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임종찬 (시조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태양으로부터 날아오는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파동이다. 아니지 입자다. 무엇이다, 무엇이다 하여 이런 저런 이론이 있어왔지만 뉴턴이 입자의 흐름이 빛이라는 주장이 중심이론으로 자리 잡았던 때가 있었지요. 이런 중심이론이 자리를 잡으면 이것을 바탕으로 학문 연구가 진행되는 게 관례지요. 바탕으로 자리 잡은 중심이론 이것을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62년에 펴낸 그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패러다임(paradigm)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더 설명하자면 그는 과학사에서 보면 특정한 시기마다 과학자 집단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모범적인 틀이 있어왔는데 이걸 패러다임이라 이름 붙인 겁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한 성과가 누적되다 보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차츰 부정되고, 경쟁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는 것이 과학이라는 거지요. 이 패러다임은 본디 자연과학에서 쓰던 말이지만 이제는 모든 분야로 파급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천동설시대엔 천동설 이 학설이 패러다임으로 빛의 입자설 시대엔 입자설 이 학설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았을 때엔 이 패러다임을 보완 보충하는 여러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이겁니다. 자리 잡은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지요.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데는 쉽지 않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겁니다.
빛은 어떤가요. 20세기 초에 와서야 빛의 광전효과를 발견하게 되었다네요.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광파의 에너지는 광자라는 미세 덩어리로 양자화 되어 있다는 광양자설을 제안하여 광전효과를 설명했습니다. 한동안 이 학설이 패러다임이었지만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선 여러 사람들의 실험 등으로 빛은 입자와 파동의 이중적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기에 이르렀는데 이 학설이 현재로서는 빛에 대한 패러다임이지요. 또 나중에는 어찌 바뀔지. 과학세계만 그런 게 아니지요. 인문사회학 쪽에서도 한 패러다임이 바뀌는 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쿤보다 앞서 과학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성이여 안녕(Farewell to Reason)’이란 별난 책을 썼지요. 여기서 그는 이성 중심, 과학 중심을 고집하는 근대 이후 서구 세계관이 영 틀린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마찬가지로 우월한 지식이 아니라 했습지요. 절대하고 고유한 과학적 방법, 신념체계란 애초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를 신봉하는 우를 인간이 저지르고 살아왔다는 탄식을 했습니다. 과학은 몇 가지 규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것인데도 과학자가 채택한 방법 하나가 일반적인 과학적 방법론으로 군림할 이유가 없다가 핵심 주장이었습지요. 그는 종교는 물론이고 미리 정해놓은 인식과 방법 때문에 과학자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고 침해함으로써 과학적 진보를 오히려 막는다고까지 했습니다.
중세는 종교이념을 진리의 기반으로 생각했다면 근대는 이성 중심 세계관으로 얼룩진 시대이지요. 그러나 이 두 관점의 공통점은 이분법적인 사고였다 이겁니다. 동물분류로 날짐승과 길짐승 혹은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는 것 이게 이분법적 사고지요. 인간세계도 둘로 나누었습니다. 계층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정치를 진보와 보수, 사회를 개인과 전체, 윤리를 의무론과 목적론으로 나눕니다. 어느 것이나 하나는 다른 하나를 억압한다고 본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과 여, 서양과 동양, 선과 악, 백인과 유색인, 이성과 감성, 빈과 부, 미와 추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 했지요. 이런 구분법의 밑바닥에는 기독교 사회를 지배하는 백인중산층의 사고가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가리워진 부분이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폭력성, 서양중심적 편견이 안 맞는다는 견해가 나타났다 이거지요. 근대 이성중심주의라는 패러다임을 과감히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로 등장했지요. 뭐냐구요. 포스트모더니즘 이거 아닙니까.
종교관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지만 합리적 사고 혹은 객관성이라는 그 말 자체가 모순이라는 겁니다. 싸르트르, 하이데거 등의 실존주의를 이어 J.데리다, M.푸코, J.라캉, J.리오타르 등이 포스트모더니즘 등장에 한 몫을 한 겁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난 문화운동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면서 서구를 중심으로 학생운동 여성운동 흑인민권운동 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은 물론 전위예술을 탄생 시켰습니다. 이것도 언젠가는 새로운 물결에 의해 퇴색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대세 아닙니까.
한마디로 기존 질서의 틀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지럽습니다. 순종을 과감히 부수는 잡종성(hybridization)과 복합성(complexity), 중심과 주변이 혼재한 패러디(parody), 혼성모방(pastiche), 나열과 병치(juxtaposition), 콜라주(collage) 등 다양한 예술 테크닉을 구사하니 어지럽다는 거지요. 창조란 언제나 새로운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구 소설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Kundera, 1985)으로 예술이란 이름의 유희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긴 있습니다.
한국 정치판도 이런 잡다한 예술 판을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당 들어갔다 저 당 들어갔다 하는 것은 물론 당을 떠났다 다시 이사 들어오는 것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꼴들을 보니 이 사람들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미국, 프랑스 등 서구를 중심으로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은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면 현 한국 국회의원들 하는 작태는 그야말로 그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처럼 질정할 수 없는 난장판 같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게 여태 반복되어온 한국 정치 풍토의 패러다임인가요. 그런지는 몰라도 한심한 구석이 있어 한 마디 하였습니다. 동의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