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독자에게
저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찰관 아버지께서 전근을 주기적으로 다녀 저는 출생지를 일찍 떠나야 했고 네다섯 살 때부터 김천이 저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김천에 있는 황악산, 우시장, 감천냇가, 직지천, 남산공원, 직지사, 충혼탑, 평화시장, 미곡정사, 봉황대…….
시청 앞에서 성의중학교까지 한 시간 거리를 3년 내내 걸어다닌 덕에 큰 병에 안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는 김천 여기저기에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고등학교는 다니지 못했는데 대학생이 되기까지 5년 세월을 주로 대구와 서울, 춘천 등지에서 허랑방탕하게 보냈지요. 그 덕에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천 촌놈인 저는 어린 날, 최고의 즐거움이 서커스 구경이었습니다. 동춘서커스단의 어여쁜 소녀는 사춘기의 저를 미치게 하였고, 아저씨들의 줄타기 묘기는 꿈속에도 자꾸만 나타났습니다. 광대에 대한 저의 관심은 경기도 안성을 제 생활의 근거지로 삼은 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되었습니다. 국립극장에서 본 김성녀 주연의 <바우덕이> 공연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때는 국립극장으로 가는 그 긴 비탈길을 열심히 오르내리며 메모하고 취재하고 시를 썼었지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러, 책을 구하러 돌아다닌 거리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 1994년에 시집 『박수를 찾아서』를 내기도 했습니다만 이 땅의 광대들을 총정리(?)하겠다는 의지는 늘 저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한 마리의 이무기였습니다.
저는 이번에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라는 시집을 내면서 고전문학 속의 백수광부와 백결, 처용, 서동, 원효 같은 이를 시를 쓰면서 만나보았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멋진 조상이었습니다. 춤꾼 하보경, 고수 김명환, 풍물꾼 김봉열, 장구잡이 신기남, 은산별신제 대장 차진용, 각설이타령 김광진,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 등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땅의 광대들입니다.
그들의 예술과 삶을 추적하여 한 편씩의 시를 썼지만 제가 ‘광대를 찾아서’ 연작시에서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은 광대가 아니라 ‘광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연극인 추송웅, 소설가 이외수, 시인 이영유, 대학교수 황우석, 개그맨 김형곤 등이야말로 이 시대의 광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때로는 이들의 불운을 애도하고 때로는 희화했습니다. 왜 이들이 광대로 여겨졌는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편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감명 깊게 본 영화 <서편제>에는 소리꾼이, <왕의 남자>에는 광대가 나오지요. 그런 예인을 탐구하면서 같은 제목으로 시 20편을 썼고, 이로써 저의 인간 탐구는 일단락되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참 후련합니다.
꼽아보니 등단한 지 어느덧 23년이 되었습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시를 써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물은 늘 이렇게 허섭스레기에 가까운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시를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해보는 것입니다.
[MBC 뉴스데스크] 2009년 3월 3일자 방송
◀ANC▶
우리나라에 하나 남은 서커스단, ‘동춘 서커스’ 아시죠. 공연 장소를 구하지 못해 겨우 내내 연습만 해온 이들이 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조재영 기자가 이들의 애환을 담았습니다.
◀VCR▶
천막 안에서 펼쳐지는 신비의 세계, 서커스는 한때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 전성기를 화려하게 이끌었던 동춘서커스. 한 번 공연으로 천막 친 땅을 통째로 살 만큼 돈을 벌었다는 건 이제 옛말이 됐습니다. 상설 공연장은 자금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됐고, 불경기까지 겹치면서 공연 장소를 못 구해 올해는 설 대목도 그냥 넘겼습니다.
◀SYN▶ 박세환 단장/동춘서커스단
“쉬면 몸이 굳으면 안 되니까 계속 놀아도 해야죠. 내일 문 닫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연습하고 있습니다.”
“서커스를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중국 기예단에서 데려온 단원이 절반이 넘고, 월급은 넉 달째 밀려 있습니다. 개개인의 곡예만 보여주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예술의 경지라는 <태양의 서커스>처럼, 짜임새 있는 이야기와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을 선보이는 게 꿈입니다.”
◀INT▶ 박세환 단장/동춘서커스단
“우리가 자체적으로 하려고 애를 쓰는데 시나리오도 있는데, 결국은 일시적인 자금, 자금이 없어서 지금 못 변하고 있어요.”
“젊은 시절 공중에서 떨어져 혼수상태에 빠지고도 37년간 서커스를 해온 곡예사의 꿈이 있습니다.”
◀INT▶ 김영희/곡예사
“진짜 좋은 무대에 좋은 음악에 좋은 의상에, 그런 무대에 한번 서보고 싶은 게 소원이에요.”
유달리 춥고 길게 느껴지는 동춘 서커스의 올 겨울, 80년 역사가 헛되이 스러지지 않기를 빌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MBC 뉴스 조재영입니다. (조재영 기자 jojae@mbc.co.kr)
광대를 찾아서 11
ㅡ동춘서커스단
이 승 하
서커스단이 왔대여 동춘서커스단이 왔다누만
성내동 처녀총각들 입가에 묘한 미소 번지고
나 같은 아새끼들은 미치고 환장하는 거지
빰빠라빰빠 나팔소리 들리고 깃발 휘날리면
선생님 말씀도 엄마 잔소리도 귀에 안 들어오고
황금동 감천냇가 드넓은 모랫벌에 차일이 쳐지면
가슴이 벅차 잠을 못 잤었다 훔쳐낸 돈으로 보았던
서커스 동춘서커스 봐도 봐도 신기하고 희한하대이
온갖 기기묘묘한 것들 갖가지 기상천외한 것들
이 세상 진기한 것들 차일 안에 다 모여 있었지
짜릿한 것들, 우스꽝스런 것들, 미치도록 예쁜 것들,
흥분케 하는 것들, 황홀케 하는 것들을 보며
내지르는 비명과 탄성, 내던지는 헐벗음과 배고픔
나이도 잊고 환호작약 귀천도 잊고 박장대소
사람이 어쩜 저렇게 몸을 휙휙 돌릴 수 있을까
잽싸게 놀릴 수 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처럼
메뚜기처럼 개구리처럼 다람쥐처럼 강아지처럼
돌고 뛰고 돌리고 굴리고 떨어지고 솟구치고
재주 참말로 신기하대이 뭘 먹어 사람 몸이 저렇노
오금이 저리고 오줌이 지리고 방귀도 뀌어가면서
웃다보면 감천냇가에도 아랫장터에도 밤이 내리고
내 생애 최초, 최고의 황홀경은 그렇게 왔었네
나 그날 밤에 난생 처음 몽정이란 걸 했다네
동춘서커스 그 가시나가 자꾸 눈웃음을 치며
내 옷을 벗기고 자기도 옷을 벗고서 이상한 짓을……
서커스 동춘서커스 봐도 봐도 신기하고 희한해서
연짱 사흘을 나 그 차일 안에서 살았네 나 그때
아부지한테 들켜서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고
나 지금도 ‘東春서커스단’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
흥분을 못 이겨…… 반은 미치네, 아니, 미쳐버리네
ㅡ『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에서 |
첫댓글 이승하 샘의 글을 읽으면 까닭없이 가슴이 짠ㅡ해져요. 같은 고향의 정취가 들어있는 탓도 있겠지만 선생의 가슴에 일렁이는 동질성의 한을 느끼는 듯도 해요
광대마인드가 되면 함께 미쳐버려요 미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