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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 북쪽 오랑캐 8만여 기가 밤에 의주(義州)를 습격해 왔는데, 이는 강홍립(姜弘立)이 인도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한윤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해서 강홍립을 격분시키기를,
“반정 후에 강씨 일문은 모조리 살육되었다.”
하니, 강홍립이 격분하여 오랑캐 추장을 권하여 군사를 일으켜 앞장서서 이들을 인도한 것인데, 강홍립이 거느린 적병 또한 뛰어난 정예 군병이었다. 강홍립은 전에 원수로 있을 적에 자못 민심을 얻었던 탓으로 평안도 백성들은 강홍립이 선봉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싸움도 않고 항복하였다.
의주의 함락은 뜻밖이었으므로, 부윤 이완(李莞)ㆍ판관 최몽량(崔夢亮)의 패전이나 인산첨사(麟山僉使) 김제정(金濟鼎)의 죽음은 괴이할 게 없는 듯하나, 능한(綾漢) 산성의 궤멸, 안주의 패배는 강홍립이 꾀인 소치가 반드시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강홍립은 포로된 김진(金搢)을 통해서 숙부와 형이 생존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비로소 자기가 한윤이 꾀임에 넘어갔음을 알았다고 한다.
●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은 능한산성에 있다가 적에게 포로 되었고, 평안 병사 남이흥과 안주 목사 김전(金悛)ㆍ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 등은 모두 안주로 들어가 성 머리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성공치 못할 것을 알고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 적병이 승승장구하자,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는 황주성을 포기하였다. 적기(賊騎)가 이미 평산(平山)에 이르니 대가는 강도로 행차하는 한편,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을 보내서 강홍립을 중개로, 강화를 청하였다. 적이 왕자를 인질로 요구하자, 원창군(元昌君)을 왕제(王弟)로 삼고 이홍망(李弘望)을 사신으로 하여, 적의 진영에 보내니 적은 크게 기뻐하여 용골대(龍骨大)ㆍ유덕(劉德) 등을 보내 와서 어전에서 삽혈(歃血)하고 형제 됨을 약속,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 뒤 돌아갔다.
● 이홍망 등이 심양(瀋陽)에 들어가니 적의 추장은 특별히 우대한 뒤 예를 갖춰 돌려보내 왔으며, 이로부터 호국(胡國)의 사신이 뻔질나게 오가고, 주화(主和)ㆍ척화(斥和)의 논란이 다시 일어 조정은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오늘날의 일은 남송(南宋) 때의 일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이른바 강화를 주장하는 측의 의도는,
“우리의 세력은 약하디 약하여 쇠잔한 병기와 조각난 갑옷으로 곳곳에서 패했다. 종묘사직은 섬에 붙어 있고 만백성들은 모조리 어육(魚肉)이 되었다. 게다가 적의 기병들은 벌써 도성을 육박했는데 저 종택(宗澤)ㆍ악비(岳飛)ㆍ한세충(韓世忠) ㆍ유기(劉錡) 등과 같은 명장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선 화친을 허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단 물러나게 한 뒤에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병력이 조금 강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함이 불가할 것이 없다.”
는 것이다. 이들은 저 왕황(汪黃) ㆍ진회(秦檜) 등이 어버이를 잊고 원수를 섬겨 국토 회복의 대책을 저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른바 화친을 반대하는 자들의 의도는,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지국으로써 2백 년 동안 명나라를 아버지로 섬겨왔다. 노적(奴賊)은 천조에게 더없는 큰 원수이니, 천조에게 더없는 원수이고 보면, 우리나라에 또한 불공대천의 원수다. 이 불공대천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어 어전(御前)에서 삽혈하였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러한 욕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
는 것이다. 이들은 그 의논이 당당하고 늠름함이 추상같아서, 저 호담암(胡澹菴) ㆍ진동(陣東) ㆍ구양철(毆陽澈) 의 상소에 비해 조금도 못할 것이 없지만, 나라 형편이 어떠함은 알지 못하고 다만 비분강개한 마음만을 품었으니, 한낱 처사(處士)의 큰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10월, 횡성(橫城)의 이인거(李仁居)가 모반, 군사를 모아 충청도로 향하려 했다. 전의현(全義縣)까지 이르렀단 말이 전해지더니, 다시 조금 후에 들리기를 벌써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한다. 이인거는 전 교리 이추(李樞)의 손자로, 젊을 적부터 횡성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함께 직접 농사짓기에 힘쓰며 자기의 명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아 옛 은자(隱者)의 풍이 있었다. 반정 후에 조정이 그에게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을 특별 제수하였는데도 그는 사직소를 올리고 그 직에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의 절개를 더욱 높게 보고 그의 얼굴을 한 번 보기를 원하였다. 이즈음에 조정이 노적과 더불어 강화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명목을 세워 바쁘게 마을로 뛰어다니면서 군인을 모집하기도 하고 때론 관가에 들어가 무기를 빌리기도 하였다. 그가 팔을 걷고 큰소리를 치면 노한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여 그 당황하고 급급한 모양을 만약 옆 사람에게 보게 한다면 경악할 뿐,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횡성 현감 이탁남(李擢男)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서 곧 원주로 달려가 이를 보고하니 목사 홍보(洪)는 이인거 부자를 체포, 서울로 보내어 모두 형을 받게 하였다.
대개 홍보와 이탁남 등이 역전 끝에 그들을 체포했다는 설도 극히 우습기는 하지만, 설사 고요(皐陶)가 법을 집행한다 하더라도 인거의 죄는 반역이란 이름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고 한 자로 전에 이미 왕돈(王敦)과 환온(桓溫) 등의 무리가 있지 않았는가? 왕돈ㆍ환온은 군왕의 나라를 찬탈한다는 말을 차마 못해서 군왕의 측근을 맑힌다고 명목을 세운 것이니, 역적 치고는 심한 자이다. 이인거의 마음은 처음부터 역모에 뜻을 둔 것은 아니나, 임금 측근의 악을 맑힌다는 것이 곧 역모가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 곧 이치를 밝게 살피지 못한 해독이 결국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것이다. 수십 년을 산중에 은거하면서 읽은 것이 무엇이며, 궁구한 것이 어떤 이치란 말인가?
● 무진년(1628, 인조 6) 정월. 전 승지 유효립(柳孝立)은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ㆍ전 좌랑 정심(鄭沁)ㆍ전 전적 김탁(金鐸)ㆍ진사 유두립(柳斗立) 등 수십 인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여 도감 장관(都監將官) 윤계륜(尹繼倫) 등과 남몰래 결탁 내응을 삼고, 초 3일에 거사하려 했다. 그런데 정랑 허적(許ㅈ)ㆍ참판 홍서봉(洪瑞鳳)ㆍ유학 최산휘(崔山輝) 등의 고발로 관리 등이 에워싸고 그들을 체포할 때 수레에 무기를 싣고 입성하는 10여 명도 함께 잡았다. 국청을 설치하고 국문하여 모두 처형하였으며, 고발자 들은 공훈이 기록되었다.
● 을축년(1625). 박홍구(樸弘耈)의 아들 박지장(朴知章)과 그 조카 박성장(朴成章)ㆍ박윤장(朴潤章) 등이 진술한 초사에 그 역모의 형태가 낭자하였으나 이들(유효립 등)만큼 흉악 처참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당인 임취정(任就正) 부자(父子)는 꿋꿋하게 참고 유효립과 함께 모역한 실상을 승복하지 않았으나 그의 조카의 고함에는 숨길 수 없어 끝내는 곤장 밑에서 죽었으니, 그들에게 다행이다. 그리고 평소 그의 집에 드나든 이종충(李從忠)ㆍ윤홍선(尹弘先)등도 역시 모두 죄를 인정하고 죽었다. 이들은 모두 임취정과 함께 공모한 자들이었다.
● 정축년(1637, 인조 15)정월. 윤운구(尹雲衢)의 억울한 죽음은 송광유(宋匡裕)의 무고에서 연유되었는데, 찰방 조존중(趙存中)은 소를 올려 사실을 말하여 구원하다가 도리어 죄를 얻은 자다. 이러한 일은 근자에 드문 일로서 이미 윤운구가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보고도 자기의 몸은 돌아보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소를 올려 그와 더불어함께 죽음에 나아가고자 하였으니, 이쯤 되면 죽음으로써 벗에게 허락한다는 의리에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다고 하겠다. 어떤 이는 ‘양숙(養叔.조존중)의 이러한 행동은 윤운구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 뿐더러 자신에게 해가 있는 일이니만치, 맨손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옛적 동경당인(東京黨人)으로 죽은 이들이 모두가 천하의 명현(名賢)들이었기 때문에 도요장군(度遼將軍) 황보규(皇甫規)는 서주(西州)의 호걸로서 그들에게 끼이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곧 소를 올려 함께 죽기를 자청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정은 그의 죄를 묻지 않았고, 후세 사람은 잘못이라 아니하였다. 오늘의 양숙은 황보규보다 한층 더하다. 평생 죽음으로 서로 허락한 친우가 남의 모함에 걸려 역적의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받고 있으니, 남은 목숨이 지기 전에 행여 임금의 마음을 돌이킬까 하고 소를 올려 구원을 펴보는 것이 이렇듯 급한데, 어느 겨를에 자신의 보존을 돌보겠는가? 그러다가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와 한 몽둥이 밑에 달갑게 죽을지언정 혼자 세상에 살아 있지 않겠다는 것이 곧 그의 뜻이었다. 아! 양숙의 기절(氣節)이야말로 전국 시대에서조차 흔히 볼 수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 하겠다.
● 경오년(1630, 인조 8). 목릉(穆陵.선조의 능)을 이장한 것은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서 비롯되어 여러 술사(術士)들의 황당한 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목릉의 재궁(梓宮.임금의 관)에 물이 침범했다는 말이 이미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으니, 능지를 옮겨 잡는 것을 어찌 말겠는가? 현궁(玄宮.광중)을 파본 결과 흙은 여전히 건조한 채 물기가 젖어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으니, 그 뒤 술사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 유흥치(劉興治)가 가도(椵島)의 난을 일으킬 때, 명목은 모 도독(毛都督)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자기의 부귀를 위함이었으니, 천 리 바깥 고도(孤島)에 조정의 호령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심세괴(沈世魁)가 유흥치를 멸하고 대신 그 무리를 통솔했으니, 마치 당 나라의 번진(藩鎭)의 폐해와 유사하였다.
● 계유년(1633) 여름. 한성부의 못물이 며칠 동안 피처럼 붉었으며, 7월 17일엔 인정전(仁政殿) 안의 기둥이 벼락을 맞은 데가 두세 곳이었다.
● 을해년(1635) 7월 13일. 비바람이 크게 일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으며 막 패어난 벼이삭이 거의 말라 죽었다. 목릉(穆陵)의 석물은 바닥에 넘어지고 축대는 무너져서 흡사 파헤친 모양과 같았으며, 건원릉(健元陵.태조의 능)의 수백 년 묵은 교목(喬木)에 벼락이 떨어졌다. 홍서봉(洪瑞鳳)은 예조 판서로서 직접 목릉에 가서 살펴본 뒤 돌아와서 아뢰기를,
“능위가 무너진 것은 곧 비바람에 의해 무너진 것이요 결코 벼락에 맞은 것이 아니옵니다.”
하고, 그때 오정승(오윤겸)은 영의정으로 있었는데, 역시 살펴보고 돌아와 아뢴 것이 예조 판서와 동일하고, 참봉의 치보와는 딴판이었다. 때문에 참봉 홍유일(洪有一)은 곧 심문 받고 삭직 추방되었다. 당초에 참봉의 보고는,
“능위에 번개불이 대낮 같고 천둥소리가 밤새껏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튿날 살펴보니 능위와 석물이 앞에 진술한 바와 같기에 사실대로 보고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원종(元宗)을 태묘(太廟)에 부(祔)하는 일이 겨우 며칠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의정의 보고에, 그것은 재변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대례(大禮)를 이미 전에 잡아 놓은 날로 행하였다. 몇 달 뒤 홍서봉은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해 12월 초 9일 인렬왕후(仁烈王
后.인조의 비)는 산후(産後)에 승하하였다.
● 병자년(1636, 인조 14) 3월. 노적(청나라를 말함)이 천자를 참칭하고 용골대(龍骨大)ㆍ마보대(馬保大) 등을 보내었다. 그들은 청군(淸軍) 백여 명과 몽고 병 수십 기를 인솔하고 와서 인렬왕후의 빈소에 치제(致祭)하고자 하였으니, 그 저의는 황제 됨을 자랑하고 싶은 한편, 우리나라가 저희들을 후히 접대하는 것을 몽고에게 보이려고 함에 있었다. 그들이 입성하자, 조정에서 그들을 대하는 예절이 전에 비해 조금 엷었으므로, 그들은 마음이 자못 불만스러운 참이었는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불살라 황제의 참칭을 크게 물리치라는 장령 홍익한(洪翼漢)의 상소와 성균관 유생들의 잇따른 소장은 그들의 마음을 한층 의아하게 하였다. 또 그들은 우리의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휴대한 것이 평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크게 놀랐으며 곧장 시가지로 나가니, 아이들은 부서진 기와를 던지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따라 다니었다. 그들은 도성을 벗어나 흩어져 여염집으로 들어가 말을 빼앗아서 거두어 귀로(歸路)로 향하였다. 조정은 그들의 오감에 대해서 방임한 채 다시 묻지 않았다.
한편 위에서는 8도에 유지를 내려 화친을 통렬히 배척하는 뜻을 보였는데, 평안도로 보낸 유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그들은 그것으로 실증을 삼아 우리나라가 약속을 배신했다고 하여 강물이 얼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정은 이러한 적의 실정도 염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변방의 일을 일체 도외시하였다.
● 11월, 조정은 박노(朴)를 심양(瀋陽)에 보내서 기미책(羈縻策)을 쓰려 하였는데, 이미 그들은 군병을 동원한 뒤였으니, 어찌 이를 막을 수 있었으랴? 박노가 겨우 황주(黃州)에 이르렀을 때 적병들이 벌써 육박해 왔으므로 그는 한 마디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14일 벌써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린 수백의 기병은 사현(沙峴.모래내)에 도착했다. 대가(大駕)가 강화로 옮기기 위해 남대문에 채 이르기도 전에 적병이 사현에 있다는 말이 또 들려왔으므로 최명길ㆍ이경직(李景稷)ㆍ신경진(申景禛) 등을 보내어 다시 화친을 요구하였다. 용골대ㆍ마보대 등은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깊숙이 들어와 화친을 성언(聲言)하였으나 사실은 후원 부대가 이르기 전에 우리의 전투계획을 그르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대가는 수구문(水口門)을 벗어나 겨우 남한산성에 이르렀는데, 이날 아침 일찍이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빈전(嬪殿)은 벌써 강화로 떠났고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平大君), 원임영돈령부사 윤방(尹昉), 영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 판서 강석기(姜碩期), 판서 이상길(李尙吉), 회은군 덕인(懷恩君德仁), 해숭위(海崇尉 선조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남편) 윤신지(尹新之), 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 판윤 김경징(金慶徵), 참판 이민구(李敏求)ㆍ여이징(呂爾徵), 승지 한흥일(韓興一), 필선 정백형(鄭百亨)ㆍ윤전(尹銓), 봉상시 정 이시직(李時稷), 익위사 강위빙(姜渭聘),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瑩) 등이 그뒤를 따랐다.
체찰사 김유(金瑬)는 그의 아들 김경징으로 검찰사(檢察使)를, 이민구(李敏求)로 부사(副使)를 삼아 강도(江都)의 사무를 주관케 하고, 유수(留守) 장신(張紳)으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하였다.
한편 남한산성에 미처 호종하지 못한 이는 예조 판서 조익(趙翼), 전 참의 심지원(沈之源)ㆍ홍명형(洪命亨), 돈령부 도정 심현(沈誢), 전 장령 송국택(宋國澤)ㆍ이강(李綱), 전 병사 정호서(丁好恕), 부사 한언(韓琂), 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좌랑 유황(兪榥), 교리 윤명은(尹鳴殷)ㆍ박종부(朴宗阜), 좌랑 이행진(李行進), 정자 정태제(鄭泰齊)ㆍ윤양(尹瀁), 전 정자 조희진(趙希進), 현감 윤훈거(尹勛擧), 감찰 최지위(崔地緯)ㆍ이선(李䆄)ㆍ홍처준(洪處俊), 찰방 정언원(丁彦瑗)ㆍ이경선(李慶先)ㆍ전 도사 이공익(李公益)ㆍ이관(李瓘), 전 세마 허국(許國), 직장 심억(沈檍), 현감 윤효생(尹孝生)ㆍ권익경(權益慶), 군수 이돈오(李惇五)ㆍ 윤탄(尹坦), 주부 고진민(高振民), 첨지 이무림(李武林), 전 승지 최유연(崔有淵), 전 정랑 심척(沈惕), 좌랑 임선백(任善伯), 첨지 최보남(崔輔男), 참봉 최노(崔櫓), 전 수사 민인길(閔仁佶), 현령 윤복원(尹復元), 도사 윤인연(尹仁衍), 감역 권억(權嶷), 선성수(宣城守), 위성령(渭城令), 우참찬 박동선(朴東善), 전 참의 이명한(李明漢), 전 승지 이소한(李昭漢), 전 교리 이일상(李一相), 전 정자 이가상(李嘉相), 좌랑 신휼(申恤), 주서 임전(林), 전 도사 이시필(李時苾), 봉사(奉事) 한진하(韓振夏), 종묘 직장 여이홍(呂爾弘), 현령 민광훈(閔光勳), 봉사 지봉수(池鳳壽), 사직 참봉 이진행(李振行), 현감 채충원(蔡忠元), 개성 도사 홍정(洪霆), 수릉관(守陵官) 홍보(洪), 참봉 홍주명(洪柱溟)ㆍ홍주언(洪柱彦)ㆍ이영(李翎)ㆍ조시량(趙時亮), 전 수찬 김설(金卨), 전 익찬 김향(金嚮), 첨정 조척(曹倜), 풍덕 군수 이성연(李聖淵), 고양 군수 권훈(權勛), 교하 현감(交河縣監) 강문성(姜文星), 교리 심동귀(沈東龜), 전 목사 이영식(李永式), 연계령(連溪令)ㆍ낙양령(洛陽令), 전 세마 신익륭(申益隆), 감목관 심핍(沈愊), 전 감찰 이장영(李長英), 정자 이정영(李正英), 경기 도사 목행선(睦行善), 현령 박창(朴敞), 참군 윤강(尹), 참봉 신광일(申光一), 전 창방 안철명(安哲命) 등이었고, 나머지 생원ㆍ진사ㆍ유학ㆍ무신과 전에 삼의사(三醫司)에 벼슬하던 이와 금군(禁軍) 등은 종사(宗社)와 빈전(嬪殿)이 계신다 하여 모두 강화도로 들어갔다.
● 15일. 적병의 선봉이 남한산성 밑에 진을 쳤는데, 잇따라 들어오는 자가 10만에 달했다.
애석하도다. 용골대와 마보대가 거느렸던 군사는 수백에 불과했으며, 밤낮 2천여 리를 달려온 나머지 추위와 굶주림이 극에 달했었다. 이때 우리는 도감의 포수(砲手)가 4천여 명이요, 어영군(御營軍) 또한 수천 명이었으니, 이 중에 정병 1~2천 명만 뽑더라도 지칠 대로 지친 적의 선봉 수백 명 꺾기는 썩은 나뭇가지 꺾듯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뒤에 도착한 적의 후원 병 들이 어찌 이처럼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겠는가? 묘당에는 이런 계획을 낸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산성은 두 달 동안 포위되었다가 끝내는 임금을 적들에게 내주었으며, 허다한 생령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으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 정축년(1637, 인조 15) 정월, 적중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강화도로 도망해 와서 다들 말하기를,
“서울에 있는 노적들이 열 명쯤 태울 만한 나룻배 백여 척을 독촉하여 만든다.”
하니, 장신(張紳)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노적이 아무리 사납다고 하지만 어찌 육지에서 배를 띄우겠는가? 한강에 얼음이 풀린 뒤에 적선이 만약 강을 따라 온다면 우리는 전선(戰船)을 가지고 낱낱이 깨뜨려 침몰시킬 것이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나룻배가 통할만한 곳은 갑곶(甲串)ㆍ광성(廣城)ㆍ연미정(燕尾亭)ㆍ승천부(昇天府) 네 나루뿐이요, 그 나머지는 물길이 험악하여 쉽사리 배를 띄울 수 없으며, 또 연미정ㆍ승천부ㆍ광성은 서로의 거리가 거의 10리나 되기 때문에 배를 띄우기가 또한 편리하지 못하였다. 갑진(甲津)은 나룻길이 매우 좁아 일위(一葦)로도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나룻머리 의심스러운 곳 한 군데도 방비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호적 수십 기가 강 언덕에 달려오곤 한 것은 이곳 지형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었는데, 강도의 제장들은 전혀 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천연적인 참호인 강이 여기 있는데 북쪽 군대가 어떻게 날아서 건너온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술에 취해 날을 보내는 이도 있었으므로, 진사 김익겸(金益兼)ㆍ윤선거(尹宣擧) 등은 글을 올려 이를 풍자하였는데, 그 가운데 ‘와신상담할 이때에 술잔이라니[嘗薪在卽 杯盤非詩]’란 말이 있었다.
● 21일 밤. 통진 현감(通津縣監) 김적(金迪)이 치보하기를,
“노적이 배를 운반해서 갑진(甲津) 건너편에 도착한 자가 대략 수만 기나 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본 강화부의 병선은 모두 광성(廣城)에 정박되어 있고,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거느린 선단(船團)은 연미정(燕尾亭)에 있었기 때문에 갑진에 정박된 배라곤 한 척이 없었으며, 변란에 대비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 22일 새벽. 유수 장신(張紳)이 비로소 수군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 갑진으로 향했는데 5 리를 채 못 미쳐서 적군이 홍이포(洪夷砲)를 쏘았다. 거위 알 만한 포탄이 날아와 갑진창(甲津倉) 앞에 떨어지는데 이것에 맞은 사람은 모두 가루가 되었다. 유수가 탄 배가 가리산(加里山) 밑에 정박하자, 뒤따르는 모든 배들은 차례로 정박하고 다시 전진하지 못했다. 강진흔(姜晉昕)의 병선도 맨 선두의 배가 포탄에 맞았으므로 강진흔 또한 겁에 질려 움츠리고 감히 출전하지 못하였다.
정포만호(正浦萬戶)가 화살을 무릅쓰고 배를 띄워서 돌진하는 바람에 적신 한 척이 여기에 부딪혀 강 속으로 침몰하였다. 이쪽의 배 한 척이 포탄에 맞아 부서지자, 만호의 배 단독으로는 감당키 어려워서 우군의 배 속으로 달아났다. 결국 갑진 일대는 적선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는 채 적선 수십 척이 멋대로 오갔다. 적병이 물을 건너와 언덕으로 오른 뒤에야 강화 중군(中軍) 황현남(黃顯男)이 겨우 칡뿌리를 캐러 간 자들을 모집, 천 명이 차지 않은 사람 으로써 비로소 방어 계획을 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힘이 상대가 되지 못하여 몸이 적의 흉악한 예봉에 죽고 군사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이에 앞서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ㆍ전창군(全昌君) 유정량(柳廷亮)ㆍ전 승지 유성증(兪省曾) 등은 모두 소모사(召募使)로 나가 각기 수백 명씩 모집해 돌아와서 강변의 요소를 나누어 수비하였는데, 적병이 상륙했다는 말을 듣자, 아무런 계략이 나지 않아 영을 내려 진을 해산한 후 배를 타고 바다로 들기도 하고 피하여 산으로 오르기도 하였다. 대개 소모사의 본래 의도는 그들이 거느린 유생들은 병기를 알지 못하는 자들인 만큼 목적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배에 탄 적들을 올라오지 못하게 할 따름이며, 짧은 도검 따위로 접전하는 일은 응당 마음에 기약한 바가 아니었다. 또 갑진의 수비가 깨진 뒤엔 군진을 해산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은 곧 오합지졸로 모아진 유생들의 손엔 칼 한 자루가 없으니, 적들과 맞싸우는 것은 곧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형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 검찰사(檢察使) 등은 성중으로 들어오지 않고 강안(江岸)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다. 적병의 선봉이 성 안으로 육박하자, 승지 한흥일(韓興一)은 성문을 닫고 성안의 남녀들을 규합, 마치 방어계획이라도 세우려는 듯이 하였으니, 이 얼마나 오활(迂濶)한 일인가? 정예병사와 건장한 무부로서도 천연적인 참호인 강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수백이 채 안 되는 힘없는 남녀들로 태반이나 허무러진 성첩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빈전은 사태가 어쩔 수 없음을 이미 알고 두 살 난 원손(元孫)을 부모(傅母)에게 맡겨 환관 한 명과 함께 성을 나가 멀리 피하도록 하니, 송국택(宋國澤)은 자기가 탄 말을 부모에게 주고 자기는 도보로 수행, 한 척의 배를 겨우 얻어 타고 섬으로 피했다.
● 우참찬 박동선(朴東善)과 참의 심지원(沈之源)은 동문으로 나가 각기 배를 타고 피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은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마치 방어를 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때 양 대군(봉림대군과 인평대군)과 참의 홍명형(洪命亨)ㆍ경력(經歷) 장우한(張遇漢) 등이 앞에 서 있는데, 김상용은 서문루에 싸움을 독려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며, 양 대군을 서문루로 권하여 보냈다. 그리고 경력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너는 관청의 일을 점검해야 되니, 여기에 있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장우한이 가자, 그는 앞에 놓여 있는 화약궤에 불을 붙이게 하니 남문루는 즉시 공중에 날았다. 홍명형(洪命亨)과 김익겸(金益兼) 등도 이 불길에 싸여 죽었다.
● 판서 이상길(李尙吉)의 농장이 선원촌(仙源村)에 있었는데, 강화로 천도한 이후 그는 연로하므로 국록을 먹지 못한다고 스스로 농장에 있었다. 그는 중대한 일이 아니면 결코 성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적기가 상륙했다는 소문을 듣자, 아들 이경(李坰)을 불러 분부하기를,
“너는 마땅히 소모사(召募使)가 되어서 너의 직분을 다해야 한다. 결코 이 늙은 아비는 생각지 말라. 이 아비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 벼슬이 정경(正卿)의 지위에 있었으니, 적이 만약 입성한다면 사직과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 곧 나의 직분이다.”
하고, 가사를 정리한 후 성 안으로 들어가 적을 꾸짖고 죽었다. 적도가 성 밖에 결진하면서 즉시 성 안을 도륙하지 않은 것은 성 안에 정병이 많이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우리의 무방비 상태를 알았던들 무엇을 꺼려서 도륙하지 않았겠는가?
● 구왕자(九王子)는 곧 통역 정명수(鄭命壽)ㆍ김돌시(金乭屎)를 통해 성 안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성을 나와 강화를 청한다면 그것을 허락하겠노라.”
하므로, 곧 경력 장우한을 시켜 쇠고기와 술을 들려 보내서 구왕자 보기를 요구하니, 구왕자는 “수상이 나와야 들어줄 수 있다.”
하였다. 윤방(尹昉)이 나가니, 그들은 다시,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와야 된다.”
고 하였다. 이튿날 다시 가니, 구왕자는 드디어 윤방을 접견하고 다시 승지 한흥일을 불러 강화의 뜻을 비로소 밝혔으며, 그리고 궐내에 들어와 빈전을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서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 한 뒤, 그들은 병사들을 풀어 성 안의 재물과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김반(金槃)의 부인 서씨, 장차주(張次周)의 처 김씨, 정백창(鄭百昌)의 부인 한씨, 김유(金瑬)의 부인 유씨, 장유(張維)의 부인 박씨, 김경징(金慶徵)의 부인 박씨, 정효성(鄭孝誠)의 부인, 윤선거(尹宣擧)의 처, 김진표(金震標)의 처 등이 모두 목을 매어 자결하였고, 강석기(姜碩基)ㆍ장신(張紳)의 부인, 장우한(張遇漢)의 처는 궐내로 들어간 덕분에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그 외 나이 젊고 인물이 고운 부인들은 다 붙들려 갔다.
● 구왕자가 거느린 공(空)과 경(耿), 두 적(賊)의 병사들은 또한 경내에 가득 퍼져 곳곳을 뒤져 여자와 명주 및 보물들은 싹 쓸어가지고 돌아갔다.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이달(정월) 30일, 구왕자는 우리의 빈전과 양 대군을 위시하여 성 안에 남아 있는 대소신서(大小臣庶)들을 강제로 육지로 내보내 모두 남한산성으로 보내어 이들을 산성 안에 과시, 속히 출성하도록 종용하였다.
● 강화도 촌사(村舍)에 있던 도정(都正) 심현(沈現)은 적기가 입성했다는 소문을 듣자, 곧 조복을 입고 띠를 맨 후 남한산성을 향해서 네 번 절하고는 부인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으며, 이시직(李時稷)은 절명사(絶命詞)를 지어 아들에게 보내고 친구 송시영(宋時瑩)과 함께 목을 매어 죽었다. 정백형(鄭百亨)의 죽음 또한 옛 사람에 비해 부끄럼이 없는 죽음이었고, 그 외 심척(沈惕)ㆍ강위빙(姜渭聘)ㆍ이돈오(李惇五)ㆍ윤전(尹烇) 등이 모두 난병(亂兵)들에게 죽었으며, 유생과 부녀자 중 효(孝)와 절개를 위해 죽은 자는 이영(李翎)ㆍ김씨ㆍ오(吳)씨 등으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다.
●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두 달, 왕사(王事)에 힘쓴 자를 보면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는 진작 군대를 이끌고 대가가 입성한 지 며칠 안 되어서 올라왔으나 진을 채 치기도 전에 적기들이 갑자기 닥쳤으므로 그는 광주의 험천(險川)에서 대패, 겨우 몸만 살아났으며, 병사 이의배(李義培)는 어디로 갔는지 끝내 소식이 없었고,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의 군병은 광주(廣州) 광교산(光交山)에서 자멸하였다. 감사 심연(沈演)은 가장 뒤늦게 출병, 자신이 충주에 앉아서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싸움을 감독 격려하였고, 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은 군병이 모두 전멸, 몸마저 보존하지 못했으며,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는 춘천과 양평 사이에 진주하여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을 보내어 검단산(黔丹山) 싸움에서 조그만 승리를 거두었으나 끝내는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다. 남도병사 서우갑(徐右甲)ㆍ북도 병사 이항(李沆)은 지평(砥平)ㆍ양근 사이까지 바싹 진군하였으나 끝내 입성하지는 못했다.
● 한편 산성에서는 시위(侍衛) 신료들이 모두 항오를 짜서 밤낮으로 성첩을 지켰으나 군량이 거의 떨어져서 형세는 궁색하게 되었다. 게다가 또 강화도가 이미 함락되어 빈전과 양 대군이 성 밑에 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런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제장들 중에는 왕에게 출성을 권하는 자도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될까 두려워 다만 화친을 내세워 강화를 반대하였던 대간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을 묶어 적진에 보냈을 뿐이고, 정월 30일에 출성을 결심하였다. 이때 판서 김상헌(金尙憲)과 참판 정온(鄭蘊)은 성을 등지고 일전을 감행 사생을 결판하자고 청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목 놓아 울다가 자결하려 했는데, 자제들의 만류로 죽지 못했다. 왕이 출성한 뒤 이들은 각기 영남으로 내려갔다. 이들의 정충대절(精忠大節)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지가 온통 비린내 나는 중에서도 오히려 늠름한 생기를 느끼게 하였으니, 사실 이 두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동방의 2백 년 기강을 누가 붙들었겠는가?
● 홍익한은 서윤(庶尹)으로서 이때 평양에 있었는데, 전에 장령으로 있을 적에 올린 ‘사신을 참하고 문서를 태우라’는 소장으로 인하여, 역시 심양에 잡혀갔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이 정기가 있고 당당하여 죽을 자리에 죽을 소원을 가지고 털끝만큼도 꺾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야말로 세상에 헛되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를 수 없다.
● 노적의 두목이 포위를 풀고 돌아갈 때, 동궁전과 빈전, 봉림대군과 부인이 심양에 끌려갔고,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자제들 또한 볼모로 끌려갔으며, 나이 젊은 부녀자들은 시녀라는 명목으로 역시 선발되어 갔었다. 그 외 약탈된 남녀들은 매겨진 값을 받고서 놓아주기를 마치 노비를 매매하는 예와 흡사히 하였다. 그 극도로 흉악한 그들의 짓은 도리어 먹이를 훔쳐먹는 개나 쥐와 같았으니, 옛 유요(劉曜) 나 석늑(石勒) 의 죄인이다. 아골타(阿骨打).ㆍ홀필렬(忽必烈) 등을 어찌 만분의 1이나 따르겠는가?
● 이해 겨울, 용골대ㆍ마보대 두 노적은 칙사랍시고 서울에 왔는데 그 소행을 자세히 살펴보매 참으로 개돼지였다. 그들은 여러 다른 호적들과 함께 여곤(餘捆.무대?) 위의 광대놀이를 구경하는데 몸을 기울이고 손을 흔들며 그 모양을 흉내 냈다. 그리고 밥을 먹을 적에 밥상머리에 끄떡거리는 모양과 강제로 기생을 데려다 놓고 상하가 번갈아 간음하는 일은 차마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대할 수 없게 하였다. 금나라ㆍ원 나라 사람이 다 이와 같다면 어떻게 중원(中原)에 들어가 임금이 될 리가 있겠는가?
● 경진년(1640, 인조 18) 겨울, 호적 용골대는 유석(柳烓)과 이규(李碩)의 계사(啓辭)에서 어떤 논을 듣고는 김상헌(金尙憲)의 이름을 자세히 몰라, 오목도(梧木道)와 함께 와서 용만(龍灣)에 주재하고 척화신(斥和臣) 지사양(至斜陽)을 찾았다. 우리나라엔 본래 사양(斜陽)이란 이름이 없다고 대답해도 될 터인에,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은 김상헌의 이름을 써서 용골대에게 제시하니, 정(正) 조한영(曹漢英)과 유학 채이항(蔡以恒) 등이 잇따라 그들의 이름을 그 옆에 병서(竝書)하려고 하였다. 이항 등이 다 불리어 북송(北送)되자, 조정에서는 청음(淸陰.김상헌)을 의주로 보내어 용골대에게 넘겨주었다. 청음을 심문하기 위해 용골대 앞으로 끌고 들어가자, 청음은 그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용골대가 묻기를,
“너는 무엇을 범했는지 낱낱이 말하라.”
하자 청음은,
“나는 알지 못한다. 만약 쭉 지적해서 말한다면 그에 따라 대답하겠다.”
하였다.
“너의 국왕이 출성(出城)할 적에 너는 어찌해서 따르지 않았느냐?”
“내가 늙고 병들어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따르지 못했다.”
“직명(職名)을 받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나의 노병 때문에 조정은 애당초 나에게 직을 제수하지 않았다. 어떤 직을 제수하였는데 내가 받지 않았다고 하느냐?”
라고 대답한 뒤 다시,
“너희는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느냐?”
고 되물었다. 용골대는 말하기를,
“네가 국왕에게 수군을 허락하지 말라고 권유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수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내가 비록 국왕에게 권했지만, 조정은 내 말을 쓰지 않았다. 이는 군신간에 서로 주고받은 말이거늘, 타국인이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니, 오목도(梧木道) 등은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가장 다루기 힘든 늙은이구나.”
하였다. 청음은 조한영ㆍ채이항 등과 심양에 들어가 각기 별실에 구류되고, 신득연 역시 구금되었다.
● 들은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정축년(1637) 초여름. 동궁전을 모시고 심양에 갔다가 돌아온 무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홍서윤(洪庶尹.홍익한을 말함)의 생사를 여러 호적들에게 캐어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처음엔 살아있다고 다들 말하다가 다시 은밀히 물으니, 그제서야 벌써 죽었다고 하면서, 말에 항거했기 때문에 죽였다고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심양에 갈 적마다 널리 물어보았는데 그때마다 그들의 대답은, 당한(當汗.청태종을 말함)이 홍모(洪某)를 묶어 앞에다 놓고 무릎을 꿇게 하였으나 끝까지 끓지 않으므로 한(汗)은 전년에 쓴 척화소(斥和疏)를 내 보이면서, “내가 어찌해서 황제가 될 수 없느냐?”
하니, 홍모는 말하기를,
“너는 명나라의 역적이거늘,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하니, 한은 대노하여 곧 칼을 뽑아 참살하였다고 한다.
● 일설에는, 평양(平壤) 사람 가달(假㺚) 이용길(李龍吉)이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홍서윤을 아직도 정표(旌表)하지 않았느냐…… 그가 죽은 날은 초 5일이다.”
하였다고 한다.
홍서윤이 데리고 갔던 종 무작금(茂作金)은 돌아와서 말하기를,
“28일에 상전(上典)께서는 심양의 한 관소(館所)에 갇혀 있었는데, 호국의 박사관(博士官)ㆍ예부랑(禮部郞) 등이 와서 연회를 차려놓고 통역을 통해 7~8번, ‘황제가 보낸 것이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면서, 먹기를 십분 권하자, 상전은 답하기를, ‘나는 죄인으로 잡혀온 사람이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무례한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끝내 젓가락을 들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성이 나서 치워버렸다……"
하고, 또 말하기를,
“25일에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는다고 역관을 통해 말하기를, ‘너는 무엇 때문에 들어왔느냐?’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척화를 제일 먼저 주장한 대간으로 붙들려 왔다……’ 하매, 용골대는 다시 묻기를, ‘너희 나라엔 조정의 관원들이 많은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어찌 너 한 사람뿐이겠는가?’ 하니, 상전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비록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핑계하겠느냐?’ 하였다. 그는 재삼 간청해 묻기를, ‘너 외에 반드시 다른 사람이 있을 터이니, 꺼리지 말고 바로 말하라.’ 하니, 상전이, ‘지난해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갔을 적에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끊자고 청한 이는 다만 나 한 사람뿐이었다'고 대답하자, 용골대는 웃으면서 가버렸다.”
고 하였다.
● 《북행일기(北行日記)》에 홍익한(洪翼漢)의 기사는 이러하다.
● 정축년(1637) 2월 12일 밤. 유지(有旨) 안의 사의(事意)에 의하여 도사 전벽(田闢)은 증산 현감(甑山縣監)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나에게 차꼬를 채워 평양 두리도(豆里島)로 압송하고, 거기서 다시 금 나라 한(汗)의 진영으로 보내 그의 명을 듣도록 하였다. 이는 곧 지난해 봄에 있었던 척화의 일 때문이었다. 이날 나는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말하여 차꼬를 풀어줄 것을 애걸했지만, 대중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금 후에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찾아와 지극히 위로해 주었다. 내가 말하기를,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천한 이 목숨이야 논할 것이 없소. 내 비록 변변치 못한 사람이지만 어찌 한 번 죽는 것쯤을 두려워하겠소. 더구나 군명(君命)이 계시는데 도망한들 장차 어디로 가겠소. 다만 밥을 먹고 길을 뜨도록 이 묶음이나 늦추어 주면 좋겠소. ”
하니, 이순민은 대중을 애써 권유해서 풀어주게 했다. 식사를 하고 나니, 밤은 2경이 되었다. 강을 건너서 밤새도록 달리니 말이 피곤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드디어 어떤 곳에 멈추고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 13일. 새벽에 죽을 먹고 온종일 먹지 않은 채 말을 달렸다. 밤중에야 숙천(肅川) 지경에 도착, 민가에 들어 말도 쉬이고 잠깐 휴식하였다.
● 14일. 닭이 울자 일어나서 출발했다. 진시에 안주(安州)에 도착하니, 방어사 이준(李俊)은 금나라 한(汗)이 이곳을 지나 이미 멀어졌으니, 형세가 필시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에게 공문을 보내어 조정에 여쭙게 하고, 인하여 변대중으로 하여금 압송하여 선천 부사에게 넘겨 의주로 보내게 하였다. 이날 오후 안주를 출발하자, 눈이 많이 내렸다. 판관 김통가(金通可)는 쌀과 약과(藥果)를 보내 노자로 쓰게 했다. 박천군(博川郡) 앞에 이르니, 눈은 더욱 쌓이고 밤은 깊어 길을 잃었는데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인가를 찾아 들어가 잠깐 쉬었다.
● 15일. 첫닭이 울자마자 길을 떠났다. 주인 늙은이가 가는 사유를 듣더니 재삼 안타까워하면서, ‘공강정(控江亭) 앞으로 해서 빙복(氷腹)을 건너라’고 나에게 길을 일러주었다. 이른 아침에 가산군(嘉山郡)에 달려 들어가니, 군수 이탄(李坦)이 정주(定州)로부터 와 있었다. 말 위에서 이별하면서 잠깐 이야기하고 달려 정주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야 능한성(綾漢城)으로 갔다.
● 16일. 새벽에 능한성을 떠나 말을 달려 오시엔 선천(宣川)의 검산성(劍山城)에 닿았는데, 여기서 변대중은 나를 인계하고 뒤에 처졌다.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그것을 이시□(李時□)에게 전하게 하고 곧 말을 빨리 달려 축시에 의주(義州)의 백마산성(白馬山城) 남문 밖에 당도, 공문을 바치어 내가 온 사유를 알렸다.
● 17일. 여명에 부윤 임경업은 영을 내려 성문을 열었다. 그는 자리로 나를 맞이한 뒤 말하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만, 공의 이번 행차는 참으로 남아다운 일이요, 살아서는 능히 대의(大義)를 붙들었고, 죽어서는 청사를 빛낼 터이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소.”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나의 소장 하나로 말미암아 나랏일이 크게 그르쳐졌으니, 어느 틈에 다른 말을 하겠소.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제발 서둘러서 군명을 지체하지 않게 해 주시오.”
하니, 부윤은 나의 행자(行資)를 묻고 필요한 모든 것을 일체 갖춰 준 뒤, 곧 나를 압송해 갈 사람을 차출했는데, 그는 곧 미곶 첨사(彌串僉使) 장초(張迢)로 가만리(家萬里) 용천(龍泉) 사람이었다. 이날 오후 나는 의주의 옛 성에 나와서 잤다.
● 18일. 새벽에 길을 떠나는데 강의 얼음은 아직도 단단했다. 구룡만(九龍灣)에서부터 구련성(九連城)을 지나 금석산(金石山)에서 말을 먹이고 계성(桂城)의 각참(覺站)에서 잤다. 이날 저녁 비와 눈이 섞여 내리므로 나무를 가지고 숙소를 만들어 의지하였다.
● 19일. 봉황성(鳳凰城)을 지나 송참(松站)에서 잤다. 호인(胡人)이 와서 무슨 사명을 띠고 왔느냐를 묻고 또 안주(安州)의 수군에 관한 일과 섬 안의 일도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하니, 그는 곧 가버렸다.
● 20일. 통원보(通遠堡)까지는 아직 10리를 못 미쳤는데 찬기가 뼈에까지 사무치므로 한 곳에 멈춰 물을 끓여 먹으려는데 호인 넷이 와서 보고는, 목을 매고 멀리 온 까닭을 물었다. 그 연유를 갖춰 말해주니 그들은,
“공이 무슨 죄가 있소. 심양에 도착하면 한(汗)이 곧 석방해서 돌려보낼 것이오.”
하였다.
저녁에 통원보에 당도하여 잠을 잤다. 이 통원보는 압록강에서 2~3일 거리로 전엔 명나라 땅이었는데 지금은 허허 벌판이 되어 산천이 거칠고 초목이 우거지니, 답답한 깊은 숲에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새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우리는 한 곳에 머물러 나무를 얽어 움막을 치고 사초(莎草)를 베어 그 위를 덮었다. 그 춥고 고생스러움은 말하지 아니해도 알리라. 밤이 되자 그곳 수보관(守堡官)이 와서 우리의 오는 목적을 묻더니 곧 심양에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우리의 식사를 그때그때 마련해 주었다.
● 21일. 통원보에서 길을 떠났다. 눈이 온 뒤에 바람이 크게 일었는데 도중에서 배앓이로 무척 괴로웠다. 억지로 길을 걸어 두건보(斗建堡)에서 잤다.
● 22일. 천주참(川珠站)에서 잤다.
● 23일. 옛 요동(遼東) 이괘리(梨掛里)에서 잤다. 어떤 노인이 와서 꼬치꼬치 묻고 갔다.
● 24일. 사아보(沙阿堡)에서 잤다.
● 25일. 오전에 심양에 도착했다. 용만(龍灣)을 떠난 후 심양에 닿은 것은 9일 만이다. 짐을 들고 싣고 가는 호인들, 포로 되어 가는 남녀, 우마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가다보니, 한 낙타 등에 짐이 가득 실렸는데, 상서원(尙瑞院) 보가(寶家.어보를 간수하는 집)가 얹혀 있었다. 너무도 참담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옆 사람은 남의 속도 모르고 위로할 뿐이다. 지내는 참(站)마다 거의가 중화인 으로서 가달(假㺚)이 된 자이며, 위(位)에 있는 진달(眞㺚) 약간 명이 주장하였다. 중화인 들은 묶여진 나를 보고 그 까닭을 알고 나서 한탄하기를,
“참으로 충신이오. 만약 우리 대명(大明) 천자께서 이를 아신다면 얼마나 격려하겠소. 남아가 이쯤 되고 보면 죽어도 빛이 날 터인데 무엇이 한이겠소. 공은 참으로 충신이오.”
하고, 번갈아 위로해 주었다. 통원보에 도착하던 날, 동궁전과 대군을 한(汗)이 데리고 가더라는 소문을 듣고 의주(義州) 여자 난향(蘭香)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오는 동안 이르는 곳마다 물으니, 그렇다고도 하고 모른다고도 했다. 필시 믿을 만한 말 일텐데 의지해 물을 데가 없으니, 그저 참통 할 밖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날 용골대가 와서 연유를 묻고 갔다.
● 26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7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28일. 한이 박사관ㆍ예부관을 관소(館所)에 보내 주연을 베풀고 문답하였다. 박사관이 농을 걸기를,
“이번 길에 미녀를 얻어 돌아왔소.”
했다. 미녀란 곧 북병사 이항(李沆)의 딸이다.
“그녀는 늘 우리 시아버님을 뵙고 싶다고 말한다.”
하고, 이내 크게 웃었다.
● 29일.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 3월 초 1일. 소식이 없었다.
● 초 2일. 초 3일. 소식이 없어 쓸쓸히 앉아 율시 한 수를 읊었다.
양지쪽 언덕에 새싹 돋으니 / 陽坡細草坼新胎
우리 안에 갇힌 새 더욱 서러워 / 孤鳥樊籠意轉哀
초나라 풍습인 답청은 마음에도 없으나 / 荊俗踏靑心外事
금성의 벌주 마심은 꿈속에 아련하다 / 錦城浮白夢中來
바람이 모래를 날리니 음산이 움직이고 / 風飜夜石陰山動
눈이 얼음덩이 속에 들어가니 월굴이 열리네 / 雪入靑澌月窟開
실오리 같은 목숨 굶주리며 겨우 부지했지만 / 飢渴僅能聊縷命
평생 처음 오늘에야 눈물 볼을 적시네 / 百年今日淚盈腮
● 조선의 누신(累臣) 홍익한은 척화에 대한 뜻을 역력히 피력할 수야 있지마는 피차 말이 전혀 익숙해 있지 못하므로 부득이 글로 쓰노라.
“무릇 천하는 모두가 형제가 될 수는 있지마는, 천하에 두 아버지의 아들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서로 숭상하여 왔으며 간하는 신하는 오직 곧은 절개로써 기풍을 삼았다. 지난해 봄에 나는 마침 대간의 소임을 맡았는데, 금나라가 맹세를 변하여 황제라 참칭하니, 내 생각엔 과연 맹세를 변했다면 이는 패륜의 형제요, 황제를 참칭했다면 이는 두 개의 천자라고 여겨졌다. 한 집안에 어찌 패륜의 형제를 두며, 한 세대 안에 어떻게 두 천자가 있겠느냐? 더구나 금나라는 우리 조선과 새로 교린(交隣)의 약속을 하고서 먼저 그것을 배신했고, 명나라는 조선에 대한 옛 부터 보살펴 주는 은혜를 베풀어 그것을 더욱 깊게 맺고 있는데, 깊은 결속의 은혜를 잊고 먼저 배신하는 공약(空約)을 지키란 말인가? 이는 사리에 매우 합당치가 못하다. 때문에 먼저 이 척화의 의견을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함은 곧 신하된 자의 직분이요,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신하의 직분이란 충과 효를 다하는 것뿐이거늘, 위에 계신 임금과 어버이를 안전하게 모시지 못하여 왕세자와 대군은 다 포로가 되었고, 노모의 생사는 알 길이 없다. 한 상소의 맹랑한 진술로 말미암아 가정과 나라의 화패(禍敗)를 가져왔으니, 충과 효의 도는 모두 말살되었다. 스스로 나의 죄를 생각하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다. 만 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달가운 바이다. 내 피로 북[鼓] 틈을 바르고 내 혼이 하늘로 날아 고국에 돌아간다면 이 얼마나 상쾌하겠는가? 이 밖에 다시 할 말은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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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 글은 병자호란(1636년) 전후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특히 3학사의 한사람인 홍익한이 심양에 압송되어 죽음에 앞서 쓴 최후의 시와 결의도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