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의 근본은 덕치주의(德治主義)에 있고 정치의 요체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 다고 하였다.
옛날 周나라의 聖王인 文王은 원유(대궐 안의 동산)는 사방 70리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작 다고 하였다. 즉 모든 시설을 개방하여 백성과 같이 즐기는 공유물로서 운영하였기 때문 에 만백성들의 同樂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齊나라의 宣王의 원유는 사방 40리인데도 백성들은 오히려 크다고 원성이 자자하 였다. 여기서 백성이 사슴을 잡으면 사형을 시켰고 오직 왕만이 홀로 즐기는 터가 되었 기 때문이었다.
옛날의 성군들은 樂以天下 憂以天下라고 하여 즐거운 일이나 근심을 백성과 함께 해야 하 고 심지어 好色 好貨도 백성과 함께 해야함을 가슴에 새겨두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여민동 락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원래 여민동락은 王者의 通路이다. 天은 사사로이 친한 사람 이 없으며 오직 有德者만을 돕는다. 天心은 常在不變이 아니다.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자 에게만 귀복(歸復)한다.
여민동락의 원리를 옛 사람들은 또 다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조선조 13대 임금인 明宗때 영의정을 지낸 명헌(名賢)권철(權轍)이 도산서원으로 이퇴 계 선생을 찾은 적이 있었다. 명현들이 만나 고담준론을 나눌 때는 좋았으나 끼니때만 되 면 권정승은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소찬이 입에 맞지 않는 권정승은 더 묵어가고 싶어도 식사 때문에 일정을 앞당겨 귀경길에 오르면서 기념이 될 만한 좋은 말을 청하자 퇴계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대감께 대접한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성찬이요. 그러나 대감은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잡수시지 못했소이다. 정치의 요체는 여민동락에 있는데 官과 民 의 생활이 이렇게 동떨어져 있으면 어찌 백성이 관의 행정을 심복하겠소이까」
이 고사는 오늘날의 공직자에게 명료한 해답을 주고 있다.
民願室도 모자라 爲民室을 만들어 놓고 「국민을 하늘같이 알고 하늘같이 모시자」는 당 국의 과분한 대접까지 받아 본 국민들이 당국의 노심초사를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다 만 제도나 「한때의 기강」에 식상한 국민들은 공직자의 의식흐름에 큰 변화가 와야 근본 치유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해답은 거기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답답해서 찾아온 민원인의 서류를 접수대장에 기재도 않고 서랍에 처박아 두는 일이 있어 서는 안 된다.
또 서민들은 전세값을 못 구해 목숨을 끊는 판에 권력자들이 위상싸움이나 해서야 국민들 의 신뢰를 얻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다. 이번의 司正조치를 계기로 여민동락의 풍토가 조 성 되었으면 하는 게 많은 국민들의 여망이다.
중국 송나라 때 왕증(王曾)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되기 위해서 예시(豫試), 회 시(會試), 전시(殿試)의 세 가지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하자 그의 벗들은 그를 보고 이제 자네는 평생토록 호의호식하고 살겠다고 부러워했다. 이 말을 들은 왕증은 정색을 하면서 「내 평생의 뜻은 어떻게 해야 우리 宋나라가 부흥하고 백성들이 잘 살수 있을까, 하는 데 있거늘 그 무슨 망언이냐」고 벗을 나무랐다. 왕증은 과연 그 뜻을 관철해 송나 라의 여민동락하는 흥국재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유관(柳寬)정승의 이야기는 더욱 여민동락의 깊은 뜻을 실감나게 하고 있 다. 어느 여름에 장마가 져서 비가 방안으로 주룩주룩 샜다. 그는 부인과 같이 우산으로 비를 피하면서 「우산도 없는 사람이 많을 텐데」하고 이웃 걱정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와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고루거각에 살 수 있는 길 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백성이 가난하니 자기도 백성과 같이 가난하게 살겠다, 권세를 써 서 치부를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공직자가 얼마나 될까.
양심과 진실을 좋아하고 權과 富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 왕증과 유관정승의 태도는 만 고에 추앙할 만한 일이 아닐까.
물체가 바르면 그림자도 바른 것과 같이 지도자가 바르면 국민이 바르고 국민이 바르면 지도층이 바른 법이고 기업주가 바르면 근로자가 바르고 근로자가 바르면 기업주도 바른 법이다.
이는 필요충분조건의 관계인 것이다. 우리 모두 직분을 지키고 성실한 마음으로 정성어 린 노력과 올바른 행동을 다한 후에 그 결과를 얻는 보람 속에서 스스로 자기를 키워나가 야 할 것이다.
''정치는 예술이다''라고 정치가들이 잘 쓰고 있다. 즉 정치는 현실을, 예술은 이상을 주제 로 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고 알고 있는 일반국민의 상식과는 사뭇 다른 말이다. 그러 나 이 주장은 필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정치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을 추구하 여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일반시민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꾸며져야 할 중요 문화시설이 관할부처간의 행정조정이 이뤄지지 않아 좋은 시설이 제 구실을 못하는 곳이 있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다. 앞서 자리잡은 서울대공원쪽이 장소를 선점한 채 대통령 내방때 말고는 지름길 의 접근로를 제공하지 않아 거길 가자면 산허리 도로를 우회해야 한다. 자가용 없이 가 기 어려운 곳이 되고 말았다. 차 없는 사람도 문화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여민동락임 을 명심해야 하겠다.
여기서 아무리 눈을 감으려 해도 불쑥불쑥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 있다. 물론 5공때 일 이다. 청남대 지방청와대 아방궁 연희궁 등등이 떠오른다. 특히 지방청와대란 도대체 무 슨 수작이었는가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묵어갈 대통령을 위해서 거대하고 화려한 공간 을 신주 모시듯 떠받들어야 하는가.
이는 군주시대나 있을 수 있는 정치행정문화를 유감 없이 노출시킨 작태라고 당시의 조사 의원들은 분개한 적이 있었다.
이 땅의 권력자, 이 땅의 고위공직자는 집이 없는 국민이 인구의 절반이 넘고 생계를 꾸리 기조차 어려운 절대빈곤층이 3백3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또 가난 때문에 점심을 거르는 학생이 1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소년소 녀가장이 상당수 있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통치자로서 최소한의 상식과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다면 이와 같은 엄청난 자작지화(自作 之禍)는 면했을 것이다. 선조의 악명은 아무리 훌륭한 효자 자손(慈孫)이라도 百世 동안 그 악명을 벗길 도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맹자는 사람이 취할 길은 仁밖에 없고 통치자의 취할 길은 여민동락뿐이라고 강변하였다.
옛 탕왕(湯王)이 토벌은 天下를 스스로 부를 삼아 이것을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非富天下 라고 하여 백성을 위하여 준 것이라고 천하백성들을 생각하였다. 우리의 정치사에 나오 는 「혁명주체세력」은 오직 국민의 소원을 들어 국민들이 고루 잘사는 분배정치를 실현 하겠노라고 했었는데 과연 천하백성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맹자의 유명한 숙어 중에 탁목구어(啄木求魚)란 말은 목적과 방법이 어긋난 경우를 표현 할 때 쓰이는 말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많은 공공기관이 있다. 그의 입구마다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선명한 구호가 어김없이 결려 있었고 7년 동안 높은 사람들의 연설에는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말이 약방에 감초처럼 사용되곤 하였다. 이 정의의 참뜻 을 우리의 2세에게 무엇이라고 가르쳐야 하겠는가?
예기(禮記)에 大道之行也天下爲公이라 하였다. 즉 대도를 걸으면 천하는 私가 아니라 公 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실행되면 협잡하는 사람이 없고 사용을 탐하는 자가 없으며 나라 에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으로 통한다. 또 예기에서는 多行無禮면 必自及也란 구절이 있 다. 즉 예의에 벗어난 일을 자주하면 그 화가 반드시 자기에게 미친다는 뜻이다. 지금 특 명사정에 걸린 공직자들이 그 꼴이다.
끝으로 조광조와 중종 임금간에 나눈 군자소인지론에 대한 대화가 다시 생각난다.
"전하 밝은 임금은 우선 사람을 가려 쓰는 법부터 터득하셔야 하옵니다. 어진 이를 멀리 하고 소인배를 가까이 하면 아무리 밝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눈과 귀가 멀게 되고 따라서 마음마저도 암흑하게 되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君子와 小人을 가려 군자는 가까이 하고 소인은 멀리하여야 하옵니다』
『어떻게 하면 군자와 소인을 가려낼 수 있는가』
『군자는 迎을 쫓되 소인은 利를 쫓사옵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찾아내기 어렵고 소인은 찾아내기 쉽사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군자는 숨고 소인은 나서기 때문이옵니다』
이상 중략하고 조광조의 至論은 큰 간신은 충신 같고 큰 탐관은 청백리 같다고 하였다. 참으로 열 번 옳은 말이다. 人事가 萬事란 말이 있다. 국민과 더불어 同苦同樂할 수 있는 청백리가 많아야 부강한 나라 번영된 민족으로 통일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부다피아-송호수님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