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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죽도록 공부하라니요...
공부하다가 죽으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공부하다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도록 공부하다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공부해도 죽어버리고 만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죽는 공부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의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공부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공부
그런 공부가 있을까요?
참 어처구니 없는 얘기 같지만
그런 공부와 그런 길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고,
이것을 증명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냐구요?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본 증인이 500명이상이나 됩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 15:6)
직접 손을 내밀어 그분의 찔린 옆구에 손을 넣어본 사람도 있습니다.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7-28)
성경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 책입니다.
성경의 말씀속에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성경에서 예수님을 바로 만나고, 그분을 마음의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사실은 한 가지 방향,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라는 말씀은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이고, 그 부분적인 것들이 예수 안에서 종체를 이룹니다. 마치 퍼즐조작이 모여서 한 그림을 만들어내듯, 그 모든 내용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줍니다.
여러 방법을 4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해 주는 사람들로 구약성경이 가득합니다.
아담, 노아,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이 대표적인 예수님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보여주는 사건들로 구약성경이 가득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예수님이 하실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③ 메시야가 하실 일을 보여주는 제도들로 구약성경이 가득합니다.
성소제도와 절기들이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알려줍니다.
④ 메시야가 탄생하실 구체적인 시간, 장소, 하실 일, 사명등에 대한 실제적인 예언들이 구약에 가득합니다.
구약성경은 인물, 사건, 제도, 예언으로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의 마지막과는 좀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앞절 “옛적에”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구약시대가 끝나고 그 모든 예언들을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곧 초림 때부터 재림때까지의 모든 날들을 말합니다.
‘옛적에’가 구약 시대를 가리킨다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구약 시대가 끝나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 곧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가지 모든 날을 가리킨다(Hewitt, Bruce, Morris). 이것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마지막 때’ 혹은 ‘말세’로 표현되고 있다(행 2:17, 약 5:3, 벧전 1:20, 벧후 3:3, 요일2:18, 유 1:18).
성경은 구속, 영생의 교과서이다.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진 그 교과서는 그 속에 포함된 66권의 책들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방법을 제시하되, 특별히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일을 전반적인 주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기록된 구약은 장차 “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그의 탄생 이후에 기록된 신약은 이미 “오신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성경 전체의 한 위대한 주인공으로서,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에서 각각 암시(暗示)되고 명시(明示)되었으며, 약속(約束)되고 이행(履行)되었으며, 기대(期待)되고 성취(成就)되었으며, 요청(要請)되고 제공(提供)되었으며, 예언(豫言)되고 실현(實現)되어 계신다. 성경은 온통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건물이라면, 구약은 땅 속에 놓인 기초요, 신약은 그 위에 세워진 상부 구조이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책이다. 구약에는 구주에 대한 갈망(渴望)이 있고, 신약에는 구주의 충족(充足)이 있다.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무수한 그림자들 또는 표상(表象)들이 나타나 있고, 신약에서는 그것들의 실체(實體)가 출현하신다. 구약에는 신약이 숨어(latent) 있고, 신약에는 구약이 드러나(patent)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린도후서 3:14~16).
특별히 오늘은 그 중에 아담이 어떻게 예수님을 예표하는 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 교훈을 전달해 줍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로마서 5:14).
⑴ 사람[아담]- “하나님의 형상”
첫 사람 아담은 여러 가지 의미와 국면으로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우선 아담은 그의 모양과 형상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히브리어로 “아담”]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아담]을 창조하시되”(창세기 1:26,27).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고 한 것은 특수한 의미로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 또는 좀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⑵ 아담- “오실 자의 표상”
아담은 매우 직접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예표 또는 표상)이라고 칭해졌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로마서 5:14). 이 말의 전후를 읽어 보면.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임과 동시에 대조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예컨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 왕노릇하리로다.…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7,19).
아담의 범죄로 인류가 죽게 되었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길, 살길이 열려져 있음을 대조적으로 묘사해 줍니다.
⑶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5,47). 여기서도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그리고 “첫 사람”과 “둘째 사람”을 각각 대비시키면서 표상으로서의 아담과 실체로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개해주는 부활장이다.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게된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생명, 부활에 이르게 된 소망의 이야기이다. 이 마지막 아담은 다른 어떤 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분명히 그리스도라고 밝혀주고 있지 않은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⑷ 아담의 갈빗대와 그리스도의 옆구리
창세기 제2장의 마지막 부분(20~25)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신부 하와를 창조하신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0~24).
먼저 하와의 창조 자체를 살펴보자.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은 홀로 있었고, 그에게는 배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가 깊이 잠들어서 그의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 갈빗대가 꺾이어 나가기 전까지는 그의 신부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사실은 영락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로 묘사된 교회를 죄의 상태 곧 비존재(非存在)의 처지로부터 구출하고 다시금 존재하도록 하여 맞이할 수 있기 위하여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다. 아담이 그의 옆구리를 찢기고 갈빗대가 꺾인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고난을 예시한 것이요, 그가 깊이 잠든 것은 그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으로 새로운 존재가 된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되었다.
⑸ 사랑받는 하와 사랑받는 교회
하나님께서 그 새 부부에 대하여 선언하신 결혼 선언문을 생각해 보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 이 말씀은 만약 신약이라는 확대경이 없었더라면 단순히 하나의 결혼 선언문에 불과할 뻔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바울은 이 말씀이 가지는 구속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은 함축된 말로써 표현하였다 : “이와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할지니…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28~32).
바울은 여기서 창세기 2:24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크나 큰 비밀을 말해 주는 일로 가르치고 있다. 하와에 대한 아담의 사랑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예표요, 아담에게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와 연합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이 땅에 내려오심에 대한 또 하나의 표상이다. 이러한 위대한 사실을 일찌기 깨달은 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32)고 천명하였다.
⑹ 사랑 때문에 죽기를 결심한 아담-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
에덴의 범죄는 하와에게서 시작된다. 사단은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를 유혹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창세기 3:1~6절에 기록된 하와의 범죄 경위는 하나의 완전한 기만에 의한 범죄였음을 보여 준다. “아담이 꾀임[deceived]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디모데전서 2:14).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담은 기만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행위의 결과를 다 알고 범죄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아내 하와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그의 신부를 사랑하는 마음, 나아가서는 그의 신부를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함께 죄인의 처지로 내려 선 것이다.
만약 하와만 죄인으로 버려둔다면 그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혀 버리고, 마침내는 혼자 영원히 죽고 말 것이다. 다시 한 번 신약이라는 쌍안경을 통하여 이 장면을 바라보자.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디모데전서 2:14,15).
여자 곧 하와가 구원을 얻는 것은 해산함으로써였다. 한 아기를 낳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와는 하나의 후손(Seed)을 가져야만 했고, 오직 아담의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아담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아담의 범죄를 근본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표상이란 어떤 특징적인 국면 또는 강조된 측면만을 지칭하는 것이지 결코 총체적으로 및 세부적으로 일일이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이 표상에서 강조된 것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인의 처지에 서신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사랑 때문에 죽기를 결심한 아담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하늘 왕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성경은 창세기부터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우리를 위해 옆구리에 찔리시며 고통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초청하시고 계신다.
나의 영원한 사랑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겠니?
내가 너에게 영원한 사랑과 행복을 주마.
내가 너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데
너는 누구를 향하여 달려가니...
https://youtu.be/J0aHf3UCG4Q?list=PLhuKCEBVU716Rl8gEuWwI5hhdS6iHnGHJ
https://youtu.be/1YVKUIepoSE?list=PL-xlRAs8H4lzt60AFKPgdb4PlHPdgXVbG
https://youtu.be/BDhWcWKOWgw?list=PLhuKCEBVU716Rl8gEuWwI5hhdS6iHnGH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