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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는 궁(弓)의 후예(後裔)라는 뜻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신라에서 지칭하는 소위(所謂) 장보고(張保皐)의 난(亂)이 있었습니다.
장보고(張保皐)는 당나라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가명이며 실제 이름은 량궁복(梁弓福)이지요.
궁예(弓裔)는 장보고(張保皐)의 외손자입니다.
장보고의 난 때 장보고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했는데,이때 장보고의 어린 딸을 명주(溟州,강릉)의 명주군왕(溟州郡王) 금주환(金周煥)이 구출하여 명주로 데려갔습니다.
금주환(金周煥)은 금헌창의 난으로 몰락한 태종무열왕계의 부활을 위하여 장보고와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때 구출하여 데려간 장보고의 딸을 나중에 자기 아들 금영신(金永信)의 후처(後妻)로 삼았지요.
금영신(金永信)은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있다가, 지금은 큰 아들 금순식(金荀息)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불가에 귀의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승려 허월(許越)대사입니다.
지금 명주(溟州,강릉)는 금순식(金荀息)과 친동생 금예(金叡)가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궁예(弓裔)는 금순식(金荀息)의 이복동생입니다. 장보고의 딸인 생모는 궁예를 낳고 곧 죽었다고 합니다. 궁예(弓裔)는 어렸을 때 사고로 한 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나 자칫 금순식(金荀息)과 대립할 우려가 있어 허월(許越)대사가 불문에 귀의시켰습니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미리 막으려는 허월(許越)대사의 고육책(苦肉策)이었습니다.
그러나 궁예(弓裔)는 영민(英敏)한 인물이라 허월(許越)대사와 금순식(金荀息)을 극진히 섬겨 그 사이는 지금도 아주 좋습니다.
궁예(弓裔)는 30대 중반 쯤 되었는데, 천 명의 승병이 있는 영월 세달사를 기반으로 자칭 하생미륵(下生彌勒)을 선포하고 광신도들인 용화군(龍華軍)을 이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아 아직 젊은 나이지만 불법(佛法)에 뛰어난 고승(高僧)의 반열에 들며, 무예 또한 아주 뛰어납니다.
궁예(弓裔)의 법명은 선종(善宗)인데 거병하면서 스스로 이름을 궁예(弓裔)라고 지은 것을 보면 궁복(弓福)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후손인 현재의 신라 왕실(王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명주(溟州,강릉) 금씨(金氏)들의 공통적인 품성입니다.
이상이 현재 궁예(弓裔)에 대하여 파악한 정보들입니다.”
송악의 교정보소(敎精報所,정보부)의 수장(首將)인 도감(都監) 춘길(春吉)이 궁예(弓裔)에 대하여 송악의 수뇌부(首腦部)들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송악의 수뇌부는 왕건을 중심으로 지금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황해용왕은 옆방에서 회의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왜(倭) 항차 이후로 왕건은 송악에서 누구도 폄훼 못하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황해용왕의 의도대로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궁예(弓裔)는 량길(梁吉)을 감쪽같이 속여 명주를 포함한 동쪽을 정벌하겠다고 량길의 정예군사를 빌려가 자기 휘하로 편입시켰습니다.
남의 정예군사들을 빌려가는 수단도 대단하고, 빌려간 군사들의 마음을 얻어서 자신의 군대로 만든 것도 대단합니다.
량길(梁吉)이 수십개의 성을 장악하고 있던 삭주와 북원경(원주)이 이제는 궁예(弓裔)의 차지가 되었고 량길(梁吉)도 궁예(弓裔)에게 패전(敗戰)하여 죽었습니다.
그전에 교통의 요지인 죽주(안성)의 기훤에게도 부하로 들어갔다가 량길과 같은 방식으로 기훤을 죽이고 죽주를 차지했고, 웅주와 서원경(청주)도 양민 대부분을 미륵교 신도로 만들어 장악했습니다.
지도로 본다면 우리 패서지방을 둘러싼 삭주, 명주, 웅주와 북원경(원주), 서원경(청주)이 모두 궁예(弓裔)의 영토입니다.
무엇보다도 미륵교를 이용하여 이 모든 지역의 민심을 사로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수단이 대단합니다.
이제 궁예(弓裔)는 패서지방을 장악하여 신라 북부와 중부의 광대한 지역을 통일하고 신라의 금성(金城,서라벌)을 점령하고 견훤의 백제와 일전을 벌여 신라 전체를 궁예(弓裔)의 왕국으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현재 패서지방은 강력한 호족들이 각 지방에 웅거하고 있어서, 서로 뭉쳐서 궁예(弓裔)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미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면 좋은 조건으로 받아주겠다는 궁예(弓裔)에게 복종하겠다는 군소호족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만일 중요한 호족이 하나라도 귀부(歸附) 선언을 한다면 곧 패서지방 전체가 무너져서 궁예(弓裔)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전투 중에 죽으면 미륵세계에 태어난다고 믿는 궁예(弓裔)의 미륵군(彌勒軍)도 상대하기 어렵고, 특히 미륵군 가운데서도 정예부대인 용화향도(龍華香徒)는 동귀어진(同歸於盡,상대와 같이 죽음)전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궁예(弓裔)가 미륵(彌勒)의 현신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세를 떨치고 있는 궁예(弓裔)와 맞서서 우리 송악이 그동안 힘들게 이룩해 놓은 성과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송악이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스스로 와서 복종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자신이 스스로 궁예의 측근으로 들어가 궁예의 실체를 파악해 보려 합니다.
만일 궁예(弓裔)가 만민이 평등하고 백성이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궁예(弓裔)의 밑에서 미륵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헌신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왕건이 송악의 수뇌부들을 향해 말했다.
군주(君主)가 스스로 귀부(歸附)가 최선이라고 하는데 이에 반대할 신하들은 없었다.
송악은 왕건의 주도 하에 궁예(弓裔)에게 귀부하기로 결정했다.
궁예(弓裔)가 패서(浿西,황해도,경기도)지방의 호족들에게 귀부할 것인지 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통문(通文)을 보낸지 한 달 만에 패서(浿西,황해도,경기도)지방의 중요한 호족들인 황주(黃州,황해도 황주)의 황보제공(皇甫悌恭), 평주(平州,황해도 평산)의 박지윤(朴智胤), 신천(信川,황해도 신천)의 강연창(康衍昌), 정주(貞州,경기도 파주 교하와 개풍군)의 유천궁(柳天弓), 광주(廣州,경기도 광주)의 함규(咸規) 등이 모두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송악(松岳) 뿐이었다. 왕건은 가장 나중에 귀부하는 것이 송악의 가치를 높인다고 판단하고 궁예에게 지금까지 귀부에 대하여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궁예(弓裔)의 책사(策士) 종간(宗干)이 직접 송악을 찾아왔다.
“종간은 승려 시절 궁예의 사형(師兄,한 스승 밑에서 자기보다 먼저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법명은 혜종(慧宗)입니다. 스스로 이름을 종간(宗干)이라고 지은 것은 궁예(弓裔)의 방패(干)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 일겁니다. 궁예의 책사로서 꾀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머리가 비상한 자입니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가 직접 송악을 찾아온 것을 보면 궁예는 송악을 힘으로 짓밟을 생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마지막까지 버티다 귀부하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고 하신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전의 양사부(楊師父)인 송악태수 왕륭이 왕건에게 말했다.
“종간을 융숭히 대접하고 송악태수이신 아버님이 조만간 쇠테우리(철원,鐵原)로 궁예대왕을 찾아뵙겠다고 귀부의사를 밝히시면 종간은 만족해서 돌아갈 것입니다. 사신으로 온 종간의 체면도 설 수 있고요.
전에 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송악을 궁예의 서울로 삼자고 제안해 보시죠. 아버님의 조리 있는 설명에 종간이 혹할 가능성이 큽니다.”
“궁예에게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얻는다.
범인(凡人)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웅대한 계획입니다. 해보겠습니다.”
“송악태수 왕륭입니다. 송악은 궁예대왕님께 귀부를 간청하옵니다. 부디 받아주시기를 앙망합니다.”
보름 후 송악태수 왕륭은 송악의 중신(重臣)들을 거느리고 철원(鐵原)으로 가서 궁예를 알현했다.
궁예는 용화전(龍華殿,미륵을 모시는 전각)이라고 쓰인 전각 중앙에 앉아 있다가 왕륭에게 내려와 두 손을 잡았다.
“어서 오시오.송악태수. 우리 같이 만백성이 평등하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궁예는 머리를 박박 깍고 허름한 승복을 걸치고 있었다. 애꾸눈에는 허름한 헝겊 안대를 대고 있었는데,남은 한쪽 눈에서는 안광(眼光)이 형형하여 안광만으로도 사람을 제압하는 힘이 있었다. 체격은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의 고수답게 탄탄했다.
왕륭은 귀한 진상품 대신에 수레 10대에 병장기(兵仗器)를 가득 싣고 왔다. 일전에 패서의 호족들이 귀한 진상품들과 예쁜 여인들을 바치려 하다가 혼구멍이 난 것을 들었던 것이다.
“각종 병장기는 고맙게 받겠소. 꼭 필요한 것들을 가져 오셨구려. 비록 흉물(凶物)이지만 이 땅에 미륵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오.”
궁예는 병장기에 반색을 했다.
직접 만나 보니 궁예는 강한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무서운 놈이다. 무지한 백성들이 홀딱 빠져들 만 하구나.”
왕륭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 인물은 근래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왕륭의 눈에는 궁예라는 인물의 허세가 어렷품이 보였다.
왕륭이 몰고 온 수레들에 실려 있던 병장기들이 궁예 앞에 진열되었다. 궁예가 직접 활을 들고 당겨 보았다.
“좋은 활이로다. 그런데 송악태수 옆의 젊은이는 누구시오?”
궁예가 왕건을 보고 송악태수 왕륭에게 물었다.
“제 자식 놈입니다. 이제 열여섯입니다.”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오. 어디 활은 쏠 줄 아느냐?”
“조금 쏘아 보았습니다.”
“그럼 저 앞의 버드나무 아래 가지에 붙은 버들잎을 맞출 수 있겠느냐.”
“예.한 번 쏘아 보겠습니다.”
철원 궁예의 궁궐 개울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다.거리는 20장(약60미터) 정도였다.
왕건은 가까이 있는 활을 들고 화살 다섯 발을 연거푸 쏘았다. 화살은 다섯 그루 나무의 가장 아래 있는 버들잎을 정확히 맞추어 떨어뜨렸다.
“잘한다. 신기(神技)로다. 나는 너를 보는 순간에 마음에 들었는데 이런 무예를 가지고 있다니...
훌륭한 아들을 두셨소. 송악태수.”
“황감합니다.”
“활을 잘 쏘았으니까 상을 줘야지. 원하는 것이 있느냐.”
궁예가 흐믓한 표정으로 왕건에게 물었다.
“저는 대왕님 휘하에서 군사들을 지휘해보고 싶습니다.”
“훌륭한 젊은이로다. 말도 잘 타느냐?”
“기마술도 남에게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되옵니다.”
“너를 마군(馬軍)소장(小將)으로 임명한다. 내 곁에서 마군 친위대(親衛隊)를 이끌어 보도록 하라.”
“존명(尊命).”
“반갑소,나는 마군 전체를 지휘하는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이라 하오. 철원은 원래 말타기에 능한 말갈족(靺鞨族)이 많이 사는 곳이라 기병 자원은 많은 곳이오. 그러나 무식한 놈들이라 미륵이 뭔지 용화세계가 뭔지 아무리 얘기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 말갈족을 우리 미륵군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소.
그래서 서원경(청주)과 그 주위 웅주에서 미륵교를 성심으로 믿는 백성들을 철원으로 이주 시키고 있소.나도 웅주 사람이오.
송악태수의 아드님이라니 앞으로의 출세가 훤히 보이오. 마군(馬軍) 친위대(親衛隊)를 맡았으니 앞으로 잘 해 봅시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이 왕건을 반갑게 맞이했다. 환선길은 궁예군의 마군사령관인데 용맹하고 마상무예가 뛰어난 용장(勇將)이다. 그러나 지략(智略)은 별로인 멧돼지형(猪突形) 장수이다.
마군(馬軍) 친위대(親衛隊)는 궁예를 호위하는 친위부대(親衛部隊)로 정예 기마병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건은 이 부대의 대장(隊長)으로 임명된 것이다.
정월 보름날 아침 왕건은 철원평야 옆의 높은 산(금학산,金鶴山)에 올라서 철원(鐵原)의 황량한 벌판을 내려다 보았다. 매서운 바람이 콧등을 시리게 했다.
신라 내에서는 보기 드믄 넓은 벌판이었다. 탐라와 같은 화산대지(火山大地)라 왕건에게는 익숙한 지형이었다.
“넓은 벌판이지만 화산지대라 물이 부족하여 농사는 짓기 어렵겠구나. 탐라와 같이 소,말 등을 방목하기는 좋겠으나 겨울이 너무 추워 그 또한 어려움이 많겠구나. 궁예는 왜 이 철원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구나.”
왕건은 산 중턱의 도피안사(到彼岸寺)로 내려갔다.
도피안사(到彼岸寺) 주지스님으로부터 며칠 전 시간이 되는대로 절을 방문해 달라는 밀지를 은밀하게 받았던 것이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삼십여년 전 도선대사가 설립한 절이다. 도피안(到彼岸)은 열반(涅槃)의 세계에 이르른다는 뜻이다.
왕건은 절 중앙의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찾아 불공을 드렸다. 일반적으로 절에는 절 중앙에 대웅전(大雄殿)이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있지만, 도피안사에는 대웅전 대신 대광명전에 철조비로자나불(鐵造毘盧遮那佛)이 모셔져 있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眞身,또는 法身)으로 화엄세계(華嚴世界)의 주인이신 광명(光明)의 부처님이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응신(應身,세상에 나타나는 모습)이시지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인이신 비로자나 부처님은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가변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비로자나 부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중생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바에 따라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 경계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때나 알맞게 행동하고 설법하며, 여러 가지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즉 비로자나 부처님은 항상 여러 가지 몸, 여러 가지 명호, 여러 가지 삶의 방편을 나타내어 잠시도 쉬지 않고 진리를 설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하시는 것입니다.”
도피안사의 주지(住持) 순보(順甫)스님이 왕건에게 차(茶)를 대접하며 비로자나불과 도피안사의 내력에 대하여 설명했다.
“도피안사는 30여 년 전 제 스승이신 도선대사께서 건립하신 절입니다. 당시 1,500명의 승려를 이끌고 이곳에 대가람(大伽藍)을 만드셨습니다.
황량한 이곳 철원에 이러한 대가람을 건립하신 이유는 추후 가짜 미륵이 철원에 나타났을 때 이를 제압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은밀하게 저희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그것이 신라의 중생들이 열반(깨달음,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도들의 시주를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라 현재는 이백여 명의 승려들이 자급자족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모두 무술에 능한 승병들입니다.
남원 실상사와 스님들이 자주 교류하고 있고, 재정이 넉넉한 실상사에서 매년 많은 시주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남원 실상사의 주지 영보(永甫)와 영암 옥룡사의 경보(景甫)가 제 사형(師兄)들이며 모두 도선대사의 제자들입니다.
최근에 도선대사께서 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오셨습니다.
왕건님께서 조만간 철원에 올 터이니 모든 것을 바쳐서 왕건님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도피안사를 만든 목적이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든지 하명만 하시면 도피안사는 모든 것을 바쳐서 왕건님을 도울 것입니다.
가짜 미륵인 궁예가 이 철원에 집착하는 이유는 수도(修道) 중에 ‘철옹성(鐵瓮城)에 거하라. 그리 하면 네 뜻을 이루리라.’라는 미륵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예가 생각하는 철옹성(鐵瓮城)인 철원(鐵原)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는 궁예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밀지에서 도선대사께서는 가짜 미륵의 운세가 앞으로 이십년 간다고 하셨습니다.
왕건님께서는 궁예의 수하에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시면서 이십년 후를 기약하라고 하셨습니다.
철옹성(鐵瓮城)에 든 가짜 미륵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스승님께서 도피안사의 비로자나 부처님을 많은 공력을 들여 무쇠로 철조(鐵造)한 것입니다.
부디 은인자중(隱忍自重)하시면서 향후 이십년을 감내하시기 바랍니다.”
“아! 스승님.”
왕건은 도선대사의 은혜에 감복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펑펑 울었다. 눈물과 함께 마음의 번뇌가 남김 없이 씻겨 내려 갔다.
왕건에게 스승인 도선대사는 바로 비로자나 부처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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