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 정유정 / 은행나무
전에 읽었던 정유정 작가의 소설들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카페에 기록된 나의 독서 노트를 뒤적여 보았다.
[네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그리고 [진이, 지니]까지 작가와는 거의 10년 관계를 맺어온 사이였다. 그의 작품은 늘 통기타와 드럼, 일렉 기타, 베이스와 키보드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시사이저를 가지고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데 마치 대 편성 관현악 음악을 듣는 느낌이 들게 한다. 줄거리는 희미하게 떠오르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닌, 줄거리로만 이야기될 수 없는 작품이 그의 작품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가 그의 작품은 띄엄띄엄 세상에 나온다. 그만큼 산고의 고통이 상당했으리라.
이 소설은 제목처럼 "완전한 행복"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정유정 작가만의 방법으로 이리저리 꼬인 "유나"를 삶을 풀어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행복"을 다룬 소설이지만 "악"과 겹쳐 있다. 독서 기록을 보니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소환되었는데 이번에도 소환되어 마땅하다.
인간의 삶에서 원치 않는 형편에 처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뜻과 관계없이 환경이 바뀌기도 한다. 그 원인이 안으로부터일 수도 밖에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바뀐 환경을 통해 어떤 사람은 성장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최악을 향하여 돌진하는 경우가 있다. 그 역시 처한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따라 많은 부분이 결정될 것이다. 어릴수록, 자아가 정립되지 않았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두 딸을 둔 가정이 집안 사정으로 둘째 아이를 시골 할머니 집으로 보낸다. 나(유나)는 가기 싫다고, 언니(재인)를 보내라고 목이 쉬도록 이야기하지만, 부모는 들어줄 수 없다. 프로이트 심리학이 강제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여기에서 출발하는 듯하다. 시골의 삶이 행복했다면 유나 인생은 달라졌을까.
첫 결혼에 실패한 신유나와 차은호는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며 제2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 작가는 행복을 아래 대화처럼 정의하면 발생할 수도 있을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한번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112
행복은 절대적인 개념일 수가 있는가. 계산할 수 있는 개념인가. 이 부부의 대화는 그렇듯 이치에 맞지 않으면서 부담 없이 읽힌다. 계산할 수 없는 것, 제거할 수 없는 것,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현대 사회는 행복을 계량화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며 심지어는 거래할 수 있는 것처럼 친절하게 장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여기 행복이 있으니 구매하라고, 가끔 세일하기도 한다.
아내에게 상처란 발아하지 않은 불행의 씨눈 같은 것이었다. 115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회는 "실패"에 대해 가혹하다. 멋진 문장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따위의 말들이 회자 되기는 하나 실상은 기독교인이 서로를 형제/자매라 부르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무의미한 문장임을 우리는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결혼에 "실패"한 두 사람이란 말이 주는 의미도 그런 것이다. "성공" 지상주의는 인간이 살아온 궤적에 대해 그런 식으로 난도질한다. "실패", "루저 Loser"의 꼬리표를 붙인다.
인간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우주를 가진다. 결함도 결핍도 없는 완전성이 아내의 우주였다. 행복은 가족의 무결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타협이 있을 리 없었다. 115
지는 게 망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첫 결혼에 실패한 후, 그의 우주를 지배하게 된 원칙이었다. 116
신유나와 차은호의 세계관을 작가는 위와 같이 설명한다. 두 사람의 세계관만 존재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다양한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다. 생각해보면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허다할 것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세계관, 철학이 꼭 필요할까 싶지만, 옛날처럼 단순한 환경에서는 한 사람의 행방을 굳이 추측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인간관계도 복잡하고 처한 환경을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고 더군다나 변화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자고 나면 변해 있는 현대에서 성인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다.
지유
서지유로 태어나서 차지유가 될뻔한 여자아이를 본다. 엄마 유나의 지배하게 완전히 갇혀 있는 듯하나 틈을 찾아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한 생명의 갈등을 작가는 독자에게 희망으로 전해준다.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고. 그러나 그 내면의 소리를 작가는 왜 "요망한 생쥐"의 소리로 표현했을까? 마치 완전히 끝나지 않은 공포형 영화를 대하는 기분이다. 께름칙하다. 소설이 아니고 영화라면, 양부 차은호와 러시아로 이민 간 지유를 통해 제2편이 나올 것이라는 예고를 보는 듯하다.
완전한 행복
세상에 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행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통해 신유나식의 완전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음을, 행복은 결함과 결핍 그리고 상처와 실패를 포함하고 있다고 는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