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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들의 성탄(마 2:1-11)
우리가 성탄절 때마다 Christmas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Christmas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Christmas의 어원을 살펴보면, Christ와 Mass의 합성어입니다. Christ는 그리스도라는 뜻이고 Mass는 경배,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Christmas는 ‘그리스도께 경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시는 날, 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기 예수님께 가장 먼저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고, 머나먼 동방, 고대 페르샤에서 온 별을 연구하는 점성술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별을 연구하다가 유독 한 별을 보고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별이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몇 달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 최고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여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번 성탄에 동방박사들이 누렸던 그런 감격과 기쁨이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경배했습니까?
1. 먼 길을 찾아온 동방박사
1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습니까?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저 동방에서 찾아 온 박사들이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동방"이란 고대 페르샤지역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란을 말합니다. 그들은 페르샤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무려 1500Km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수개월에 걸쳐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자기 나라를 떠나 먼 나라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여러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단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매년마다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부르면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과연 정말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환영하며 진심으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그 일이라면,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라도 만나야겠다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찾고 만나고 경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먼 길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들은 그들은 동방박사들에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성경 예언을 가르쳐 준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4-6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랬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을 잘 몰랐던 동방박사는 머나먼 길을 떠나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저들,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던 대제사장들이나 그것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가 탄생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성경을 온전히 믿었다면,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면, 쉽게 이 예언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과 달리, 그들이 있는 베들레헴은 8킬로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결코 이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그중에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마23: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여러분, 이러한 외식에 대해 예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우리가 그대로 믿고, 우리가 그대로 순종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경험과 환경에 근거해서 말씀을 판단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는 데 앞장 서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보다는 경험을 의지하고 환경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말씀을 믿는 겁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고, 우리 손에 안 잡히고, 내 앞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할 때, 진정한 성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는 정말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천사가 찾아와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 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이었습니다. 말씀을 내것으로 붙잡았습니다. 설사 내가 죽는다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붙잡았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9:29).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
2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동방박사들은 성탄을 축하하고 예수께 경배하기 위하여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구경하거나 호기심으로 온 것이 아니라 분명히 경배를 드리려 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지식이 있습니다. 부귀가 있습니다. 명예가 있습니다.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그 먼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가지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올 때는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 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간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그 신앙이 산 신앙이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신앙이요, 인정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 먼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겠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옵니까? 성탄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나같은 죄인이 구원받아서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면 행복합니다. 기쁩니다. 즐겁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복중에 최고의 복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 최고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복을,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에, 그것도 방도 없이 말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를 왕이라고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은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가 어디서 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알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배운 성경, 그들이 들은 성경을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드렸습니다.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뭡니까? 경배한다는 뜻은 땅에 엎드리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다를 의미합니다.
지식도 있고 부귀 명예도 있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 태어난 지 얼마되지않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드렸습니다. 예배가 뭡니까? 우리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하는 겁니다. 기도가 뭡니까?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겁니다.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 이게 진정한 경배요,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몸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엎드린 자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주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온전히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생각을 드리고, 내 몸을 몽땅 드리는 것, 이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님께 온전히 경배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요한이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예수님은 흥해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그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가 나의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셔야 되겠고, 나는 죽어야 되겠다."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되리라." 이런 자세가 누구의 자세입니까? 동방박사들이 아기예수님께 경배한 자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앞에 나아와 늘 경배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영접하고 진정으로 예수님께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 가지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
동방박사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찾아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경배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박박사는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자기들에게 있어서최고의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1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예물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예물이었습니다.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헌신이었습니다. 이 동방 박사들은 세 가지 예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이 예물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황금입니다. ‘황금’은 그 당시 왕에게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께 황금을 드린다는 말은 당신은 나의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당신은 나의 왕입니다! 이 고백으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으로 경배와 헌신을 드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돈이 왕이 아니고 나 자신이 왕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둘째는 유향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향기를 내기 위해 피우는 향입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제사장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셋째는 몰약입니다. 몰약은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몰약을 드렸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약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의 예물에는 ‘당신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영원한 참 대제사장이시며,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라는 고백이 담겨진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에겐 이런 고백이 담겨진 경배와 섬김과 헌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먼 동방에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베들레헴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가장 소중한 세가지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게 드렸습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나의 대제사장입니다. 나의 구주입니다.라는 신앙고백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탄을 맞이하면서 진심으로 중심으로 주님을 환영하고 우리 중심에 모셔들이고 중심으로 환영하고 기뻐하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