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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장항선 열차를 타고☆]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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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선 열차를 타고]
정완희 시집 / 시선시인선 113 / 시선사(2015.06.3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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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선 열차를 타고
정완희
기차는 칙폭거린다
대천항에서
함지박에 갈치와 넙치를 얹어
새벽열차로 자유시장에 푸른바다를 펼쳐냈던
생선장수 아주머니는 귀향중이다
날마다 대천항에서 천안의 자유시장까지
몸불편한 남편과 아들의 학비 걱정을 안고
하루분의 삶을 붙들고 돌아가는
붉은 노을이 내리는 들판
삽교 지나면 어둠이다
오늘은 대천역에서 바퀴달린 헹거를 끌고
내일이면 함지박에 갈치를 담고
바람같은 세상 한바퀴 돌아
자유시장으로 돌아올 아침
잠시 멈춰선 광천역에서
토굴 새우젓 젓갈이라고
간판을 붙인 가게옆으로
홀로계신 어머니의 유리창 불빛이 보인다
어머니는 지금 무얼하고 계실까
날마다 스쳐 지나가는 친정집
기차는 칙폭거린다
그리움의 산모롱이를 돌아
커브길을 달리며 대천역으로 가는
기차는 칙폭거린다
폐 자전거를 보다
정완희
언제쯤 버려졌는지도 모를 오래된 자전거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봉인된 채
아파트단지 주차장 옆에 쓰러져 있다.
바퀴에 족쇄가 채워진 채 잊혀지는 것들
아파트단지마다 수없이 녹슬고 있는 이들은
결코 낡아서 죽은 게 아니다.
단지 싫증나서 버림받은 것
처음 새 자전거를 만났을 때 마주했던 설레임과
가슴 두근거리던 열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부러진 페달과 끊어진 체인
녹과 먼지에 둘러싸여 생을 포기한 프레임
바람과 함께 질주했던 욕망이 빠져나간 타이어
철창 속에서 안락사 될 날만 기다리는 유기견들이나
장례식장 한켠에 붙어있는 요양병원의
사람 그리운 노인들의 눈빛들처럼
몇 년마다 한 번씩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버려진 자전거의 봉인된 쇠사슬을 끊고
트럭에 실어 하늘나라로 올려 보낸다
응급실에서
정완희
성모병원 응급실
일주일에 한 번씩 냉동고에 보관된 영혼들을
하늘나라로 보내기 위한 절차가 진행 되었다
경광등 불빛 번득이는 속에서 비상벨 소리와
의사의 호령에 울먹이며 복창하는 앳된 간호사들이
시신들을 탑차에 실어 화장터로 보낸다
연고가 없거나 찾는 이 없는 영혼들은
그저 냉동 탑차에 실려 화장장에서 한줌재로 남아
누군가에 의해 공동묘지에 뿌려질 것이다
온갖 병으로 사고로
피투성이 되어 실려 오는 사람들과
세상이 싫어 입에 거품을 물고 실려 온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순간으로 바뀌어 스쳐가는 응급실에서
생과 사의 경계선과 갈림길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살다
어디로 떠나가는 것인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떠나가는 것일까
갈치회를 먹으며
정완희
추석 앞두고
멸치 떼를 따라서
갈치 떼가 몰려든
거제 앞바다 고깃배들은
그물마다 갈치 떼가 가득 하였다
부둣가에 양동이를 들고 모여든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 가득한 표정들이다
은빛 번득이며 바닥에 펼쳐진 갈치들을
싱싱한 회로 먹을 수 있는 건
이곳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작은 침이 섬모처럼 달린 푸른 호박잎으로
은빛 갈치의 비늘을 밀어내고
칼을 닮아 칼치라고 칼로 토막 내어
갈치회 한 양푼을 초장으로 버무려
식솔들과 배불리 먹고
남은 갈치들은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삶이 버거운 이 남녘에서도
오늘만은
마을마다 사람들은 행복하다
갈치회를 먹으며
장롱들의 반란
정완희
모두들 잠이든 한밤중에만
장롱들은 스스로의 뼈를 다시 맞춘다
뚜 뚜뚜 두 두두두득 !
세상의 고통을 저 혼자 어께에 멘 듯 삐걱거리며
내가 불면으로 하얗게 밤을 뒤척이는 동안에도
어긋난 관절들은 밀고 밀리며 자기들만의 세상을 꿈꾼다
저 멀리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의 열대 우림 속에서
잘려나간 꿈의 조각들이 밤마다 아파트의 베란다로 나와
창밖의 별들을 보며 남으로 간다
몇 년 파도 속으로 출렁이며 뒹굴지도 못하고
찜통 속에서 억지로 뒤틀린 근육들이
밤마다 새로운 배열을 꿈꾸며 꿈틀거린다
일주일이나 한 달씩 혹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잠이 뒤틀릴 때마다 어김없이 삐걱거리는 신음소리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 숨죽이는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는 나무들은 바람에 뒤척거린다
달빛에 흔들리며 서걱거리는 나무들의 그림자
방안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장농들의 그림자
나무들은 밤마다 새로운 모반을 꿈꾸며 꿈틀거린다
경호강을 지나며
정완희
세월도 경호강은 비켜갔구나
마산에서 창원에서 명절과 여름휴가
일 년 세 번 고향길에 들렀던 경호강
맑고 푸른 물줄기 아름다운 풍경들
지금도 옛 모습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네
아내와 어린 아들과 여행의 지친 몸을 이끌고
강가 둥근 돌에 앉아서 발을 담그던 기억들
진주 산청 생초 함양으로 88시멘트고속도로를 타고
남원 전주 거쳐 부모님 계신 내 고향 서천으로
여덟 시간씩 낡은 자동차로 달렸던 길
이제 새롭게 열린 대진고속도로 옆으로
경호강의 강줄기가 눈앞에 다가서네
훗날 언젠가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경호강에 지친 발을 담그고 싶다
강물은 세월처럼 흐르고 흘러
다시 만날 날들이 올 수 있을까?
선덕여왕릉 가는 길에
정완희
경주 남산의 남쪽자락
울산에 출장갔다 오는 길목에서
무거운 어깨 뻣뻣한 뒷목
세상의 짐은 잠시 주차장에 모두 내려놓고
선덕여왕릉 가는 길은 수백 년 소나무 숲이다
돌담으로 둘러진 대숲을 돌아 솔숲으로
언덕길을 숨차게 올라 거대한 봉분들을 본다
신라천년 세월도 허무하게
솔숲으로 스러지는 묘지들
크고 작은 봉분 꼭대기에는 어김없이
수백 년 자라온 소나무들이 일어서 있다
땀 내어 오를 때는 사방이 아름다운 솔숲이더니
내려올 때에는 솔숲 사이로 공동묘지
수많은 무덤들이 보인다
무심한 세월 속 솔숲으로 불어오는 바람들이여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더냐
흔적 하나 남길 것 없이 허허로운 인생길에서
나 또한 바람처럼 여기를 다녀가노라
판교역에서
정완희
장항선은 아직도 허전하다
아직도 복선 철로가 깔리지 아니한 곳
임시역에서 몇 번씩 상 하행 새마을호에
길을 내어주고 나서야 도착한 무궁화 열차로
이십년 만에 판교역에 내렸다
키 큰 칸나와 해바라기
봉숭아 채송화가 반겨주는 정든 판교역
이제 이 역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직선화 구간으로 새 역사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서쪽 들판으로 이동하고
열차는 흥림저수지를 관통하는 교각을 밟고
기억을 더듬어 작은 터널들을 지나서
서천역과 장항역을 없앤 뒤에야
금강 하구둑을 거쳐 군산으로 달려가리라
새 길들은 서쪽으로 남쪽으로 비켜만 가고
이제는 기억 속으로 사라져갈 판교역에서
광장의 늙은 소나무 손목 잘려나간 두팔을 들고
눈 시리게 푸르른 하늘을 지켜보고 있다
가지치기
정완희
겨울의 끝자락에서 가지치기를 한다
우리들의 갈증과 욕망들이 겨우내 땅속에 웅크린 채
아직도 몇 개 얼음덩어리로 남아 있는 과수원에는
언제나 받쳐줄 뿌리보다 욕심으로 무성한 가지가
감당하지 못할 열매를 달고 세상에 나서려 한다
꽃피는 봄날 개화의 꿈을 펼쳐지 못한 채로
작은 톱과 전정가위로 잘려나간 나뭇가지들
안개같이 희뿌연 황사바람이 휘도는 이 들판에서
너희는 썩어 뿌리를 위한 거름으로 돌아가리라
바깥 세상에는 지역구 공천에 잘려나간
억울한 나뭇가지들로 세상이 어지러운데
정권이 바뀌어 임기도 못 채우고 잘릴 가지들은
꼿꼿하게 서서 세상의 흔들림을 지켜보고 있다
자르지 말아야할 것들을 자르면 독이 되고
잘라야 할 것들을 자르지 못하면 병이 되리라
나도 부질없는 몇 개의 욕망과 갈증을 자르고
몇 개 튼실한 가지를 골라 화병에 꽃는다
햇빛 잘 드는 베란다의 유리창 안에서 너희는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배꽃으로 펼쳐져
열매는 맺지 못해도 꽃은 피우고 죽으리라
아침 주차장
정완희
눈 내린 아침
지하주차장이 없는
가난한 이 아파트 주차장에는
며칠째 내리는 폭설에게 항복이라고
와이퍼로 두 손을 번쩍 들고
밤새워 벌선 자동차들이
반사경 거울로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발소리 총총거리며 사람들은
서둘러 버스 정거장으로 달려가고
서녘으로 지루한 해가 넘어갈 때까지
유리창에 눈이 다 녹고
다시 얼음이 얼은 뒤에야
어둠속 지친 몸으로 귀가하는 사람들
벌써 두 달째 벌을 서는 녀석들도 있다
주인의 손이 돌아와 시동을 켜는
그날을 기다리는 자동차들
봄이 돌아와도
산그늘에 응달진 여기는
아직 캄캄한 한겨울이다
여름 산행길에서
정완희
태풍이 지나간 뒤
망초꽃 하얗게 흐드러진 언덕을 지나
숲으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바람맞아 부러진 나뭇가지와
찢어진 이파리들이
황폐한 풍경으로 나뒹굴고 있다
임도를 지나 나무숲 사이로
아직도 쨍쨍거리는 햇빛들이 뜨겁다
흘러내리는 땀방울 속으로 휴대폰이 울린다
비지땀 속에서 더욱더 들러붙는 세상사
잡념처럼 귓속을 앵앵거리며
끝끝내 따라붙는 날파리떼들
숨 가쁜 능선을 지나
휴대폰의 수신 신호가 사라지고 나서야
쫒아오던 날파리 떼들이 사라졌다
세상사 근심들은 모두 하늘로 날려 보내고
나 또한 날아가고 싶구나 저 푸르른 하늘
낫을 갈다
정완희
무너진 광에서 연장을 꺼냈다
아버님 떠나신지 십여 년
낫과 도끼와 연장들은 모두 녹이 슬었어도
우물가 아버님이 남기고 가신
숫돌과 거치대는 이직 성성하다
아버님은 농사일만은 최고였다
왼손잡이 나를 고치려고 혼내시던 기억들
뇌졸증으로 몸과 정신이 반신불구로 사신지 7년
온전한 모습의 아버님이 보고 싶었다
아버님 모습으로 낫을 갈았다
갈아도 갈아도 녹물만 나오는 시간을 딛고
날이 번득이며 일어선다
손끝으로 날을 만져본다
사각거리는 날의 감촉이 서늘하다
언덕의 풀들을 벤다
후려치는 낫 아래서 풀들이 쓰러진다
햇빛 아래로 나뒹구는 풀들
낯익은 풀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꽃을 만지다
정완희
꽃들을 만져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땅에 꿀벌들이 사라져 버린 뒤
몇 마리 나비들마저 가을의 문턱으로 숨어들 무렵
메마른 화분에서 힘들여 꽃을 피워낸 화초들은
아침저녁으로 내가 만져준 꽃들만
겨우 열매가 맺혀 있다
그렇다
봄부터 배밭에서 복숭아밭에서 붓을 들고
그림 그리듯 꽃가루 부벼주던 아낙들 덕분에
올 가을 과수원엔 과일들이 풍성했던 게다
이제 농약 오염으로 꿀벌들이 사라지고
사라지고 나서야 귀중한 걸 알게 된 게야
수많은 꿀벌들이 붉은 엉덩이로 부지런히
꽃들마다 꽃가루를 부비고 나서야 풍성한 열매
우리는 그 덕분에 살아온 게다
오늘에야 늦은 개화를 펼쳐내는 화초 앞에서
비로소 겸손해지는 게다
겨우 꿀벌들이 하는 일도 다 못하면서 아니면
벌들이 살아갈 환경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들은
정말 이 땅에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인가
빨래를 접으며
정완희
일주일씩이나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서
두 손 들고 벌을 선 빨래를 걷어
양말은 비슷한 놈끼리 짝을 맞추고
속옷들은 아내와 내 것으로 분류하여
차곡차곡 접어 서랍에 넣는다
몸이 약한 아내가 바빠지면서
설거지와 세탁일 빨래 접기는 내 일이다
아내는 못마땅한 눈치다
아무렴 삼십 여년을 해오던 사람에게는
서투른 신랑 하는 게 눈에 안 차기 당연지사
그러면 어떠랴 서투른 손으로
아내의 체취가 배었던 속옷을 접으며
일주일분의 땀과 눈물을 닦았었던
손수건과 수건도 접으며
세상의 여자들이 모두 일상으로 하는 이것이
세상사는 작은 행복일 수 있나니
할미꽃을 위하여
정완희
답사 나온 길에서 할미꽃을 만났다
할미꽃은 무덤가에서
누군가의 영혼을 지켜내는 꽃이거늘
천안 논산 고속도로 산이 깎여나간 언덕의
콘크리트 옹벽 틈에서 꽃을 피웠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이 커브 길을 과속으로 달려서
남쪽 어디론가로 서둘러 길을 떠나는 사람들
할미꽃은 하얗고 까만 먼지와 소음 속에서
몇 해 봄날을 외로이 보냈으리라
세상과는 아무 미련도 아무 인연도 없이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일어선 할미꽃을 위하여
페트병의 아랫도리를 잘라 화분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화분에 옮겼다
봄날 내내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으며
할미꽃은 웃고 있었다
잘려진 목련
정완희
당초에 거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어 백목련아!
키 작은 개나리들이나 명자나무들이 어울릴 자리
1층의 베란다에서 사람들의 시야를 막지 않을
가난한 사람들의 키만큼만 허락된 높이 위로
해마다 아우성치며 올라오는 갈망의 푸르른 가지들이
늦가을이면 무참히 잘라져 나가는 걸
나는 늘 안타까이 바라보아야만 했어
남쪽을 막아선 거대한 산그늘 속으로
빼곡히 들어선 낡은 아파트 단지
몇 년째 거름도 없이 메마른 화단에서
여기 사는 사람들처럼 작은 면적에
제한된 양분과 햇빛으로 목숨을 부지한 세월
해마다 팔다리가 잘려 몸통만 서서
몇 개 서러운 꽃망울을 터트리는 너를
제대로 허리 펴고 자라지도 못하고
낡아가는 아파트처럼 늙어가는 너를
얼마나 더 가슴 시리게 바라보아야 할까
당초에 거긴 네가 설 곳이 아니었어 백목련아!
아침 서릿발
정완희
겨울 아침 출근길
안개 젖은 아침엔 서리가 가득하다
어젯밤에 동사한 노숙자들의 영혼과
어둠속을 떠돌던 세상의 슬픔과 눈물들이
속살거리며 밤사이 땅위로 내려와
나무들과 풀들과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게
한 방울 이슬이 되지 못하고
칼날로 얼어붙은 서릿발
그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찌른다
서러운 이 땅의 아침을 향해
밤새워 모의한 모반의 칼날을 들고
일어선 서릿발들과 서리들이
온 들판 하얗게 펼쳐져 있다
이슬로 돌아가거라 눈물들아
아침 따스한 햇살로 너희들의
흔들리는 어깨 다독거리며
얼어붙은 가슴과 날선 슬픔들을 녹여주마
메마른 겨울나무들의 뿌리 적시는
한 방울 이슬로 돌아가거라
안개 젖은 아침엔 온 들판이
얼어붙은 눈물들로 가득하다
새들은 농부를 쫓아다닌다
정완희
늦은 봄 들판 한가운데서
트랙터로 써레질하는 농부를 보았다
개선장군처럼 농립을 쓰고 높이 앉아서
무논을 갈고 써레질하는 뒤로
백로와 왜가리들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긴 다리 겅중거리며 쫓아다닌다
뒤집힌 흙에 노출된 우렁이나 미꾸라지 개구리까지
부리에 하얀 날개에 진흙 묻히며 쪼아대는 새들
언제부터 그들은 이 들판에서
농부들과 같이 살아가는 친구가 되어
푸르른 하늘을 나란히 바라보게 되었는지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 사는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도 도시에는 촛불들이 짓밟혀 부서지고
온 나라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깃발을 들고 일어섰는데
오만과 독선의 탈을 쓴 자들은 두 귀를 막고
언제나 불도저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밀고 나아간다
뜨거운 불통정국 속에서도
벼들은 새들과 함께 자라나
이 들판은 아름답구나 눈물겹도록
쥐를 잡다
정완희
이 세상 살 곳이 여기뿐인가?
천안에서 이름도 어여쁜 신부동
고층건물 둘러싼 도시의 한가운데
사십년도 더 넘은 낡은 집 몇 채 빗속에 웅크려 있다
몇 년째 비워 두었던 마당 세모진 집에서
쥐들과의 전쟁이 시작 되었다
녀석들이 살던 곳에 내 가족이 침입자인가?
잠결에 머리맡을 오가는 놈들과
밤새 천정에서 부시럭거리며 뛰어다니며
숙면을 방해하는 녀석들
문틈과 천정 부엌의 싱크대 밑까지
구멍마다 시멘트로 놈들의 출입구를 봉쇄 하였다
달콤한 향기 풍기는 쥐약으로
몇 달 동안 오십여 마리의 쥐를 잡아 화단에 묻고도
마당에 고구마를 심어서인가
나랏님이 쥐를 닮아서인가
잡아도 잡아도 모여드는 이 도시의
이 세상의 쥐떼들이여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정완희
그 속에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모래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떠돌던 영혼들이 폭풍을 몰고
회오리바람 속에서 비구름과 뜨겁게 만나
온 세상의 지붕에 튕겨져 낙숫물로 떨어질 때
비로소 화강암 댓돌이 홈이 파인다
붉은 흙먼지들이 모래알들이
온 세상을 휘돌아 나와
소낙비와 함께 쏟아지고 있다
물은 물일뿐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일 퍼센트의 사람들
이제 오늘의 눈물들은 누구의 벽에
또 누구의 가슴에 희망의 구멍들을 뚫어낼까
만추
정완희
길을 걷는다
붉은 손바닥 흔들던 단풍잎들은
둥그런 조막손이 되어
가랑잎들과 함께 내 발밑에서
아프게 부서진다
용서하라 용서해다오
내 한목숨 부질없이 살아온 세월 속에서
내 말 한마디로 상처받은 사람들과
내 발자국으로 인해 부서진 낙엽들이나
죽어간 벌레들과 개미들
나도 모르게 나에게 짓밟혀진
상처받은 영혼들이여!
가을비가 내린다
마지막 남은 단풍잎들이
내 뺨을 후려친다
내 차의 유리창에 수십 개의
빨간 손바닥들이 붙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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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시를 쓴 지 이십오 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이제 다시 팔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저에게는 아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아버님 돌아가신지 6년 만에 어머님 돌아가시고
작년 오월에는 성모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온 것이지요.
이제 저는 남은 생을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욕심도 버리고
좀 더 겸허하게 살려도 노력합니다,
퇴직 후 고향에 내려가 살려고 주말마다 시골에 가서
농사연습도 하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시는 살아가는 인생의 이야기이고 그 삶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부끄러운 제 삶의 흔적을 세상에 내놓으며
제가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 문우들 표사를 싸주신 구재기 시인님
박미라 시인님
정공량 시인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2015년 6월
정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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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정완희의 일상에서 만나는 정서생활과 시 사이에는 최상의 순간과 심연의 깊이가 이루는 조화로운 삶의 그윽한 맛이 용해되어 있다. 시를 통하여 무엇인가 의미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머물면서도 그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영혼의 잠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시혼詩魂에 비치고 있는 심상心象이라든가 사상思想, 또는 정서에 이르기까지 출렁이고 있는 숨결로부터 삶의 정수精髓를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정완희의 시를 읽는 또 다른 즐거운 삶의 아픔이 되기도 한다. ‘폐자전거’를 통하여 “철창 속에서 안락사될 날만 기다리는 유기견들이나/장례식장 한 켠에 붙어있는 요양병원의/사람 그리운 노인들의 눈빛들”(<폐자전거를 보다> 중에서)을 읽어내고, 썩어가는 ‘모과’로부터 “모과나무 그늘 아래/번들거리는 이마를 가진 노인들 몇 열매로 앉아있다”(<모과> 중에서)는 것은 이성의 힘에 의하여 도움 받게 된 상상력으로부터 발견한 시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음이다. 모름지기 시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일상을 재창조하여 언어로 빚어놓는 엄연한 존재라는 것을 정완희 시로부터 맛볼 수 있는 별미別味라 하겠다.
― 구재기(시인)
‘서향으로 창을 내고도 남쪽 참나무 숲을 향해 해바라기를 하는’(겨울 숲에 서다) 시인의 숙명을 겸허히 받드는 시인 정완희. ‘우리가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흐르고 흘렀’을 강물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그의 시에서는 훈훈한 사람 냄새가 풍긴다. “장항선 열차를 타고” 가며 바라보는 창밖 풍경처럼 평화롭게 흘러간다. 이후로도 그의 시가 고요한 강물처럼, 그러나 도도히 흘러가기를 바란다.
― 박미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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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완희 시인∥
∙ 충남 서천 출생
∙ 경남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 2005년『작가마당』으로 등단
∙ 시집『어둠을 불사르는 사랑』(2007년)
∙ 한국작가회의 회원, 충남작가회의 회원, 충남시인협회 이사
∙ 공장자동화기계 엔지니어로 근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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