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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2, 예수님의 탄생. 성탄절 예배, 2024. 12, 25.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헤롯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소망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했는데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가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을 때에 비로소 헤롯왕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소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누구인지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방나라인 바벨론 북동쪽에 있는 파르티아라는 곳으로 부터 온 고관들이라고 학자들이 추측을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시면 하나님의 열심히 예언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데 여기에 동방의 박사들을 동원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별의 출현으로 계시된 것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의 나타나심이 별과 별빛으로 예언했습니다. 사9:1~2. 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친다고 했습니다. 민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베들레헴의 광명한 새벽 별은 메시야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소망의 별이었습니다. 계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메시아는 도래했고 왕이었습니다. 당시 헤롯왕은 다윗의 계보에 따른 왕이 아니었습니다. 눅1;5, 그는 야곱의 후손도 아니고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왕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느 누구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본문 4~8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말씀과 예언서가 있는데도 이때서야 확인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헤롯이 가만히 동방의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헤롯이 겉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또 경배할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6절 이하에.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인 것을 보면 이미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악독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동방의 박사들은 9~10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동방에서 보던 별이 다시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이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셨던 것처럼, 역사를 이어오면서 암흑기를 제외하고는 친히 때마다 인도하셨습니다. 암흑기를 지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별을 통하여 동방의 박사들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결국 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이 아기 예수님이 계신 집 위에 머무르자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가지고 온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1. 그러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인카네이션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시대의 도래 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여러분, 2024년 순간순간의 시작을 무엇으로 하셨습니까?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주님의 시대의 시작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시대의 시작입니다. 이 땅의 끝은 어디입니까?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의 때가 세상의 끝입니다. 항상 시작과 끝으로 매듭을 짓고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그런데 세상의 끝이 신앙인에게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지난 송구영신 예배로 시작을 했습니다. 다음 주일은 송년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다음은 송구영신 예배로 끝과 새로운 시작이 동시에 다시 열립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작과 끝의 마디마디가 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마디마다에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출생이 왜 예언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시작이 아담의 잘못으로 에덴동산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에덴동산의 막을 내리면서 바로 아담을 용서하고 용납하신 하나님은 바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것이 창3;15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절망과 죽음 앞에서 이렇게 새로운 시작을 알린 하나님의 예언이 오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세주로,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임마누엘로 표현되었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시작에 대한 예수님의 출생이 여러 각도에서 시대를 거치면서 완벽하게 예언이 되었습니다. 예언의 내용은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예언이 되었습니다.
1-1. 장소와 역할의 예언과 성취입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서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5;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결국 마2:1-2.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베들레헴에서 출생을 합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입니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고, 깊이 보지 않으면, 예언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베들레헴을 알 수가 없습니다. 베들레헴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 넘는 장소이었습니다. 역할은 평강과 평화의 왕입니다,
1-2. 태어나는 방법이 예언되었습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동정녀, 처녀에게서 태어납니다. 잉태되는 방법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이 예언은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지금 생각을 해도 상상할 수 없고,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 동원 됩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할 때에,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동정녀, 처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여 불러낸 마리아입니다. 동정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한 아이,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야를 탄생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눅1;37, 38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능력으로 이 일을 이루십니다.
1-3. 혈통과 지위와 행함의 기준이 예언 되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왕의 지위이지만 공평과 정의가 행함의 기준입니다.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여러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는 이미 다윗의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의로운 한 가지가 나옵니다. 행13:22-23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시더니.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혈통과 지위와 행함과 기준을 예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1-4. 이름의 의미가 예언이 되었습니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을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 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로 예언이 되었습니다. 성탄주일 예배에서 이 부분을 은혜로 나누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상황과 여건이 다 다르고, 각자의 삶과 소망과 목표가 다르고, 누리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어느 때와 어느 분에게 다 맞추어 은혜를 받아야 할 조건에서 기묘자와 모사와 전능하신 하나님과 영존 하시는 아버지와 평강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로서 오신 예수님의 새로운 시대의 도래 이며, 이것이 예언된 이름의 의미로서 성취입니다.
2.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의 박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요?
2-1. 사모함과 목마름이 있었던 박사들입니다.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동방의 박사들은 특별한 별을 보고 움직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요, 그리고 결국에는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면 오늘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은 어떻게 생명의 주를 만날 수 있었는가? 사모함과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사실 동방 박사에 대해서는 성경에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 한 가지는 1-2, 그들이 먼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이라는 것이고, 11절 또 그들이 예수님께 드린 예물의 내용으로 보아 부족함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층이었고, 부자들이었고, 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이 동방 박사들이 그 멀고 먼 길을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별을 보고 메시야의 탄생을 믿고서 그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동방박사는 이방인입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모릅니다. 설사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인들을 보내어 확인하면 되는데, 자신들이 직접 생명을 걸고 그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동방 박사들에게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 곧 구원자에 대한 원초적인 사모함과 거기에 대하여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의 기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이 땅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예배를 드립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동방의 박사처럼 이 성탄 예배의 목마름과 사모함과 기다림이 있습니까? 그리고 동방의 박사처럼 재림을 기다리는 이런 사모함과 목마름과 기다림이 있습니까?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진정한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진리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구주 예수님을 찾아 그 먼 길을 찾아 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를 만나는 놀라운 은총은 얼마나 기도와 말씀 선포에 온 마음과 힘을 다하는가? 어떤 마음과 신앙으로 주님을 만나러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시107;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주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케 하시고, 주님은 주린 영혼을 만족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주님을 만나려는 간절함과 목마름과 사모함! 이것이 주님을 만나는 첫 번째 요건인데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런 사모함과 간절함과 기다림이 회복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희생과 순종이 동반된 박사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탄생을 오랜 기간 동안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는데.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고, 이방 사람인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헌신과 희생이 있느냐? 동방 박사들은 여러 가지 한계와 장애물을 뛰어 넘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들이 동방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간적으로나 거리로 보나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당시의 먼 거리의 여행은 많은 위험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동방의 박사들은 이런 희생과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헌신하며 순종하는 모습과 행동하는 신앙과 실천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동방 박사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정통했습니다. 4-6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예언에 대하여 잘 압니다. 정확하게 압니다.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은 지푸라기 같은 별 빛을 보고 찾아 왔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순종과 실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회복과 말씀의 회복과 예배의 회복과 전도와 선교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답은 아는데 순종은 안합니다. 구호만 외칩니다. 사모함으로 끝이 납니다. 거기서 멈추면 아니 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대가를 치룰 수가 있을 때 주의 영광을 보며 주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는 은혜는 환경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희생하며 믿음의 대가를 치루는 행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생수가 되시고 능력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동방박사의 예루살렘입성에 나타난 내용과 은혜입니다, 2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습니다. 이들이 처음 출발을 할 때는 베들레헴이 목표였습니다. 처음부터 왕궁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인도했던 별이 인근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 유대인의 왕이니까? 왕궁이 아닐까?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 수소문 했습니다. 보통 동박의 박사가 세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세 명이란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이 세 가지였다는 사실에 추정한 것뿐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들썩이게 한 것을 볼 때, 이들 무리는 박사를 비롯해서 그들을 호위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박사들의 소동은 헤롯왕에게 연결이 되었고, 헤롯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헤롯은 자기 왕위를 넘본다는 이유로 자기 아들도 죽인 왕이었습니다. 그런 헤롯에게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마땅히 치를 댓가이며, 처형해야할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이 이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을 보면 동방박사는 꽤 고귀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이들의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모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메시야가 나실 곳이 어디인지를 묻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구동성으로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700년 전의 선지자 미가가 이미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7km떨어진 곳입니다. 동방의 박사들 때문에 메시야의 탄생은 당시 왕과 백성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비록 아기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한 마굿간에서 조용히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들판의 목자들에게, 그리고 동방의 박사들을 통해서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3-1. 은혜를 덧입고 은혜로 계시를 보고 인도함을 받았을지라도 실수하고 약점이 드러난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는데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자기들의 생각대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잘나가다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인도 했던 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다는 선입견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왕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2-3,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습니다. 이 움직임 때문에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연합을 합니다. 5-6.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덧입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합니다. 약점이 드러납니다. 여러분, 사람은 그렇습니다. 박사도 그렇고 목사도 그렇고 항존 직분 자들도 다 같습니다. 평신도와 같습니다. 인도함이 잠시 보이지 않으면, 지도자가 잠시 떠나 있으면, 동행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지면 사람의 생각을 하고 실수를 하고 약점을 드러냅니다. 오늘 동방의 박사들이 약점을 드러내고 실수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을 해서 경쟁자 헤롯왕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그러면 지금 동방의 박사들에게 기다림과 사모함과 간절함이 없어졌습니까? 헌신과 순종이 없어졌습니까?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실수와 약점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소동한 내용이, 헤롯왕에게 들려진 유대인의 왕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그 것이 16절 이하에. 헤롯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다 죽였습니다. 어마 어마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때는 계시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어느 때는 은혜가 없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눈에 안 들어오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 그런 때에도 하나님으로 실수와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실수와 약점이 드러났더라도 은혜를 떠나지 아니하면, 처음의 시작을 사모하면, 원하던 행하던 방향과 길을 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동방의 박사들은 바로 회복과 은혜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9-12,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니라. 여러분, 동방의 박사들이 처음의 시작으로 다시 시작을 합니다. 여기서 “갈새“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후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왔던 길로 방향을 180도 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함과 간절함과 기다림으로 시작을 했던 동방의 박사가 다시 헌신과 순종의 길을 가려고 할 바로 그 때에 동방에서 보던 별이 나타났습니다.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계시와 은혜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인도함을 다시 받습니다. 결국에는 베들레헴에 도착을 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니라. 여러분, 동방박사들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기다림과 사모함과 간절함이 무엇입니까? 헌신과 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왕,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직접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면 10절.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강조합니다. 매우 크게 기뻐했습니다. 11절에,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에 들어가라는 꿈까지 꿉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에는 계시와 은혜가 나타나고 그 은혜로 살아 왔습니다. 너무나 감사했고 특별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는 왜 이렇게 안 풀리고, 왜 이렇게 어려울까? 약점을 드러내고 실수를 하지 않았나요? 괴로워 울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하고 살아오지 않았나요?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간직하며 사모함과 간절함과 기대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순종과 헌신의 마음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매우 크게 기뻐하고 큰 기쁨으로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다시 나타난 은혜와 축복으로 결국에는 여러분의 목적을 이루고, 소망을 이루고 여러분의 서원을 열매로 가져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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