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선 시인의 시집 『가시는 푸름을 기워』
책 소개
강대선 시인이 건네는 목소리에는 자아와 공동체, 일상과 역사, 황홀과 페이소스 사이를 횡단해가는 남다른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현실을 바탕으로 삼으면서도 존재론적 심층의 언어를 최량의 언어로써 구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인상적인 장면이나 순간에 대한 기억의 현상학에 매진하면서도 그 장면과 순간이 의미론적 확장을 거듭해가는 과정을 포착하고 표현한다. 때로 그것은 단아한 아포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 궁극적인 인간 존재론에 대한 예술적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표면적 관찰을 넘어 근원적인 삶의 심층을 되묻는 시인의 이러한 의지는 그래서인지 내면과 사물을 이어주는 통합적 마인드에 의해 한결같이 완성되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조를 통해 한결 미덥고 성숙한 시인의 시선을 만나면서 동시에 고전적 형식과 다양한 음역音域을 한껏 경험하게 된다.
시인의 말
생각하니
옛 나는
드들강에서 버들치와 살았다
그 시간이 나를 지었다
2024년 봄
강대선
약력:
나주 출생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시와사람』 등단
한국작가회의, 『오늘의 시조』, <율격>,
광주전남시조협회 회원
장편소설 『우주일화』, 『퍼즐』, 『대륙의 천검』(전자책)
시집 『구름의 공터에 별들이 산다』,
『메타자본세콰이어 신전』,
『가슴에서 핏빛꽃이』(문학나눔),
시수필 『해마가 몰려오는 시간』(문학나눔),
시조집 『가시는 푸름을 기워』
◈89kds@hanmail.net
개나리 할매
햇살도 휘움하게 쏟아져 오는 아침나절,
한갓지게 앉아 있던 지팡이 몸을 일으킨다. 히죽,
웃을 때마다 빠진 앞니 사이로 움돋이 하듯 혀를
내밀다가 마당을 서성인다. 들여다본 편지함엔
묵은 적막이 솔래솔래 빠져나가고 흐리마리한
추억만 서너 개 남겨져 있다. 벨 소리에 허둥지둥
달려가 전화기 손에 드니 반가운 손자 목소리.
온냐, 온냐, 우리 강아지, 입에서 연신 함박웃음
쏟아진다.
개나리 흐드러지는 하천가 외딴집
히말라야 독수리
절벽 위로 펼쳐진 허공을 바라본다
순례자의 영혼은 바람으로 일어나고
룽다는 나부끼는 날개
서녘으로 물결친다
찬 이마가 아무다리야 바람을 맞는다
지상에 펄럭이는 오색의 영혼
깡링"이 혼들을 부르면
넓적다리뼈가 들썩인다
*인골피리.
출구
숫자들의 몸에 X로 긋는다
낙엽처럼 뒹구는 상처 난 마스크
침묵이 바람에 날린다
입들이 벗겨진다
지워지는 또 하루
흩어지는 광장
불안한 창문에 수심이 차오르면
밀실은 문을 잠그고
어긋나는 입들
아우성은 속울음
찢기는 너와 나
벽을 사이에 두고 안부를 묻는다
그래도 내일은 하며
지나가는 입들
판화전
태백파, 무등파, 옥탑방파, 고수들
회오리 몰아치듯 검법을 펼친다 산들산들 바람
같고, 슬렁슬렁 넘어가는 구렁이 같고, 한 번에
몰아치는 세찬 북풍같다 날렵한 선으로 첩첩한
산줄기를 담아낸 고수들의 칼놀림에 입이 딱 벌
어진다
섬뜩한 고수의 칼날이 내 문장을 가른다
우리 건달님
건들건들 걸어서 건달인 줄 알았드만
고서를 펼쳐내니 신들의 이름이다. 건달아,
이름 불러도 꼼짝하지 않는다. 한 장을 넘겼더
니 건달 내력이 상세하다. 지국 건달바왕 수광
건달바왕 정목 건달바왕 화관 건달바왕 보음
건달바왕 낙요동묘목 건달바왕 묘음자사당
건달바왕 보방보광명 건달바왕 금강수화당
건달바왕 낙오현장엄 건달바왕이라, 예전에
건달들께서 세상을 휘젓고 다니셨노라. 건달바
번역하노니 향기 먹는 신이라, 술 고기 좋아하
고 싸움질 좋아하는 우리 아들 건달이가 향기
나는 이름이라. 이런 낭패가 푸대접도 이만저만,
변변찮은 직장 없이 음식 냄새 맡듯이 돈 냄새
맡아가며 어깨들과 건들건들, 땅 뺏고 나와바리
싸움 인상조차 고약한데 아악을 맡아보는 신이
었단 내용에 야, 건달 이리 와봐 노래는 좀 하냐?
아들놈 씨익 웃으며 한 가락을 뽑는데 날건달은
날건달인가 어깨춤에 흥이 난다. 건달은 다른
말로 한량이라 음식 향기 맡고 그 집에 달려가
악기를 연주하고 음식을 축내고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며 며칠이고 엉덩이 깔고 잘놀아준다.
상을 당한 사람마다 아는 체하며 추켜세워
주니 이 맛에 이력이 난 한량들이 다른 일인들
손에 잡힐까. 뒈져도 향기만 먹는 건달바 한량
놀음, 용무늬 문신 새겨 넣은 아들놈 등에
금강수화 건들바님 함자를 새겨 넣는다.
건달님, 큰 법을 닦아 개과천선하시게나
해설
시간 탐색을 통해 삶의 본령에 가닿는
역동적 서정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강대선 시조집 가시는 푸름을 기는 시인 특유의 내면적 고백과 삶의 해석을 정형 양식에 담아낸 예술적 축도로 다가온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인은 “생각하니//옛 나//드들강에서 버들치와 살았다// 시간이 나를 지었다" (「시인의 말)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자신을 구성하고 키워온 미학적 형질이 오랜 자연 경험의 시간에 있었음을 토로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만큼 강대선은 자연 경험의 시간에서 비롯한 사유와 감각을 심미적 언어에 담음으로써 완결성 있는 시조 미학을 구축해가는 시인이다. 특별히 그는 초월과 암시를 통한 응축의 정형 미학을 완미하게 구현함으로써 안정성과 다양성을 함께 구비해가고 있다
내면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물과 상황을 시의 표면으로 불러들여 그것들로 하여금 발화 주체가 되게끔 한다. 그때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한결같이 근대적 삶의 효율성에 의해 서서히 사라져가지만, 그 사라짐으로 하여 역설적으로 눈부신 순간이요 사물이요 장면들이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 자연 사물이 이루고 있는 비대칭적 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계기들을 얻는 동시에, 또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이루고 있는 등위적等位的 네트워크도 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