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계선..(境界線)
(렘5:20-25,엡6:10-17)359.361(교10)
2017.1.29.9시 시온성군인교회
2017.2.1.13 태안보건 의료원
(보내지는 10곳)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태안자살방지생명지킴이협회장
충청남도자살예방위원
글:-남제현목사
두 범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현상을 경계이란 한다..정신병자와 건강한 사람의 사이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을 위험한 경계선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땅의 필지를 구분하는 지적도에 그려진 필지와 필지의 구분선을 경계선이다..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경계선을 넘을 수 있고 안 넘을 수도 있다..그리고 <싸이코 패스>(psycho pass)는 반사회적일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형태를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사회와 전혀 관계없는 반사회적인 사람은 폭력은 물론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도 변화 되다 면 반대로 일에 대한 추진력이 높고 성공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릴 때 학대받거나 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서슴없이 나타나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상해를 강정을 그 상처의 수치심을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폐쇄성을 같기도 한다. 그러면서 집을 뛰쳐나가 반사회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으로 동생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면서 모범생이 될 수도 있다. 바다가 아름다운 너울이 해안선을 넘을 때마다 재앙이 아름다운 파도가 되여 무서운 재앙으로 변할 수 있다..
(렘5:2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모래로 한계를 삼으셨다..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동에도 경계선을 만들어 주셨는데 인간들은 매일 <하나님>의 계명을 수없이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육체적 영적 재난을 초래하게 된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경계선을 침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이스라엘>민족은 민족적인 소원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난>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토박한 사막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동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그래서 현대인에도 요단강은 상징적으로 불신앙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경계선이다. 그리고 요단강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가 있고 축복의 의미가 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바란 것이다..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합리적인 타협으로 신앙적이고 양심적인 경계선을 넘어 들면서 살아 갈수도 있다..그래서 경계선을 넘어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렘5;25절)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내재된 질서가 있어 그것을 어기면 거기에 마땅한 결말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알게 하시고 그 결말을 피하도록 경계선을 지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해야 한다..그래서 새해를 맞이할 때 마다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온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큰 변화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인생을 위한 지도와 같다..이집트에서의 탈출, 광야생활, 가나안 점령이라는 3단계의 역사이다..<이집트>에서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백성이다..
그리고 홍해를 지나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하신다..<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받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받게 된다..그리고 약속의 <가나안>입성 과정이 40년의 준비 과정이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죄에서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어 죄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에서 탈출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넘어 훈련시켜 제자로 만드신 것이다.
약속의 땅에 도착하기 전 요단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리고 7족속을 몰아내는 전쟁을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40년간 훈련에는 그래도 거기에는 적군은 없었다. 육체적 고생스러움이 있었지만 치열한 전쟁은 없었다..오히려 더 큰 위험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적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적군이 항상 둘러싼 삶에서 평화의 전쟁이다..우리 인생에서는 삶의 방향이 중요하다..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도착이 늦더라도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향관리가 속도관리를 잘 해 보십시다..멀리 내다보는 인생길에서 근시안적으로 즉흥적으로 해결하지 말자..사람들은 더 작은 스마트폰에 매달려 매우 근시안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멀리 볼 수가 없다..<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과 목회 현장을 보아야 한다..우리의 가나안 일곱 족속과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영적인 싸움이다. 우상숭배가 가득한 땅에서 분리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들에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이스라엘이 백성이 홍해도 건너오고 요단강을 건너 왔다. 그러나 엄청난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율법을 받지 않았을 때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 왔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일곱 족속과의 전쟁을 해야 할 훈련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삶이 진지 한 것을 안다면 권력, 명성, 지위 같은 것을 소원하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쉽게 만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하나님>의 일에 헌신 투자하는 시간에 또한 내 개인적인 일에 영적을 투자해야 한다..<그리스도>인들이 바쁘고도 보람 있는 소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다. 우선순위로 모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일이 뒤죽박죽되어 버린다.
<그리스도>의 몸에 주어진 은사들이 밝은 햇빛을 구성하는 색깔의 신비와 같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모든 색이 다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훈련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가 내재하는 훈련이다. <그리스도>와 유기적인 접근 된 훈련이다. <그리스도>인의 세상 속에 들어가는 것은 매일 반복되어 비치는 <하나님>의 영상이다..<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신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뻗어갈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러기 위해 사랑으로 협력하고 이런 우리의 협동 작전에 <하나님>이 도와 줄줄 아는 철저히 헌신이 필요하다. 성경의 진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성경적인 믿음의 기준이다. 말씀으로 사는 법을 모르면서 영감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불순종을 조장하는 경계선을 넘어 선 것이다. 직장인들이 성경적인 직업윤리의 적용을 부정한다면 실용주의 인간에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이것으로 세상 속에 있는 내 자신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그리기에 모든 일은 우리 모두 에게 선한 것이다. 쓰레기 수거와 같은 일상 격무에 얼핏 보기에 불필요 한 듯 보이겠으나 여기에 심오한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란 단순히 봉급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경계선은 <하나님>의 창조에 동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반역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공동체에서 분열되고 창조에 동역 아니라 지구를 착취하는 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에덴동산의 반역 이후 계속이여 지는 매일의 일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 가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과 일을 숭배하기도 하고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하기도 하는 것이다..(고전15:58)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