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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4부 5
그다음 날 아침 정각 11시에 라스콜니코프가 지구 경찰서로 들어가 예심판사 사무실로 출두하여 포르피리에게 면회를 청했을 때, 그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데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적어도 10분은 걸렸다. 그의 계산으로는 다짜고짜로 자신에게 달려들 줄로 알았다. 한편 그가 대기실에 서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가고 왔다 갔다 했으나, 보건대 그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인 듯싶었다. 사무실처럼 보이는 다음 방에서는 서기 몇 명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중 누구 하나 라스콜니코프가 누구며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불안하고도 미심쩍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 근처에 간수 같은 자가 있지나 않나, 그가 어디로 가지 못하도록 감시 명령을 받은 비밀의 눈이 있지 않나 하고 살펴보았으나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다만 바쁜 듯이 서성거리는 사무원 몇 사람과 그 밖의 몇 명을 보았을 뿐, 그가 지금 곧 어디로 뛰어나가더라도 문제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만일 수수께끼 같은 어제의 사나이가, 저 땅속에서 솟은 그 환상의 사나이가 정말로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 라스콜니코프로 하여금 이렇게 서서 태연하게 기다리도록 그냥 놔둘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점점 굳어져갔다. 또한 그가 11시나 되어서야 겨우 제 발로 어슬렁어슬렁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멍청히 기다리고 있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사나이가 아직 아무런 밀고도 하지 않았든가, 혹은....혹은 그 자신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가, 전혀 보지를 못했든가, 그중 하나다.(그러면 그렇지, 제깟 놈이 어떻게 볼 수 있담!) 그렇다면 어제 라스콜니코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역시 초조한 병적 상상으로 과장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러한 추축은 이미 어제부터 가장 심한 불안과 절망 속에서도 그의 심중에 굳어지고 있었다. 지금 모든 것을 회상하고 새로운 투쟁을 다짐하면서 그는 문득 자기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저 죽이고 싶도록 미운 포르피리가 두려워서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마음에는 분노까지 끓어올랐다. 그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또다시 그자와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었다. 그는 그자를 한없이 증오했다. 그 증오감 때문에 어쩌다가 그의 앞에서 자기 정체를 폭로하지나 않을까, 그런 것까지 근심될 정도였다. 분노의 도가 너무 심한 때문인지 도리어 몸의 떨림은 곧 멎고 말았다. 그는 침착하고도 대담한 표정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침묵을 지키며 상대방을 살피고 귀 기울여서 눈치를 살피자, 적어도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병적으로 혼란되기 쉬운 자기 성질도 스스로 극복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마침 이때 그는 포르피리에게 불려 들어갔다.
포르피리는 자기 방에 혼자 있었다. 그의 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큰 탁자, 그 앞에 유포를 씌운 소파, 사무용 탁자, 한구석에는 책상, 그리고 의자 몇 개 등이 있었는데, 전부 손질이 잘된 황목 제품의 관용물이었다. 구석진 벽면에, 벽이라기보다 차라리 칸막이 판자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닫힌 문이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 칸막이 저쪽엔 다른 방문이 더 있을 것 같았다. 라스콜니코프가 방에 들어서자 포르피리는 곧 그 문을 닫아버렸으므로 그들은 단둘이 마주 앉게 되었다. 포르피리는 겉보기에 매우 유쾌한 상냥한 태도로 손님을 맞았다. 그러나 불과 몇 분도 지나기 전에 라스콜니코프는 두세 가지 징후로 그가 좀 당황하고 있는 듯한 눈치를 챘다. 그것은 무슨 뜻밖의 일로 어리둥절했거나, 혹은 남몰래 무슨 비밀스런 일을 하다가 들켰을 때 같은 그런 당황스러움이었다.
“아아, 선생, 이거 참.....이렇게 먼 길을 오시게 해서.....” 포르피리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자, 어서 앉으십시오, 노형! 참 당신은 노형이니....선생이니 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군요! tuou court?(‘그러시죠’라는 뜻) 너무 허물없이 군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고....자, 어서 이 소파에......”
라스콜니코프는 상대방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먼 길을’ 이라든지, 허물없는 태도에 대한 변명이라든지, ‘tout court' 따위의 프랑스 말 등은 모두 특수한 징후였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두 손을 다 내밀었다가 한 손도 쥐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다 빼버리고 말았군.‘ 이러한 의심스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스쳤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쌍방의 시선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재빨리 눈길을 돌려버렸다.
“이 서류를 갖고 왔습니다....그 시계 건으로.....이겁니다만, 양식은 이걸로 됩니까? 다시 고쳐 쓰지 않아도 될까요?”
“뭐, 서류라고요? 아, 좋습니다. 좋습니다....염려 마십시오, 그걸로 됐습니다.” 포르피리는 급히 나갈 일이라도 있는 듯이 이렇게 성급히 말했으나, 서류를 들고 본 것은 그렇게 말하고 난 다음이었다.
”이걸로 좋습니다. 다시 쓸 필요는 없어요.“ 그는 여전히 빠른 어조로 말하고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잠시 후, 이미 딴 얘기를 하고 있을 때였지만 그는 다시 탁자에서 서류를 집어서 자기 옆 책상 위로 옮겨놓았다.
”당신은 어제 분명히 나에게....그....살해된 노파와의 관계를....정식으로.....묻고 싶다고 말하신 것 같은데?“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쳇, 나는 왜 분명히라고 필요 없는 말까지 덧붙였을까?‘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아니, 나는 또 왜 분명히라고 말한 것을 이토록 걱정하고 있을까?‘하는 반대의 생각도 번개처럼 번쩍였다.
그러자 문득 그의 위구심이 포르피리와 단 한번 접촉한 것만으로, 한두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 한두 번 시선을 부딪힌 것만으로 순식간에 놀랄 만큼 크게 성장해버렸다는 것을....그리고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신경은 초조해지고 마음의 동요는 더해갈 뿐이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또 실언을 할지 모른다!‘
”예, 예, 그렇습니다! 염려하실 건 없어요!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탁자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면서 포르피리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로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게 창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가 하면 사무용 탁자 쪽으로 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탁자 있는 데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의 의아스런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한자리에 멈춰 서서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곤 햇다. 둥글둥글 살찐 조그만 그의 몸이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갔다가 사방의 벽과 구석구석에서 도로 튀어 오는 모양은 말할 수 없이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늦지 않습니다, 늦지 않고말고요!....아참, 담배 피우십니까? 가지셨어요? 자, 한대, 궐련이지만.“ 그는 궐련을 권하면서 말을 이었다. ”실은 지금 이 방으로 모셨습니다만, 내 숙소는 바로 저 칸막이 저쪽입니다. 관사요. 그러나 지금은 임시로 사삿집에 있습니다. 좀 수리를 해야겠기에, 하긴 집수리도 거의 끝났습니다....관사라는 건 그대로 쓸 만하거든요, 안 그렇습니까?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쓸 만할 테죠.“ 비웃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쓸 만하죠, 쓸 만해요......“ 갑자기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린 듯이 포르피리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암, 쓸 만하고말고요!“ 그는 문득 라스콜니코프에게 시선을 던지고, 두 걸음 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서면서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관사는 쓸 만한 것이라는 실없는 말의 반복은 그 저속한 점에 있어서 그가 지금 손님에게 쏟고 있는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수수께끼 같은 시선과는 너무나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라스콜니코프의 분노를 더 촉발시켰다. 그는 이 부주의한 냉소적 도전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신도 아시겠지만.....“하고 그는 거의 뻔뻔스러울 만큼 대담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그 대담성에 스스로 기쁨이라도 느끼는 듯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거의 모든 예심판사에게는 일종의 재판상 원칙이랄까, 법률가적 방법이랄까,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즉 처음엔 멀찍이 우회해서 아주 부질없는 얘기 또는 비록 진지한 화제라 하더라도 그와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부터 시작해 그것으로 피신문자에게 기운을 주고, 아니 좀 더 절절히 말하면 주의를 산만케 해서 경계심을 잠재워놓고, 그다음에 느닷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가장 치명적인 위험한 질문을 정면으로 퍼붓는단 말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이것은 아직까지도 모든 법규와 훈규 속에서 성스럽게 가르쳐지고 있다더군요?“
”아, 그래요...그럼 당신은 내가 숙소 얘기를 꺼낸 것도 역시 그런 수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포르피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무언가 유쾌한 듯한 교활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갔다. 이마 주름살이 펴지고 눈이 가늘어지며 얼굴의 윤곽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는 라스콜니코프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온몸을 물결처럼 흔들며 신경질적으로 길게 웃어댔다. 라스콜니코프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포르피리가 상대방도 따라 웃는 것을 보고는 얼굴이 거의 자줏빛으로 변할 만큼 허리를 잡고 웃었으므로 라스콜니코프의 혐오감은 순식간에 일체의 경계심을 압도하고 말았다. 그는 웃음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포르피리가 무슨 속셈이 있는 양 오래도록 계속 웃고 있는 동안 상대방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 얼굴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경계심의 해이는 쌍방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었다. 포르피리는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웃어대고, 손님이 자기 웃음을 증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그런 상태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라스콜니코프에게 지극히 의미심장했다. 그는 조금 전에 포르피리가 전혀 당황햇던 것이 아니고, 도리어 함정에 빠진 것은 자기, 곧 라스콜니코프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여기엔 반드시 자기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무슨 목적이 있다, 어쩌면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어서 지금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본성을 드러내어 그의 머리 위에 솓아져 내릴지도 모른다.....그는 급히 용건에 들어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어 들었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단호한 어조이긴 했으나 몹시 초조한 음성으로 그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제 신문할 일이 있다며 나더러 와달라고 하셨죠(그는 특히 신문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왔습니다. 물을 것이 있으면 어서 물으십시오. 그렇잖으면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볼일이 있어서요.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말에 밟혀 죽은 관리의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하고 그는 덧붙였으나,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였구나 싶어 이내 화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더욱 초조해지면서 이렇게 항의햇다.
”이런 문제엔 이제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시겠어요, 벌써 오래전부터....나는 이 문제로 병이 났을 정돕니다....한마디로 말해서.“ 병이 났다는 한마디는 더욱 큰 실언이었다고 느끼면서 그는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곧 신문을 하든지, 아니면 당장 돌려보내주든지 하시오. 그리고 만일 신문을 하겠으면 반드시 정식으로 해주시오! 그렇잖으면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요.“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당신을 신문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포르피리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 어조도 표정도 바꾸면서 마치 투정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도 염려는 마십시오.“ 그러고는 또다시 이리저리 걷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를 자리에 권하기도 하면서 수선을 피웠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그리고 그런 건 문제 삼을 것도 안 됩니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이렇게 일부러 찾아주신 걸 기뻐하고 있습니다....당신을 손님으로 맞을 수 있게 된 것을 말입니다. 방금 함부로 웃은 실례에 대해서는 용서해주십시오. 로지온 로마느이치....아마 그렇죠, 당신의 부칭은? 나는 원래 신경질적인 인간이라 지나치게 날카로운 당신의 관찰이 우스워서 참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나는 때로 마치 고무 제품처럼 온몸을 떨면서 웃곤 합니다. 게다가 그런 웃음이 반 시간씩이나 계속될 때가 있어요....아무튼 잘 웃는 편이죠 그런 체질이라 졸도할 우려가 있을 지경입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자꾸 그러신다면 단단히 화나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여전히 화난 듯이 눈살을 찌푸린 채 잠자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튼 그는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모자는 그냥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로지온 로마느이치, 나 자신에 대해서 한마디 얘기해줄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내 성격의 설명이라는 거죠.“ 방 안을 부산스럽게 거닐며 그는 말을 이었으나, 여전히 손님하고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는 것 같았다.
”아시다시피 나는 독신자로서 사교계란 것도 모르는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미 다 끝난 인간, 아주 굳어버린 인간이고 이미 열매가 맺힌 인간입니다. 그래서....그래서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도 아마 느끼셨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즉 우리 러시아에선, 특히 이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선 서로 각별히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서로가 존경하는 총명한 두 인간이, 예를 들면 지금의 당신과 나 같은 인간이 한자리에서 만났다고 하면 30분쯤이나 아무 화제도 찾지 못하고 쌍방이 다 굳어져서 어색하게 앉아 있게 마련입니다. 대체로 화제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컨대 여자인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사교계의 인간, 상류사회의 인사들도 화제는 언제나 갖고 있지요. C'est de rigueur.('그건 꼭 필요하니까요’라는 뜻) 그런데 우리 같은 중류층 인간은 하나같이 수줍어하고 구변이 없어요. 다시 말해 사색형이거든요.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우리에겐 사회적 흥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정직해서 서로 기만하길 원치 않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 그 모자를 내려놓으시죠. ...곧 가시려는 것만 같아서 보기에 민망스럽습니다. 나는 도리어 이렇게 기쁜데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모자를 내려놓았으나,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한 얼굴로 포르피리의 공허하고 두서없는 요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 이 사나이는 이런 실없는 잡담으로 내 주의를 산만하게 하려는 생각일까?’
”커피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장소가 장소니만큼. 그러나 친구하고 기분을 풀기 위해 한 5분쯤 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요.“하고 포르피리는 쉬지 않고 지껄여댔다.
”아무튼 이런 직무상의 의무란 것은.....그러나 노형, 내가 이렇게 앞뒤로 거닐며 서성거리는 것을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례지만, 실은 당신 기분이 상하지나 않을까 몹시 염려됩니다만, 나에겐 운동이란 게 꼭 필요하거든요. 노상 앉아만 있기 때문에 단 5분 동안 만이라도 이렇게 걸어 다니는 것이 여간 유쾌하지가 않습니다....치질 증상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이 병을 고쳐볼 생각이죠. 풍문으로는 5등관이나 4등관, 심지어 3등관 관리들까지 자진해서 줄넘기 운동을 한다더군요. 아무튼 과학 만능의 시대니까요.....정말 그래요. 한데 이곳의 여러 가지 직무라든가 신문이라든가, 그런 형식적인 일들은.....방금 당신도 신문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사실 말이지, 노형,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 신문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신문당하는 사람보다도 신문하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때가 있답니다. 그것은 노형께서 방금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지적하신 대로입니다(라스콜니코프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한 기억이 없었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정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밤낮 같은 소리만, 마치 북을 치듯이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게 되는 거죠! 다행히 개혁이 진행중이니까 우리는 하다못해 명칭만이라도 변경되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헤, 헤, 헤! 그런데 법률가적 수법에 대해선 -기지에 넘친 당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말입니다 - 전적으로 당신 의견에 찬성입니다. 어떤 피고든지, 머리가 우둔한 농민 출신의 피고들까지도 그만한 것은 잘 알고 있거든요. 즉 처음엔 아무 관계도 없는 질문을 퍼붓다가 - 당신의 훌륭한 표현에 따르면 말입니다 - 그다음에 느닷없이 정면을 내리치죠. 헤,헤, 헤! 바로 정면을 말이오, 당신의 그 훌륭한 비유에 따라서 말입니다. 헤, 헤, 헤! 그만한 것쯤은 누구다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관사 얘기를 꺼내서 당신을....어떻게 하려 했다고. 헤헤! 당신도 꽤 비꼬기를 좋아하시는군요. 아니, 그런 말은 그만 둡시다! 아 참 ,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원래 말이나 사상은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끌어내게 마련이죠....당신은 아까 형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즉 신문의 형식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식으로란 대체 뭡니까! 형식이란 건 대개의 경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죠. 경우에 따라선 친구처럼 허물없이 얘기하는 편이 훨씬 편할 때가 있어요. 형식이란 것은 결코 도망치지 않으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본질적으로 봐서 형식이란 대체 뭡니까?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식 따위는 어떤 경우에도 예심판사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예심판사의 일은, 이를테면 일종의 자유 예술이거든요. 일종의 그 어떤 ....헤, 헤, 헤!“
포르피리는 잠깐 숨을 돌렸다. 그는 피로한 기색도 없이 무의미하고 공허한 수작을 늘어놓는가 하면, 갑자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뇌까리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실없는 수다를 피우면서 지껄여댔다. 그는 거의 뛰다시피 방안을 걸어다녔다. 그 짧고 굵은 다리를 재게 놀리면서 여전히 마룻바닥에만 눈을 준 채 오른손은 등 뒤로 돌리고 왼손은 연방 흔들어대면서, 말의 의미와는 놀랄 만큼 동떨어진 갖가지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방안을 돌아다니는 도중에 두어 번쯤 문 옆에 잠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 듯한 것을 라스콜니코프는 눈치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실은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하고 포르피리는 유쾌한 듯이 유달리 솔직한 태도로 라스콜니코프를 보면서(그 때문에 오히려 이쪽은 흠칫 몸을 떨면서 한순간 정신을 가다듬을 정도였다) 말을 계속했다.
“당신은 법률상 형식에 대해 실로 날카로운 조소를 퍼부었지만, 사실은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헤, 헤, 헤! 그 의미심장한 심리적 방법이란 것은,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지극히 우스꽝스러워서 너무 형식에 치우치면 오히려 유익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고말고요....아니, 또 형식으로 되돌아왔군요. 그런데 만약 내가 위임받은 무슨 사건로 A나 B나 C를 범죄자로 인정한다, 아니 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용의자로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은 법률가를 지망한다고 하셨죠, 로지온 로마느이치?”
“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당신에게 한 가지, 이를테면 장래의 참고로 말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당신에게 주제넘게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신은 그처럼 훌륭한 범죄론을 발표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고말고요. 나는 다만 한 가지 사실로 조그만 실례를 들려는 것 뿐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내가 A나 B나 C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고 합시다. 이러한 경우에 비록 내가 증거를 잡았다 하더라도 시기가 무르익기 전에 본인을 불안하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기야 때로는 지체없이 체포해야 할 경우도 있죠. 그러나 개중에는 성질이 다른 인간도 있거든요. 이건 사실입니다. 그런 자에 대해서는 잠시 거리를 산책하게 내버려둬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헤, 헤! 그런데 당신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내가 그 사나이를 너무 빠릴 미결감방에 잡아넣으면, 그 때문에 도리어 그 사나이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지주를 주게 되는 셈이거든요....헤, 헤! 당신은 웃고 계시는군요(라스콜니코프는 웃으려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이글거리는 시선을 포르피리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종류의 인간에 대해선 특히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지각색이지만,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당신은 곧 증거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실 테죠. 물론 증거가 있다고 해둡시다. 그러나 증거란 것은 대부분 양쪽에 꼬리를 달고 있거든요. 나는 예심판사이면서 동시에 마음 약한 인간이라 고백합니다만, 예심이란 것은 수학적으로 명확히 내밀고 싶다, 2곱하기 2는 4같은 확실한 증거를 잡고 싶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확고한 증거를 잡고 싶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를 시기가 무르익기 전에 체포해서 수감해보십시오, 비록 내가 그자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사나이에 대한 그 이상의 증거를 잡을 방법을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셈이 됩니다. 왜냐고요? 그를 수감함으로써 나는 그에게 일정한 지위를 주고, 말하자면 심리적으로 일정한 방향을 주어서 그를 안정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는 나를 떠나서 제 껍데기 속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즉 자기는 죄수가 됐다고 깨닫게 되는 거죠. 여기 이런 말이 있더군요. 세바스토폴(크림반도의 남단 해군 기지. 크림전쟁 때의 포위전으로 유명함)에서 알마 강 전투 직후, 식자들은 당장에라도 적이 총공격으로 나와 일거에 세바스톨을 함락하지나 않고 매우 두려워했답니다. 그런데 적이 공공법에 의한 포위 작전을 택하고 첫 번째 평행호를 파는 광경을 보자, 그들은 몹시 기뻐하면서 안심했다는 겁니다. 즉 정공법에 의한 포위 작전으로는 적어도 두 달 동안은 함락이 연기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아니, 또 웃으시는군요.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그야 물론 당신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옳아요, 옳고말고요! 이건 모두 특수한 경우니까요, 당신의 말씀대롭니다. 지금 예로 든건 정말 특수한 경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로지온 로마느이치, 여기서는 다음 사실도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모든 법률상의 형식과 규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고려되는, 책에도 쓰여 있는 그런 일반적인 경우라는 것은 실제론 결코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 모든 범죄는 그것이 현실에서 발생하자마자 곧 하나의 특수한 경우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전혀 전례가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은 우스꽝스런 사건이 생기는 수도 흔히 있습니다. 가령 내가 어떤 혐의자를 멋대로 혼자 내버려둔다고 합시다. 체포도 하지 않거니와 별로 불안도 주지 않지만, 그 대신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밤낮으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끈덕지게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에게 끊임없이 느끼게 한다. 적어도 그런 의심을 품게 한다, 그 말입니다. 이렇게 그 사나이가 항상 나한테서 혐의를 받고 위협을 받고 있다고 자각하게끔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나이는 반드시 머리가 혼란되어 마침내는 자수하게 됩니다. 더욱이 나로서는 2곱하기 2는 4라는 이른바 정확한 수학적 증거까지 얻을 수 있을 테니, 그야말로 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면이런 일은 신경이 무딘 농민에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처럼 현대적 두뇌를 가진, 더구나 어떤 방향으로 발달한 인간이람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발달한 인물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경이죠, 신경이에요, 당신은 중요한 이 점을 잊고 있어요! 오늘날 이런 족속들의 신경은 모두 병적이요 영양실조인 데다가 항상 들떠 있거든요. 이를 테면 담즙 작용이죠. 그들에겐 이 담즙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것은 사실 일종의 광맥 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 사나이가 제멋대로 거리를 싸돌아다녀도 나로서는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뭐, 멋대로 당분간 산책하도록 내버려두는 겁니다. 제멋대로. 그런 것 없이도 나는 그 사나이가 내 손아귀에 든 희생물이며, 결코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또 도망가려야 도망갈 곳이 있어야죠, 헤, 헤! 외국으로요? 외국으로 도망치는 것도 폴란드 정도나 가능하지, 그 사나이는 안 됩니다. 더구나 나는 항상 그를 감시하면서 적당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국내의 어느 깊은 시골로라도 도망친다면? 그러나 거기엔 농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순진하고 곰 같은 진짜 러시아 백성이 살고 있어요. 교양 있는 현대인이라면 그 외국인 같은 우리나라 백성과 함께 사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할 겁니다. 헤, 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대수롭잖은 표면적인 문젭니다. 도대체 도망이라는 건 뭡니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 사나이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내게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이미 도망치지 못하는 거죠, 헤헤, 어떻습니까, 멋진 표현이죠! 즉 그 사나이는 비록 도망해 숨을 곳이 있더라도 자연법칙에 의해서 도망치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은 촛불에 모여드는 나방을 본 일이 있겠죠? 마치 그것처럼 그 사나이는 항상 내 주위에서 뱅뱅 돌겁니다. 마치 나방이 촛불 주위를 뱅뱅 돌듯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유도 달갑지 않고 침울한 생각에 잠겨 머리가 점점 더 혼란해집니다. 그리고 그물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 제 몸을 묶어 버리고 죽도록 혼자 고민할 것이 뻔합니다. 뿐만 아니라 2곱하기 2는 4식의 정확한 수학적 증거를 자기 쪽에서 나를 위해 제공해주게 됩니다, 내가 막간을 좀 길게 잡아주기만 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주위를 돌면서 그 행동반경을 차츰 좁히다가, 마침내는 탁 걸려 듭니다! 곧장 내 입속으로 뛰어드는 거죠. 그러면 나는 꿀꺽 삼켜버린다 이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유쾌한 일이죠, 헤, 헤, 헤! 당신은 믿어지지 않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긴장된 표정으로 포르피리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파랗게 질린 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럴싸한 설교로군!’ 온 몸이 얼어붙은 듯한 느낌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어제처럼 고양이가 쥐를 놀린ㄴ 정도의 얘기가 아니다. 이자가 공연히 자기의 힘을 과시하거나....나한테 조언할 리는 없다. 그런 짓을 하기에 이자는 너무나도 영리하다....필시 딴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일까? 흥, 어리석다, 너는 나를 위협해서 골탕을 먹이려는 거지! 하지만 네게는 아무런 증거도 없을 뿐더러 어제의 그 사나이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는 나를 당황하게 하여 초조와 불안 속에 몰아넣은 다음 그 틈을 타서 덜컥하게 할 속셈일 거다. 천만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엉뚱한 수작만 늘어놓고 내가 거기 넘어갈 줄 알고! 그런데 대관절 무엇 때문에, 아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자는 이렇게까지 나한테 조언을 해주는 걸까? ....나의 병적인 신경을 고려하고 있기라도 한가 보지. 네가 아무리 잔재주를 피워도 네 정체는 드러나게 마련이야...어디 두고 보자, 네가 얼마나 잔재주를 피우는지.’
여기서 그는 예측할 수 없는 가공할 파국에 대비하여 온몸의 힘을 모아 굳게 마음을 도사렸다. 가끔 그는 포르피리에게 덤벼들어 당장에 목을 졸라 죽여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이 방으로 들어오면서도 이런 증오심이 폭발하지나 않을까 염려했었다. 그는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술에 침이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는 침묵을 지키고 시기가 올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현재의 자기 처지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쪽에서 무슨 실언을 할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침묵으로써 적을 초조하게 하고 적으로 하여금 또 무슨 말이든 지걸이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이것을 노리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아무래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군요. 그리고 내가 무슨 실없는 농담이라도 하는 줄로 아시는 것 같습니다.“ 포르피리는 점점 더 유쾌하다는 듯이 만족스럽게 키득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방 안을 돌기 시작했다. ”그야 물론 당신이 옳겠지요. 보시다시피 나는 이 몸뚱이부터가 남에게 우스꽝스런 느낌을 주게끔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어릿광대지요.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로지온 로마느이치, 노인의 말이다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아직 젊고, 말하자면 한창 청춘기에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보통 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인간의 지혜라는 것을 존중하게 계십니다. 즉 발랄한 기지라든가 이지의 추상적 연역 따위에 당신은 유혹을 느끼시겠짐요. 그것은 내가 군사에 관해서 판단하는 한, 마치 오스트리아의 군사 회의와 똑같은 겁니다. 그들은 종이 위에선 나폴레옹을 분쇄하고 포로로 잡기까지 했습니다. 자기네 서재에선 종횡의 기지를 발휘하여 모든 계획을 세우고 적을 술책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마크 장군은 전군을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헤, 헤, 헤! 아니, 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내가 문관 신분이면서 군사상의 실례를 드는 게 우습다는 거죠?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 약점이니까요. 실은 군사 문제에 취미가 있어서 전쟁 보고서 따위를 읽는 것이 퍽 재미있습니다. 정말 나는 길을 잘못 들었어요. 나 같은 사람은 군대에서 복무하면 좋았을겁니다. 나폴레옹은 못 됐어도, 적어도 소령쯤은 됐을 테니까요, 헤, 헤, 헤! 그건 그렇고, 나는 여기서 당신에게 그 특수한 경우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현실이라든가 자연이란 것은 실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주도 면밀한 계획까지도 일거에 뒤집어 앞을 때가 있으니까요. 자, 노인의 말을 좀 들어보시오. 나는 진정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로지온 로마느이치(이렇게 말했을 때 서른다섯 살밖에 안 된 포르피리는 정말 갑자기 늙은이같이 보였다. 음성이 변하고 허리까지 구부정하니 굽은 것 같았다). 더구나 나는 개방적인 인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때요, 당신 생각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이런 것까지 당신한테 공짜로 가르쳐주고 아무 사례도 청구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헤, 헤! 자, 그건 그렇고 얘기를 계속합시다. 도대체 기지라는 건 내가 보기에 참으로 멋진 것이어서, 이를테면 자연의 아름다움, 인생의 위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무슨 요술이든 능히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망상에 열중해 있는 하잘것없는 예심판사 따위는 도저히 그것을 간파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될 정도지요. 이런 일은 흔히 있는데, 예심판사도 역시 인간이니까요! 그런데 인간성이란 것이 이 초라한 판사를 구원해주거든요. 이것이 곤란합니다! 그런데 자기 기지에 열중해서 ‘모든 장애를 밟고 넘어가는’ -이것은 어제 당신이 말한 묘하고도 현명한 표현입니다만 -청년은 이 점을 전혀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령 교묘하게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어떤 사나이가 말이에요. 즉 특수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남모르게, 교묘하게, 감쪽같이 거짓말을 했다고 합시다. 이걸로 이젠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기지의 성과를 즐길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잇을 때 천만뜻밖에도 퍽 쓰러져버립니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동을 일으키기 쉬운 장소에서 퍽 하고 졸도 같은 걸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야 갑자기 병이 났다거나, 아니며너 방 안 공기가 너무 탁하든가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그래도 역시 상대방에게는 어떤 암시 같은 걸 주게 됩니다! 그 사나이는 거짓말은 교묘하게 했지만 인간성을 계산에 넣는 걸 잊었던 겁니다! 엉뚱한 곳에 복병이 있는 법이지요!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자유분방한 자기의 기지에 현혹되어 자기에게 혐의를 걸고 있는 상대방을 우롱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이, 제법 연극처럼 새파랗게 질려 보입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그럴사하게 질려 보이기 때문에, 또다시 상대방은 그럴싸한 암시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 한 번은 속여 넘겼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바보가 아닌 이상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눈치채고 맙니다. 아무튼 하나하나가 다 이런 식이죠! 그뿐이겠습니까, 자기 쪽에서 먼저 앞지르는 가하면, 묻지도 않은 말을 불숙 뇌까리기도 하고, 또 그와는 반대로 잠자코 있어야 할 때 함부로 지껄이거나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하기도 합니다. 헤, 헤! 나중에는 제 발로 어슬렁어슬렁 찾아와서, 왜 나를 이렇게 오랫동안 체포하지 않소, 하고 따지고 들게 되지요, 헤, 헤, 헤! 더구나 이것은 기지가 매우 발달한 사람들, 심리학자나 문학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거든요! 자연은 거울입니다, 거울이고 말고요, 가장 맑은 거울입니다! 자신을 비춰 보고 즐기는 게 좋겠죠! 바로 이거예요! 아니,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졌습니까? 답답하십니까, 창문이라도 열어드릴까요?“
”아니, 그런 걱정 마십시오.“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포르피리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도 갑자기 껄껄 따라 웃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자기의 그 발작적인 웃음을 뚝 끊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으면서도 커다란 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모든 걸 똑똑히 알았습니다, 당신이 그 노파와 리자베타의 살인범으로서 확실히 나한테 혐의를 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똑똑히 말해두지만, 벌써부터 나는 이런 일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만일 당신이 법에 따라 나를 조사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어서 조사해보시오. 체포하겠으면 빨리 체포하란 말이오. 그러나 맞대놓고 조롱하거나 괴롭히는 일은 나로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별안간 그의 입술은 떨리고 두 눈은 분노에 불타면서 여태까지 억제하던 음성이 쨍쨍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용서할 수 없어요!“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으로 힘껏 탁자를 내리쳤다. ”들립니까,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용서할 수 없어요!“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또!“ 포르피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노형!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봐요! 대체 왜 그러십니까?“
”용서할 수 없어요!“ 라스콜니코프는 또 한번 외쳤다.
”제발 좀 진정하시오! 남이 들으면 달려와요! 그러면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포르피리는 자기 얼굴을 라스콜니코프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대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할 수 없단 말이오!“ 라스콜니코프는 기계적으로 되풀이햇으나 그 음성도 어느새 속삭이는 소리로 변해 있었다.
포르피리는 얼른 몸을 돌려 창문을 열려고 달려갓다. ”방 안에 공기를 넣어야지, 신선한 공기를! 그리고 당신은 물이라도 좀 마시는 게 어때요, 이건 발작이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물을 가져오도록 이르려고 문쪽으로 달려가려 했으나, 마침 그쪽 구석에 있는 물병을 발견했다.
”자, 좀 드십시오.“ 그는 물병을 들고 라스콜니코프에게로 달려오더니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좀 도움이 될 겁니다.....“ 포르피리의 놀라는 표정과 간호하는 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므로 라스콜니코프는 입을 다물고 의아심과 호기심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물은 받지 않았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이봐여! 정말 그러시다간 자기 자신을 미치게 만듭니다. 정말이에요. 자! 어서! 물을 좀 마시세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마시십시오!“
그는 억지로 물이 든 컵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입술로 가져갔으나 퍼뜩 정신이 들어 불쾌한 표정을 띠며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요, 당신은 발작을 일으킨 겁니다! 그러다간 또 전의 병이 재발합니다.“하고 포르피리는 정다운 어조로 지껄여대기 시작했으나, 그 얼굴엔 아직도 당황한 빛이 엿보였다.
”큰일이군요! 당신은 왜 그렇게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어제도 라주미힌이 왔었는데요....하긴 나한테 빈정거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는 건 나도 압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아십니까.....말씀 마십시오! 그 친구는 어제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 와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어찌나 지껄여대는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저 두 손을 벌리고, 이거 큰 봉변을 당하는군, 하고 생각했을 정도죠. 대체 그 친구는 당신이 보냈습니까? 자, 좀 앉으세요, 어서!”
“그는 내가 보낸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당신을 방문했다는 것도, 그리고 그 방문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입니까?”
“다름 아니라 로지온 노마느이치, 나는 그밖에도 당신의 행동에 대해 굉장한 것을 알고 있어요. 속속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해가 저물어서 밤이 될 무렵 당신이 셋방을 구하러 가서 초인종을 울리고, 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해서 인부와 문지기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사실까지 정확히 알고 있거든요. 그야 당시 당신의 정신 상태를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짓을 하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건 진담이에요! 머리가 돌아버리고 맙니다! 당신의 내부엔 여러 가지 모욕 때문에...우선은 운명에게서 받은 모욕, 다음엔 경찰 친구들에게서 받은 모욕 때문에 고결한 분노가 강렬히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한시바삐 모든 사람의 입을 열게 해서 대번에 완전히 결말을 지어버리려고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즉 그런 맹랑한 공상과 혐의가 싫어서 참을 수 없는 거겠죠. 어떻습니까, 그렇죠? 당신 마음을 잘 알아맞혔죠? 그러다가는 당신 자신뿐만 아니라 라주미힌까지 미치게 만듭니다. 그 친구는 정말 사람이 좋거든요. 그건 당신도 잘 아시겠죠? 당신이 그러시는 건 병 때문이지만 그 친구가 그러는건 우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이란 전염되기가 쉽거든요....아니, 지금이라도 당신의 기분이 가라앚ㅅ으면 내가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십시오. 얼굴빛이 아주 말이 아닙니다. 자, 좀 앉으세요.”
라스콜니코프는 의자에 앉았다. 전율은 차츰 가라앉았으나, 그 대신 온몸에 열이 올랐다. 깊은 놀라움에 사로잡힌 채 그는 주의력을 긴장시키고, 허둥지둥 열심히 간호해주는 포르피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포르피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은 이상야릇한 욕구를 느끼면서 실은 한마디도 그 말을 믿고 있지 않았다. 셋방을 구하러 갔었다는 포르피리의 뜻밖의 말에 그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대체 어찌 된 걸까? 그럼 내가 그 집에 갔던 일을 알고 있군그래?’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더구나 자기 쪽에서 그걸 내게 말하다니!’
“그렇습니다. 그와 똑같은 심리적 사건이 우리가 취급한 재판 사건 중에 있었어요. 즉 그런 병적인 사건 말입니다.” 포르피리는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역시 어떤 사나이가 자기 자신을 살인법이라고 단정해버렸는데 그 방법이 또한 교묘했습니다. 자기가 본 환각을 끌어내서 사실을 구체적으로 늘어놓고 그 현장의 상황까지 상세히 진술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을 모두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나이는 아주 우연히 무의식중에 어느 정도 살인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은 문제 삼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 사나이는 자기가 살인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안 뒤에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해서 머리가 이상해지고, 결국 망상에 사로잡혀 완전히 발광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자기가 살인범이라고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이 사건을 명료하게 해명해주었으므로 그 불행한 사나이는 무죄가 증명되어 요양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대법원 덕분이랄 수 있겠죠!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도 자꾸 그러시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밤중에 초인종을 울리러 가거나, 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거나 해서 자기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고 싶은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열병 정도는 쉽사리 일으키게 마련이니까요! 이런 심리라면 나 자신의 실지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 창문이나 종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그런 유혹은 굉장히 매력적이거든요. 밤중에 초인종을 울리는 것 역시 같은 성질의 것이죠....병입니다. 로지온 로마느이치, 병이고말고요! 당신은 자기의 병을 너무 경시하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경험 있는 의사한테 진찰을 받아보시는 것이? 당신의 그 뚱보 의사는 틀렸어요!....당신은 열에 들떠 있는 겁니다. 그런 건 모두 열에 들떠서 정신없이 한 짓입니다!”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주위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 것같이 느꼈다.
‘이자는 과연 지금도 거짓말을 하는 걸까?’ 하는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그는 그런 상념을 밀어냈다. 그는 그런 상념이 자기를 어떠한 광분에 몰아넣을지 모를 일이며, 그 광분의 결과 아주 발광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열에 들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제 정신으로 한 겁니다!” 포르피리의 연기를 간파하려고 온갖 이성의 힘을 다 경주시키면서 그는 외쳤다. “제정신이었어요! 제정신으로 한겁니다! 내 말이 들립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다 듣고 있어요! 당신은 어제도 열에 들떠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열에 들떠 있지 않다는 것을 특히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암, 알고말고요! 그러나 로지온 로마느이치, 제발 부탁이니 내 말좀 들어주십시오. 만약에 말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범죄자이거나 또는 그 끔찍한 사건에 다소나마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열에 들떠 무의식중에 한 일이 아니라 완전히 의식해서 한 일이라고 제 입으로 강조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그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집요하게 강조한다, 대체 그럴 수가 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가 보기엔 그와 정반대입니다. 만약에 당신에게 무슨 켕기는 일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반드시 ‘의식이 없었다’고 주장해야만 할 겁니다. 그렇잖습니까, 예? 그럲잖아요?”
이 질문에는 무언가 교활함이 느껴졌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한테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들이대는 포르피리를 피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미심쩍은 눈으로 말없이 상대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라주미힌 군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국 그 친구가 어제 나한테 얘기하러 온 것은 자기의 의사에 따른 것이냐, 아니면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냐 하는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의 입장으로선 라주미힌 자신의 의사로 온 것이라고 말하고,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감춰둬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감추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교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결코 그런 주장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당신은 거짓말만 하는군요.” 그는 병적인 미소로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 약한 음성으로 천천히 말햇다. “당신은 또다시, 내 술책을 빤히 알고 있고 내 대답을 죄다 미리 알고 있다는 걸 나한테 과시하고 싶은 거죠?” 그는 자기가 이미 말을 선택하는 데 마땅히 해야 할 주위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이렇게 말해버렸다. “당신은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그렇잖으면 다만 나를 우롱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햇다. 그러자 갑자기 끝없는 증오가 다시금 그의 눈에서 번쩍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거짓말만 하고 있어요!”하고 그는 외쳤다. “범인의 입장에서 감추지 않아도 무방한 것은 되도록이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가장 능란한 기만 방법임을 당신 자신도 잘 알고 있잖나 말이에요. 나는 당신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하고 포르피리는 키득거리며 웃어댔다. “당신한텐 손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신한텐 모노마니아(편집광) 비슷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내 말을 믿지 않는단 말씀이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당신은 이미 나를 믿고 있다고. 적어도 4분의 1아르신 정도는 믿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1아르신 전부를 믿도록 해 보이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충심으로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으니까요.”
라스콜니코프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바라고 있고말고요. 그래서 분명히 말해둡니다만....”하고 그는 자못 정답게 라스콜니코프의 팔꿈치 위를 가만히 잡고서 말을 계속했다. “분명히 말해둡니다만, 당신은 자신의 병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 당신한텐 가족이 와 계시니 그분들에 대해서도 좀 생각을 하셔야 할 게 아닙니까. 당신은 그분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해드려야 할 텐데, 도리어 그들을 놀라게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미를 가지십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은 역시 나를 감시하고 있고, 또 그렇다는 것을 나한테 보이려는 거죠?”
“무슨 말씀을! 그건 모두 당신한테서, 당신 자신의 입에서 들은 얘기가 아닙니까! 흥분한 나머지 당신 자신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 얘기한 것까지도 모르시는군요. 하긴 라주미힌한테서도, 드미트리 프로코피치한테서도 어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얘기를 상세히 들었습니다만, 아니, 그보다 당신은 내 말을 중간에 막고 말았어요. 그래서 다시 계속하겠습니다만, 당신은 그 시기심 때문에 날카로운 기지를 지녔으면서도 사물에 대한 건전한 판단력까지 잃고 만 겁니다. 예를 들면 또 같은 얘기가 됩니다만, 그 초인종 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귀중한 정보 자료를, 그만큼 중대한 사실을 -그야말로 굉장한 사실이거든요!- 나는 죄다 당신한테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예심판사인 내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아무런 의미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만약에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당신을 의심한다면 과연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우선 당신의 의심스런 생각을 흐리게 해놓고, 내가 이미 그 사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눈치도 보이지 말아야 할 겁니다. 당신의 주의력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는 느닷없이 정수리를 내리치고 -당신의 표현을 빌린다면 말이죠- 그다음 계속해서 ’도대체 당신은 밤 12시, 아니 11시 가까운 시각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 집에 가서 무엇을 했소? 무엇때문에 초인종을 울렸으며, 또 무엇 때문에 피에 대해 물었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경찰서에 가자느니, 경찰서 보좌관한테 가자느니 하면서 문지기를 골탕 먹였느냐 말이오?‘ 하고 묻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추궁하는 게 옳았을 겁니다. 만약에 내가 당신을 털끝만큼이라도 의심한다면 말입니다. 모두 격식대로 당신한테서 신문 조서를 받고 가택수사를 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을 체포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나가지 않은 이상 당신한테 아무 혐의도 품고 있지 않다는 건 명백하지 않으냐 말이오. 그런데도 당신은 건전한 판단력을 잃고 있기 때문에, 거듭 말합니다만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 겁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온몸을 떨었다. 그것은 포르피리까지도 똑똑히 눈치챌 정도였다.
“당신은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하고 그는 외쳤다. “어떤 목적에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신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아까 당신이 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오해할 리 없어요....당신은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포르피리는 분명히 화난 표정으로 이렇게 반문햇다. 여전히 유쾌한 듯한 조소 어린 표정을 간직한 채, 라스콜니코프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요? 그렇다면 아까 내가 당신한테 취한 행동은요? 내가 말이오, 예심판사인 내가! 나는 자진해서 당신한테 가능한 모든 변호 방법을 암시하고 털어놓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면 ’병이라든가, 열병의 발작, 극도의 모욕, 우울증, 경찰관들‘.....이런 심리적 묘사까지 내 입으로 열거하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헤, 헤, 헤! 하긴 그런 건, 말이나왔으니 말입니다만, 그런 심리적 변호법이나 변명이나 구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될 수 있어서 하나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병이나 열병의 발작이다. 잠꼬대다, 확각이다, 기억에 없다‘ 등등은 모두 실제로 그렇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병을 앓거나 잠꼬대를 할 때 왜 하필이면 언제나 그런 환각만 보이고 다른 것은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다른 것도 환각 속에 나타날 수는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헤, 헤, 헤!”
라스콜니코프는 경멸하는 눈으로 오만하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말해서”하고 그는 포르피리를 조금 밀치듯이 일어나서 어디까지나 강경한 오조로 크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게 완전히 혐의가 없다고 인정하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알고 싶습니다. 어서 말해주시오, 포르피리 페트로비치. 분명히 딱 잘라 말해주시오, 자, 어서!”
“당신은 정말 까다롭군요! 당신에겐 정말 손들겠습니다.” 포르피리는 자못 유쾌한 듯이 태연자약한 능글맞은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런데 당신은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여러 가지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겁니까, 아직 아무도 당신에게 폐 끼치는 일은 하지도 않고 있는데 말이오! 그렇다면 어린애와 다를 게 뭡니까, 손에 불을 쥐여달라, 빨리 쥐여 달라고 보채는 것과 뭐가 다르냐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걱정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떼를 쓰십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예? 헤, 헤, 헤!”
“되풀이하지만” 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분연히 외쳤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뭣을요? 분명치 않다는 것 때문인가요?” 포르피리는 말을 가로챘다.
“약 올리지 마십시오! 나는 싫습니다! ....나는 싫단 말이오!.....더는 참을 수 없소!.....알겠소? 알겠느냐 말이오?” 또다시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이렇게 호통을 쳤다.
“아하, 조용히 하세요, 조용히! 남이 듣겠어요! 진심으로 충고합니다만,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농담이 아니에요!” 포르피리는 속삭이듯 말했으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노파같은 선량함도, 놀라는 듯한 표정도 그 얼굴에 떠오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눈썹을 찌푸리고서 모든 비밀과 모호한 태도를 일시에 내동댕이쳐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맞대놓고 엄격하게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한 대 얻어맞아 어리벙벙해진 라스콜니코프는 극도의 광분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분노의 발작이 최절정이었는데도 다시금 조용히 말하는 상대방의 명령에 복종하고 말았다.
“더는 나 자신을 괴롭힐 수 없어요!” 그는 갑자기 조금 전과 같은 어조로 속삭였으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고통이나 증오와 함께 순간적으로 의식했다. 그리고 그 의식 때문에 더욱 격심한 광분에 빠져들었다.
“나를 체포하시오, 가택수색을 하시오. 그러나 모든 행동을 정식으로 해주시오. 공연히 사람을 우롱하지 말란 말이오! 그런 무례한 짓은.....”
“뭐, 그런 형식 따위를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포르피리는 여전히 교활하게 웃고 만족스러운 듯이 라스콜니코프의 격분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말을 가로챘다. “나는 오늘 당신을 가정적으로 초대한 것이니까, 순전히 우정에서 부른 겁니다.”
“당신의 우정 따윈 바라지도 않소. 그런 돼 먹지 않은 소린 하지도 마시오! 아시겠소? 자, 나는 이러헥 모자를 들고 나갑니다. 어쩌겠소,체포할 생각이면 뭐라고 해야 할 게 아니오?”
그는 모자를 들고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보다도 뜻밖의 선물이 하나 있는데 보고 싶지 않소?” 포르피리는 또다시 라스콜니코프의 팔꿈치 위를 붙잡아 문가에 멈춰 세우며 히히히 웃었다. 분명히 그는 더욱더 유쾌하고 장난기 서린 기분에 잠기는 듯싶었다. 그 대문에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말았다.
“뜻밖의 선물이란 뭐요? 대체 뭐냐 말이오?”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겁먹은 듯이 포르피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뜻밖의 선물은 저기 문 저쪽 내 방에 있습니다. 헤, 헤, 헤! (하고 그는 자기 관사로 통하는 칸막이에 붙은 닫힌 문을 가리켰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두었지요.”
“대체 뭡니까? 어디 있어요? 뭐예요?” 라스콜니코프는 다가가서 열려고 햇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대체 뭡니까? 어디 있어요? 뭐예요?” 라스콜니코프는 다가가서 열려고 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잠가두었다니까요. 자, 여기 열쇠가 있지요!”
포르피리는 정말로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라스콜니코프에게 보였다.
“네 녀석은 거짓말만 하고 있어!” 라스콜니코프는 더 참지 못하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거짓말 마, 빌어먹을 어릿광대 같으니!” 그는 이렇게 고함을 치며 포르피에게 덤벼들었다. 포르피리는 출입문 쪽으로 뒷걸음치기는 했으나 위축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포르피리에게 대들었다.
“너는 거짓말만 하면서 내가 실토하도록 놀리고 있는 거야.........”
“이젠 더 실토할 것도 없을 거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요. 그렇게 자꾸 고함을 치면 사람들을 부르겠소!”
“거짓말 마,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사람을 부르겠으면 불러봐! 너는 내가 병에 걸린 걸 알고 미칠 때까지 내 신경을 자극해서 실토케 하려는 거겠지? 그게 네 목적이었어! 그러나 안 돼, 증거를 제시해! 나는 다 알고 있어! 네 놈에겐 증거가 없단 말이야, 다만 자묘토프 식의 황당무계한 추측이 있을 뿐이야!.....너는 내 성격을 아니까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해놓고는 느닷없이 사제나 입회인을 데려와서 내 혼을 빼려는 거야....너는 그자들을 기다리고 있지, 응? 무엇을 기다리고 있어? 어디 있느냐 말이야? 어서 내놔봐!”
“이봐요, 여기 무슨 입회인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정말 엉뚱한 것까지 다 생각해내시는군요! 그래서는 당신 말대로 정식으로 하긴 다 틀렸소! 당신은 이런 일에 대해선 너무 몰라요.....형식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젠 스스로 알게 될 거요.......” 문 쪽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포르피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실제로 이 순간 다음 방의 바로 문 옆에서 무슨 소음이 들렸다.
“아, 오는군!” 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네가 저놈들을 부르러 보냈지?.....너도 저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너는 계산에 넣고 있었어. 자, 모두 이리 오라고 해. 입회인이든, 증거든, 누구든지 맘대로...어서 내놔보란 말이야! 나도 각오가 되어 있으니, 각오가!”
그러나 이 순간 보통 때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실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라스콜니코프는 물론 포르피리까지도 그렇게 되리라고는 도저히 예기할 수 없었을 만큼 돌발적인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