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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안충기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있다. 성(城)의 북(北)쪽에 있는 동네다. 성은 한양도성을 말한다. 서울 미래유산이 된 길상사는 본래 대원각이라는 최고급 요정이었다. 1995년 소유주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며 화제가 됐다. 세간에 널리 퍼진 얘기는 이렇다.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시인 백석은 기생 김영한과 사랑에 빠졌다. 그가 붙여준 이름이 자야(子夜)다. 백석은 김소월, 이중섭, 황순원을 낳은 평북 정주 오산학교 출신이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의 뜻으로 백석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다. 둘은 다시 만나 짧은 동거를 한다. 백석은 함께 만주로 가자고 하지만 자야는 서울로 향한다. 이때 남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됐다. 김영한은 한국전쟁기에 임시수도 부산에서 정치 거물들이 드나드는 요정을 운영한다. 그 뒤 성북동에서 청암장이라는 요정을 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대원각’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북한산 아래 3대 요정으로 불렸다.
요정은 일제강점기 이래 정치의 은밀한 무대였다. 1947년에 서울에만 3000여 개가 넘었단다. 지금도 노년층이 즐겨 듣는 한복남의 노래 ‘빈대떡 신사’는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로 시작한다. 여기 나오는 요릿집이 요정이다. 한국이 세계 무대에 본격 등장하기 전인 1970~80년대, 요정은 ‘기생관광’을 온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1973년 국제관광공사(한국관광공사의 전신)는 요정과를 설치해 이를 관리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접객원 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에 요정이 800개가 넘었다.
마당에서 본 극락전. 2014년에 스케치한 그림을 묵혔다가 완성했다. 작업을 하다가 막히면 그냥 놔두는 편이 났다. 시간이 흐르면 복잡한 마음이 정리되고 느낌이 달라진다.
대원각은 고관들과 재벌들의 단골 회동 장소 중 하나였다. 김영한은 요정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백석을 잊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법정의 『무소유』 정신에 감화돼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 부지 2만3000여㎡와 40여 채 건물을 시주했다. 법정은 한동안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길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했다. 창건 법회에서 김영한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1999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돈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단다. 김영한의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다. 2010년 법정 스님도 여기서 입적했다.
여기까지는 애틋한 이야기다. 하지만 생전 김영한을 깊이 인터뷰하거나, 백석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김영한의 주장에는 사실이 아니거나 윤색이 많다는 얘기다.
요정은 리모델링을 통해 사찰로 탈바꿈했다. 본채는 극락전이 됐고 계곡을 따라 늘어선 별채들은 참선 공간이 됐다.
(길상사는 법정이 출가한 전남 송광사의 옛 이름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30여 곳이 넘는다. 내비게이션 잘못 찍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경복궁 옆 삼청동에서 길상사를 가자면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 삼청터널을 지나야 한다. 터널을 빠져나가면 바로 대원각처럼 유명 요정이었던 삼청각이 나온다. 터가 2만115㎡이니 길상사보다 조금 작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 적십자대표단의 만찬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500~6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개업 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실력자들이 참석하고 내로라하는 연예인들이 흥을 돋웠다. 별채 중 하나인 청천당은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았단다. 요정을 오가는 손님들 사이에서 오가는 얘기는 은밀하게 모여 보고됐다. 삼청각은 2000년 서울시가 사들여 전통문화 공간이 됐다가 보수공사를 거쳐 올해 다시 문을 열었다.
삼청터널은 1970년 12월 30일에 뚫렸다. 대학교육보험(교보생명보험 전신)이 공사해 국가에 헌납했다. 이유가 있었다. 창업주 신용호 회장은 이전에 동작동 땅 10만㎡ 이상(3만6000평)을 국립묘지 터로 넘기며 성북동 땅을 30만㎡ 넘게 받았다. 터널 덕에 이 땅은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이 돼 최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교보주택단지로 불리며 대사관저와 재벌들 저택이 자리 잡고 있는 성북동 330번지 일대다.
삼청각에서 북악스카이웨이 입구까지 길 이름이 대사관로다. 이 길 양쪽으로 각국 대사관저들이 모여 있다. 요르단, 일본, 콜롬비아, 오스트리아, 브라질, 아일랜드, 덴마크, 독일, 방글라데시, 폴란드, 핀란드, 알제리,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앙골라, 노르웨이, 네팔, 파푸아뉴기니, 그리스, 호주, 중국….
삼청동에서 백악산으로 올라가는 능선은 한국 마라톤 역사를 연 길이기도 하다. 손기정이 이 능선을 따라 백악산 정상까지 달리며 훈련을 했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로 골인했다. 2시간 29분 19초 2로 사상 처음으로 2시간 30분 벽을 돌파했다. 남승룡은 3위였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이를 국내에 보도할 때 손기정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덧칠해 지운 사진을 실었다. 이 일로 인해 여운형이 사장이던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고, 송진우가 사장이던 동아일보는 네 번째 무기정간을 당한다. 일본은 손기정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을 보도한 일본 언론은 한 곳도 없었다.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는 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백악산에서 훈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른 새벽마다 더운 김을 뿜어내며 가까운 삼청동 골짜기를 타고 북악 산정까지 뛰어 올라갔다. 그렇게 큰 산은 아니지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면 가슴으로 등으로 땀이 후줄근하게 흘러내리고 숨이 턱에 닿는 듯했다. 경성 도성을 보호하는 돌벽이 산등성이로 이어져 있었다. 성벽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낮고 작은 느낌이어서 오히려 대갓집 후원 담장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광복 뒤 손기정은 지도자로 변신해 함기용, 손길용, 최윤칠 등을 길러낸다. 손기정이 달린 산길을 이들도 달렸다. 함기용은 손기정 감독의 백악산 훈련이 피오줌이 나올 만큼 고통이었다고 회고한다. 백악산 능선을 ‘한국 마라톤 발상지’ ‘한국 마라톤 성지’라 부를 만하다.
성북동은 한국 근현대 예술 100년사가 켜켜이 쌓인 동네이기도 하다. 간송 전형철, 만해 한용운, 이태준, 이효석, 정지용, 박태원, 김용준, 윤이상, 박경리, 박완서, 장석남 등이 이런저런 인연으로 엮이면서 자신의 작가 세계를 펼치고 있다. 1969년 김광섭 시인은 이 동네에서 ‘저녁에’를 썼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김환기 화백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제목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그렸다. 1980년에는 유시형·유의형 형제 듀엣 ‘유심초’가 이를 같은 제목의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작업 노트: 예술품은 위안을 준다
길상사 숲은 명품이다. 느티나무, 굴참나무, 소나무 등의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경내에 300세, 200세 정도 잡수신 느티나무 보호수가 둘 있다. 극락전 뜰의 100세 쯤 된 느티나무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그림 뒤쪽에 보이는 나무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
그림은 실제 모습과 살짝 다르다. 관세음 보살상을 앞으로 당겨 부각하고 숲을 짙게 처리해 극락전을 돋보이도록 했다. 극락전 뜰에는 석등이 있었고 그 아래는 꽃무릇 화단이 있었다. 뜰의 여백을 살리려고 그랬는지 지금은 없어졌다. 그려놓고 보니 사족처럼 보인다. 스케치에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고요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지웠다. 그냥 비워 놓으면 좋을 뜰에는 지금 ‘추계관음기도 동참자’ ‘동안거 관음기도 동참자’ ‘대입 100일기도 동참자’ ‘2023학년도 입시 기도 추가 동참자’ 명단이 줄줄이 붙어있다. 화장실 맨 끝 칸에 ‘스님 전용 사용금지’라는 표식을 붙여놓은 이유는 뭘까.
그림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상은 설법전 앞에 있다. 이를 강조하려 실제는 없는 나무를 배경에 짙게 배치했다. 얼핏 보면 성모 마리아를 닮아 기독교 신자들도 앞에서 두 손 모은다. 법정스님이 천주교인 최종태 조각가에게 제작을 부탁했다. 종교 간 화합을 바라는 마음이었다. 길상사 창건 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이 찾아와 축사를 했다. 법정 스님은 명동성당에 가서 답사를 했다. 김 추기경은 법정의 책 『무소유』 개정판에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추천사를 썼다.
지난달 30일 일요일에 마무리 취재를 했다. 맨발로 서 있는 관음상 앞에는 갖가지 기원을 담은 공양물들이 쌓여있었다. 쌀 봉지 하나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태원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