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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를 여는 나의 집 § 원문보기 글쓴이: pinetree
사망 1510명, 시위 횟수 1717회, 참여인원 200만명,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망과 투지로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100년전(2019년 기준) 3월 1일 그날, 사람들은 거리에 나와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농민: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농사짓는 땅을 죄다 빼앗아가고 있소. 헌병과 순사들의 무자비한 폭정을 견딜 수가 없소!
유생: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종처럼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우리 모두 장터로 나가 만세를 부릅시다!
기생: 나라를 구하는데 귀천이 따로 있겠습니까 저희 기생도 동참 하겠습니다.
학생: 전 세계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합니다. 목청껏 외칩니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3.1운동 100주년 기획 두번째 시간입니다. 자, 여기 스튜디오에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지니까 전율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류근/시인: 우리도 같이 외쳤잖아요. 마찬가지겠지만 3.1운동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인파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그 모습 말입니다.
이윤석/방송인: 사실 대한민국 사람이 3.1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고 3.1운동 말만 들어도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솟구쳐오는 뭉쿨한 그걸 아마 모두가 느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원정: 정말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던 가장 잘 아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모두가 3.1운동을 다 알고 있을까요?
류근: 당연하죠.
이윤석: 네, 네, 3.1운동은~
최원정: 저희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3.1운동 O X 퀴즈! 첫번째 문제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들고 있었다 O, 안들고 있었다 X,
이윤석: 첫번재 문제니까 쉽게 낸 거예요. 잠깐 내려놨을 수 있지만 전제적으로 태극기를 들고 있었죠.
최원정: 정답은, 교수님?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정말 그랬을까요? 자, 사진을 보시면 이 사진은 1919년 3월 1일 덕수궁 앞에서의 시위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류근: (사진을 보며) 정말 태극기가 없네요?
이윤석: 진짜 없는 거에요? (어리둥절)
최원정: 찾아봐야데요. 믿겨지지 않아요.
이익주: 그래서 정답은 X,
류근: 둘 다 틀린 거 아냐?
이윤석: 누가 태극기를 지운거 아냐?
이익주: 저날 1919년 3월 1일날 저 날은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요. 여기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태극기를 사용할 계획은 세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3월 5일에 시위가 또 한번 있는데 이때 시위를 준비할 때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집단적으로 태극기를 준비를 해요. 그런데 학생지도부에서 오히려 그 태극기를 사용하지 말아라 이런 요구를 합니다. 왜냐하면 태극기를 가지고 나가면 일본경찰 눈에 금방 띄잖아요. 오히려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해서 태극기를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박찬승/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알기를 3월 1일날 이후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거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실제로 조선독립만세를 더 많이 외쳤어요.
류근: 우리는 그런 뭐지?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잖아요?
최원정: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류근: 역사 왜곡입니까?
박찬승: 당시만 해도 아직도 대한, 한국 이런 말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그래서 조선독립만세~ 이렇게 외쳤죠.
최원정: 아까 연기자분은 조선독립만세 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같이 아~ 뭔가 잘못 알고 있나, 저도 만세를 외쳤는데~방금 이게 고증이 된 거였군요.
박찬승: 독립만세라고 하는 것은 그 전에는 없던 것입니다. 대한제국시기에 대한제국에서 행사를 할 때 황제 폐하만세~ 만세란 걸 그런때 많이 쓰기는 했지만 독립만세 라고 하는 구호는 없었어요. 그런데 3.1운동 때 처음으로 독립만세란 말이 나오게 된 거죠.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게 되면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비폭력적인 평화적인 시위를 이끌기 위해서 만세를 서서도 부르고 걸어갈때도 부르고 이렇게 하라는 거죠. 저 사진에 보시면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팔을 들어올리는 장면들이 나오죠.
최원정: 그러니까 이 의미들이 나는 무기를 들지 않았소 하는 그런 의미군요.
박찬승: 그렇죠. 평화적인 시위를 보여주는 거죠.
최원정: 이번에 3.1절 행사때도 다 그거했는데~
심용환: 완전히 또 틀린건 아닌게 3.1일 당일날 서울에선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은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같은날 평양이나 선천 같은 다른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에서는 태극기가 등장을 하는거죠. 제일 처음에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게 주된 역할이었는데 사실은 글이 길고 배포하는 과정도 쉽지가 않잖아요. 그런데 태극기는 그 자체로 상징성을 딱 띄니까 3.1운동이 퍼져나갈수록 운동의 어떤 상징과 중심으로 태극기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죠.
최원정: 진짜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못 알고 있는 상식들이 많은 것 같애요. 3.1절 노래 자체가 기미면 3월1l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그러면 이걸 다 고쳐야 되는 거 아닌가요?
박찬승: 정오가 아니고 2시죠.
최원정: O X 퀴즈, 만만하게 보셨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두번째 문제 갈게요.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는 33명이다. O X?
심용환: 긴장이 되시죠?
이윤석: 민족대표 33인은 수학공식처럼 나오는 것이거든요~ 어저게 당한게 있어가지고 지금 함부로 얘기를 못하겠네요.
류근: 우리가 그림도 있어요. 그걸 상상하겠지만 그 그림을 보면 33명이거든~
이윤석: 맞아요, 맞아, 세어봤어요, 나도.
박찬승: 정답은 X 입니다. 33명이 다 오신게 아니고 그날은 29명이 참석하신 거지요. 바쁘신 분들도 있어서 연락을 미쳐 받지 못해서 연락을 늦게 받아 가지고 못오신 분도 있고 그래서 결국 4분은 오후 4시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류근: 그래서 지난 주에 이어서 3.1운동 100주년 기획을 준비한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우리가 몰랐던 3.1운동의 많은 이야기 함께 나눠봅시다. 1919년 3월 1일 대화관에 일본 순사들이 들이 닥친다. 29명의 무리들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한 목소리로 외친다. 조선 독립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만세~ 그리고 순사들에게 순순히 연행되어 가는데 이들은 3.1운동 민족대표들이었다.
이윤석: 제가 들어보니까 민족대표들이 순순히 연행이 됐어요 마치 순사들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익주: 이날 민족 대표들이 오후 2시에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확인을 해요. 확인을 하고 바로 이 독립선언서를 오전에 종로경찰서로 보냅니다. 그리고 식사를 해요. 종로결찰서에서는 이걸 받아 본 다음에 급히 경찰을 보냈겠죠. 경찰들이 태화관에 온 것이 오후 3시, 경찰이 온 걸 보고 한용운 선생이 마지막으로 연설을 하고 거기 모여있는 민족대표들이 만세삼창을 한 다음에 모두 경무총감부로 연행이 됩니다.
류근: 경찰서에 미리 독립선언서를 보냈다는 걸 보니까 그냥 애초에 잡혀 갈 것을 각오하고 선언했다는 거 잖아요. 그야말로 최후의 오찬 같은 거네요.
최원정: 종로경찰서에 독립선언서 보냈다는 건 자수한 건데~
박찬승: 자수라기 보다는 통고라고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여기 있다~~
이익주: 달리 보면 일본경찰을 상대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죠.
이윤석: 와라!
류근: 정말 해석이 진짜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하니까 그럴 수 있는 거네요.
최원정: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점심식사를 민족 대표들이 했잖아요. 그걸 두고 술판을 벌였느니, 잔치를 했느니,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요?
심용환: 집고 넘어갈 필요는 있는 것 같애요. 원래는 독립선언 장소가 탑골공원이었는데 갑자기 태화관으로 바뀌었다 태화관에서 한쪽은 먹고있는데, 그때 학생대표들이 따로 모여서 독립선언을 하니 한쪽은 놀고 먹고있는 모습, 다른 한쪽에선 학생들이 활동했다는 식이 되니까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된 거죠. 그걸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거예요.
박찬승: 원래 계획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연행 되어간다는 것이었거든요. 28일 밤에 민족대표들이 사전 모임을 손병희 선생 집에서 가졌는데 그때 기독교 쪽에서 내일 학생들이 탑골공원에 수백명이 모일 겁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 얘길 듣고 일부 사람들이 만약에 우리가 붙잡혀 갈 때 학생들이 거기에서 말린다거나 하면 경찰과 충돌이 있지 않겠는가 우려를 한 거죠. 그래서 28일날 밤에 급히 태화관이란 음식점으로 옮겨서 독립선언서식을 갖기로 한 거죠. 이건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랬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윤석: 3.1운동의 3대 원칙이 비폭력, 대중화, 일원화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수가 많아지다 보면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을 거예요. 민족대표들이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뭔가 움직임을 보였을 거고 그러면 경찰은 무력을 썼을 거고 그러면 충돌은 커지고~
심용환: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 수가 있겠구나
`
이윤석: 예방하기 위한~
최원정: 술잔치를 벌였다는 얘기는 정말 모역적인 얘기네요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는데~
박찬승: 간단히 한잔씩 축배를 드셨고 목사님은 또 술을 못하시지 않습니까. 상징적으로 하신 거죠.
이익주: 민족대표 33인은 다 아시는 것처럼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들이예요. 모두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분들 신분이 집안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말하자면 평민출신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양반출신이 아니라는 뜻이죠. 민족대표 라고 하는 말도 정말 말이 좋지만 그 선언서에 권위를 실어주기 위한 것이지 어떤 명예를 바래서 대표다 이렇게 자칭한 것도 아니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이거보다 8년전에 105인 사건이 있었죠. 105인 사건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연행되고 고문 받고 틀림없이 그런 상황을 예상을 했을 거예요. 실제로 민족대표 중에 한 사람이었던 최린의 자서전에 독립선언서에 연행되면 아마 모진 고문을 받게 될텐데 그것을 우리가 견딜 수 있을까 이걸 걱정하는 대목이 나와요 이분들의 나이가 대개는 50대, 또 연로하신 분은 60이 넘은 분도 계셨기 때문에 고문에 대한 불안감 이런게 틀림없이 있었겠죠.
류근: 진짜 감동이네요. 민족대표들이 고문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형을 각오하고 서명을 한거에요.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민중은 투쟁을 선택했는데 민족대표들은 투항을 선택했다 이런 식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삐딱하게 본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민족대표 33인에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분들은 3.1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셨어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어요.
이윤석: 근데 인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기는게~ 민족대표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지 않았다면 누가 한 건지 누군가는 먼저 나서서 선언서를 읽고 만세삼창을 해야 만세가 쭉~쭉~ 이어질텐데~ 그러면 누가 그걸 했을까요?
박찬승: 당시에 탑골공원 선언식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나중에 회고록이라든가 이런 걸 쓴 걸 보면은 30대 초중반의 중절모를 쓰고 회색 두루마리를 입고 백색 가방을 맨 신사가 나타나서 독립선언문 한장 꺼내 가지고 읽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거기 모였던 학생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죠.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구요. 또 그 뒤에 경찰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든지 체포를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 이후에 한 참 동안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린거죠.
류근: 진짜 그야말로 의문의 사나이네요. 어디서 갑자기 뿅하고 나타났다가 또 바람처럼 사라졌어요.
이익주: 해방된 다음에 11년이나 지나서 1956년에 어떤 사람이 내가 그 일을 했다 나타나요. 정재용이란 분인데 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지 전해지지가 않았잖아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상황설명이 굉장히 구체적이고 나이도 보면은 그 당시 정재용의 나이가 33세예요 그래서 현장에서 낭독한 사람을 봤다는 사람들의 증언과 그게 일치한 거죠. 그래서 지금은 거의 정재용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렇게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류근: 그러면 교수님, 정재용이란 분이 그 당시의 신분 같은 거를 알 수 있나요?
이익주: 그럼요. 그것도 본인이 밝힙니다. 그 당시 황해도 해주에서 학교교감 선생님을 하고 있었는데 의창학교 교감 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류근: 교육자였군요.
최원정: 이런 과정을 통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짚어봤습니다만 3.1운동이 일어난 계기, 살펴볼까요?
심용환: 그러니까 파리강화회의를 잊으면 안될 것 같애요. 어찌됐던 1차 세계대전을 처리하기 위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이목을 끌려면 국내에서 뭔가 해주어야 된다. 저쪽 저멀리 지구 반대편의 회의장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 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인상적인게 실제로 3월 1일날 시위대가 프랑스 영사관엘 갑니다. 프랑스 영사관엘 가서 선언문을 전달하고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면서 제발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려 달라, 프랑스의 수도이잖아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와 개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확정할 수 있는 거죠.
류근: 진짜로 대단히 효과적이고 대대적인 후방지원을 한 게 맞는 거네요.
이익주: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처음에 3.1운동을 계획할 때 처음에 독립선언이냐 독립청원이냐 하는 논의가 있었어요. 독립선언이라고 하면 우리가 독립국 이다 라는 것을 선언하는 거고 독립청원은 우리를 독립시켜 주세요라고 청원하는 거잖아요. 이게 상당히 다른게 이것을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윤석: 요즘 많이 하는 국민청원과 비슷한 것 아닌가? 청원들 많이 하죠.
이익주: 네, 그해 (1919년) 1월 중순경에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송계백이라고 하는 사람이 귀국을 해서 2월 8일날 동경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할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려요. 그래서 논의가 급격히 선언쪽으로 바뀌게 되는거죠(청원->선언). 여기에 자극을 받은 천도교 교단에서 독립선언을 중심으로 하고 독립청원을 부차적인 것으로 한다 라고 결정을 하게 됩니다.
최원정: 독립선언서가 아니라 독립청원서가 될뻔 했었군요. 새로운 지식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네요.
류근: 일견통열합니다.
이윤석: 잘 했어요. 순서상, 이미 선언했는데 뭔 청원해, 부탁을 해요.
박찬승: 동경 2.8선언에서 선언으로 딱 못을 박아버렸기 때문에 그 이후에 독립청원서 라든가 이런 쪽으로 후퇴할 수는 없죠.(2.8독립선언-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독립을 요구),
심용환: 역사교육을 시킬 때도 독립청원을 시도했어 독립선언을 했어 라고 하는 건 사실 후대가 공부할때 완전 느낌이 다르잖아요.
박찬승: 그런데 독립선언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구를 대표로 세울거냐 였죠. 대한제국 시기에 이름이 있었던분들, 이를 테면 한규설이라고 을사조약을 반대한 분이 있었고 남작작위를 거부한 윤현구란 분도 있었고 그런분들을 섭외를 해서 대표로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또 박용우란 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분들이 모두 다 이걸 거절을 했어요.
류근: 왜 그랬을까요, 어떤 식으로 거절을 했을까요?
박찬승: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독립 가능성이 없다. 또 하나는 선언이든 청원이든 하게 되면 감옥에 갈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하는 것이었죠. 선언을 한다면 청원보다 특히 선언이 더 위험하다고 본 거죠. 그래서 거절하게 됩니다.
최원정: 33명 선정하는데 쉬운 작업이 아니었네요.
박찬승: 그렇죠, 그래서 이제 그런 형식을 포기하고 기독교 하고 천도교가 다수의 대표로, 수십명을 대표로 뽑아서 대표로 내세우자 라고 된 겁니다. 33명을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각 선정하게 된 겁니다.
심용환: 원래는 숫자도 적게 생각했던 거예요?
박찬승: 처음에는 네 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33명으로 늘어나게 된 거죠.
심용환: 명사가 좀 없으니까 오히려 다수로 하자.
류근: 그러면 저는 결과론적으로는 민족대표가 평민으로 구성된게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기왕에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도 평민들이 주도한 거잖아요. 그런 시대정신의 흐름대로 이 때부터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심용환: 어찌됐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학생들이 중심이 돼서 3.1운동이 진행이 되는데 이때부터 되게 인상적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3월 5일 당시는 남대문역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서울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학생 두명이 인력거를 준비해서 거기에다 조선독립 이라고 대형깃발을 만든거죠. 학생과 시민들 5천여명이 모여서 막 시위를 하는데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을 보고 서울역을 통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잖아요. 돌아가는데 바로 돌아가는 날이 3월 3,4,5일 정도가 됐을 것 아네요 그때 대형 깃발에 학생과 시민 수천명이 나와서 시위를 하니까 그걸 다보고 기차를 타고 집에 가서 야! 지금 서울에 난리가 났어 하면서 거기서 자기들도 깃발을 만들고 우리도 뭘 해야지 하고 거기서 또 퍼져나가니까 들풀처럼 너무나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난 거죠. 3월5일,
최원정: 시기를 잘 맞쳤네요. 고종 장례식에 민족 대이동시기에~
이익주: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해요. 그러니까 학교가 사실상 휴교상태가 되고 학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학생들이 고향에 내려가서 3.1운동을 전파하고 그리고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또 주동하고 이런 일을 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유관순이예요. 고향으로 내려가서 고향이 천안에 병천이잖아요, 천안. 제가 태어난 곳 이잖아요. 거기서 만세를 하는 4.1일날 아우내 장터시위 이게 아주 전국적으로 유명한 만세시위죠.
최원정: 이렇게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요. 현장에 나가 있는 리포터 연결해서 진행상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윤석 리포터!
이윤석/리포터役: 네, 전국은 지금 이윤석 리포터입니다. 지금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는 물론 저 멀리 평안도 함경도 까지 그야말로 전국이 만세물결에 휩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요. 한번 만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장연결-충청도 : 해유? 저희들은 횃불시위를 해유 그러니까 횃불을 들고 밤에 산에 올라가유 그리고 만세를 불러유 그리고 내려와유 은밀하고 위대해유~ 다했슈~
다음은 경상도 입니다. 경상도는 만세만 갔고만 택도 없다 아닙니꺼 촌에 보면 똘맹이 몸둥이 농기구 천지빛장이 아닙니꺼 단단이 챙겨가 일본인 상점에 가 오마마 확마 쎄리마 억시게 마 뽀사뿌여
다음은 평안도입니다. 뽀조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면사무소를 습격해서 나무네 우리를 탄압했던 일본놈들을 그저 열열히 죽치고 있습니다. 그저 오드메 간기니~ 자피기만 해보라우 가만 안두갔으~
네, 전국에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만세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 전해 드리면서 앞으로 독립을 향한 만세 물결은 계속 됩니다. 쭈욱~
일동: 아주 잘 했어요
최원정: 잘 한 거예요?
이익주: 잘 했슈~
최원정: 충청도가 가장 특이하기는 횃불을 들었어요? 왜 하필 횃불이죠?
이익주: 정말 은밀하고 위대하게~ 아니 훤한 대낮에 시위를 하면은 잡혀갈 가능성이 크잖아요. 그래서 어두운 밤에 산에서 시위를 하면 안잡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횃불까지 들게되면 정말 캄캄한 밤에 산등성이에서 횃불이 이글이글하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그 위압감이 대단하잖아요.
류근: 횃불을 들고 저쪽 산에 있는 동지들한테 뭔가 신호를 했을 거 아네요 이 봐요 동지들 나 여기 있슈~ 그쪽에서도 받아바유~거기 있슈~
이윤석: 여기 있슈~여기 있잖아뉴~ 뭐유~
류근: 생각해 보면 시위라는게 결국 우리끼리의 결속과 연대를 다지는 일이잖아요 이 장면도 참 감동이예요.
이윤석: 아까 제가 3.1운동이 비폭력이 원칙이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보니까 농기구도 있고 몽둥이도 있고 그리고 무기가 될만한 걸 사용을 한 거 같네요
심용환: 장터 이런 데서는 대부분 비폭력성을 지향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운동이 겉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게 되면서 성격과 양상이 바뀌어 나가요. 일제 군경의 강경진압이 진행이 되니까 그에 대한 분노와 반작용이 같이 진행되면서~ 공세적이죠. 일부지역에서는 초기부터 헌병분견소 라든지,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거 그리고 흔적을 소각하거나 기물을 파괴하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류근: 오죽했었으면, 그때가 무단통치 10년기간이었으니까 얼마나 울분이~
박찬승: 그러니까 제일 목표가 된 거는 헌병분견소가 되겠고 그전에 붙잡혀가서 태형을 맞는다든가 이런 일이 많았고 또 3.1운동과정에서 붙잡혀간 사람들이 헌병분견소에 있으니까 총독부의 하부기관인 면사무소나 분견소를 습격한다 하는 것은 결국 조선후기에 나타났던 민란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전체로 보면 총독부의 폭정에 대항하는 항거다 라고 볼 수 있고 결국 그것이 일본을 볼아내야 한다는 것에 이어지기 때문에 또 한편에서는 독립운동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죠.
이익주: 민란의 전통이라는게 굉장히 중요한데요. 정말 일본사람들은 역사 속에 민란이 없잖아요. 이런거 이해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거예요. 예상도 못했을 거구요. 그리고 또 한가지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현상이 여성들의 참여입니다. 그 한사례가 목포지역에서 3.1운동을 한 기사가 있는데 여기보면 4월 8일 밤에 야소교, 그러니까 기독교죠. 야소교에서 경영하는 여학교 이게 정명 여학교인데 여기 학생과 졸업생 40명이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관원이 출동하여 제지하고 주모자를 잡았다더라 이런 기사가 나와요. 또 안성에서는 3월 31일날 기생들이 만세시위를 부르면서 시위에 참여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 1천명과 함께 연합해서 만세를 부르는데 이건 여학생들 뿐만 아니라 정말 계층을 막론하고 여성들까지도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하는 굉장히 중요한 사례죠.
박찬승: 3.1운동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건 3.1운동이 계기가 됐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했죠.
심용환: 그리고 충격적이게도 복식사에 중요한 변화가 있습니다. 원래 한복을 입을 때 끈을 가로로 묶어야 되는데 이게 너무 불편하잖아요. 흘러내릴 수도 있고 그래서 이때부터 어깨끈을 확실히 했데요.
최원정: 제가 지금 어깨끈 있는 옷을 입고 있잖아요. 이게 3.1운동 때부터 생겨났다구요~ 여기에 흘러내리지 말라구~
박찬승: 이화학당에서 서양선교사들이 여학생들에게 그런 옷을 입히긴 했어요. 이게 널리 퍼지진않았는데 3.1운동 이후에 퍼지게 되었죠.
류근: 만세패션, 투쟁패션,
최원정: 앞으로 한복 입을 때마다 생각날 것 같애요~
이윤석: 만세~만세~ 이러잖아요~ 옷이 어깨에 걸려 있어야 마음껏 쭉~쭉~ 팔을 올릴 거 아닙니까 일리가 있어요.
이익주: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 않은 3.1운동 사례가 있어요. 평안남도 맹산이라고 하는 곳에서 맹산시위가 일어나는데 3월 10일날 천도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100명이 만세운동을 벌릴려고 하는데~헌병들이 출동해서 주모자 4명을 분견소로 연행해갑니다. 그러니까 시위대가 이 연행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분견소 안에 까지 들어가서 헌병들과 격투가 벌어져요.
박찬승: 그때 마침 군인이 추가로 파견돼 와서 분견소 밖에서 안에다 총질을 시작합니다. 안에 사람들이 있는데~ 조준사격을 해서 그 안에 있던 사람 51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3명은 도망쳤지만 도망치다가 부상당한 상태에서 죽습니다. 민간인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는 것, 바로 맹산시로 기록하고 있죠. 우리가 북한 지역이기 때문에 잘 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죠.
이윤석: 54명이면 100명 중에서 반이상을 죽인건데~ 이건 시위진압이 아니라 학살이잖아요.
류근: 조준사격을 했다고 하니까~다 계획적인 범죄이죠.
최원정: 그렇게 일본의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진 곳이 맹산만이 아니었다죠.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일본군이 기독교 천도교인 30여명을 교회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집중 사격을 하는 동시에 불을 지르는데 탈출하는 사람까지 모두 사살한 일본의 끔찍한 만행, 3.1운동에 대한 보복이었다.
류근: 저게 제가 듣기로는 만세운동 진압할 때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테니까 교회로 모여라 그래놓고는 저렇게 학살한 거래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예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거죠.
이윤석: 그러니까 때려서 미안하다 모여라 하고 죽였다는 건 때려서 미안하다 죽였어야 했는데~
류근: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되어버린 거죠~ 정말로 치가 떨려요.
박찬승: 결국은 일본군이 출동을 해서 화수리에 전부 불을 놓고 사람들을 잡아서 매를 때리고 죽이고 했고 지금 화수리 구장(區長)은 붙잡혀서 수십군데 칼에 찔려서 결국은, 이런 비극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죠.
심용환: 어찌됐던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한번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으로 말하는 그날-심용환: 한 순간에 사라진 아름답고 풍요로운 마을이 있습니다. 1919년 4월 15일이었구요. 일본에 의해 파괴된 제암리의 모습, 사진이 남아 있구요.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망연자실하고 비통한 아낙과 여자아이가 사실 그날의 참혹함을 표정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윤석: 비록 사진이지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들여야 될지 모를 정도로~
류근: 교회 뿐만이 아니라 마을을 초토화시켰던 거로군요. 야만인이다.
최원정: 저 분들도 어쩌면 가족을 잃었을텐데~
심용환: 일제에 의해 묻힐번 했던 이 제암리 학살사건, 이것이 놀랍게도 신문기사를 통해서 해외에 알려지게 되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갇혔을 때 일본군들이 총을 쐈고 모두 죽은 후에 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들을 완벽히 몰살시켰다-------------------------스코필드, 제암리 학살 만행보
The story was that a number of Christians had been shut up in a church, then fired upon by the soldiers and when all were either wounded or dead the church had been st on fire, in this way ensuring their complete destruction.
이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해외에 알린 사람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류근: 스코필드는 혹시 석호필(石虎弼)이 아닙니까.
심용환: 맞아요. 맞아요. 실제로 이분의 활약이 없었으면 제암리 사건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려지지 못했을지 모르는 사건인데 스코필드는 일본 경찰을 따돌리고 학살증거를 사진으로 남깁니다. 3.1운동과 일제 강점기때 있었던 이런 고통스런 현실을 세계에 알리는데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 <상하이 가제트>, 미국의 장로교 기관지 였던 <프레스비테어리언 위트니스> 같은 여러 미국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고 심지어 일본에 있었던 극동 선교사들, 아시아 선교사들 400여명이 모인데 가서도 이 얘길 다 하고 심지어 일본의 하라다카시를 만난 자리에 가서도 제발 통치를 똑바로 해라 라는 식의 직언을 날리기도 하는데 정말 온 몸으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서 이 사건을 알렸던 인물입니다.
최원정: 우리가 왜 영화 <택시 운전사>에 나왔던 독일인 피터 기자가 생각나지 않으세요. 그분이 없었다면 5.18의 참상이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을텐데~제암리 사건 역시 스코필드, 석호필 저분 때문에, 저분의 존재가 너무 감사합니다. 저 분이 34번째 민족대표 라고도 불리는 분이세요.
심용환: 스코필드는 일제 눈 밖에 날 수 밖에 없었고 결국은 강제 출국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쫓겨난 후에도 끊임없이 한국으로 편지를 보냈고 독립을 계속 격려하는 활동들을 하고요. 나중에 그가 남긴 3.1운동에 대한 회고가 있는데 그걸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자유를 요구하며 일어선 군중의 그때의 모습은 참으로 잊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지금까지 사진이 말하는 그날이었습니다.
박찬승: 스코필드 박사는 원래 영국출생인데요. 1916년에 조선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와 달라 초청을 해서 선교사겸 교수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이죠.
이익주: 스코필드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선교사잖아요. 스코필드가 어느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같이 앉아 있는 아주 부유해 보이는 노인을 만납니다. 이 노인이 스코필드가 선교사 라고 생각을 해서 이걸 물어봤다고 해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냐? 선교사에게는 늘 물어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스코필드가 한 눈에 그 노인이 누군지를 알아봤던 거예요.
이윤석: 그게 누군데요?
이익주: 스코필드가 한 말을 들으면 그가 누군지 금방 아시게 될거에요. 스코필드의 대답이, “교회에 가서 구원받을 수는 있지만 당신은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구원 받을 수 없다” 이렇게 아주 일침을 날입니다.
최원정: 2천만 동포의 적?
심용환: 그 분(?) 이군요?
류근: 그 자?
이익주: 순진하고 쉬운 문제예요?
류근: 다 같이 하나 둘 셋, (일제히) 이완용!
이익주: 맞습니다. 이완용이었어요.
최원정: 저걸 어떻게 하나~ 아, 부끄러워~!
류근: 거기서 질문이 구원에 대해서 한다는 게, 진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후안무치 계보의 진정한 원조급입니다.
심용환: 이완용이 나왔으니까 한번 애기해 보겠습니다. 친일행각이 3.1운동 도중에도 나타납니다.
류근: 그럴테지요.
1919년 4월 5일, 매일신보에 실린 이완용의 글입니다. -------무지몰각한 무리들이 망동하고 그후에 각 지방에서 역동하여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망동하면 죽거나 다칠 것이 눈 앞에 보이니 살아 있음에도 죽을 길을 택할 것인가. 동포여 내 말을 잘 들어 후일에 후회하지 말지어다 (매일신보 4월 5일 1차 경고문),
최원정: 아니, 만세운동을 지금 망동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망언 중에 망언이죠, 망동이라니~
박찬승: 이완용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4월5일, 9일, 5월 30일 3차례에 걸쳐서 경고문을 싣게 되거든요. 특히 경고문의 마지막 부분에 혹시 내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면 나한테 찾아와라 내가 토론해 주겠다 이렇게 썼지요.
이윤석: 확신범이예요. 의견교환하다가 보면은 아마도 주먹교환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류근: 그런데, 이완용뿐만 아니라 3.1운동에 반대하는 운동이 또 있었습니다.
최원정: 마이크 나오네요~
류근: 류근의 카더라 통신입니다. 3.1운동 이를 막기 위한 조선인 자제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민간 유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에 진정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하면서 스스로 자제단을 꾸렸다고 합니다.
심용환: 자제하라?!]
류근: 또한 전국 각지를 돌면서 만세운동을 진압하거나 참여자를 귀가시키는 일을 하였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자제단의 대표는 이 일로 일본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최근까지도 추앙받는 인물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런~악~ 지금까지 류근의 카더라 통신이었습니다.
이윤석: 괜찮습니까? 모욕을 하신거예요?
류근: 아무튼 말을 할 수는 없는데 역사저널 그날은 방송심의 규정을 준수합니다.
최원정: 조선인들이었단 말이죠? 착하게 살자 라고 다니는 조폭들도 아니고~ 도대체 자제단이 어떤 활동을 한거예요?
류근: 가출 청소년도 아니고~
이윤석: 기분 나쁘네요
이익주: 설득이 안되겠죠. 그러니까 신고를 해요. 신고를 해서 이런 방법을 통해서 3.1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겁니다.
최원정: 애썼다 애써~정말~
심용환: 더 화가 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는 충남 공주에 있는 비석인데요. 내용을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유공선정(惟公善政) 민불능망(民不能忘)” ‘공이 베푼 선정을 생각하면 백성들이 잊을 수 없다’-----공주 박중양 불망비-----------
류근: 얼마나 훌륭한 분이시기에~
심용환: 이 비의 주인공이 누구냐? 대구 군수 충남도지사를 지낸 박중양 이란 사람입니다. 박중양 놈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인데 친일파 공부하다 보면 대단한(?) 인간이거든요. 자제단의 단장 역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박찬승: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라고 불릴 만큼 철저한 친일을 한 사람입니다.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공로자명단이란 책이 있어요. 거기에 이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평을 했느냐 하면, 비상한 시기에 도지사급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박중양뿐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쓰고 있죠. 또 당시에 대구에 있을 때 1910년 이전인데요. 대구 읍성을 전부 파괴해 가지고 그걸 땅으로 만들어서 일본인들이 쓰게끔 한 사람이죠. 그래서 일본인들로써 특히 대구의 일본인들로서는 굉장히 큰 은인이라고 할 수 있죠.
류근: 이게 역사의 참 아이러니인데~ 일각에서는 박중양을 대구근대화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고 했어요. 저런 공덕비가 이 시대에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최원정: 아직도 비석은 안뽑아내고 있다는데 어이가 없어요.
이익주: 친일파의 흔적을 없애는게 능사가 아니고요. 기념하기 위해 남기는게 아니라 저 친일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해서 남겨두고 설명을 부쳐야죠. 이 사람의 어떤 일을 했는지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윤석: 그래도 또 다른 한편 생각을 해보면 이렇게 까지 만세운동을 막을려고 한 걸 보면은 일본에게는 큰 위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심용환: 통상 2백만명 이야기 하는데 2백만명이면 당시 인구의 10분의 1이예요. 당연히 엄청난 위협이었겠지요.
류근: 일본 입장에서는 독립을 염원하는 그런 마음이 가장 두려웠을 것 같애요. 이쪽을 진정시키면 저쪽에서 일어나고 저 쪽을 진정시키면 그 옆이 또 일어나고 말이죠~명분 없는 통치자들에겐 진짜 우리의 하나된 마음이 가장 두려웠겠죠.
최원정: 그렇죠, 그야말로 우리의 독립을 향한 염원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습니까.
이익주: 자제단이 만들어지고 해도 꺾이질 않습니다. 독립만세 시위가 계속 되니까 일본군이 기포성산(碁布星散) 이란 자칭 말을 해요 (기포성산-바둑판 포석과 하늘의 별처럼 헌병을 총총히 배치하는 탄압방식), 기포란 뭐냐하면 바둑돌을 바둑판에 쫙 깔아놓는 것 처럼 성산은 밤 하늘에 별을 흩어놓는 것처럼 많은 군인경찰을 깔아논다는 거죠.
박찬승: 그러니까 군인병력만 2만 또 헌병과 경찰 합쳐서 1만5천 그렇게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됐어요. 특히 4월 초순에 시위가 더 불이 붙었기 때문에 일본정부에서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되죠. 그것은 일본 본국에서 보병을 더 파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6개 중대+헌병 400명 무려 4천명 정도의 병력이 추가로 조선에 파견되어 들어오죠. 그런데 앞서 제암리 사건에서나 맹산 사건에서 본 것처럼 군인들은 헌병경찰하고 또 달라서 가혹하게 진압을 하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겁을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4천명의 병력을 증강 배치하겠다고 나왔기 때문에 당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죠.
류근: 그물망이네요.
최원정: 병력 증강하는 것도 세계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한국에서 큰 일이 일어나면 안되니까 내색을 하면 안되니까 조금씩 조금씩 파견했다는 얘길 들었어요. 아주 디테일 해요.
류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심용환: 결국은 3.1운동이 수그러드는 데요. 3월 초순에 시작이 됐잖아요. 적극적인 분위기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4월 18일에서 20일 정도 되거든요.
류근: 두달은 한거에요.
심용환: 그렇죠, 맹산이나 제암리 같은데서 가혹한 학살사건이 진행 되니까 이게 너무 힘든데다가 증파까지 지금도 가혹한데 더 가혹한 군대가 들어온다고 하니까 계속되기는 힘든거예요.
류근: 1894년 동학농민 운동 때도 군대로 쓸어버렸잖아요. 1907년 의병대 토벌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민간인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군대로 쓸어버릴려고 했다는 거네요. 이게 야만이죠. 이게 야만아닙니까?
최원정: 3.1운동 이제 우리가 2회에 걸쳐서 새롭게 조명을 해 봤는데 새로운 사실도 알았지만 진짜 이게 우리의 얼마나 큰 의미의 거사였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됐습니다.
류근: 위대한 민족입니다.
최원정: 인도의 독립운동가인 네루가 말했듯이 3.1운동은 조선민족의 숭고한 독립운동이었다. 올해가 꼭 100주년이어서가 아니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우리의 3.1운동 역사를 길이 길이 다루고 기억해야 되어야 하겠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46화, “3.1운동 2편”에서 정리).
①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계기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려서 조선의 대표가 파리에 갔는데 조선독립에 대한 이목을 끌려면 국내에서 뭔가 해주어야 된다. 실제로 3월 1일 시위대가 프랑스 영사관엘 가서 선언문을 전달,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② 1919년 3월 3일에 경기도 화성 화수리 주민 2천명이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고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에다 교인 30여명을 몰아넣고 집중사격을 하고 불을 지르고 모두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③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 해외에 알린 사람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라는 영국 기자, 학살증거를 사진으로 남김, 3.1운동과 일제 강점기 고통스런 현실 세계에 알리는데 정말 중요한 역할, 중국 <상하이 가제트>, 미국의 장로교 기관지 <프레스비테어리언 위트니스>, 미국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고 심지어 일본에 있었던 극동 선교사들, 아시아 선교사들 400여명 모임에서도 이 사건을 알렸던 인물,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에 조선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초청 교수겸 선교사로 한국에 옴,
④ 스코필드와 관련한 일화, 스코필드가 어느날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같이 앉아 있는 아주 부유해 보이는 노인, 스코필드 선교사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냐? 스코필드는 한 눈에 그 노인이 누군지를 알아보고 스코필드의 대답, “교회에 가서 구원받을 수는 있지만 당신은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구원 받을 수 없다” 라고 아주 일침을 날림, 그 노인은 바로 이완용,
⑤ 실제로 날로 거세지는 시위를 억압하기 위해서, 1919. 4. 6. 대구에서 친일파 67명이 모여서 자제단 결성, 목적은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설득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 설득이 안되니까 경찰에 신고해 3.1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⑥ 1919.3.1.운동결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탄생,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나라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여기서 만들어 놓은 것이고,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출발이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
⑦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인 이집트, 인도, 아일랜드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사실 조선의 3.1 운동 처럼 거족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에게 독립을 달라고 요구한 나라는 없다. 3.1운동이 식민지 약소국에게 대단히 큰 영향 미침, 중국 5.4운동에도 커다란 영향,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 있는 사건, 한국민족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