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짠하다는 말은 언짢고 다소 아프다는 걸 뜻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갖는 어떤 아쉬움의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아쉬움은 오래전 한 시인이 노래한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느니라'는 그런 감상적인 느낌일지 모르겠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고, 지나가는 것의 안타까움과 다가오는 것의 기대감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김진숙, 안철수, 김어준, 그리고 SNS
올 한 해 우리 사회에서 내 시선을 잡아 끈 세 인물은 김진숙, 안철수, 그리고 김어준이다. 이 세 이름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희망버스 행진, 안철수 현상, 나꼼수 돌풍이라는 상징이 담긴 일반명사다. 지난 7월 3차 희망버스가 부산 영도구를 방문했을 때, 9월 안철수 원장이 박원순 현 서울시장에게 후보를 양보했을 때, 그리고 11월 나꼼수 멤버들이 여의도 공원에서 콘서트를 열었을 때,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는 자신의 경로를 조금씩 변경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들 못지않게 내 시선을 강렬하게 잡아 끈 것이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앞서 말한 인물들과 더불어 올해 우리 사회를 대표할 또 하나의 존재는 다름 아닌 SNS라고 나는 생각한다. SNS가 없었다면 김진숙, 안철수, 나꼼수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정치사회 변동의 분수령이 된 10월 보궐선거의 경우도 사회적 관심이 덜했을 것이다. 최근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우리 사회 분위기가 과거와 달리 차분한 것도 SNS를 통해 많은 정보들을 공유하게 된 데서 그 이유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SNS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공론장(public sphere)의 등장을 함축한다. 이러한 과정을 나는 공론장의 '제2차 분화'라고 이름짓고 싶다. 인쇄매체로 대표되는 기존 오프라인 공론장에 맞서서 온라인 매체, 블로그, 토론 커뮤니티 등이 등장한 것을 공론장의 '제1차 분화'라고 한다면, 스마트폰 도입을 통해 SNS 공론장이 활성화된 것은 사이버 공론장이 다시 분화하는 제2차 분화라고 할 수 있다.
공론장의 제2차 분화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SNS 공론장은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유비쿼터스 공론장이다.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연결되며,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 가상공간에서 자유롭게 접속하는 이른바 '장소귀속탈피' 방식이 새롭게 실현됨으로써 소통을 활성화하고 여론을 형성한다.
둘째, SNS 공론장은 심미적 공론장의 성격이 두드러진다(<표>를 볼 것). 심미적 공론장이란 숙의적 공론장, 대항적 공론장과는 다른 형태의 공론장이다. 이 공론장에서는 개인의 정체성, 내러티브, 유희, 감수성, 이미지 등이 중시된다. 트위터로 대표되는 SNS와 시사정치토크인 나꼼수 등의 공론장은 기존 오프라인·온라인 매체와 비교해 심미적 공론장의 성격이 한층 강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공론장, 참여민주주의의 공간
▲ 309일간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트위터 이용자 @ez2dj81
이론적으로 공론장을 체계화한 사람은 위르겐 하버마스다.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그는 공론장에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결집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와 부르주아 간의 갈등이 공론장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토론을 통해 해결되는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이점에서 공론장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를 이룬다.
공론장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러 더욱 정교화된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삽화적 공론장', '기획된 임석 공론장', '추상적 공론장'으로 구분하고, 특히 현대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추상적 공론장의 미디어 행위자와 그 권력을 주목한다. 그가 모색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규범적 기획이며, 그것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간의 새로운 '쌍선적 토론정치'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칼럼에서 다소 딱딱한 하버마스의 주장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에 주는 함의에 있다. 공론장의 활발한 의사소통에 기반한 참여민주주의를 부각시킴으로써 그것과 대의민주주의와의 생산적 공존 및 상호작용을 강조하려는 것이 하버마스의 정치적 기획이다. 비록 사이버 공론장의 등장과 그 분화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시민들이 공론장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자기결정'을 실현하고자 하며, 이러한 시민들의 열망이 정보사회의 진전과 결합해 공론장의 진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 진화과정에서 SNS 공론장의 등장은 앞서 말한 정보사회의 실시간적이고 장소귀속탈피적인 특징의 정점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 공론장은 공론장의 제1차 분화를 주도한 인터넷 논객들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시민 다수의 자발적 참여가 주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공론장의 탈중심화 경향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물론 이런 SNS 공론장이 밝은 측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론장이든 편향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SNS 공론장 역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강화된 기존 공론장의 보수적 성향에 대응해 SNS 공론장은 진보적 오프라인·온라인 매체와 함께 진보적 담론 생산과 유통의 새로운 중심을 이뤄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SNS 공론장의 편향성이 아니라 SNS 공론장의 등장으로 인해 시민사회의 정치적 성향에 적절히 조응할 수 있는 공론장의 균형구도가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두 개의 선거와 SNS의 역할
SNS가 갖는 유희적 공론장의 특징은 어떤 이들에게는 당혹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SNS 공론장의 특징은 1996년 미국에서 이었던 통신품위법 논란에 대한 판결을 돌아보게 한다. 당시 펜실베니아 연방지방법원이 "인터넷의 힘이 혼란(chaos)에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 자유의 힘도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한 속박받지 않는 언론의 혼란과 불협화음에 의존한다"고 판결했듯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새로운 자율과 질서를 구축해가는 것이야말로 SNS 공론장의 존재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트위터 타임라인을 살펴보니 대법원의 정봉주 의원 판결에 대한 글들이 끝없이 올라오고 있다. 분노는 공감과 토론을 가져오고, 그것은 다시 기억과 의미로 주조된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이 세계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유의미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듯이, 말의 자유와 소통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본령을 이룬다. 2012년 우리사회에서 두 개의 선거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험대가 될 수 있듯이, 동시에 SNS 공론장의 일대 실험장이 될 가능성 역시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