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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된 롤라의 달리기.(편의상 이곳부터는 2부라고 하겠습니다.) 역시 카메라는 복도를 뛰어가는 롤라에서 잠시 벗어나 옆 방 여자를 360도로 한 바퀴 돈 뒤에 텔레비전 속으로 줌인합니다.
이렇게 똑같이 반복되거나 조금씩 다르게 변주되는 요소들이 이 작품 전체에 마치 운문 같은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롤라 런'은 노래하듯, 춤추듯 봐야 하는 영화인 것입니다.
롤라가 달려올 때 이번엔 복도의 심술궂은 남자가 다리까지 겁니다.
그 발에 걸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롤라. 계단 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키면 애니메이션은 실사로 바뀌어 있지요.
역시 문을 나서서 정원을 빠져 나오는 롤라의 모습이 부드럽게 하강하는 크레인 쇼트에 잡힙니다. 이렇게 1부와 똑같이 반복되는 몇 개의 쇼트를 2부의 초반에 깔아둠으로써 관객에게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거죠. 1부에서 실패를 겪은 롤라가 20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설정을 게임의 규칙처럼 관객에게 일러주는 겁니다.
'롤라 런'이 특정한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 반복해 보여주는 서사 구조를 처음 선보인 작품인 것은 물론 아니지요. 이 영화가 나오기 직전만 해도 '슬라이딩 도어즈' '레트로액티브'가 그와 같은 화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까요. 최근에도 '나비 효과' '이프 온리'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작품들에서 주인공이 특정한 시간대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는 모티브가 차용되었고요. 잘못 선택한 과거로 돌아가서 바로잡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기에, 이런 설정은 언제나 관객들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자전거 타는 남자가 자전거를 사라며 말을 걸어옵니다. 그러자 이번엔 롤라가 "그건 훔친 거잖아"라고 내쏘면서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요.
이어서 자전거 탄 남자의 미래가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포토 몽타주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길로 들어선 그의 미래가 1부와 상당히 다르게 펼쳐지죠. 그가 중독자로 전락해서 공중 화장실에서 마약을 주사하며 망가지는 과정이 10여장의 사진으로 연이어 스케치 되니까요.
이번엔 롤라가 뛰다가 노숙자와 부딪칩니다. 그러나 그가 마니의 돈을 챙긴 사람이라는 것은 여전히 알지 못하지요.
롤라가 아버지의 직장인 은행으로 들어서기 전, 아버지는 오래 사귀어 온 애인과 1부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롤라가 1부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조금 더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은 1부에서보다는 좀더 긴 대화를 하게 되죠. 그때 여자는 망설임 끝에 그 뱃속의 아기가 다른 남자의 소생이라는 것까지 밝히게 됩니다. 그래도 나를 선택해주겠냐면서요.
하필 그 순간에 롤라가 들어옵니다. 두 사람은 그녀가 들어온 것도 몰랐기에 계속 입씨름을 벌이고 롤라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게 되지요.
자신의 상황이 다급한 데다가 의외의 비밀까지 알게 된 롤라는 감정이 격앙되어서 아버지의 애인을 향해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인 롤라의 따귀를 때립니다. 제가 인터뷰 했을 때 톰 티크베어는 '어둠 속의 댄서'와 '도그빌'의 라스 폰 트리에를 무척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천재"라는 말까지 해가면서요.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와 갈등하는 이 장면을 포함해서 폰 트리에 작품들과 느낌이 비슷한 부분들이 종종 톰 티크베어의 영화들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습니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롤라는 집기들을 부수고서 아버지 사무실을 나섭니다. 경비원이 그런 그녀의 등에 대고 "그냥 일진이 나쁘다고 생각하렴"이라고 말을 하자 롤라는 그 자리에 우뚝 섭니다.
그리곤 돌아서서 경비원을 바라보죠. 이처럼 '롤라 런'에서는 인물들이 서로 엇갈리거나 마음이 바뀌게 되는 순간에서 카메라의 위치를 직전 쇼트와 정반대 방향으로 놓고 찍은 쇼트를 넣어 연출의 방점을 찍곤 합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서 갑자기 경비원이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드는 롤라.
그 총으로 아버지를 위협해 금고로 끌고 갑니다. 이어 금고를 지키던 직원과 아버지에게 번갈아 총구를 겨누면서 돈을 요구하죠.
쓰레기 봉투에 그 돈을 담아서 은행 건물 바깥으로 나온 롤라는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롤라의 얼굴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은 앵글이 강렬하죠? '롤라 런'의 카메라는 이렇게 매우 과시적이고 자극적인데 그게 영화 전체의 들뜬 분위기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집니다. 어떠한 영화든 그 영화에 가장 잘 맞는 형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지요.
놀라는 롤라의 얼굴에서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이 보입니다. 아뿔사! 벌써 신고가 됐구나.
그런데, 총을 겨누고 있는 경찰의 표정이 좀 이상합니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들은 롤라에게 옆으로 비키라는 뜻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롤라가 그 돈을 챙길 때 하필 우연히도 그 은행에 진짜 강도들이 들었던 거지요. 롤라가 돈을 강탈한 것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작전 중에 끼어든 그녀가 다칠까봐 빨리 비키라고 했던 거고요. 아이러니의 연속이죠?
돈다발을 움켜쥔 채 다시 질주하는 롤라. 정말이지, 이 영화엔 그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하긴,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뛰어라, 롤라'니까요. 이렇게나 뛰는 장면이 많은 영화는 아마도 일본 감독 사부의 '탄환 주자'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 영화도 러닝 타임이 82분 밖에 되지 않네요. '롤라 런'과 거의 같은 상영시간입니다.
2부에서도 롤라가 뛰는 모습은 다양한 앵글의 쇼트들을 통해 내내 강조됩니다. 광장을 가로지르는 이 직부감의 롱쇼트에서는 기하학적인 무늬마저 강조되죠? 여러가지로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네요.
역시 앰뷸런스와 나란히 뛰는 롤라.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다급했는지 운전 기사에게 좀 태워달라고 말을 합니다. 운전 기사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롤라의 말을 무시하고요.
그 결과에 대해 감 잡으셨죠? ^^ 그렇게 대화하느라 전방을 제대로 주시하지 못한 기사는 거리를 조심스럽게 횡단하던 사람들이 들고 가던 거대한 유리를 1편과 달리 그대로 들이받습니다.
그걸 또 직부감으로 멋지게 재확인시켜주시는 감독님. ^^ 이렇게 작은 차이가 서로 다른 결과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는 게 '롤라 런'을 즐기게 만드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인 셈입니다.
난장판이 된 사고 현장 옆을 경쾌하게 가로질러 계속 달리는 롤라.
결국 이번에는 마니가 총을 들고 슈퍼마켓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그를 불러세우는 데 성공합니다. 정말 1부과는 간발의 차이로 결과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거지요. 그 순간의 긴박감을 분할화면으로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롤라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뭔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느낀 마니가 권총을 뒷주머니에 꽂고서 걸어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달려오던 앰뷸런스에 치여 쓰러지게 됩니다.
뒤늦게 앰뷸런스 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아보지만 이미 때는 늦은 거지요.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옥에 티'가 있습니다. 사진에서 급정거할 때 도로 위에 생기는 타이어 자국인 스키드 마크가 보이시죠? 앰뷸런스가 지나가기도 전에 스키드 마크가 도로에 먼저 나 있는 상황이라니요. 아마도 스태프들이 미리 만들어놓고 그 위로 자동차가 급정거를 하도록 했던 게 탄로난 것 같네요.^^
코 앞에서 애인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롤라가 돈 봉투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표현됩니다.
쓰러진 마니 옆에 가서 무릎을 꿇는 롤라. 파국을 내려다보는 직부감의 롱쇼트가 역시 인상적입니다.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운명을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라고 할까요.
마니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롤라. 간신히 돈을 구했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라니요.
롤라를 올려다보던 마니가 까무룩하게 정신을 잃어갈 때쯤,
카메라가 마니의 눈을 향해 줌 인해 들어갑니다. 화면은 붉은 톤으로 점차 바뀌고요. 이건 1부에서와 흡사한 방식이죠? 쓰러진 사람이 롤라가 아니라 마니라는 점에서 대조를 이루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플래시백 속에서 마니가 롤라에게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래?"라고 묻습니다. 그러고 나선 "몇 주간은 울겠지. 그러다 곧 나를 잊을 거야"라고 푸념합니다. 그 말을 듣던 롤라가 이렇게 말하지요. "마니, 넌 아직 안 죽었잖아."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서 쓰러진 마니가 눈을 부릅뜹니다.
그 순간 돈다발을 담은 봉투가 때마침 비행기가 지나가던 하늘 높이 던져지면,
다시 롤라가 질주합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요.(이 부분은 편의상 3부라고 하겠습니다.)
10여년 전 선댄스 영화제에서 인터뷰를 위해 만났을 때 제가 이 영화에서 달렸던 경험에 대해 물었더니, 프란카 포텐테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포텐테는 애연가였는데 숨이 금세 가빠져서 촬영 기간 중에 금연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대단치 않게 여겼던 신발 역시 갈수록 무겁게 느껴져 애초에 가벼운 신발을 신지 않았던 것에 대해 수도 없이 후회를 했다지요. 이미 촬영한 분량이 있으니 신발을 도중에 바꿀 순 없었을 테니까요.
이번에는 심술궂은 남자와 사나운 개의 옆을 가볍게 점프해서 지나칩니다. 심지어 개를 향해 무서운 얼굴로 으르렁대기까지 하죠. 뭔가 1부나 2부와는 출발부터가 달라 보이죠?^^
'롤라 런'은 확실히 비디오 게임의 서사 구조를 지닌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한 캐릭터가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그 단계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도전하는 비디오 게임의 진행 방식과 상당히 흡사하니까요.
롤라가 달리는 장면은 3부에서도 계속됩니다. 티크베어는 달릴 때 배경이 되는 거리도 이처럼 벽이나 천장의 형태나 무늬가 역동적인 경우를 선호하지요.
자전거를 탄 남자가 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전거 사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이 엇갈려 지나치는 동안 부딪칠 뻔 했기에 그 말을 할 생각도 못했던 상황이었던 거죠. 롤라는 그저 미안하다고만 말하고 계속 가던 길을 갑니다.
이 장면에 다시 도달하면 관객은 이번엔 자전거 타는 남자에 대한 어떤 포토 몽타주가 펼쳐질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같은 상황을 두 차례나 앞에서 보았으니까요.
그때 티크베어는 살짝 기대를 배신함으로써 신선함을 안깁니다. 롤라와 헤어져 길모퉁이를 돌아선 남자가 노점에서 커피를 사려는 장면을 정지 화면의 포토 몽타주가 아니라 비디오 카메라 동영상에 담아내서 보여주니까요. 롤라나 마니가 등장하지 않는 곁가지 이야기이기에 이 장면은 애초에 세운 원칙대로 비디오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그 순간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노숙자가 괜히 선심을 씁니다. 자전거 남자의 커피값까지 내겠다면서요. 뭐, 10만 마르크를 횡재했으니 기분을 내고도 싶었겠죠.
그러자 커피를 얻어마시게 된 남자가 노숙자에게 한번 찔러봅니다. "제 자전거 안 사실래요? 70 마르크에 드릴게요." 왠지 돈이 있어 보이니까, 롤라에게와는 달리 그 사이에 20 마르크를 올려서 팔아보려는 저 잔머리.^^
역시 아버지가 애인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여자가 뭔가 중요한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갈 때문에 아버지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섭니다.
이번에는 여기서 분할화면이 펼쳐지지요.
막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차를 타고 떠나는 광경을 목격한 롤라. 소리쳐 부르지만 듣지 못한 아버지는 손님과 함께 떠나고 맙니다.
멀어지는 차를 향해 계속 외치는 롤라. 부감의 롱쇼트가 이 장면에서도 롤라의 망연자실한 심리를 그대로 표현해줍니다.
그 사이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던 마니는 거리로 눈을 돌렸다가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쇼핑백을 싣고 가는 자전거를 본 거죠. 이전 장면에서 노숙자가 그 자전거를 70마르크에 샀던 겁니다.
자전거를 세우라는 말이 들려오자 돌아보던 노숙자는 혼비백산합니다. 이렇게 돈다발 주인을 다시 만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기서 카메라는 다시 180도로 방향을 돌려 둘의 추격전을 뒤에서 쫓아갑니다.
아버지를 놓친 후 어찌할 바를 모르던 롤라는 뾰족한 수도 없이 다시 뜁니다. 일단 뛰면서 해결책을 강구하기로 하는 거죠.
이 장면 역시 카메라워크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달리는 롤라를 수직으로 내려 찍던 카메라가 천천히 그녀를 앞질러간 뒤 서서히 내려오면서 앞모습까지 끊이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한번에 잡아내는 것이죠.
톰 티크베어는 이 영화에 이어 연출한 '공주와 전사'라는 작품에서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야 제대로 이해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고 현란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합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역시 프란카 포텐테였지요. 하지만 그 영화에선 붉은 머리가 아닌, 금발에 노란색 점퍼를 입고 등장합니다. '롤라 런'의 주된 색조가 빨간색이라면 '공주와 전사'의 핵심 색깔은 노란색이거든요.
3부에서는 롤라가 하마터면 차에 치일 뻔 합니다.
그런데 도로 한복판에서 우뚝 선 롤라의 눈에 카지노 건물이 들어옵니다.
카지노에 들어선 롤라는 주머니를 톡톡 텁니다. 동전까지 다 합해서 모두 99.2 마르크였죠. 100 마르크 칩 하나를 달라고 하니까 직원이 돈이 모자라다고 차갑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롤라는 "제발요"라고 딱 한 마디를 하죠.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들어줄 수 있겠어요.
프란카 포텐테의 출연작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는 '롤라 런'이 아닙니다. '본 아이덴티티'와 '본 수프리머시'가 있으니까요. 그 두 영화에서 프란카 포텐테는 맷 데이먼이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 역을 맡았지요. 그런데 머리 색깔이 달라서인지, 본 시리즈에서와 '롤라 런'에서의 프란카 포텐테는 완전히 달라 보이죠?
모두가 정장 차림으로 즐기고 있는 카지노에 들어선 이방인 롤라가 느끼는 생경함이 역시 직부감 롱쇼트에 담겨 있습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본 롤라는 룰렛 게임을 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곤 숫자 20에 100마르크를 걸지요.
룰렛이 돌아가자 롤라는 두 손을 움켜쥐고 간절히 20이 나오길 바랍니다.
기도가 통했던 것인지 룰렛의 공은 신기하게도 20에서 멈춰섰습니다. 38분의 1의 확률. 롤라는 그 한 판으로 35배의 상금을 받습니다.
롤라는 3500 마르크를 받자마자 다시 20에 올인합니다.
독특한 차림새 때문에 롤라가 카지노에 들어설 때부터 못마땅했던 직원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제지하려고 합니다. "저와 같이 좀 가실까요."
그러자 롤라가 고개를 들려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한번만 더 하고요."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에 서슬 퍼런 표정. 움찔해진 직원은 결국 말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공이 룰렛 주위를 돌기 시작하자,
롤라가 온 몸의 힘을 모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룰렛의 가장자리를 돌고 있는 공이 매우 역동으로 표현되고 있죠? 사실, 시각적인 쾌감은 톰 티크베어 영화에서 핵심적인 목표가 됩니다. 티크베어가 11살 때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영화는 바로 액션 피규어를 이용한 괴수영화였지요. 그 자신 어렸을 때 일본 괴수 영화 시리즈 '고지라'의 골수 팬이었다죠. 스타일이 현란한 테크니션 감독들의 적지 않은 경우가 티크베어처럼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취향은 그야말로 타고난 유전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어 카메라는 괴성을 지르는 롤라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러자 카지노에 있던 술잔들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말씀 드렸듯, '양철북'에서와 흡사한 초현실적 표현이지요.
그손님들이 들고 있는 술잔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어 멈춘 룰렛이 가리키는 숫자는 바로 20이었습니다. 숫자 20을 대단히 강조한 앵글이지요?
그런데 20이라는 숫자는 '롤라 런'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0은 우선 롤라가 자신의 모든 돈을 걸었던 숫자입니다. 그리고 룰렛이 돌기 시작한 후 롤라가 비명을 지르는 시간은 정확히 20초입니다. 극중에서 롤라가 돈을 구하는데 주어진 시간도 11시40분부터 12시까지, 딱 20분입니다. 그리고 프롤로그를 제외한 이 영화의 1부의 러닝 타임 역시 20분간 지속됩니다. 톰 티크베어는 지독한 형식주의자인 셈입니다.
롤라는 최종 상금인 12만2500마르크를 환전합니다. 그때 카메라가 그녀로부터 벗어나 카지노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기이한 사건을 목도한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얼이 빠진 채 그녀를 내다보고 있는 광경이 묘사되지요.
이때 재미있는 것은 카지노 벽에 걸려 있는 그림입니다. 카지노 벽이 비어 있는 게 싫었던 티크베어는 이 장면을 찍던 날 촬영 현장에서 미술감독에게 '현기증'에 나온 킴 노박의 얼굴을 그려 걸어달라고 했다지요. 미술감독이 그 영화 속 킴 노박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하겠다고 하자 티크베어는 "그럼 그냥 뒷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미술감독이 현장에서 최단 기간 안에 뚝딱 그려낸 소품이 바로 저 그림입니다. '현기증'을 보신 분들이라면 킴 노박의 저 헤어 스타일이 떠오르실 테지요. 틀어 올린 헤어 스타일조차 나선형이죠?
한편 있는 힘을 다해서 자전거를 쫓아간 마니는 결국 사내에게 총을 겨누고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합니다.
돈을 돌려준 노숙자는 그에게 "그러면 내게 총이라도 달라"고 요구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마니는 사내에게 연민을 느꼈는지 그의 말을 들어줍니다. 조심스럽게 갖고 있던 총을 건네주는 거지요. 총을 달라는 사람이나 그렇다고 그걸 주는 사람이나…
그리곤 마니는 쇼핑 백을 들고 전력을 다해 뛰어갑니다.
다시 광장을 가로지르는 롤라. 광장을 가로지를 때 부감으로 찍어서 아득함을 강조했던 1-2부와 달리, 3부에서는 같은 장면을 옆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이동 쇼트에 담았습니다. 최후의 질주를 하는 롤라의 스피드를 그대로 전해주려는 듯 말입니다.
롤라를 만나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는 유리 앞에서 제대로 서 있는 앰뷸런스.
잠시 멈춰서 있는 사이에 롤라는 냉큼 앰뷸런스에 오릅니다.
그 앰뷸런스에는 심장 마비를 일으킨 은행 경비원이 타고 있었지요.
롤라가 그의 손을 잡아주자 사경을 헤매던 그가 의식을 찾고 심장 박동도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티크베어의 영화들 속에서는 사고 장면이나 응급 치료 장면이 자주 묘사됩니다. 그 과정에서 상당히 엽기적인 묘사도 종종 나오는 편이죠. 그의 또다른 작품 '공주와 전사'에서는 트럭 밑에서 사고로 마비가 된 채 누워 있는 프란카 포텐테의 목에 구멍을 뚫고 피를 뽑아내 살려내는 장면까지 등장합니다.
이제 시간은 정확히 12시.
마니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롤라가 내립니다.
그러나 마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거리는 텅 비어 있습니다. 적막함을 최대한 강조한 앵글이죠?
이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스피드를 줄입니다. 일반적인 스릴러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계속 속도를 올리는 것과 정반대로, '롤라 런'은 후반으로 갈수록 오히려 쇼트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어지는 매우 예외적인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롤라가 사방을 둘러볼 때 카메라는 360도로 그녀의 주위를 빙빙 돌며 그녀의 당혹감을 묘사합니다. 이 장면에서 롤라의 머리카락 상태를 보시면 그녀가 7주간이나 감을 수 없었던 머리 때문에 얼마나 촬영 중 힘들었을지를 고스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마니를 발견한 롤라.
마니가 두목인 로니에게 돈을 건네주고 칭찬을 받는 광경이었지요.
뒤늦게 롤라를 발견하고 웃으며 걸어오는 마니. 이제 문제를 다 해결했으니 저절로 웃음이 흘러 나오겠지요.^^
"다 해결됐다"면서 롤라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키스를 하는 마니.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를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롤라는 결국 3부에서 돈을 구하기 위해 그토록 애쓸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어떻게 보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라고 할까요.
함께 걷던 마니는 롤라가 들고 있는 쇼핑 백에 뒤늦게 눈이 갑니다.
그러자 롤라에게 불쑥 묻는 마니. "그건 뭐야?" 그 순간 롤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르고 화면은 정지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시종 재기와 스타일로 승부하는 영화 '롤라 런'다운, 정말 쿨하고 아이러니한 엔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