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0년대🌺 |
✿1883년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 출생
독립운동가 안무 선생(20세 무렵) 독립운동가 안무 장군(사진=해군 제공)
봉오동 청산리 전투 승리에 빛나는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1883. 6. 29 ~ 1924. 9. 7)은 경성지역의 무인집안 출신이신데, 대한제국의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이 된 후 주된 보직은 국경 지대에서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함경북도 지방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3년 뒤 국권이 피탈되자 이를 계기로 북간도로 망명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듭니다.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안무 장군에게 조국으로부터 3.1 만세운동시위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를 계기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국민회군' 사령관으로 취임하게됩니다. 과거 교관시절의 경험을 살려 국민회군의 훈련을 맡았으며 독립군의 양성과 세력확장에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1920년 드디어 장군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 봉오동 전투는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일본의 정규군대가 군대가 해산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참히 참패를 한 사건 이었기 떄문이죠. 이 후 일본은 이 치욕을 갚으러 엄청난 수의 군대를 투입했고 이어서 벌어진 전투가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입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과 함께 안무장군은 청산리, 대전자령 등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 정규군을 거의 섬멸해버립니다. 그 후, 독립운동사의 가장 슬픈 사건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군의 조직 개편 및 사기 증진을 위해 남은 여생을 바치다가 일본 경찰의 습격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완강히 거절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하였습니다.
독립군의 독립전쟁은 승패여부를 떠나, 투쟁 자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식 군인들이 아니었고 평범한 일반 국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그만큼 더욱 값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9월 7일 북간도 용정에서 순국한 안무 장군의 위업은 우리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빛날 것입니다. | |
| 🌱1900년대🌱 | |
🌳06년 광업법 공포 : 외국인도 차별 없이 광산 개발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됨. 🌳28년 치안 유지법 개정 : 사형 무기형 추가, 사상 운동 탄압 강화. 🌳34년 문맹 퇴치 운동 참가 학생 5478명의 동원식 개최. -조선일보 🌳38년 전국에서 방공훈련 실시 | |
🌳44년 만해 한용운 스님(1879-1944) 세상 떠남
만해 한용운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독립운동에 힘썼던 만해 한용운 선생이 194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눈을 감았다. 본명이 정옥(貞玉)인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법호인 만해(萬海)와 법명인 용운(龍雲)으로 더 친숙하다. 충청남도 홍성 출생인 그는 6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는 등 일찍이 글과 독립운동에 눈을 뜬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1896년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온 그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러던 1910년 한ㆍ일합병의 국치(國恥)를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 독립군군관학교를 방문한 뒤 만주ㆍ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불교정신을 널리 펴는 데 힘썼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6년 희대의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으며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조선일보가 중심이 된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발기에 참여,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한편,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심신이 지칠 때 마다 찾았던 백담사 소재 강원도 인제에 ‘백담사 만해마을’이 준공돼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사는 이곳에 ‘조선불교유신론’ 1913년 초판본, ‘불교대전’ 1914년 초판본 등 만해의 저서 원본들과 관련된 희귀자료 115점을 전달한 바 있다. | |
🌳46년 민족통일총본부 결성 (총재 이승만) 🌳49년 김구 선생 피살(안두희 소위. 백주에 경교장서 저격, 7월5일 국민장) 🌳49년 주한미군 철수 완료,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음 | |
🌳50년 맥아더 원수 방한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면적인 군사원조 약속
맥아더
1950년 6월29일 맥아더원수 한국전선 시찰
맥아더와 6.25 6·25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인민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다. 이에 국제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제1단계로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는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 |
🌳50년 미군의 B-29기 평양 최초 폭격 🌳51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리지웨이 장군에게 정전 교섭 명령 🌳59년 주한유엔군 경제조정관실(OEC), 미국원조단 (USOM)으로 개편 🌳59년 자유당 9차 전당대회, 4대 정·부통령 후보에 이승만·이기붕 지명 🌳61년 김일성, 소련 방문. 🌳70년 제37차 서울 펜 대회 열림 🌳77년 밴스 미국 국무장관, 남북한ㆍ미ㆍ중공 등 당사국 회담개최 촉구 🌳77년 박동진 외무장관, 국회답변에서 「국가보전위해 핵개발을 할 수 있다」고 밝혀 🌳77년 밴스 미국 국무장관, 남·북한, 미·중공 등 당사국 회담 촉구 🌳79년 카터 미 대통령 방한(6.29-7.1), 한-미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 🌳81년 전두환 대통령, 말레이지아 도착(30일 마하티르 모하메드 말레이시아 차기 수상과 회담) 🌳83년 국방부, 지난 10년간의 방위성금 총액이 480억 5300만원이라고 발표 🌳83년 서울지방검찰청, 5억 원 상당의 외화를 밀반출 하려던 재일교포 윤경훈 형제를 구속 🌳84년 정래혁 전 민정당 대표, 의장직사퇴ㆍ민정당 탈당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재산을 사회에 환원 🌳85년 치안본부, 9개대 학생회관 전격 수색. 유인물· 화염병 등 8만점 압수 66명 연행 | |
🌳86년 멕시코 월드컵서 `축구의 신` 마라도나 등장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펠레에 이어 또 한 명 `축구의 신`이 등장했다. 6월 22일 잉글랜드와의 준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는 `신`으로 거듭났다.
그는 잉글랜드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공중에 뜬 공을 손으로 건드려 넣었다. 주심은 보지 못했고, 경기 후 마라도나는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가 두 번째로 뽑아낸 골은 완벽한 개인기로 빚은 신기(神技)였다. 마라도나는 센터라인에서부터 잉글랜드 수비 5명을 제치며 드리블한 뒤 득점하고 포효했다. 마라도나는 당시 서독과의 결승전 결승골을 어시스트해 아르헨티나에 월드컵을 안겼다. 숱한 화제 속에 끝난 멕시코 월드컵은 지금도 전세계 축구팬에게 `마라도나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천재였지만, 사생활에선 끊임없이 광기를 뿜어낸 `문제인간`이었다. 아르헨티나 역대 최연소인 16세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해, 1986년 우승, 1990년 준우승했다. 마라도나는 국가대표 외에도 그가 소속했던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나폴리팀에 무수한 우승트로피를 헌납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진출 후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기자들에게 공기총을 쏘아대고, 툭하면 여자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마라도나는 1994년 미국월드컵 조별 리그 도중 도핑 테스트에서 흥분제를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 쫓겨났다. 마라도나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고, 악동과 축구의 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마라도나의 선수생활도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 |
🌳87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 대통령중심직선제개헌. 金大中사면복권. 구속자석방 등 8개항 선언(6.29선언)
1987년 6월 29일...선언...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시국 수습을 위한 특별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6ㆍ29 (민주화)선언. 그 선언으로 현행 헌법이 탄생했다. 그 해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숨졌고, 학생ㆍ시민들의 ‘ 살인정권 퇴진’과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쳤다.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던 임기 말 대통령 전두환은 입장을 선회, 4월 13일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5공화국 헌법(8차 개헌)대로 간선 7년 단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거였다. | |
🌳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한국외국어대 불어과4년 임수경(여.24)평양축전 남한대학생대표로 파견 🌳90년 노태우 대통령, 남북경제협력을 위해 북한을 통한 운송수단과 물자반입을 무제한 허용한다고 밝혀 🌳90년 정원식 문교부장관, 세종대 학생 전원 유급이 불가피하다고 세종대측에 최후통첩. 🌳91년 노대우 대통령, 8박9일간의 미국, 캐나다 공식 방문을 위해 오후 2시 20분 서울공항을 출발. 🌳91년 한국은행, 은행의 CD(양도성예금증서) 발행한도를 1조 5000억원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 🌳91년 서울지검, 이화여대부속병원 레지던트의 추천 과정서 돈을 받은 이화여대 피부과장 국홍일교수 구속 🌳92년 주택은행이 서울 및 5개 직할시 지역에서 자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의 평균 내집마련비용 4567만원. 🌳92년 서울 경찰청, 6세미만의 어린이를 있는 길거리 에서 놀게 하는 부모에게 교통안전교양과 함께 범칙금 . 🌳93년 정부,육군 상록수부대를 소말리아평화유지군 (PKO)으로 파병 🌳93년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 40명,사법부의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 🌳93년 국방부, 日후지TV 서울지국장 시노하라 마사토씨가 군기밀을 보도 이외의 목적에 이용 발표. | |
🌳95년 서울 서초구 소재 삼풍백화점 붕괴(사망ㆍ실종 458명, 부상 307명)
1995년 6월29일..삼풍백화점 붕괴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 5층 건물 2개동 북쪽(정문에서 왼쪽)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501명이 사망하고 939명이 부상했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붕괴사고는 사망 5백1명, 부상자 9백30명을 기록하는 등 해방 이후 단일사고로 는 최대규모였다.
1995년 6월 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사망 5백1명, 부상자 9백30명을 기록하는 등 해방 이후 단일사고로는 최대규모였다 단일사고로는 건국이래 최대의 사망자를 낸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당시 백화점안에는 고객 1천여명과 직원 5백~6백명이 있었다.
백화점 건물은 폭격을 맞은 듯 폭삭 가라앉아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으며 수십명이 피투성이가 돼 밖으로 튀어 나오는 등 현장주변은 아비규환을 이뤘다. 사고현장은 콘크리트 잔해와 철근 구조물이 수북이 쌓였고 파편이 인근 법원건물에까지 튀었다. 삼풍백화점 건물은 며칠전부터 벽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며 이날 오전 일찍부터 4층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삼풍백화점 사고는 부실설계, 부실시공에 의한 품질사고로서 사고원인이 매우 복합적이었다. 설계와 시공만 부실한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의 부실, 기술을 무시한 건축주의 독선, 부정부패와 뇌물관행을 기본으로 한 건설업계의 비리 등 총체적인 부실의 결과였다. | |
🌳95년 정부, 북한측이 쌀지원을 위해 청진항에 입항한 씨 아펙스호에 인공기 강요- 쌀지원을 전면 중단 🌳95년 북한, 정전협정은 종이조각이라고 매도하면서 한반도 평화유지를 위한 새장치의 마련을 주장 🌳96년 일본영화 "쇼군 마에다" 국내 개봉 | |
| 🌺2000년대🌺 | |
✿2001년 6월29일..해군-해병대 여성 장교 국내 첫 탄생
해군 및 해병대에 창설 이래 처음으로 여군 장교들이 생겼다.
2001년 6월 29일 거행된 제96기 해군사관후보생과 제87기 해병간부후보생 수료 및 임관식에서 해군 13명, 해병대 7명 등 모두 20명의 여군장교(소위)가 처음 배출됐다. | |
✿2002년 6월29일..한국 월드컵 3-4위전서 터키에 2대3 패배. 4위 달성
아시아 첫 4강신화를 달성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월드컵 대장정을 아쉽게 마감했다.
29일 대구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3·4위전에서 한국은 터키에 2대3으로 패해, 4위에 머물렀다.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은 다소 맥이 빠질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시종 한 치 양보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하지만 승리는 골 결정력과 수비력에서 앞선 터키의 몫이었다. | |
✿2002년 6월 29일 북한 해군, 서해안에서 무력도발 (제2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쯤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남북 해군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이 때는 한일월드컵으로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던 시기였다.
제1차 연평해전의 모습
2002년 6월 29일 도발 준비를 끝낸 북한 경비정 2척이 9시 54분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한다. 이에 우리 고속정 편대가 차단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접근하자, 북한 경비정은 북상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들은 다시 남하하여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뒤 10시 25분, 참수리 357호에 기습 선제 사격을 가했다.
참수리호 357
우리 참수리 357, 358호는 급작스러운 피격 상황에도 불구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하며 응전했다. 몇 분 후 10시 30분경 인근 해역에 위치하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모두 격파사격을 실시하며 교전에 합류, 북한 경비정을 대파했다. 큰 피해를 입은 북한 해군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도주하면서 교전은 25분 만에 종료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 중 침몰했고, 승무원 중 6명이 사망, 19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우리의 소중한 아들인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조천형 중사, 박동혁 병장이 전사했다. 북한 피해에 대해 군 당국은 50명승선 규모인 이 경비정에 탔던 북한 병사들 가운데 적어도 10명 이상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월드컵 축구 3.4위 전 경기에 앞서 제2연평해전 사망자를 위해 묵념하는 모습. | |
✿2007년 애플 #아이폰 최초 판매개시
2007년 6월29일..오늘, 애플 #아이폰 최초 판매개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