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를 찾아서/靑石 전성훈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불현듯이 떠올리는 건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어서는 안 되는 애틋한 사연이나 피맺힌 곡절이 있기 때문이다.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이웃 마을 이름인 동막골처럼 봉화산 부엉이바위도 그런 곳이다. 도봉문화원 7월 인문학 기행은 “가야, 그 빛나는 상자가 열린 곳, 경남 김해”라는 표제를 달고 금관가야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멸망한 왕국의 후손이 정복자의 친위 그룹이 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모습은 인류의 역사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한반도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인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 김유신 장군을 생각하며 경상남도 김해 땅을 밟는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아침 해가 반짝하며 하루를 연다.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고 구름 사이로 파란색 하늘이 고개를 내민다. 오전 6시 35분 도봉문화원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길이 막히지 않아 잘 달리다가, 강동으로 나가는 곳에 이르러 병목현상이 생기면서 가는 듯 서듯 하면서 조금씩 움직인다. 문화원에서 나누어준 자료를 읽으며 금관가야의 발자취를 그려본다. 무심코 하품이 나오길래 슬며시 눈을 감고 쪽잠을 청한다. 충주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은 맑고 공기가 무척 깨끗하다. 쾌청한 날씨 덕분에 마음도 편안하여 오늘 일정을 기대해본다. 알록달록한 옷가지를 걸치고 양팔을 벌린 허수아비를 오랜만에 보는 순간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창녕을 지나 영산휴게소에 들어가기 전에 고속도로 옆에 연꽃이 탐스럽게 핀 저수지가 보인다. 간간이 내리던 비가 그치고 저수지 주변 산천은 비에 젖어 촉촉한 모습으로 웃으며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처음 찾은 곳은 김수로왕릉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가야루(加耶樓),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에는 고추잠자리들이 신나게 날갯짓하며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비가 그치는 게 틀림없는가 보다. 문화원 탐방객뿐만 아니라 몇 사람의 관람객이 한가하게 왕릉 경내를 걷는다. 우리나라 성씨 중 단일 성씨로 김해 김씨가 가장 많다고 한다. 김수로왕이 바로 김해 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시조이다. 왕릉으로 들어가는 길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예의를 지키는 것이 도리이다.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으로 부르는데 정문인 납릉정문(納陵正門)에는 쌍어문, 파사석탑, 코끼리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왕릉의 비문에는 ‘가락국수로왕릉’이라 적혀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서기 42년에 많은 무리가 구지봉(龜旨峯)에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로 싼 금빛 그릇이 내려오고 그 안에 6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며칠 뒤 황금알에서 각각 남자아이 여섯이 나왔다. 이 아이들이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온 아이를 수로(首露)라 하였는데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다’. 수로왕릉을 벗어나 대성동 고분군(古墳群)을 찾아간다. 대성동 고분군은 해발 22.6m의 북에서 남으로 L자형으로 길게 휘어진 낮은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 삼국시대 가야의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금관가야 지배집단의 고분군으로 파악되었고, 중국 한군현(漢郡縣) 및 왜(倭)와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대성동 고분군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후에는 수로왕비릉을 둘러본다. 구지봉 동쪽에 있는 왕비릉의 비문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이라 적혀있다. 왕비의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16세인 서기 48년 가야에 와서 수로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허왕후 왕릉 앞에는 인도에서 올 때 파도를 잠재우고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실었다는 원형을 잃어버린 파사석탑이라고 전해지는 탑이 있다. 이 돌의 성분을 조사했더니 한반도에서는 나오지 않는 돌의 성분이라고 한다.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조선왕조 왕과 왕비 무덤과는 다른 모습이다. 왜 이렇게 먼 거리에 능침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수로왕릉과 왕비릉 주위는 무수한 세월의 부침에 따라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다. 눈을 감고 시간을 100~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왕릉 주변 모습을 그려본다. 먼 옛날 조상들의 생활상은 마음을 열고 바라보아야 한 조각이나마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국립김해박물관을 둘러보다가, 조선 후기 1800년대 군사행정용지도로 만든 김해부내지도(金海俯內地圖)를 보니,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왕릉과 왕비릉 주변 모습이다.
금관가야는 서기 532년(법흥왕 19년), 고령 대가야는 서기 562년(진흥왕 23년) 신라에 의해 멸망하여 가야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구지봉 황금알 여섯 아이 설화와 관련하여, 지금도 고령과 김해에서는 김수로왕이 서로 자기들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다투고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금관가야의 시조로, 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김해평야를 끼고 숱한 이야기를 낳으며 영겁의 세월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에는 오리가 많이 산다. 신라에 멸망 당한 가야제국을 떠올리며 어처구니없게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는 말이 생각난다. 저잣거리에서 아이들 입에 떠도는 이야기가 비와 눈이라는 세월의 모자를 뒤집어쓰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된다. 본래의 내용과는 다르게 바뀐 이야기는 천년의 껍질을 벗어던지려고 똬리를 틀고 있는 구렁이처럼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바꿀 수 없다. 신화나 전설의 가치는 역사적 사실이나 실체적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세월을 먹고 세월을 잊은 채 사는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가에 달려 있다.
가깝고도 머나먼 갈 수 없는 북녘땅을 포함하여 한반도 여기저기 망해버린 왕국의 도읍지였던 곳에는 오늘도 슬픔과 한탄, 원망과 비애가 깃들지 않는 곳이 없다. 허전한 마음으로 슬픔에 젖은 땅을 밟는 나그네의 눈동자에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힌다. 로마의 지혜의 여신으로 알려진 ‘미네르바’, 철학자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명언으로 철학사의 한 페이지를 수 놓았다. 한쪽 눈을 가리고 내 편만 보는 맹목적인 열성 팬들이 거리를 휩쓰는 세상, 홍위병이 따로 없는 붉은 무리의 함성에 놀란 부엉이는 정든 바위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간 지 오래다. 언제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다시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까?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가는 그 날이 올지 궁금하다. (202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