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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안동 가곡리 가일마을 둘러보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47 14.06.13 1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일마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문화유적 안내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에서 하회마을 방면으로 2.5km가량

떨어진 곳에 풍광이 좋은 가일마을이 있다.

가일마을은 고려 개국공신인 권행(權幸)의 후손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일가를 이루어 600여 년간 살아온 곳으로 세종 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 1403~1461)이 이곳의 부호인 류개(柳開)의 손자인  류서의 사위가

 되어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아 정착함으로써 동성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류개는 서애 류성룡의 5대조 유보의 아우이며 하회 마을 류씨 입향조인

류종해의 숙부로서 고려말 인물이다. 권항이 14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가에

후사가 없자 사위가 처가재산을 물려받았다. 이러한 덕으로 같은 외손인

한 마을의 순흥안씨와 공동으로 외손봉사를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가일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버드나무 보호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수령 200년, 수고 12m, 나무둘레 5.7m이다.

 

 

마을 앞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있고 그 너머 넓은 풍산들이 마주하고 있으며,

풍산들 건너에는 하회마을이 있으며,  멀리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인심이 좋기로 유명하며, 가일이라는 이름과

같이  산세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다.

 

 

먼저 병곡고택, 수곡고택, 권성백고택으로 가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제일 먼저 남천고택이 방문객을 반긴다.

 

 

남천고택(南川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24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건물은 권장(權璋)이 조선 철종(哲宗) 1년(1850) 그의 아들 권수(權綏, 1832~1901)

에게 지어준 집이다. 권수의 택호에 따라 남천고택으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서당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전면에 '-'자형의 대문채를 두고 그 뒷채에 안채와 익사를 둔 튼 'ㅁ'자형으로

 좌측 트인 부분을 담으로 막아 폐쇠성을 확보했다.

 

 

3량가 납도리 수장집으로 안채 배면 두칸에 벽장을 들인 구성은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19세기 말에 들어 건축물이 많은 수장공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을 띠는데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이 건물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잇다.

이는 19세기 말 직전의 건축구조의 변화 추이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여겨진다.

 

 

담벼락에는 가을에 심을 쪽파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집앞에는 넓은 마당과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남천고택 옆에는 권오설의 생가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인지?

 

 

남천고택 윗쪽에는 안동 권성백 고택이 있어 그곳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안동 권성백 고택(權成伯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202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으로 보아 1,800년대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서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뜰에는 연못과 정원수가 조화를 이루어 양반집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안방의 왼쪽에는 3칸이 넘는 부엌이 있고 안대청 앞에는 사랑방이 있다.

이 사랑방은 원래 마루방이던 것을 개조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은 앞 3칸에 장마루를 깔고 뒤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권성백 고택 대문채

 

앞마당 왼쪽에 초가지붕 별당채가 있었는데 현재는 철거되고 없으며,

1994년 보수하여 변형된 대문채의 기와지붕을 원래의 초가지붕으로

 복원하고, 허물어진 기단 및 담장을 자연석 기단과 높이 1.6m,

길이 5m의 토석 담장으로 다시 설치하였다.

 

 

1984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될 당시 명칭은 안동 권태웅 가옥이었으나

2007년 1월 29일 안동 권성백 고택으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고택은 숙박이 가능한 곳이다.

 

 

멀리서 바라본 권성백 고택의 풍광이 너무 좋았다.

 

 

 

 

 

 

권성백 고택에서 위로 올라가면 일감당이 나온다.

 

 

이곳이 일감당인 듯 한데 안내판을 찾아도 없다.

 

 

 

 

 

 

이곳은 야유당으로 대문채가 초가로 되어 있다. 

 

 

초가집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야유당(野遺堂)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집은 수곡 권보(1709~1777)의 증손자 야유당 권장(1802~1874)이

1844년에 매입하여 기거하던 집으로 그 후 1921년에 권원탄의

조부 권동진(1887~1961)이 개축한 것이라고 전한다.

 

 

맨 앞쪽의 '-'자형 대문채를 들어서면 '-'자형 사랑채가 마주 놓여있고

그 옆으로는 중문간 역활을 하는 사주문이 사랑채와 방앗간 채에 접해있고

 사주문의 좌측선상 끝에 '-'자형 안채가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아궁이

 

 

사랑채 옆에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나 있고 낮은 담장으로 안채가 들여다 보인다.

20세기 중반에 개축한 집으로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배치형식과 평면의

현대식 개조 등은 건립이후의 변화과정을 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사랑채 뒤에는 -자 형태의 안채가 있는데

주인어르신이 일을 하고 계셔서 멋적게 사진을 좀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하셔서 마음놓고 찍을 수 있었다.

 

 

안채 앞에는 방앗간채가 있고 중문간 역활을 하는 사주문이

나 있어 그곳으로 나가보기로 하였다.

야유당은 안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양반집

가옥의 모습이 아니라 조금은 독특한 배치형태를 하고 있다.

 

 

 

 

예쁜 꽃들이 좁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체적으로 배치형식은 三자형으로 대문채 좌측 모서리에 측간이

있고, 주위에는 기와지붕 판축담장을 쌓았다.

 

 

야유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권성백 고택

 

 

 

 

야유당 흙담을 따라 나가니 가일 수곡고택이 나온다.

 

 

가일 수곡고택(佳日 樹谷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6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건물은 조선 정조(正祖) 16년(1792)에 권조(權眺)가 조부 권보(權補)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고택이다.

 

 

'ㄷ'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 '-'자형의 별당채와 문간채가 있다.

안채는 4칸인데 이 중에 2칸은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이고 왼쪽 2칸은 안방이다.

사랑채는 8칸으로서 4칸은 큰 사랑방이고 왼쪽의 4칸은 작은 사랑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별당인 일지재(一枝齋)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년간에 걸쳐 일지재를 비롯하여 안채를 보수하였다.

이곳에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독립운동가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인 독립운동가 권오상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대문 옆에는 방문을 환영한다고 쓰여 있었는데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들어가볼 수 없어 아쉬웠다.

 

 

이쉬움에 대문 틈사이로 카메라를 집어넣어 한컷 담았다.

 

 

 

 

가일 수곡고택에서 몇자욱을 걸으면  안동권씨 병곡종택이 나온다.

 

 

안동권씨 병곡종택(屛谷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8호)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이 집은 조선후기의 학자인 병곡(屛谷) 권구 선생(1672~1749)의 종택이다.

선생의 7대조로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화산(花山) 권주(權柱)

 선생(1457~1505)이 살았던 집으로,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중건되었다.

멸실되었던 대청을 2011년 중건하였으며 보물 제549호 종손가문서와

 보물 제1002호 종손가문적이 보관되어 있다.

 

 

당호는 시습재(時習齋)로 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취하였다. 선비의 전형적인 삶을 지향하였던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성리학의 이론탐구에 그치지 않고 경전이 지닌 본래의 뜻을

익히고 몸소 실천하여 후학의 본보기가 되었다.

 

 

병곡 권구는 서애 류성룡(柳成龍)과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일찍이 과거를 단념하고

 유학의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여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1728년(영조 4) 인인좌의 난으로 영남에 파견된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에 의하여 적당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압송되었으나

 그의 인품에 감동을 받은 영조의 특지(特旨)로 곧 석방되었다.

사후 1859년(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저서로는 『병곡집(屛谷集)』 10권 5책이 전한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과 부엌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에는 종손이 살고 있어  살짜기 들어가서 사진만 담고 나왔다.

 

 

사랑채 우측으로 돌아가면 안채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병곡종택 사랑채 우측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병곡종택 사랑채 앞의 마당

 

 

마당 한쪽에 핀 접시꽃이 너무 이쁘다.

 

 

병곡종택은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다.

지금껏 양자(養子) 없는 적장 적통으로 종가를 잇고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수백년은 넘은   회나무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밖으로 나와서 되돌아본 병곡종택

 

 

 

 

 

 

마을 뒷산 소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갔더니

 

 

쉼터와 무대가 만들어져 있다.

 

 

쉼터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노동서사와 노동재사를 찾아 가는 길

 

 

가는 길에 풍서초등학교도 바라다 보이고

 

 

마을의 옹기종기 붙어있는 지붕들과 멀리 산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허수아비가 군데군데 땅콩밭을 지키고 서 있다.

 

 

노동서사 외삼문

 

노동서사는 1770년 권구의 학문과 유덕을 기리기 위해 지방 주민이

세운 서운으로, 사당이 없어서 서원이 못되고 서사로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권구의 후손인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이 원흥학술강습소

(元興學術講習所)를 열어 민족교육 운동을 일으킨 유서 깊은 곳이다.

 

 

노동서사(魯洞書社)

 

권오설은 1926년 5월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발각되어 6월 7일 검거되었다.

1930년 4월 17일 권오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이 피멍이 든채 순국하였다.

그의 무덤은 가일마을 부근의 풍산들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으며

묘 옆에 '권오설지묘'라 쓰여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는 2001년에 마을 들머리 저수지 옆에 세워졌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동서사 옆에는 노동재사가 있다.

 

 

노동재사(魯洞재사)

노동서사는 유생들의 글공부하는 공간으로 쓰였고

노동재사는 유생들의 숙식과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노동재사에는 앞쪽과 옆쪽 문이 두개가 나 있어 특이했다.

건물 안쪽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궁금했다.

 

 

노동서사나 노동재사에서는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니

한옥의 아름다움도 감상하시고 가일마을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허수아비가 정겨웁게 다가온다.

 

 

노동재사 앞에서 앞을 바라보니 마음까지 확 트이는 기분이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다니다 보니 평화로운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을 뒤로는 뒷산인 정산(井山 293m)이 마을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거물산 동쪽에 있는 정산은 산 위에 오래된 우물이 있어 정산이라고 한다

 

 

가일마을 안에는 가곡보건진료소가 있어서

편리하게 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필 수 있을것 같았다.

 

 

300년 된 회화나무에는 용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가일마을은 34번 국도와 인접하여 있으나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지나치기가 쉽다.

가일마을은 안동에 남아있는 많은 전통마을 중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

가운데  하나로, 가일권씨라 불릴만큼 안동권씨 가운데서도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해 온 마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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