-1913) 루까
1.들어가는 말
우리 합덕본당에 부임한 최초 한국인 사제는 제2대 홍병철 루까 신부이다. 홍병철 신부는‘아기 신학생’이었다. 홍병철은 어린나이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일생을 주님의 목자로 도구가 되어 살았다. 어린나이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믿음의 씨앗 하나로 지켜낸 신앙의 상징이기도 하다. 어린 홍병철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은 로베르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1884년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의 추천대로 홍병철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옥천본당 100년사>2006년, 56쪽 이국 땅 페낭신학교<카톨릭사전>파리 외방전교회가 1807년에 세운 신학교로 말레이반도 서해안의 작은 섬 페낭(Penang 혹은 Poulo-Pinang)에 있었다. 방인성직자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1665년경부터 당시 샴왕국의 수도였던 유타이어(Juthia)에 신학교를 설립, 운영해 왔으나 박해와 전쟁으로 베트남, 인도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807년 페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페낭에 신학교가 설립되자 박해로 인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수업을 받았다. 로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유학을 1884년 10월 9일 떠나게 된다. 어린 10살 신학생은 이종국, 김승연, 홍병철김정환<강성삼신부의 가계와 신학생시절>2012년, 9쪽/<뮈텔일기 연구>2015년,104쪽 이다. 외국에서 특히 신학교 생활은 고단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흔히 말하는 풍토병이 신학생들을 괴롭김정환<강성삼신부의 가계와 신학생시절>2012년, 12쪽 혔을 것이다. 이런 연유 등으로 조선신학생들은 페낭을 뒤로 하고 용산신학교에 편입하여 수학하게 된다.<옥천본당100년사>2006년, 61쪽 홍병철은 그 무렵(1893년) 양촌본당(현 합덕본당)으로 파견<구합덕본당 100년사>1990년, 202쪽 [1897년9년18일 : 홍 누까가 또 돌아 왔고], <옥천본당100년사>2006년, 62쪽 [1893년 5월부터 2년 동안 양촌본당 파견] 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1893년과 1897년에 파견한 것으로 추정한다. 을 나오게 된다. 우리본당(양촌)에서 실습김정환<강성삼신부의 가계와 신학생시절>2012년, 12쪽 을 하면서 당시 본당 남 퀴클리에 신부와의 돈독한 관계는 홍 신부의 전 생애를 보듬는 은인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홍 신부를 합덕본당 주임신부로 짧은 기간 머물러 기록이 매우 미흡하다김수태<구합덕 성당 성직자의 서한 분석>2007년, 5쪽 하나 조선인 신학생으로 그 관습과 신앙을 터득하는데 2년을 보냈고<옥천본당100년사>2006년, 62쪽 주임신부로도 2년을 보냈으니 짧지만 알찬 기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열 살 되던 해에 신학생으로 추천된 후 15년 동안 주님의 길을 찾는 홍 신부는 먼 외국에서 신학생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25세 되던 1899년 10월 1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이래 10번째 조선인 사제로 서품을 받고 주님의 뒤를 잇는 사제가 된다. 당시에 주교관에 머물면서 홍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조사]의 청원자(공증관) 겸 서기로 임명되어 활동하며 새남터 순교자 7명의 유해를 발굴한다. “공증인으로 임명된 홍병철 신부가 유해들을 깨끗이 씻고 명주천으로 쌌다. 관의 널빤지들도 용산으로 보내졌는데, 신학생들이 정성껏 말리고 깨끗이 닦았다. ”<옥천본당100년사> 63쪽/<뮈텔주교일기>2. 476쪽 이와 같이 순교자를 발굴하는 일을 홍 신부는 성심을 다해하였다. 이어 인천의 첫 본당인 제물포본당(현 답동주교좌성당) 보좌신부<교회와 역사 103호> 1984년 5쪽, “1990년에 홍신부는 마라발신부의 후임으로 제물포본당 4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라고 적고 있는 반면 답동성당홈페이지<http://www.dapdong.or.kr/cathedral/dapdong/dapdong3.php>에서는 “보좌 홍병철 루까 신부 부임”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최세구 <파라외방전교회 선교사 열전>1997년,최종철 번역 2011년 48쪽 “보좌신부 홍 루카가 재임하고”라고 적고 있다. 를 거쳐 믿음의 고향 합덕본당(1904년) 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된다. 이 합덕 땅을 “백제인들이 걸었으면 백제길이고 천주교인이 걸었다면 신앙의 순례길”김성태<당진지역 농민항쟁 관련 역사자원 활용>2014. 14쪽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머문 기간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로 한다. 신학생시절을 우리본당에서 보냈기에 첫 주임신부로서의 사목도 기록은 적지만 낯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남 신부의 길을 뒤따르게 된다. 기록에 보면 합덕에서의 상황은 강도가 횡행<구합덕본당 100년사>1996년, 246쪽 하여 노심초사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위키백과> 홍성 홍주 의사총 :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셔졌다. 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전투<구합덕본당 100년사>1996년, 251쪽 이 이어지는 등 국가적 누란의 위기 놓여 민심도 혼탁하였다. 또한 폭풍우로 인하여 가옥과 농작물에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사제관도 담이 무너지고 나무들이 넘어지는<구합덕본당 100년사>1996년, 247쪽 고통을 겪게 된다. 더불어 1905년 9월 20일 뮈텔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신학생을 한명 보내’<구합덕본당 100년사>1996년, 248쪽 : 홍병철 신부가 보낸 신학생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는 등 본당을 반석위에 올리는데 노력을 거듭하였다. 홍 신부는 주교께 드리는 글에서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린 불초 본인”이라 하여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됨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공주본당(3대 남신부)에서 옥천본당이 분리(1906년 5월 20일)되자 합덕본당 2대 주임신부였던 홍 신부는 초대주임신부로 부임하게 된다. 또한 홍 신부가 합덕본당과의 끈끈한 정을 보여주는 것은 매괴학교(1908년)<카톨릭용어사전>: 충남 합덕 본당에서 운영하던 초등 교육기관으로 1908년 설립되었다. 개교식에서의 연설에서 학생들에게 애국사상과 학문<당진신문>2008년7월29일자 신문 에 대하여 언급하는 등 자주 합덕을 방문하였다. 2.몸 말 옥천본당에서는 주임신부로서 지역의 조선인 최초의 사목자로서 그 소명을 눈부시게 이루어 낸다. 옥천본당은 남 신부가 있는 공주본당에서 2번째로 분리되는데 이도 홍 신부를 이끌었던 남 신부와의 애정 어린 관계의 지속으로 보인다. 1906년 뮈텔주교의 사목방문(1906.11.30.∼12.3)<옥천본당100년사>2006년, 51쪽 을 통한 격려는 옥천본당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고 특히 주보성인인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굿뉴스자료실>,(http://pds.catholic.or.kr/pds/bbs_view.asp?num=1&id=23755&menu=4806) 축일(12월3일)의 주례는 신자들에게 큰 영광이 되었다. 한편 1908년 봄부터 홍 신부는 이문동(문정리)의 기존 성당이 비좁고 위치 또한 좋지 않아 군내면(1917년 옥천면으로 개칭)의 읍내에 가깝고도 높은 지역으로 옥천본당의 이전을 계획을 세우고 1,676평을 매입<옥천본당100년사>2006년, 53쪽 한다. 아마도 양촌(합덕)에 파견되었을 때 본당 이전에 관한 입지 등을 남 신부에게서 배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본당이 화재로 전소 되는 어려움을 격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그 위기를 이겨낸다. 또한 뮈텔주교는 홍 신부가 타국에서의 어려운 신학생 생활 등으로 병김정환<강성삼신부의 가계와 신학생시절>2012년, 12쪽 이 생기는 등 배앓이로 고생을 한 것에 대해 ‘쑥뜸질’을 권하는 등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정을 나눈다. 그리고 편지에도 ‘사랑하는 아들아’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다정한 부자관계 처럼 보인다. 더불어 화재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도 서한<평화신문>2002년 7월 14일자 신문 을 보내 위로 하고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홍 신부에 대한 뮈텔주교의 따뜻한 배려가 아버지의 심정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정부기관인 통감부 문서에도 1909년 7월 6일(융희 3년 7월 6일) “홍병철 이라는 자가 신도의 중추이다.”<통감부문서>8권 1909년 7월 6일 : 충북지방 기독교 세력에 대한 조사보고 라고 밝히는 등 충북 옥천 지역에서의 홍 신부의 역할에 일제도 감시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홍 신부는 “사사성경”(신약4복음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의 번역에 참여하여 마태오 복음 번역을 1906년 7월 7일에 마쳤다.<http://blog.daum.net/oyt12/1028>, <국사편찬위원회>홈페이지, 김정환<뮈텔 일기 연구>2015년, 186쪽 그리고 기도서인 “성가첨례찬미경”등을 집필하여 뮈텔주교에게 올렸고 1911년 5월 15일자로 공포<평화신문>2009년10월25일자 돼 도록하여 전국의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3.맺는 말 홍 신부는 매순간 열정어린 전교와 자기 절제를 보이며 사목활동을 하는데 1913년 봄 판공 도중 장티푸스에 걸려 방골(옥천군 안내면 정방리)공소에서 동기 김문옥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3월 6일 새벽 1시 45분에 선종<평화신문>2009년10월25일자 하였다. 10살에 신학생이 되어 25살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온 정성을 다한 15년의 사목활동을 보내고 주님 품에 39살의 선종하고 옥천본당에 잠들었다. 이후 2006년 5월 20일 옥천본당은 100주년 기념행사 때에 홍병철루까신부의 묘역을 정비<가톡릭신문>2006년5월28일자 하였으며 서울교구에서도 매년 3월 6일을 기억해야할 사제로 기념<천주교서울대교구홈페이지>http://aos.catholic.or.kr/main-v02/Today/T_4_1.asp# 하고 있다. 우리 합덕본당의 최초 한국인 사제로 부임하였던 홍 신부는 이곳에서 사제의 길을 남신부로부터 익혔을 것이며 신앙의 뿌리를 이곳에 두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들러 어린 학생들의 교육에도 힘썼던 것이며 다른 사목지에서도 그 익힌 바를 실천하는 행동가이며 각종 저술에 힘쓰고 순교자들을 발굴하는 등 한국천주교 신앙에 기틀을 마련하는데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린”<구합덕본당 100년사>1990년, 248쪽 홍병철 루까 신부가 언제나 지키고 있다.
홍병철 루까 신부님 연표 1874년 2월 21일 충청도 청주군 남일하면 방동리 출생(고종10 년, 음력 1월5일) (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방서동, 운동 지역) 1883년 12월 23일 아버지 여읨(9세) 1884년 4월 25일 로베르 신부로부터‘루까’를 세례명으로 받음 1884년 신학생으로 추천 1884년 12월 9일 페낭신학교 도착(페낭 유학 2기 5차 유학생)- 10세 1885년 견진성사 받음 1892년 6월 20일 페낭에서 출국 1893년 5월 2년 동안 양촌본당(합덕성당 전신) 신학생으로 파견-19세 1895년 3월 9일 삭발례 1896년 4월 26일 수문품 1987년 12월 18일 강경품 1898년 6월 4일 구마품과 시종품 1899년 3월 18일 부제품 1899년 10월 1일 사제서품-25세 (1990년 구합덕본당100년사 565쪽과 1984년 교회 와 역사 103호에도 1899년 8월 27일 로 서품일을 적고 있으나 음력날짜를 적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 10번째, 현 청주교구 첫 번째 서품)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조사’의 (공증관)청원 자 서기 임명 1899년 10월 30일 새남터 순교자 7명 유해 발굴 1900년 10월 제물포본당 보좌신부 부임(26세) 1904년 10월 6일 합덕성당 2대 주임신부 부임(합덕지역 최초의 한국인 신부)-30세 (구합덕본당100년사 244쪽에 ‘루까신부는 지난 목요 일에 이곳에 와서’라고 1904년 10월 9일 보고문서 에 적고 있어 6일을 도착일로 적음) 1906년 5월 20일 남신부님(합덕본당초대), 홍신부님(합덕본당2 대), 헨리신부님(합덕본당3대) 합덕성당에 모임 옥천본당 초대 주임신부(5월 29일 도착)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주보로 지정 한옥성당 겸 사제관 신축 1906년 11월 30일 뮈텔주교 옥천성당 방문 격려 1908년 6월 14일 합덕본당 매괴학교(1907년말 개교) 개교 기념식 참석 ‘연설’-34세 1909년 11월 옥천성당신축 1910년 ‘사사성경’[四史聖經] 번역 출판 참여(1906년부터) ‘성가첨례찬미경’집필 1913년 1월 합덕성당 방문 1913년 3월 6일 방골(옥천군 안내면 정방리)공소 순방 중 선종- 39세 동기 김문옥 신부님이 지켜본 가운데 1913년 3월 6일 새벽 1시 45분 선종 서울대교구에서는 매년 3월에‘기억할 사제’홍병철 신부 님을 정하고 있으며 2006년 옥천본당 100주년 기념행 사 에서 묘역을 정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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