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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묵상글 들 (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 선종 기도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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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선종 기도
오늘 주님은 멸망의 때를 얘기하십니다.
노아와 룻의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홍수와 하늘의 불과 유황이
"모두 멸망시켰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멸망이 분명히 있고,
멸망의 때가 분명히 있는데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보지 못함을 말씀하시며 그 대표적인 예로 룻을 드십니다.
멸망의 때가 분명히 있고 멸망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가까이서 얼마나 많이 봅니까?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고나 병으로 죽는 것을 많이 보고,
그런 죽음이 아니더라도 부모와 가까운 친척이 죽는 것을 보는데도
멸망 다음을 보려고 하기보다 뒤 곧 멸망할 세상을 돌아보잖습니까?
그런데 뒤를 돌아보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고
직면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지요.
뒤를 돌아본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랄까 반대는 너머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죽음 너머를 보지 못하기에 죽음을 직면하기 싫어하고,
직면하기 싫기에 죽음도 외면하고 죽음 너머의 하느님도 외면하게 됩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죽음 너머에 하느님이 계심을 안다면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싫어서 뒤를 보지 룻처럼 않을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에 대해 걱정하고 그래서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고통은 많아질 텐데
그것들 안에서 또는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것들만 보는 저일까 봐 걱정하고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선종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인데
선종이란 것이 고통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이 닥쳐도 인간적으로는 그것들을 두려움 없이 맞이하는 것이요,
신앙적으로는 그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루를 끝내며 매일같이 제일 마지막으로 하는 성무일도 기도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인데
거룩한 죽음이 바로 선종인 것이고, 거룩한 죽음이란
하느님을 만나는 죽음이요 하느님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이지요.
이것을 묵상하는 위령 성월이고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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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한 때와 장소와 방식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재림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때에 벌어질 일을 물과 불에 의해 멸망하게 된 구약의 두 사건, 곧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때와 같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재림’의 준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노아와 롯의 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아 때에 대해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갔음을 말하고 있을 뿐, 특별한 죄나 부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사랑에 소극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이 장차 일어날 일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처럼, 비록 죄를 짓지 않는다하더라도 자신들의 인간적인 세속의 삶에 빠져 주님을 알려하지도, 하느님을 경외하지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지도 않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놓은 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의 25장의 ‘심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이 사랑하지 않았음이 문제였음을 말해줍니다(마태 25,31-47).
한편, 롯의 때에는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였습니다. 롯도 노아와 마찬가지로 장차 닥쳐올 재앙을 미리 알고서 소돔을 떠나는 조처를 취하고 구원받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안에 있는 세간 곧 소유물에 대한 애착으로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결국, 이 두 이야기는 ‘사람의 아들의 날’을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먹고 마심과 자신의 소유와 목숨의 보존에 매이지 말고, 그 때를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의 삶이 어디를 향하고, 누구를 향하여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곧 죽음을 향하여 있는지, 생명을 향하여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 17,37)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주님!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을 향하여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썩어 부패한 시체의 삶이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살아 팔딱거리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보존을 향한 죽음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생명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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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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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지혜서는 지금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힘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온갖 피조물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힘이 센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학문은 그 아름다운 질서를 찾아가는 인간의 노력이고, 모든 예술은 그 아름다움을 소리로나 형체로 느끼도록 해 주려는 인간의 노력이며, 모든 기술은 그 힘을 본따서 이용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피조물들의 아름다움과 힘에 감탄한 나머지 그것들을 신으로 떠받드는 우상숭배의 종교는 하느님께 대한 무지의 소치 때문에 나타난 헛된 것입니다.
학문과 예술, 기술의 정당한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그것들이 함부로 우상화되지 않고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대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학문과 예술과 기술을 이해하셨으면서도 그 한계를 깨우쳐주시느라고, 무지한 탓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닥치는 박해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의 수많은 이들에게 이런 가르침과 삶을 몸소 보여주셨는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현실이 이것입니다. 노아 때에 그 엄청난 대홍수가 일어나던 때에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쫓겨서 무심하게 각자 자기 일상에 파묻혀 있었으며, 십자가 죽음 이후에는 제자들까지도 겁을 먹고 다락방에 숨어 지냈기로 예수님께서 발현하셔서 끌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헛된 것을 좇는 세태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오히려 일상에서 부활 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학문에서든 예술에서든 또 기술에서든 거룩하고 참된 진리를 추구함으로써 창조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 찬란한 아름다운 질서를 경탄할 줄 알아야 하고, 힘의 질서를 경외하며 이용하되 나누어쓸 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그 때는 지금이요 그 자리는 여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날 수 있는 현존의 자리로서 이미 세 가지 양식을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말씀과 성찬과 섬김, 특히 가난한 이들을 섬김으로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과 함께 사십시오. 부활 신앙은 지금 여기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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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얼마 전,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했습니다. 미루고 미뤘던 정리였습니다. 하나씩 꺼내 보며 필요한 것도 또 반대로 필요 없는 것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서랍 깊숙한 곳에서 너무 좋은 펜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마음에 무척 들어서 아껴 쓰려고 서랍 속에 잘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끼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보니 아예 사용도 못 한 것입니다.
작년에 모친상을 치르고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본인은 아주 낡은 이불을 덮으시면서, 이 새 이불을 아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낀 새 이불은 제 용도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아끼다가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용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아낀다고 해도 이 세상의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처럼 아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기에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고, 롯 시대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는 데려가고, 또 다른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시지요.
이 사실을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을까요? 당연히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꾀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치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주님을 굳건히 믿고,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겸손하게 이웃에 봉사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 항구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끝날이 와도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언제일까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추스르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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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발걸음이 휘청거리게 내버려 두신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직 그분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대가 완전히 쓰러지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손을 꼭 붙잡으십시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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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성 게임.
우연히 예능 프로그램을 봤는데 초성 게임이 있었습니다. 단어의 초성 자음 2개를 말하면, 순발력과 어휘력을 발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ㄱ, ㅅ’이면 ‘감사’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이 유행인가 봅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데도 종종 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에 간 꼬마 아이가 돌아다니다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와 묻습니다.
“아빠! ‘시옷’하고 ‘미음’으로 시작하는 글씨가 뭐야? 어느 문에 초성으로만 쓰여 있어.”
이상한 마음이 들어 아이의 손에 이끌려 그 문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入口(입구)’였습니다.
맞습니다. 한자였습니다. 입구라는 한자어였지만, 한자를 모르는 아이는 한글의 초성 정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익숙한 것을 모든 상황에 맞추다 보면 진리에 더 멀어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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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과 미국의 장례문화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 한국은 조문 온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문 온 분들은 고인과 유족을 위해서 조의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천주교는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바칩니다. 미국은 ‘Viewing'이라는 예식이 있습니다. 특별히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의금을 내는 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관을 반을 열어서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고, 고인에게 애도의 인사를 한 후에 유족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종교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주교는 ‘Viewing' 전에 고인을 위한 연도를 바칩니다. 죽은 이를 묻어준 최초의 무덤은 대략 10만 년 전 쯤이라고 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시작되면서 죽은 이를 위한 무덤은 형태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람만이 행하는 풍습입니다. 무덤을 만든 다는 것은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임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망이 신앙이 되고, 종교가 되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우리는 가보지 않았지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곳을 희망하며 고인을 위한 무덤을 만들었듯이,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서 그런 세상을 만드신 분을 찬미합니다.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헬렌 켈러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라. 그대의 그림자를 못 보리라. 고개 숙이지 마라. 머리를 언제나 높이 두라. 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라.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통의 뒷맛이 없으면 진정한 쾌락은 거의 없다. 불구자라 할지라도 노력하면 된다. 아름다움은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그대가 정말 불행할 때 세상에서 그대가 해야 할일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그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언제나,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절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절망을 보는 사람은 버려지는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 희망을 보는 사람은 데려가는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시대에 방주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셨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열려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주도 열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구원의 방주에 머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하루가 모이면 감사의 일주일이 되고, 감사의 한 달이 되고, 감사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루가 모이면 사랑의 일주일이 되고 사랑의 한 달이 되고, 사랑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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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
- 하느님 예찬; 하느님이 답이다 -
하느님을 찾는 사람, 바로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 수도원에 온 수도자들입니다. 그러니 평생 여정이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요,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고, 평생 화두가 하느님입니다. 22년전 1999년 순교복자수녀회 연피정 지도시 강론 주제는 “오, 하느님!” 이었고, 언젠가 청담동 성당 대림 특강 제목도 “하느님”이었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런 하느님 공부의, 하느님 탐구의 롤모델은 예수님입니다.
하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33년 동안 하늘 배경의 불암산 기슭 여기 요셉 수도원에 살면서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느님의 얼굴을, 하느님의 마음을 대하듯 가장 많이 바라 본 하늘이고, 하늘에 대해 쓴 시들도 참 무수합니다.
“나무에게/하늘은 가도 가도/멀기만 하다
아예 호수가 되어/하늘을 담자”-1997.2.
“늘 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들
내 영혼/늘 하늘에 닿아있는/고요한 산능선이고 싶다”-1997.4
“이 가지 저 가지/가리지 않고/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하늘 사랑 꽃 피워내며
하늘로 하늘로/오르는/메꽃!”-1997.8
“나무는/평생/하늘만을 향해/살아 왔기에
하늘 사랑만으로/행복했기에
낮에는 햇빛 사랑/밤에는 달빛 은총
하늘 위로 속에/살아왔기에
꽃, 열매, 잎들/떠남에도/초연할 수 있는 거다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거다
그리움을 버텨낼 수 있는 거다”-1997.10
“그리움이 깊어/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되었다
영원한 하늘이/되었다
침묵의 하늘이/되었다
영원히 바라보는 눈빛이/되었다
하느님의 눈이/되었다/나는”-1997.11
“당신이/그리울 때
당신이/보고 싶을 때
눈 들어/하늘을 본다
한 눈 가득 들어오는/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흰 구름/빛나는 별들
한 눈 가득 들어오는/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보고 싶은 당신”-1998.11
하늘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샘솟는 열정이, 갈망이 바로 성소요 수도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제 좋아하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매 주일과 대축일 제1끝기도, 신명기 독서도 우리 가슴을 늘 새롭게 두드리며 마음 설레게 합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 주어라.”(신명6,4-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바칠때는 목이 메어 더 이상 기도를 바치지 못한다는 동방 수도자의 일화도 생각이 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삼위일체 과목 강의 중 “하느님”이란 말에 목이 메어 강의 도중 나갔다는 강우일 주교에 대해 신학생 시절 들은 전설적인 일화도 생각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 불행과 비극은 하느님 망각에서 기인합니다. 인생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이고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하느님 없이 답을 찾으려 하니 연목구어緣木求魚, 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답인 하느님을 바로 앞에 놔두고 엉뚱한 밖에서 답을 찾는 무지의 어리석은 눈먼 사람들입니다. 꼭 언제나 기억해야 할 바 둘이 있으니, “죽음”과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를, 늘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13,1-9)는 “자연 숭배의 어리석음”에 관한 내용이고 후반부(지혜13,10-19)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지혜서의 처음과 끝 구절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그러나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평생 아무리 많은 공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모르면, 기도할 줄 모르면 완전한 헛공부요 유령같은, 헛개비같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회개와 겸손으로 자기를 아는데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라면 애당초 회개도 겸손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궁극의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엄중한 말씀입니다. 참으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평생 공부인 하느님 공부에 소홀히 한 책임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음을 환히 두고 깨어 산다면, 늘 하느님 사랑에 환히 깨어 산다면, 결코 세상 것들에 빠져 중독되어 아까운 시간, 정력을 낭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량 소비생활로 대량 쓰레기를 양산하는 눈먼 탐욕의 무지에 중독되어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태반인 현실입니다. 성인들보다는 날로 폐인들, 괴물들 늘어가는 작금의 부정적 자본주의 현실입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요, 악도 더 진화進化되는 느낌이고 조선시대 500년 동안의 당쟁과 보복의 악순환은 지금도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노아 때의 사람들이나 롯 때의 무지한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 하느님을 잊은 사람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코로나, 기후위기 시대의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전적인 회개의 촉구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자업자득의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물과 불, 다음에 무슨 심판일까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회개의 촉구가 참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세상 것들 속에서 살되 집착하지 말고 늘 주님을 향해 홀가분한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그날 밤,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때, 그분께서 데려갈 수 있도록 늘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날밤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을 그날처럼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언젠가의 그날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 안해도 될 것입니다.
계속되는 성인 축일입니다.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모두 각자 분발 노력하여 고유의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똑같은 성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43세로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우크라이나 요사팟 주교 순교자입니다. 한결같이 사랑의 순교입니다. 사랑의 순교를 통한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요사팟 주교의 시성 과정의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성인의 순교후 무수한 기적들이 보도 되었다. 1628년 교황 울바노 8세는 위원회에 조사를 명령하였고 116개의 증거가 입증되었다. 사후 5년이 경과되었어도 성인의 시체는 부패하지 않았다. 1637년 2차 위원회가 그의 생애를 조사하였고, 사후 20년후 복자품에 올려졌으며, 마침내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인의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하느님께서 감동하심을 보여주는 사랑의 기적들입니다. 성인마다 사랑의 크기, 색깔, 모양, 향기는 달라도 결코 우열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 친히 인정하시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대가’였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덕聖德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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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모든 이가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노아 때와 같이, 그리고 롯 때와 같이 느닷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귀하게 여기는 세간이라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또 들에 있다면 뒤돌아서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사람은 저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겠지요. 하지만 지난 과거의 영화는 물론 상처까지도 집착하지 말고 이제부터 펼쳐질 구원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삶에서 귀하게 여겼던 것은 실상 이제부터 마주할 구원을 위한 준비와 같습니다. 그걸 버리고 넘어서야만 구원으로 들어갑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예수님은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까지도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고 아둔하며 근시안적이라 그것이 없으면 세상 끝날 것처럼 뭔가라도 붙들고 늘어지기 마련이지만, 결국 바로 그 직찹하는 것을 잃게 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은 생명의 차원이 바뀌는 날입니다. 그간 매달렸던 육적인 생명이 스러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날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맞갖는 시선과 심성과 행동을 점검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살아 생전에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 만나는 길을 알려 줍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 만물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주어진 물질 세계를 통해 하느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는 사람을 아둔하게 만들어 세상 만물을 소유하고 모으고 쌓는 일에 집착하게 합니다. 피조물에 집착하는 딱 그 수준으로 멈추지요. 피조물 너머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창조주께 눈을 돌리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무심하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 어찌하여 ...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지혜서 저자는 탄식하듯 묻습니다. 하느님을 알 기회, 그분을 사랑할 기회를 하나도 붙잡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월만 보낸 이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무관심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주님을 찾고, 그렇지 못하고에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아주 딴판이 되겠지요. 그간 찾아오던 것이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이는 기뻐하며 즐거이 달려갈 것이고, 세상에 고이 모셔둔 이는 뒤돌아서게 될 테니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복음 환호송)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저 가까이 왔다고, 그러니 깨어 준비하라고만 반복해서 이릅니다. 확실한 것은 영적인 보화를 추구하며 산 이는 찾던 것을 영원한 생명 안에서 받아 누리게 될 것이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산 이는 아주 생소하고 낯선 현실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실 그날, 우리 모두가 기쁘게 그분을 맞이하는 행복한 신부이길 기원합니다. 미련과 집착으로 소중한 때를 놓치지 않도록,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의 눈길을 피하거나 뒤돌아서지 않게 이제부터라도 거룩한 해후를 준비해 나가면 좋겠지요. 노아 때처럼, 롯 때처럼 구원 안으로 성큼 들어서게 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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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얼마 전 ‘섬뜩한 오늘?’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글에서는 하느님께서 ‘오늘’이라는 일상의 삶 안에 찾아오실 때마다,
인간은 엇갈리게 행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이라는 시간은 해가 뜨고 지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발생하는 변화의 측정 단위로서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삶의 방향이 바뀌는 기회의 때이며 결단의 때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달력은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오늘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일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롯 시대에 소돔이 멸망하던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인 오늘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이 ‘오늘’이라는 일상이 아닌
‘오늘’이라는 마지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물리적 시간인 ‘오늘’이 아닌
변화와 결단의 때인 ‘오늘’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섬뜩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한 내가 변화하고
회개한 때의 시작점인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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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절),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언제나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며, 성체로 양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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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무엇을 정말
사랑하는 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욕심이다.
멈추어야 할
우리 삶의
욕심이다.
보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지금
이순간이다.
과거로 가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다.
결단의 순간이
왔다.
과거를 떠나야
현재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무거우면
떠날 수 없고
빠지면
나올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하느님께
내놓는다.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욕심이
아니다.
욕심은
소금 기둥을
이루고
주님의 뜻은
우리를 살린다.
살아있는
이 순간을
소금 기둥이
되게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삶의 마지막은
소금 기둥이
아니라
부활의 삶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회개가 이어진다.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려야 할
우리들
생명이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소금 기둥이 아닌
삶의 새로운 모습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욕심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시체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가 사랑이며
기도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위해
기도드리는
위령성월이다.
생명이 욕심을
치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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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재림, 종말, 회개 >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종말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날은 곧 ‘종말의 날’이고, ‘최후의 심판 날’입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과 ‘롯 때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멸망을 당하는 일”을 뜻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과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이미’ 시작 된 때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는
‘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회개할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고 평소에 살던 대로 사는 모습을,
즉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죄인들’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내립니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노아 때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노아와 롯을 통해서 주어진 하느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고
회개했다면, 멸망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종말과 심판의 날에 ‘노아 때의 일’과 ‘롯 때의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보이지만, 진짜 뜻은 “노아 때의 사람들이나
롯 때의 사람들처럼 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인의 멸망이 아니라
죄인들이 회개해서 사는 것입니다(에제 33,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래도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은
‘구원’입니다(1테살 4,15-17).
심판과 멸망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멸망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라는 말에서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상의 회복’은 온 세상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중요한 일’이 되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일이고, 신앙인들은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재난을 겪지 않더라도 ‘회개’는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경고로 생각되는 재난을 겪었다면
더욱더 ‘회개’를 첫 번째로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새롭게 변화되지도 않고,
“회개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던 때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만을 바란다면,
하느님의 경고는 경고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될 것입니다.
또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옛날 철학자의 말도 연상됩니다.
이 말이, 충실하게 회개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담담하게 종말을 맞이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좋은 말’이지만, 심판과 회개 같은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이 말 자체가 죄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이 말씀은, ‘세속 일’과 ‘세속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 때에 살아남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그날이 되면 세속의 재물 같은 것을 챙길
잠깐의 시간도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할 시간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있더라도 그때서야 하는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 거짓 회개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이 말씀은, 세속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어리석고 쓸데없는 집착을 모두 버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이 말씀은, 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의 뜻은 그렇지만, 만일에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날 식구 중에 누군가는 구원받고 누군가는 멸망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구원받는 일이 과연 행복한 일이 될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가족이 모두 서로 권고하고 타이르고 기도하면서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는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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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금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야 할 때 ♣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사람의 목숨은 하느님께서 “쓸어 내시면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시편 90,5)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자기 것을 챙기며,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즐기는데 몰두하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오늘의 시대는 ‘하느님을 망각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날의 삶에서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이루어지고 있으며 누구나 그날을 맞을 것입니다. 그날은 우리에게는 마지막 죽음의 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창세 6-7장)와 롯(창세 19장)의 예를 들어 그날을 준비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하늘에서 온 징조와 노아의 경고를 무시한 채 세상일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결국 홍수에 휩쓸려 모두 죽습니다(17,27). 롯 시대 사람들도 구원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다가 롯이 소돔을 떠난 바로 그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17,28-29).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한 생명, 구원에는 무관심한 채 자기 일에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17,33)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남을 향해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을 말하며,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 집중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노아 시대나 롯 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현세재물, 심지어 자기 목숨에도 애착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잘 살 궁리만 하고 자신의 부귀영화, 안락을 챙기는데 몰두하는 사람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 것에 정신을 팔지 말고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순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뜻대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만나는 사람을 소중히 대하며, 세상 한복판에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세상일과 재물에 대한 미련 없이 항구하게 사랑의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며,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2코린 6,2)이기에, 지금 회개하고 지금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소돔을 나올 때 롯의 아내는 집에 남기고 온 재산이 아까워서 소중한 것을 가져오려고 발을 돌렸으나 소금기둥이 되어버립니다(창세 19,26). ‘사람의 아들의 날’, 나의 죽음의 순간은 그렇게 너무나 갑작스레 찾아오기에 자기 재산을 챙길 틈조차 없습니다(17,31). 시간이 많다고 영원한 생명, 행복이 저절로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또 내 자신의 일을 다 하고 영원한 생명, 구원, 참 행복을 챙기기 위한 시간이 따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세상을 좇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한다면 결국 시체가 독수리의 먹이가 되듯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17,37 참조). 현세 재물도 명예와 권력도, 내 몸뚱아리도 다 바람처럼 헛되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 없이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몸부림치지 말아야겠습니다.
기꺼이 버리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버리고 비우고 낮추는 일상의 죽음 준비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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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과 고통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명령합니다.
억압을 멈추시오!
불의가 정의를 능가할 수 없음을 온 몸으로 선포하다가 순교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헤로데 왕권의 타락 앞에서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결국 그는 승승장구의 길을 걷다가 순식간에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고,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 참수 당하게 됩니다.
2018년 시성(諡聖)되신 전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로메로 대주교님(1917~1980) 역시 같은 노선을 걸으셨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했던 독재자에게 홀로 맞서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1980년 3월 23일 주교좌성당 강론대에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고통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간청하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명령합니다. 억압을 멈추시오.”
바로 그 다음 날, 한 괴한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를 거행하던 병원의 경당에 숨어들어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사팟 대주교님(1580~1620)의 최후도 정말이지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1609년 비잔틴 예식에 따른 동방 교회 사제로 서품됩니다.
1617년 러시아 비텝스크 교구 주교로 임명된 그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헌신합니다.
요사팟 주교님과 뜻을 달리하던 러시아 주교들은 로마 가톨릭이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며 대립주교를 임명하는 등 그를 축출하기 위해 다양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620년 교구 내 한 본당을 사목방문 하던 중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흉기를 소지한 적대자들은 요사팟 주교님이 사제관에 있으려니 하고 사제관을 습격했습니다.
요사팟을 호위하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일부는 살해되고 일부는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던 때, 요사팟 주교님은 마침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끔찍한 비명 소리에 요사팟 주교님은 기도를 중단하고 사제관으로 달려왔는데,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지요.
저 같았으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을 텐데...놀랍게도 그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적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를 상대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저는 결코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요사팟 주교님의 그 당당함 앞에 악한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주교님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한 녀석은 몽둥이로 때리고, 한 녀석을 큰 도끼로 찍고, 또 다른 녀석은 창으로 찌르고, 마침내 그 중에 하나가 총으로 주교님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요사팟 주교님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렵사리 오른 손을 쳐들고 적대자들을 향해
십자가를 그으며 강복하셨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사죄하는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의 선구자였던 요사팟 주교님은 1867년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셨는데, 동방 교회 출신 첫 번째 성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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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을 찬미할 때 평화가 오는 이유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하느님 나라’가 이룩된 사람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오늘은 그렇게 주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면 그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나는 주님의 집에 살고 있고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뜻’은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고 그 뜻을 따름은 그 사람에게 속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늑대에게 자라 늑대의 뜻을 따라 늑대처럼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늑대에 속해 있고 늑대 가족 무리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자라 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자라는 아이라면 당연히 그 부모에게 속한다 생각하고 그 부모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아의 홍수 비슷한 것을 거쳐야 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해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는데 우리 집이 그나마 가장 높이 지어져서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엔 우리 집으로 다 모입니다.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헬기가 와서 지붕을 뚫고 저희를 구출했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조금 자라서도 큰 홍수가 또 났습니다.
물이 점점 불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다 모였습니다.
길과 논의 구분이 사라졌고 어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땠을까요? 팬티만 입고 나가서 물놀이하고 놀았습니다.
어른들은 논으로 빠지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는 미군 부대 바로 옆이기에 미군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미군들이 철책을 끊고 보트를 끌고 우리를 구조하러 왔습니다.
팬티만 입고 여군들도 있는데 보트에 타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여관에서 머문 뒤 돌아왔을 때는 동네에 물이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부모님을 믿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동네는 홍수가 잦아서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지켜주고 계심을 잘 믿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때 아버지는 일 나갔다 돌아오실 때 마을에 홍수가 나서 들어오실 수 없으셨는데 수영을 하셔서 저희를 구하러 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뜻을 따라주는 대상에 속함을 알고 그 대상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
당연히 내가 주님의 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뜻을 따라주는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분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속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뜻이 양식과 가르침을 통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향한 희생을 통해 들어옵니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의 뜻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내가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의 뜻은 자녀 안에서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사라집니다.
따라서 내가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살려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속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사하고 찬미하는 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따르면 나도 모르게 그분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평안을 찾습니다.
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입니다.
평화롭지 않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찬미하는 이는 죽음도 이기시는 주님 품에 안겨 있음을 느끼고 평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예를 드십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입니다.
이때 방주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을까요? 방주는 바로 그리스도의 품입니다.
그분께 감사하면 그 뜻이 내 주위에 방주를 만듭니다. 그리고 홍수와 같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또 천사들과 탈출하고 있던 롯이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
천사에게 감사하고 그 품에 있으면 유황이 자신들 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세상에 집착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천사를 찬미하는 이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있어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자아를 따르고 찬미하기에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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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오늘이 마치 종말의 때인 것처럼 살라고 합니다.
내일이 삶의 마지막이라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일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행복을 향한 선택이고
희망을 담는 선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선택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세 하늘 새 땅이 열리는 그 날이 오면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습니다.
늘 해왔던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 되고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그 길에 충실하면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을 알면서도
세상에 대한 근심과 걱정 때문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또 흩어 없어질 것들에 눈길이 매어버린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을 받지 못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듯,
우리 역시 없어질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여정을 꾸준히 걸어간 성인이
오늘 기억하는 요사팟 성인입니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생긴 갈등 사이에서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온갖 반대를 받는 중에도 타협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향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결국 반대파로 인해 죽임을 당했지만
성인의 삶은 종말을 살아가는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함께 기도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향하기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참 행복을 선택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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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2.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지혜13,1-9)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9)
지혜서 13장에서 15장은 우상숭배를 단죄하는 내용이다.
지혜서 저자에 의해 단죄받는 우상 숭배의 첫째 형태가 지혜서 13장 1-9절에 나오는데, 바로 자연 숭배이다.
자연 숭배에는, 아무리 아름답고 힘 있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피조물들을 창조주로 오인하는 것이 포함된다.
자연 숭배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그들이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한다." (지혜13,1)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자연 숭배자들을 판단할 때 관용을 보이는 듯하다가 ("그렇다고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 지혜13,6),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그들이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 내지 못하였다." (지혜13,9)는 사실을 지적한다.
우상 숭배의 다음 형태는 나무로 만든 목상을 경배하는 것이다(지혜13,10-19).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품을 어떤 사람들이 신(神)으로 부르는 것을 조사한 뒤에 저자는 그 다음 구절에서 목수가 나무를 깎아 만든 우상에 색을 칠하여 바닥에 떨어지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 고정시킨 다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모든 것, 곧 재산, 가족, 건강 등을 위하여 그것에 간청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는 항해를 하려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데려다 줄 배보다 더 깨지기 쉬운 나무 조각"에 대고 비는 경우이다(지혜14,1).
배는 이득을 버리는 마음에서 고안되고 장인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조종하는 것은 아버지의 섭리" (지혜14,5)이고, 아버지는 육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해주신다.
"세상의 희망이 뗏목에 몸을 피하였던"(지혜14,6) 노아의 방주의 경우가 그랬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물론 그것을 만든 자도 저주를 받는다(지혜14,8-11).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물을 "사람들의 영혼에 올가미"(지혜14,11)가 되게 하였기 때문에 징벌을 받을 것이다.
우상 숭배의 기원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다(지혜14,12-21).
우상들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없었던 것이며 영원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우상들은 죄와 타락의 원천이다.
두 가지 예는 우상 숭배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설명한다(지혜14,15).
첫째 예는(지혜14,15) 갑작스런 죽음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들의 상을 만드는데
그 조각상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예는(지혜14,16-21) 임금의 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임금의 조각상을 공경하기 시작하였는데, 임금은 야심을 가진 장인들에게 덜 사실적이고 훨씬 더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게 하여 경배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사람들은 죽은 아들의 조각상과 임금의 조각상을 신(神)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에게 함정이 되었다"(지혜14,21).
모든 죄악과 악행의 뿌리인 우상 숭배의 주제는 지혜서 14장 22-31절에서 발전한다.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요 원천이며 끝이다"(지혜14,27).
하느님을 잘못 알게 되면 반드시 살인, 도둑질, 성도착 등으로 이어진다(로마1,18-32참조).
특히 사악한 것은 이교도들의 종교의식("비밀의식")과 결탁된 악이며, 우상들(결코 神이 아닌)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거짓 증언과 연관된 악이다.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7,26~37)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6~27)
여기서 '노아 때와 같은 일이'에 해당하는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노에'(en tais hemerais Noe; in the days of Noe)를 직역하면, '노아의 날들에'로서 노아의 살아 생전을 말한다.
이것은 바로 노아의 생애에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인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물 심판을 말한다.
이처럼 노아 때의 홍수 심판과 사람의 아들의 날을 비교하는 의도를 살펴보려면, 루카 복음 17장 24절의 번개와 사람의 아들의 날을 비교한 것을 보면 된다.
루카 복음 17장 24절에서 번개의 번쩍임과 비추임을 사람의 아들의 날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재림은 매우 급작스러울 것이며,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을 것임을 예언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분명 심판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해서 그것을 거절했다.
결국 심판은 임했고, 경고를 무시한 자들은 심판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멸망 당한 자들에게 있어서, 그 심판은 갑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들은 심판의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경고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러한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리스도 재림의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하느님의 경고를 통해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루카 복음 17장 27절에서는 26절의 노아 때와 같은 일들에 관해 더욱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하고'로 나열된 동사는 모두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이것은 그들의 삶이 항상 그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노아의 경고를 듣고도 안일하고 익숙한 삶의 방식에서 탈피하지 않고, 계속 이전과 동일하게 살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그들에게 죄가 되는가?
루카 복음사가의 의도는 단순히 그것밖에는 다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즉 그들에게 가장 심각한 죄는 다름아닌 세상의 일들에만 가치를 두고, 그 일들에만 골몰하였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었을 때나 그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그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아무런 위기감 없이 여전히 그들의 세속적 관심에 따라 일상사에만 열중해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에 대비한 노아와 그 가족들은 구원 받았지만,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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