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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개봉 / 확장판 99분 / 미성년자 관람불가>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조지 하이켄루퍼
출연 : 시에나 밀러 & 가이 피어스
극장 상영본보다 11분 늘어난 “팩토리 걸” 확장판 Unrated Version
앤디 워홀과 그의 뮤즈, 그들의 매혹적인 기억
팩토리: 앤디 워홀의 새로운 예술 창조의 시스템, 그 안에 숨겨진 드라마를 엿본다
한 때 주드 로의 연인이었던 이 시대의 ‘잇걸’ 시에나 밀러의 매혹적 연기
[LA 컨피덴셜] 호주 출신의 연기파 배우
가이 피어스
[스타워즈 3]의 헤이든 크리스텐슨
[아메리칸 뷰티] 미나 수바리
[날 미치게 하는 남자]의 지미 팔론
혼돈의 시대 1960년대의 패션, 시대 완벽 재현
“에디 세즈윅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밥 딜런의 “Just like
a woman”을 들어라”
- Glenn Whipp “LA Daily News”
1965년, 전세계가 그들을 주목했다
1965년, 섹스, 마약, 로큰롤, 모든 혼란의 중심
뉴욕. 캠벨수프를 이용한 파격적인 전시로 현대 예술의 개념을 뒤흔든 앤디 워홀(가이 피어스)은 한 사교 파티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한다. 그녀의 이름은 에디 세즈윅(시에나 밀러). 오드리 헵번을 꿈꾸며 뉴욕으로 건너와 패션모델을 하고 있는 그녀는 이제껏 발견할 수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앤디는 그녀가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예술의 뮤즈가 될 것을 직감한다.
앤디와 에디, 그들의 강렬하고
매혹적인 기억 속으로…
앤디는 에디를 자신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팩토리’로 초대한다. 그의 실험영화 주연으로 발탁된 에디는 그가
창조하는 예술의 동반자이자 뮤즈로서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에디는 자신이 피사체일뿐, 팩토리의 일원은 아니라는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런 그녀 앞에 빌리(헤이든 크리스텐슨)라는 록스타가 나타나는데…
감독 조지 하이켄루퍼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조지 하이켄루퍼는 극작가인 아버지와 사회저항 단체를 이끌어온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1991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걸작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회상, 지옥의 묵시록>으로
에미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이어 제작된 1999년 오손 웰즈의 대본으로 만든 정치극 <킹 메이커>로
골든 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2002년 앤디 가르시아, 믹 재거 등의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 싸이코 섹슈얼 영화 <맨 프롬
엘리시안 필드>가 미국 평단에 의해 2002년 최고의 영화란 찬사를 받았다. 그의 최근 장편영화 <메이어 오브 선셋 스트립>을
통해 음악감독 로드니 빈겐하이머의 시각으로 바라본 음악인들의 명성을 강렬하고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메이어 오브 선셋 스트립>은
2003년 뉴욕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같은 해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칸, 선댄스, 뉴욕, 런던, 로카르노, 모스크바, 도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많은 상을 휩쓸며 높은 작품성을
인정 받아왔다. 최근작 <팩토리 걸>은 그가 대본을 받아 다 읽기도 전에 감독을 자청한 작품. 모두에게 여신과도 같았던 20세기 패션
아이콘이자 심적으로 나약하고 외로웠던 한 어린 소녀였던 에디 세즈윅을 회고한 영화 <팩토리 걸>을 통해 그의 새로운 열정과 혼이 다시
한 번 관객에게 다가선다.
[작품 해설]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회화와 영화, 그리고 실제 나의 표면을
주시해라.
그리고 그곳에 내가 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이 말하는 앤디 워홀에 대하여
실존하는
인물의 인생을 조명하다 보면 여러가지 방향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 <팩토리 걸>은 최초의 ‘잇걸’이자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에디 세즈윅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한 진실과 앤디 워홀의 예술적 세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앤디 워홀의 빈틈없는 성격 덕분에
방대하게 남아있는 음성 자료들과 활동 기록들, 그리고 실제 팩토리 멤버들, 그리고 에디의 가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깊이 있는 조사를 할 수
있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감독과 제작자는 에디가 앤디와 함께 했던 가장 화려했던 시간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애매한 기억들과 규정되어
있지 않은 팩토리 안에서의 사건들에 좌우되지 않고, 그들은 오직 하나 에디 세즈윅에게 진실할 것을 목표로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모두를 인정받은 조지 하이켄루퍼 감독은 그 어떤 자전적인 영화도 모든 소소한 사실을 집어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시대에 충실한,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에디와 앤디를 상상의 세계에서 살려내기 위해 감독은 매체를
혼합하여 몽타주영화 같은 느낌을 발전시켰다. 수많은 흑백화면과 반전, 앤디 워홀의 영화로부터 재창조된 화면들은 팩토리 시절을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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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Mary,
she's my friend
Yes, I believe I'll go see her again
Nobody has to
guess
That Baby can't be blessed
Till she sees finally that she's like all
the rest
With her fog, her amphetamine and her pearls.
She takes just like
a woman, yes, she does
She makes love just like a woman, yes, she does
And
she aches just like a woman
But she breaks just like a little girl.
오
여왕님, 내 친구여
그래, 난 그녀를 보러 갈 거야
의심할 필요 없어
그녀가 운이 좋을 수 없다는 걸
그녀가 결국 마지막을
맞을 때까지는
그녀의 담배와 약과 진주들 속에서
그녀는 천상 여자지, 그래, 그녀는
여자답게 사랑하고, 아무렴
그리고
여자처럼 아파하지
하지만 작은 소녀처럼 부숴버려
- Bob Dylan “Just like a woman” 중에서
=== 인물 정보 ===
에디 세즈윅 Edie Sedgwick (본명 Edith Minturn Sedgwick)
1943.04.10 ~ 1971.11.16, 미국의 배우
* ‘아시아엔’ 연수 외국기자가 작성한 기사의 한글요약본
[아시아엔=라훌 아이자즈 기자·번역 최정아 기자]
에디 세즈윅을 추모하는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몇가지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에디는 무척 아름답다는 것과 그녀의 삶이 너무나 비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디의 아름다운 외모 뒤에 숨겨진 ‘가녀린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에디는 1960년대 미국 패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대표적인 ‘패셔니스타’였다. 그녀의 인기는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팝아티스트 중 하나인 앤디 워홀만큼 빛났다. 에디는 자신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의 틀 안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에디 세즈윅은 1960년대 앤디 워홀이 연출한 18편의 단편영화에 등장하면서, 앤디 워홀의 ‘뮤즈’로 뉴욕 언더씬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비틀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뉴욕의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팜므파탈’이란 노래를 작곡해 화제가 됐다. 당대를 대표하는 두 아티스트가 에디 세즈윅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정도로 그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에디는 ‘슈퍼스타’나 ‘셀러브리티’가 아닌, 사랑스런 작은 소녀였다. 이 소녀는 어린 시절 가족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깜깜한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처럼 웃고 있었다. 클릭 한번이면 인터넷에서 그녀의 전기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아픔을 진실로 느끼기 위해선 이를 넘어선 무언가가 필요하다.
오늘날까지 에디는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독, 갈등, 매너리즘, 패션, 어린 시절의 아픔이 엉켜 그녀의 삶을 옭아맸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녀의 예술관, 사랑, 꿈, 패션에 대한 고뇌 등 화려한 모습 뒤에 감춰진 이면을 살펴보라 권하고 싶다.
에디는 짧은 생 동안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녀는 언젠가 “나는 2년에 한 번씩은 큰 사건사고를 겪었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으나, 1971년 11월 6일 그녀는 신경안정제 과다복용으로 호흡곤란을 일으켜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의 유산은 지금도 새로운 모습으로 재해석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인물 정보 ===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08.06,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거 ~ 1987.02.22, 미국 뉴욕
포스트모던 미술의 과정과 개념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 관계로, 앤디 워홀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 미술 학사학위를 받은 후 상업미술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워홀은 I. 밀러 같은 회사를 위해 신발 광고를 만들며 1950년대에 성공적인 삽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책의 삽화를 그리고 무대 디자인도 했다. 1956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워홀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앤디 워홀은 상업 미술 분야의 광고계에 종사하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바라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1960년대 초 그는 돌연히 목표를 바꾸어, 워홀은 '뽀빠이'와 '슈퍼맨' 같은 연재만화를 이용해 실험적인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페루스 갤러리에서 열린 워홀의 첫 주요 개인전에서, 그는 캠벨 수프 깡통을 그린 37점의 회화를 전시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은 대량생산되어 번호가 매겨지는, 미국 문화의 어떤 속성, 특히 넘쳐나는 상업품과 유명인 도상에 대한 논평이었다. 예를 들어 캠벨 수프 깡통 그림은 상품화에 대한 점점 더 늘어나는 무관심함에 대한 언급이며, 반면 매릴린 먼로의 이미지는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천박함에 대한 언급이다. 영화계에 대한 워홀의 끈질긴 집착은 엘비스 프레슬리, 말론 브랜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들의 모습을 강박적으로 반복 제작한 워홀 덕분에 이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워홀은 냉정한 관찰자로서 사진과 영화가 사람들의 현실 인식에서 행하는 눈에 띄는 역할에 일찍부터 주목해왔다. 비행기 추락과 피로 물든 인종 폭동, 시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납게 공격하는 경찰 등의 정치적인 작품들은 워홀의 대표작인 유명인과 상품의 이미지만큼이나 중요한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전기의자 작품들에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사형에 관한 정치적인 함의가 담겨 있다. 또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얼마 안 되어 만든 재키 케네디의 이미지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재키가 암살당한 남편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관 옆에서 울고 있는 뉴스 사진은 어쩌면 암살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충격을 주었다. 앤디 워홀은 이것을 여러 버전으로 사용했다. 1960년대 워홀이 만든 도상들은 모두 명성의 덧없음과 필멸적인 인간 존재에 관한 것이다. 1970년대의 대표작으로는 공산주의 지도자 마오 쩌둥의 초상과 자신의 모습을 워홀의 양식으로 영원히 남기길 원했던 유명인들의 주문작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에 워홀은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젊은 미술가들과 공동으로 작업했으며, 달러 기호($)의 이미지를 그려 과열된 미술시장을 조롱하기도 했다.
컬트적 인물
워홀의 작품은 미술의 전통적인 개념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는, 대중미술의 파생물인 팝 아트의 전제를 입증한다. 팝 아트는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에 깊이 물들은 사회에 관해 진술한다. 워홀은 "대상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그것의 의미를 모두 잃게 될까봐 두렵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홀은 대량생산이 특징인 이 문화를 받아들여, 기계를 이용해 작업하는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생산했다. 그는 작업실의 조수들도 작품 제작에 참여시킴으로써, 의식적으로 완성작에서 미술가의 손길을 지워버렸다. 이처럼 원작자의 배제 외에, 팝 아트의 또 다른 양식 요소는 대담하고 선명한 색채이다.
워홀은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연극적인 태도와 사치스러운 생활방식으로도 유명했다. 작업실이자 사회적 안식처였던 워홀의 '팩토리'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할리우드의 전위적인 엘리트들부터 별난 보헤미안들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워홀은 유명한 컬트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제각기 다른 시기에 만든 자화상들은 유명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의 욕망을 보여준다. 워홀은 '첼시의 소녀들'(1966)과 '나의 허슬러'(1965) 같은 아방가르드 영화를 제작했다. '첼시의 소녀들'은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파노라마 영화로 워홀이 첫 번째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또한 벨벳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가수이자 배우이며 패션모델인 독일인 니코와 함께 레코드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1969년에는 미디어와 오락문화에 관한 잡지 『인터뷰』를 공동 창립하기도 했다.
내가 앤디 워홀을 쐈다
1968년 워홀은 급진적 페미니스트 작가인 발레리 솔라니스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거리의 매춘부였던 솔라니스는 SCUM(남자를 괴멸하기 위한 단체)의 성명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뉴욕에서 워홀을 소개받은 후, 그녀는 워홀에게 자신이 쓴 연극 '빌어먹을'(1966)의 제작을 부탁했다. 그러나 워홀은 이 요청을 거절했고, 극본도 돌려주지 않았다. 솔라니스는 워홀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극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워홀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영화 '나는 남자다'(1968)에서 배역 하나를 맡겼다.
그러나 이런 회유에 만족하지 못한 솔라니스는 팩토리에서 나오는 워홀을 기다려, 그와 그의 매니저인 프레드 휴, 그리고 미술비평가인 마리오 아나야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총탄이 워홀의 폐와 위, 간 그리고 목을 관통했고, 응급 수술 뒤 그는 두 달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워홀은 목숨을 건졌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다. 솔라니스는 경찰서로 가 자수를 하며, "그가 내 삶을 좌지우지했다"라고 주장했다. 워홀이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도, 그녀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팩토리에서 또 두 건의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첫 번째는 낯선 사람이 허공에 대고 총질을 한 것이고, 두 번째는 영화 스타 도로시 폰더가 매릴린 먼로의 그림 넉 점에 대고 총을 쏜 것이었다. 이는 별난 아트 해프닝의 일부였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들의 가격만 높아졌다.
"미래에는 누구든 15분간(즉, 아주 짧은 시간동안)의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앤디 워홀 [ANDY WARHO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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