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을 위한 기도
(요 17:20-26)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 잘할 수 있을까요? 또 신앙생활 잘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많고, 신앙의 결과로 축복받았다는 사람도 많은데, 신앙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혹은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앙을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믿는 신앙의 기준이 바라는 것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를 두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고,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을 이루면 그것이 곧 예수 잘 믿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라는 것을 구하면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신 적도 있으니 구하여 복을 받는 것이 잘못된 신앙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신앙은 복을 비는 기복신앙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의 중심에 자기가 있고, 신앙은 수단이 됩니다. 원시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웃을 바라보고 이웃과 함께 하는 신앙이 그다음 단계가 되겠지요. 고등종교라고 하는 경전과 회당과 조직이 있는 종교들은 이웃사랑,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에서 이웃을 생각하고, 인류 공동체, 생명 공동체를 생각하는 이타적인 신앙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은 복을 받았다고 잘 믿는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이타적인 신앙을 잘 믿는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여전히 교회에서의 기도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구하는 기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인류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이웃사랑, 평화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이 원하는 신앙을 우리가 가진다면 좋은 신앙일 것입니다. 좋은 신앙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 누구라도 성경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서의 앎이 아니라, 체험으로서의 앎입니다. 체험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15:5) 열매는 축복이 아니라, 믿음의 정도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좋은 믿음, 성숙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은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가지면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잘 믿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고, 노력도 합니다. 결심하면 잘 믿을 수 있을까요? 노력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지와 결심,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혼자 노력하고, 결심한다고 좋은 신앙에 이르기는 부족합니다. 제자들이나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이 결심이 약하거나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노력하고, 강한 의지로 결단하고, 실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마음에 드는 신앙에는 부족합니다.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이 주님께 책망을 들은 것은 노력이 부족하고, 결심이 약하기 때문에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결심이 완전하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님 말씀을 듣지 않고, 주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실망한 것은 스스로 결단하고 노력했는데, 성숙한 신앙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실망한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나는 할 만큼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했는데 이 길이 아닌가?’ 의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에는 자기 노력, 자기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신앙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것, 진리를 깨닫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지만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지만, 체험이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강한 의지와 결심을 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신앙은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약함,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겸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정직함입니다. 자신의 약함, 허물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의 약함,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을 인정할 때, 주님은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과 약함을 채우시고 우리의 허물을 씻어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약한 내가 강하게 되거나, 부족한 것이 채워져 풍족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약함을 강하게 만들고,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어 약한 것은 강하게 되고, 부족한 것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완전한 분이시니, 주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완전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의 고난이 닥치게 되고, 제자들은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질 것을 생각하니,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주님 없는 삶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마음도 무겁고 힘들겠지만, 세상에 제자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주님의 마음은 더욱 힘들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로써 그 두려운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려 평안을 얻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1-8절 말씀으로 예수님 당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1절에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때’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시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며, 세상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이 주님께 있음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고백하십니다.
이어서 둘째 부분은 9-19절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걱정되어서 지켜달라는 기도가 되겠지요. 제자들을 위한 기도해서 11절 하반절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하나인 것 같이 제자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고,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면, 주님의 일을 알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셋째 부분인 20-26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20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21절 ‘그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24절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삶(26절)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롬 8:26) 우리의 의지와 결단, 노력으로는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과 성령께서 우리 위해 간구하심으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중에도 믿음을 지켜 주님이 주신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도 없고, 의지도 약하고 부족하여, 늘 불안하고 의심하고 실망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부족함은 채워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19)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는 성도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도구로 삼아 사용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을 기뻐하며 신앙의 즐거움을 증거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잘 못 믿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