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라 지목은 대지고 면적은 100평이 조금 빠진다.
"여기 살다 시내로 나간게 94년도야. 집이 비니까 애들이 들어와서 담배도 피고 못된짓도 하고 그랬나봐. 마을 민원이 장난 아니었지. 수리해서 임대 하기는 집이 너무 낡았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형두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고 없었어. 들어와서 살사람이 없었어. 헐 수 밖에 없었지. 형은 마을을 떠나며 몇 몇 사람에게 채무를 남긴채 갔어. 나는 살면서 그 일로 종종 불편했지. 포크레인 사업하는 동네 형님에게 부탁해서 집을 헐 때도 난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어. 사랑방 책들 어떻하냐고 묻길래 땅파고 묻어 달라고 했어. 단칸방 살고 있는데 둘데가 없었거든."
동네 형님은 고물상에 팔라고 했지만 나는 반대 했다.
만화 화실을 다니며 습작 했던 미완의 원고들이 섞여 밖으로 나오는게 싫었다.
그렇게 나의 젊은시절 흔적은 수백 수천권 책들과 함께 땅속에 묻였다.
부추나물 자란 장독대, 볏짚을 갓처럼 덮은 김치광, 코끼리를 닮은 무쇠 코로 콸콸 지하수 물을 뿜어내는 작두펌푸,
개복숭아 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던 자리는 지금도 알아볼 수 있었다.
부엌에는 두 개의 아궁이가 있었다.
왼쪽 아궁이에는 밥 짓는 작은 무쇠솥이 걸렸고 오른쪽 아궁이에는 물을 끊이는 용도의 큰 솥이 걸려 있었다.
안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넒다란 나무마루가 있었다.
한여름에 북쪽으로 낸 문을 열면 냉장고보다 시원한 바람이 들이쳤다.
종인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2년의 가을과 겨울을 이 사랑방에서 지냈다.
대학생인 종인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다.
방학에는 시골집에 내려왔다.
종인은 군을 전역하고 유원지 입구에서 매점을 하는 아버지의 건강을 묻고 가사일을 돕는 누이동생에게는 고생 많다느니 살림 잘 한다느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이동생은 집을 빠져나가려고 아부떠는 속셈을 알고 있었다.
누이동생은 다음날 아침 우리집 가러 나서는 오빠를 모른척 보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가을 걷이를 하러 서울서 내려와 있었다.
우리는 낮에는 들판에 나가 추수일을 했다.
밤에는 온돌방에 누워 책을 읽거나 술을 마셨다.
비가 내려 들판일을 못하는 날에는 강과 이어진 도랑에 나가 민물게를 잡았다.
때로는 동네 친구 집에 또래 여럿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의미없이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렇게 젊은시절의 가을들을 보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2월이 오면 친구는 개학 준비를 하러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와 헤어진 나도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는 서로의 어떤 점이 마음에 맞아 40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떨어지지 못하고 붙어 다니는 것일까?
방아쇠를 당기자 쏴아 하는 굉음을 내며 살충약이 뿜어져 나갔다.
그 소리에 머리속에 그려지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첫댓글 오랜세월 좋은친구와 늘 함께 할 수 있었다는건 참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는 증거 같습니다.
쭉~~ 이어가서 회고록을 쓰시면 될듯 ᆢ하네요.
젊음의 추억을 땅에 묻은건 너무 아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