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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접의 세 가지 차원(성탄)
(요한복음 1:11~14)
지난 주에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크리스마스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도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요한복음의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는데 백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3절에 보면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듣고 소동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소동하였습니다. 지금도 성탄절이 되면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도 모른 채 소동하고 시끌벅적합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두 날은 태어난 날과 태어난 이유를 깨닫는 날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하여 우리 인생에 중요한 날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깨닫는 날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인생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왜 살아야 하는지라는 인생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탄생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요한복음 1장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탄생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예수 탄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영접 안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제가 고등학교이던 1970년대 초엽 여의도는 지금처럼 공원이 아니라 시멘트가 깔린 광장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광장에서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빌리 그레이험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경찰 추산으로 100만 명이 여의도 광장에 운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수색 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중고등부를 담당하시던 전도사님께서 60~70명 정도 되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100만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한 번에 귀가를 하니 그 주변의 모든 교통편이 마비되어서 저는 친구들과 수색까지 노래를 부르며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빌리 그레이험 목사님의 설교 중에 저는 마지막 딱 한 부분이 분명히 기억에 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를 마치면서 “예수님을 구제주로 영접하신 분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수 많은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저와 친구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냥 자리에 멀뚱멀뚱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께서 저희를 째려보시면서 “야! 일어나 맞고 일어날래 그냥 일어날래”라고 저희를 다그쳤습니다. 저희는 이 말에 바로 한 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얼떨결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떨결에 예수님을 영접한 의미가 아주 엄청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영접이라는 의미가 예수님께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 때에 저는 아마도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는 이 성탄절 절기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그때의 백성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영접을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 육적인 영접입니다. 육적인 영접은 영접을 1차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육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육적으로 환대(hospitality)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낯선 방문자를 환대하며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육적인 영접이 성경의 원어로 어떻게 쓰였는지 보면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에 ‘데코마이’로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세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에 두 번, 요한복음에 한 번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45절에 보면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는 것은 육적으로 환대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14절과 40절에 언급된 영접도 ‘데코마이’를 썼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자들에게 전도여행을 위해 배낭이나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고 하시면서 전도하는 일꾼이 전도를 받는 가정에서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의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구약에 육적인 영접의 원어는 ‘아싸프’인데 이것은 ‘호기심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낯선 사람을 구경하거나 혹은 조사하는 것을 말하며 그 결과로 방문자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예로는 사사기 19장 15절과 18절에 쓰여져 있는 바 그것은 레위인과 그 첩을 노인이 육적으로 영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술한대로 육적인 영접은 낯선 방문자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육적인 환대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 환대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잘 정리한 학자가 쟈크 데리다라는 포스트모던 학자입니다. 그는 환대에 있어서 방문자와 주인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방문자와 주인 사이에 ‘문’이 존재하는데 환대란 주인이 방문자에게 문의 경계를 허는 것이다”라고 데리다는 정의했습니다.
이와 같은 육적인 영접의 관점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육적인 영접도 제대로 받아보질 못한 분입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날 방도 없어서 말이 거하는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이 땅 백성으로부터 육적인 영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적 의미의 한 단면입니다.
둘째, 혼적인 영접입니다. 혼적인 영접은 영접을 이차원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혼적인 영접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본문 말씀 요한복음 1: 11~12에 나오는 영접의 의미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영접’으로 사용된 헬라어 원어는 ‘람바노’인데 그것은 ‘신뢰적 관계, 교제를 나누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또한 혼적인 영접의 히브리어 원어는 ‘카발’인데 이것은 ‘교훈을 받아들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적인 영접이 의식주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혼적인 영접은 지, 정, 의로 교제를 나누며 서로가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영접은 하였으나 믿지는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육적인 영접은 하였으나 혼적인 영접을 하지 않아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 정, 의에 근거한 혼적인 영접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서로 신뢰적 관계를 구축할 수 없습니다. 이 혼적인 영접에 대해서 한 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그 사람이 우리에게 십 만원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아무런 사귐과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깊은 사귐과 교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아주 친한 죽마고우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현재 건실한 기업의 간부가 되었는데 이 친구의 부모님께서는 어렸을 적에 교회 앞에서 철물점을 운영하셨습니다. 저와 교회 친구들은 교회에서 늦게까지 기도를 하거나 시간을 보내다가 배가 고프면 이 친구의 집에 가서 어머님께서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이렇게 이 친구와 저의 관계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제가 교수가 되었을 때 책을 출판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이 친구는 제가 도움을 청하자 기꺼이 출판에 필요한 금액을 보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제와 만남의 힘입니다. 교제와 만남은 우리가 교제를 나누고 있는 대상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이끕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제가 앞서 말한 저와 친구의 관계보다도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혼적으로 영접하면 예수님과 이렇게 지, 정, 의로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또한 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은 영, 혼, 육의 통합된 상태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교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지, 정, 의 차원의 깊은 교제가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영적 영접입니다. 영적 영접은 3차원적 영접입니다. 육적인 영접은 의식주의 차원이고 혼적인 영접은 지, 정, 의로 이루어진다면 영적인 영접은 진, 선, 미를 추구합니다. 진, 선, 미는 철학적으로 플라톤이 이야기한 것인데 신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진리와 도덕, 참된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영접을 하면 참된 진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영접을 표현해주는 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속에 영접은 헬라어 ‘아판테시스’로서 영적인 영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진리이신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가에 서 계십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차를 세워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볼 일이 있다고 가버립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반겨 차에 태우고는 자기가 운전하고 갑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는 차를 세워 예수님께 운전석을 내어 드립니다. 바로 이 마지막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인생의 소유권을 통째로 예수님께 넘겨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영접이란 진리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영접의 또 다른 하나의 단어가 ‘카라’입니다. 이 히브리어 ‘카라’는 ‘매우 고귀한 분을 모셔드리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천사를 영접하는 장면이라든가, 마태복음 25장에서 열 처녀 비유 중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영접한다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썼습니다. 즉 이것은 바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들이어 내 마음을 지배하도록 삶의 지배권을 예수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적으로 영접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성도들 마음 속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영접입니다.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성도의 마음을 예수님이 지배하게 되면 반드시 성도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접의 세 가지 차원, 즉 육적인 차원과 혼적인 차원, 영적인 차원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러한 구분이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접이란 영, 혼, 육의 분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 혼, 육의 통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몸으로의 영접’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성경에 의하면 몸이라는 개념이 영, 혼, 육을 통합하는 전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 혼, 육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 안에 통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주와 지, 정, 의 그리고 진선미를 통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몸으로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이 빛으로 오시는 이 성탄절기에 그 예수님을 우리의 온 몸으로 환영하며 영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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