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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서(迂書)》 해제(解題)
한영국(韓榮國)
Ⅰ
《우서(迂書)》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학계(學界)에서조차 거의 생소하던 책이다. 1970년을 전후하여 《우서》와 그 저자 유수원(柳壽垣)이 본격적으로 소개ㆍ연구 되기까지, 《우서》는 저자 미상인 채로 ‘정령(政令)에 관한 77종의 사항을 들어 그 연혁과 이해(利害) 편부(便否)를 문답체로 기술하고 소견(所見)을 발표한 내용’이라고 소개된 데 불과하였고 유수원은 유수항(柳壽恒)’으로 오기(誤記)된 가운데 문과방목(文科榜目) 소재의 간단한 인적(人的) 사항과 함께 그 저서로 《우서》 5권이 있다는 소개를 찾아볼 수 있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유수원은 18세기 중엽에 손꼽혔던 석학(碩學)이었고, 《우서》 또한 《동서(東書)》라고 불렸던 유명한 논저(論著)였다.
영조(英祖)가 이 책을 통독하고서 다음과 같이 술회할 정도로 당시 위정자나 지식인들의 심금(心琴)을 울린 부국안민(富國安民)을 향한 사회개혁론(社會改革論)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책과 그 저자가 근래에 이르도록 널리 알려지지 못하여 온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생각하여 보면 그 근원적 원인은 저자 유수원이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목으로 사형되고, 그 자손이 노비(奴婢)로 몰락된 데다가 그의 최후를 이같이 참담하게 만든 노론(老論)의 집권이 그로부터 2세기 가까이 지속된 데 있었다고 하겠다. 대역죄인의 저술이 행세(行世)될 수 있는 조선왕조의 풍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서》와 그 저자는 19세기의 그 많은 문헌에서도 소개 거론되지 못하였고, 그 전승(傳承) 또한 뒤에서 보듯이 극소수의 수사본(手寫本)만이, 경우에 따라서는 저자마저 이탈시키는 가운데 이루게 되어, 《우서》가 하나의 사료(史料)로 전변(轉變)된 뒤에도 위와 같은 빈약하고도 부정확한 소개를 지니게 되었고, 나아가 학자의 눈길을 쉽게 끌지 못하여 온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제 다행히 《우서》와 그 저자는 본래의 성가(聲價)를 되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책과 여기에 담겨진 유수원의 사상에 대해서는 탐구되어야 할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이 해제가 소략함을 면치 못하는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많은 연구들을 기대하며, 감히 이 해제를 역주 본(譯註本)의 상재(上梓)에 붙인다.
Ⅱ
농암(聾菴) 유수원은 1694년(숙종 20)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봉정(鳳庭)의 맏아들로 충청도 충주목(忠州牧)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가(外家)에 관해서는 아직 가계(家系)를 살필 수 없으나, 친족(親族) 일가는 한성(漢城)과 그 근교에 자리잡고 있었던 중견적(重堅的)인 관인가문(官人家門)의 하나로서, 주로 소론(少論)에 속하였던 것 같다. 그가 태어나던 당시만 하더라도, 할아버지 상재(尙載)가 보덕(輔德)으로, 큰할아버지 상운(尙運)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종숙(從叔) 봉서(鳳瑞)가 검열(檢閱)로 각기 벼슬하고 있었고, 증조부(曾祖父) 성오(誠吾)의 처조카인 박세채(朴世采)가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그는 이러한 한성의 친족 집에서 자란 듯하다. 그러나 그가 어느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는지는 전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자(字)를 남로(南老)라 하였던 유수원은 약관 21세(1714, 숙종 40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어 25세 때 문과 정시(庭試)에 합격함으로써 일찍 벼슬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관력(官歷)은 역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직은 연보(年譜)나 행장(行狀) 같은 전기적(傳記的) 자료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대역부도의 죄로 사형된 데서 말미암은 것이라 보겠으니, 이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통하여 그 관력을 정리하여 보면, 대개 다음과 같다.
50세에 못 미쳐 벼슬살이를 청산한 농암 유수원은 그로부터 10여 년을 초야(草野)에서 보냈 다. 이 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전혀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나, 동료들과 함께 곧잘 시정(時政)에 관한 이야기를 즐겼던 것 같다. 그러다가 1755년(영조 31) 5월에 그는 모역(謀逆)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해 2월에 있었던 전라도 나주(羅州)의 괘서사건(掛書事件)과, 이의 토벌을 경하하여 열린 5월의 정시(庭試)에서 나타난 변서(變書)사건에 연루(連累)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5월 무술(戊戌)에 대역부도의 죄로 사형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유수원이 실제로 모역에 가담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에 뒤이어 같은 죄목으로 사형된 심악(沈䥃)이 그의 마지막 공초(供招)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이 무렵의 사정을 살피는 데 다소 도움이 되리라 본다.
Ⅲ
《우서》는 이같은 유수원의 생애 중 정치적 폐고(廢錮)와 신체적 질병(疾病)으로 시달리며 지방 수령으로 전전하던 시절, 즉 그의 나이 40세 전후의 시절(영조 5~13년)에 저술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그의 《우서》를 소개하면서 그를 요직에 기용하도록 천거하고 있는 앞서 인용한 기사에서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뒤에는 개수(改修) 보필(補筆)되지도 않았으리라 생각되니, 그것은 《우서》가 찬성(撰成)된 뒤에 제진(製進)된 《관제서승도설》(영조 17년)이 오늘날 전하는 모든 《우서》에 나타나지 않고, 또 이 후에 시행된 균역법(均役法)(영조25년)에 관한 기술이 그의 모든 제도에 관한 논술 속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수원의 《우서》는 그가 가장 혈기 방장했으면서도 가장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 었던 40세 전후 시절에 그의 울분(鬱憤)과 정열(情熱)을 연구와 저술에 한껏 쏟은 데서 맺 어진 하나의 결실이었다고 하겠으며, 또 오늘날 전하는 《우서》는 거의 당초의 저술 내용 그대로의 것이라고 보겠다.
유수원이 그의 사회개혁론을 담은 이 책을 《우서》로 명명(命名)한 까닭은 분명치 않다. 적어도 《우서》에서는 스스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기술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가 《우서》를 통독한 뒤에
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과, 중국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신의 저술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오활하여 쓰이기 어려우니 세상에 이익이 하나도 없다.’고 한 데서 그 저술 41편의 책이름 을 《우서》라 하였다는 자변(自辯)으로써 미루어보면, 유수원 스스로도 자신의 저술을 이들과 같이 여긴 데서, 또는 남들이 이와 같이 여기리라 생각한 데서 명명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우서》를 사마광의 《우서》와 같이 문답체로 기술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겠다.
《우서》는 이러한 명의(名義)와는 달리 그 찬성(撰成) 당시에 이미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유포(流布)되었던 것 같다. 앞서 소개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로 써 그의 학문과 경륜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 잠시나마 정치적 폐고(廢錮)에서 벗어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우했던 임종(臨終)과 뒤이었던 노론(老論)의 장구한 집권은 《우서》로 하여금 곧 지하(地下)에 묻히게 하였고, 나아가 위축된 전승 과정을 밟게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19세기에 편찬된 문헌들에서 《우서》를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늘날 겨우 다음의 수사본(手寫本)들이, 그것도 그 대부분이 1910년을 전후하여 필사된 것으로 생각되는 수사본들이 전존(傳存)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들 수사본 이외에도 미처 조사 발견하지 못한 《우서》들이 전존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서》가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으리라 본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윤리 풍토가 모역 죄인의 저서를 행세하도록 방관(傍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위의 6본(本)의 《우서》중 규장각본(奎章閣本)과 동양문고본(東洋文庫本)이 그 조본(祖本)을 같이 하고, 나머지 4본이 또다른 조본을 같이 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자(誤字)나 탈자(脫字) 및 낙행(落行)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이(相異)가 없다. 그리고 이들 중 1900년 이전에 필사된 것은 박승만(朴勝萬) 소장본뿐이 아닌가 여겨진다.
따라서 4권이 결실(缺失)된 동양문고본과 낙행(落行)과 오자가 많은 장서각본(藏書閣本)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본을 택하여도 《우서》의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무방하리라고 생각된 다. 하지만 가장 고본(古本)으로 여겨지는 박승만 소장본에는 의도적으로 고자(古字)가 많 이 사용되고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규장각 수장본이 가장 이용에 편리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역주(譯註)본의 대본(臺本)을 규장각본으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Ⅳ
《우서》는 문답체(問答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기는 하나, 그 구성은 체계 정연한 한 편의 논문 양식을 이루고 있다. 77개의 항목이 논지(論旨)의 전개에 따라 질서있게 연결되고 있는데, 처음 6개 항목은 서론(緖論)에 해당하고, 다음 69개 항목은 본론(本論)에, 그리고 끝의 2개 항목은 결론에 해당되고 있다.
서론은 머리말 격인 ‘기론찬본지(記論撰本旨)’와 도론(導論)격인 ‘논동속(論東俗)’ㆍ‘논여제 (論麗制)’ㆍ‘논국조정폐(論國朝政弊)’ㆍ‘논비국(論備局)’ㆍ‘총론사민(總論四民)’ 등으로 이루어 져 있는바, 전자에서는 《우서》를 저술하는 동기가 피력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국허민빈(國虛民貧의 현실을 빚어낸 원인을 역사적으로 성찰(省察)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룩할 수 있는 기본 방향이 모색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우서》의 요추(要樞)인 동시에, 유수원의 정치철학과 사회사상 전반(全般)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핵심적 부분이라고 하겠다.
유수원은 이곳에서 국허민빈의 원인을 ‘사민불분(四民不分)’ 즉 사ㆍ농ㆍ공ㆍ상으로 대표되는 국민 모두가 각자의 생업(生業)에 전업적(專業的)으로 충실하지 못하고 있고, 또 그렇게 못하도록 조선왕조의 사회가 온갖 여건을 조성하여 온 데 있다고 단정하고, 나아가 그것은 양반 문벌의 발달을 초래한 신분제(身分制) 질서에서 말미암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사민일치(四民一致)’ 즉 신분제 질서의 파기(破棄)를 통한 모든 국민의 평등 일원화(一元化), 다시 말하면 각자의 능력과 취향에 따르는 하나의 직업인으로서의 국민의 평등적 개편을 부국안민에 이르는 선결(先決)의 과제로 생각하고, 이에 바탕하는 온갖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도를 종결(終決)의 과제로 생각한다.
본론은 이어서 신분제 질서의 파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모색 제시로부터 시작된다. ‘논문벌지폐(論門閥之弊)’에서 비롯하여 ‘논구문벌지폐(論救門閥之弊)’ㆍ‘논학교(論學校)’ㆍ‘논학교선보지제(論學校選補之制)’ㆍ‘논거인격례(論擧人格例)’ㆍ‘논과거조례(論科擧條例)’ㆍ‘논과공음삼도격례(論科貢蔭三塗格例)’ㆍ‘논은음전서사의(論恩蔭銓敍事宜)’ㆍ‘총론선거공음사리(總論選擧貢蔭事理)’ㆍ‘논무거(論武擧)’에 이르는 9개 항목이 바로 그것이다.
유수원은 이들 항목에서 모든 국민의 자제들이 그 가업(家業)이나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그 교육에서 드러난 능력과 재질에 따라 ‘사(士)’ 즉 직업인으로서의 관리로 기용될 수 있는 피교육자(被敎育者)를 선발하여 국가 관리 아래 고등교육을 받게 한 다음, 이들 중 소정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관리에 임용하게 하는 온갖 절차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의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양반 관리의 비신분적인 직업인으로의 개편을 뜻하는 것인바, 그의 신분제 질서의 파기 방안이 우선 유한(遊閑) 그리고 특권계층인 사(士 廣義의 兩班)의 개편 방안으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은 이른바 사(士)의 궁극적인 목표가 관리로 입신(立身)하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또 이들 양반 관리가 곧 신분제 질서의 기저(基底)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수긍(首肯)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士)’의 개편만으로는 직업인으로서의 관리의 자세와 위치가 확립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는 그에 응당하는 관제(官制)와 이의 운영 방안이 또한 수반되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유수원은 위와 같이 양성 선발된 관리를 수용하고 활용할 이상적인 관료기구와 적절한 운영방안을 연이어 모색 제시하고 있다. 바로 본론의 둘째 부분이 되는 ‘관제총론(官制總論)’ 이하의 20개 항목이 되겠다. 즉, ‘관제총론’ㆍ‘논관제지폐(論官制之弊)’ㆍ‘논관제추승(論官制推陞)’ㆍ‘논책임승강조례(論責任陞降條例)’ㆍ‘논선주직관사례(論選注職官事例)’ㆍ‘논구임직관사례(論久任職官事例)’ㆍ‘논고적사의(論考績事宜)’ㆍ‘논추고(論推考)’ㆍ‘논패초(論牌招)’ㆍ‘논주론지폐(論主論之弊)’ㆍ‘논삼사책임사의(論三司責任事宜)’ㆍ‘논양사교례(論兩司謬例)’ㆍ‘논대계직감율명지폐(論臺啓直勘律名之弊)’ㆍ‘논양사합행직무사의(論兩司合行職務事宜)’ㆍ‘관제잡론(官制雜論)’ㆍ‘논관제년격득실(論官制年格得失)’ㆍ‘논물의(論物議)’ㆍ‘논서경(論署經)’ㆍ‘논탄핵(論彈劾)’ㆍ‘논척원은음(論戚畹恩蔭)’ 등인 것이다.
유수원은 기존 관료기구의 대폭적인 개편보다는 정치를 원활하고도 책임있게 수행할 수 있는 기존 기구의 합리적인 운영 방안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는 전문화된 직업적인 관리에 의한 정무(政務)의 분담책임제, 정책 수립에 있어서의 문호개방제, 관리의 신분보장제, 행정부[六曹]의 기능강화책 등등을 추구 구상하면서 삼사(三司)의 과도하고도 무절제(無節制)한 간섭을 억제하는 방책을 대체로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부국안민을 위한 선결 과제로서의 사민일치(四民一致)의 기본 요건을 추구 논술한 유수원은 이어 이러한 기술 위에서 전개되어야 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길, 즉 행정ㆍ재정상의 제반 개혁 과제와 농ㆍ공ㆍ상업 및 그 종사자들에 대한 제반 시책에 관하여 광범하게 검토 추구하고 있다. 바로 본론의 끝 부분이 되는 ‘논호구격식(論戶口格式)’ 이하의 40개 항목이 그것으로, ‘매세편심규칙(每歲編審規則)’ㆍ‘논관사조책규례(論官司造冊規例)’ㆍ‘논편심구관신증사례(論編審舊管新增事例)’ㆍ‘논균요사리(論均徭事理)’ㆍ‘논균요전부사의(論均徭田賦事宜)’ㆍ‘논호구잡령(論戶口雜令)’ㆍ‘논전정(論田政)’ㆍ‘논견휼진구(論蠲恤賑救)’ㆍ‘논선혜대동(論宣惠大同)’ㆍ‘논상진이청(論常賑二廳)’ㆍ‘논화전(論火田)’ㆍ‘논과종상마(論果種桑麻)’ㆍ‘논면세보솔지류(論免稅保率之類)’ㆍ‘논징수공세전량(論徵收貢稅錢糧)’ㆍ‘논양서재화(論兩西財貨)’ㆍ‘논노비공역(論奴婢貢役)’ㆍ‘논각사파지공비(論各司派支公費)’ㆍ‘논외방파지공비(論外方派支公費)’ㆍ‘논파지영문공비(論派支營門公費)’ㆍ‘논이원역만승발지제(論吏員役滿陞撥之制)’ㆍ‘논전폐(論錢弊)’ㆍ‘논어염정세(論魚鹽征稅)’ㆍ‘논철야속환(論鐵冶贖鍰)’ㆍ‘논상판사리액세규칙(論商販事理額稅規則)’ㆍ‘논한민(論閑民)’ㆍ‘논사서명분(論士庶名分)’ㆍ‘논희성지류(論稀姓之流)’ㆍ‘논군제(論軍制)’ㆍ‘논속오보갑(論束伍保甲)’ㆍ‘논기군마정(論騎軍馬政)’ㆍ‘논외관영송비(論外官迎送費)’ㆍ‘논포체(論鋪遞)’ㆍ‘논훈예(論勳裔)’ㆍ‘논진헌물종(論進獻物種)’ㆍ‘논내탕(論內帑)’ㆍ‘논서원(論書院)’ㆍ‘논공장(論工匠)’ㆍ‘논사찰승도(論寺刹僧徒)’ 등이 되겠다.
항목의 수효나 서술된 분량에 있어서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방대한 부분은 앞서의 부분과는 달리 논지(論旨)의 전개가 체계를 잃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다. 국민 경제와 국가 재정에 관한 현실의 비판과 이의 개혁안이 주제를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이와는 직결되지 않는 작은 문제들, 예를 들면 ‘논이원역만승발지제’나 ‘논희성지류’ 및 ‘논훈예’와 같은 항목들이 주제의 사이 사이를 끊고 있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광범하고도 다양한 과제들을 일시에 다룬 데서 불가피하였던 편집상(編輯上)의 흠일 뿐, 이것이 이 부분에서의 논지를 흐트러뜨리고 있지는 않다.
유수원이 여기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용후생의 길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업(生業)에 철저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온갖 여건을 조성하고 유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사민일치의 사회체제와 적절균등한 수취체제 아래서 국민 모두가 능률적이고도 전업적(專業的)으로 자원(資源)을 개발 확장하고 기술(技術)을 연마 습득하여 증산(增産)을 기하고, 또 이들 물자를 신속하고도 원활하게 유통하여 수요와 공급에 충족을 기할 때 부국안민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ㆍ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에서 위와 같은 자신의 방안을 제시한 유수원은 이들 방안이 지니는 이해(利害)와 가행(可行) 여부를 스스로 살피면서 이 논저를 끝맺고 있다. 77항목 중 마지막 2개 항목, 즉 ‘논변통규제이해(論變通規制利害)’와 ‘총론법도가행여부(總論法度可行與否)’가 곧 그것이다.
그는 이 결론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바탕한 ‘실사(實事)’와 ‘후생(厚生)’의 방안임을 다시금 확언하고 있다. 그는 원시유가(原始儒家)에서 주창된 사상과 제도가 하늘의 이치에 합당하고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는 가장 공명정대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理解)하고, 이 정신과 체제에 따르는 일이 곧 실질적이고도 이상적인 정치요 생활이라고 믿어 마지않는 것이다. 그가 그의 개혁안을 주로 중국의 제도 문물에서 취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보겠다.
그러나 유수원은 자신의 개혁안이 즉각적으로 실시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그의 방안이 ‘치표(治標)’의 안이 아니고 ‘치본(治本)’의 안이기 때문이라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치본’을 향하는 ‘치표’의 도리를 논술한 다음, ‘겉만 다스리고 근본을 다스리지 않으면 옛날과 같이 침고(沈痼)할 뿐’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이 논저를 끝맺고 있다.
Ⅴ
《우서》는 위에서 개관한 바와 같이 18세기 조선왕조의 부국안민책(富國安民策)에 초점을 맞춘 사회개혁론을 대담하고도 체계 있게 기술한 하나의 논저이다.
돌이켜 보면 18세기 조선왕조는 실제로 일대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15세기 말엽에 확립된 양반 중심의 모든 제도 질서가 그 대강(大綱)을 유지하려는 허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 시기에는 그 사회를 지탱할 능력을 상실하여 정부와 국민은 서로 유리(遊離)된 가운데 각기의 명맥(命脈)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고질화(痼疾化)된 양반들의 정치투쟁과, 대동ㆍ균역법 등이 외면(外面)된 가혹하고도 무리한 수취 수탈, 그리고 안일한 양반의 신분을 획득하고 가혹한 수취에서 벗어나려는 군공(軍功)ㆍ납속(納粟)ㆍ모칭(冒稱)의 성행(盛行) 등등의 양상이 모두 이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재래의 질서 제도를 유지 지속하려는 노력이 깊어진 병폐(病弊)에 비하여 매우 미봉적(彌縫的)이고도 소극적이었던 데서도 원인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당시의 사회가 이질적(異質的)인 요소와 정신을 생성(生成) 발전시키면서 양반 중심의 폐쇄적이고도 고식적(姑息的)인 질서와 제도를 배척하여가고 있었다는 데서도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18세기 조선왕조에서 요망되었던 개혁은 재래적인 질서ㆍ제도의 수보(修補)나 강화(强化)가 아니고, 이같은 사회 변화에 부합되는 그 어떤 새로운 질서와 제도의 창제(創制) 실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글자 그대로의 일대 유신(維新)이 요망되고 필요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수원의 《우서》는 그 어느 논저보다도 이러한 시대상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나아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참신하고도 전진적인 개혁안을 총괄적(總括的)으로 체계 있게 제시하고 있는 드물게 보는 저서라는 점에서 우선 그 사료적 가치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개혁안이 시대적 한계성으로 말미암아 원시유가(原始儒家)의 자연법적(自然法的) 사회사상과 왕도적(王道的) 정치철학에 바탕하고, 중국의 제도ㆍ문물에 견주어 마련되고는 있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지향한 바가 18세기 이후의 역사적 지향과 부합될 뿐 아니라, 근대적 질서와 제도에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는 데서 그리한 것이며, 또 현재까지는 《우서》처럼 총괄적으로 체계지어 사회개혁론을 기술한 조선 후기인의 저서가 보이지 않는데서 그러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 나름의 단견(短見)일 뿐, 보다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이해와 평가는 앞날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리라 믿는다.
1981년 12월 30일
제1권 이 책을 저술하는 근본 취지
【문】: 그대가 이 책을 저술하는 것은 내용이 참으로 세상에 시행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답】: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세상에 시행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겠는가.
【문】: 그렇다면 이 책을 저술하여 무엇하겠는가.
【답】: 천하의 모든 일은 참으로 그 이치가 있으면 반드시 그 말이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간(世間)에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으므로 부득이 말하는 것이니,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은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 옛날 군자(君子)들은 대개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들이 어찌 당초부터 시행될 수 있고 없음을 헤아렸겠는가. 요는, 마음에 쌓이고 맺힌 바 있으나 이를 펼 수 없어서 부득이 글로 기록하여 스스로 성찰하였던 것뿐이다. 그런데 세상의 소견 좁은 무리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이상히 여겨 수군거리다가 떼를 지어 떠들어대기를 ‘저 사람이 이 책을 저술하여 무엇하려는가. 이를 세상에 펴고 정사(政事)에 베풀고자 하려는 것인가.’ 하며 서로 놀라 마지않으니, 이는 대개 그 마음가짐이 자기의 명예를 꾀하는 데만 있고, 군자가 책을 저술하는 의의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공연한 고생을 사서 하니 그 누가 알아주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무리들이다. 나는 항상 그 간악한 마음과 비열한 생각을 미워하여, 그들과는 상대할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대가 또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유수원
제1권 우리나라의 습속을 논함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좌해(左海 좌는 동방 곧 우리나라를 뜻함)를 연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 뒤로 오랑캐 습속에 빠져든 지 오래되어 이제는 그 팔조(八條)가 어떠한 것인지조차 모르도록 되었으니, 그 밖의 일들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고구려ㆍ신라 이전은 대체로 문명이 미개한 세상이었으므로, 법제(法制)나 문헌(文獻)이 실로 논의될 만한 것이 없겠으나, 고려 통일 이후는 제법 국가 체제를 이루었던 때인데도 오늘날 유감스럽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이제 그 대략을 논의하여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가 문명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기자의 가르침이 이미 없어진데다가 신라의 정치가 또한 거칠고 서툴러서, 오직 최치원(崔致遠) 한 사람이 당(唐) 나라 말기에 약간의 시율(詩律)을 배워 온 데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문자(文字)를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법제를 마련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들이 뒤이으면서 제도를 만들어 놓아야만 커다란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데, 최치원은 한낱 시인(詩人)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문자를 깨친 근원이 이같았으니, 모든 일이 거칠고 서툰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 왕조는 나라를 세운 지 5백 년에 이르도록 인륜(人倫)을 밝히지 못하고 나라의 체통을 확립하지 못하여, 의장(儀章)과 법도(法度)가 오늘에 전하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이른바 문헌도 이규보(李奎報) 등의 시율(詩律)이 약간 전하는 데 불과하고, 왕조 말기의 선비들은 원(元) 나라의 문자(文字 문예(文藝)를 뜻함)를 익힌 데서, 시(詩)ㆍ부(賦)ㆍ의(疑)ㆍ의(義) 등의 과제(科製 과거 답안문(答案文))와 조맹부(趙孟頫) 등의 필법(筆法)이 아울러 전하고 있을 뿐이니, 이러한 것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저, 고려의 재상들은 시를 읊조리거나 술을 마시는 외에 간혹 선가(禪家 불교(佛敎))의 문자(文字 도량문(道場文) 등)를 짓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이러한 일 밖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러하고도 국가다운 모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문교(文敎)가 비로소 두루 미치게 되매, 법도를 세우고 기강(紀綱)을 펴서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이 바로 고려 태조(太祖)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태조의 유훈(遺訓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뜻함)이라는 것이 지리(地理)ㆍ불법(佛法)ㆍ탑상(塔像) 등의 일을 간곡하게 부탁함으로써 국가 성쇠의 기틀로 삼은 데 지나지 않았으니, 이 어찌 심히 개탄할 일이 아닌가. 다만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의 호)ㆍ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 등의 여러 유학자가 처음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일으킨 것은 하늘이 우리 왕조(조선왕조를 뜻함)의 문교(文敎)를 앞서 열어 주려는 징조로서, 마침내 그 실마리가 끊이지 않고 전하여 선비들에게는 다행한 일이 되었으나, 국가의 실제 정사에 있어서는 기여한 바를 찾아 볼 수 없다.
[주D-001]그 팔조(八條)가 …… 되었으니 : 팔조법금 중 5조목은 알 수 없고, 다음의 3조목만이 전하고 있다. 즉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死刑)에 처한다. ② 남에게 상해(傷害)를 입힌 자는 곡물(穀物)로 배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 단, 자속(自贖)하려는 자는 50만 전(錢)을 배상한다. 《漢書 地理志》
제1권 고려(高麗)의 제도를 논함
과목(科目)
고려 광종(光宗)이 처음으로 쌍기(雙冀)의 말에 따라 과거(科擧)로 인재를 뽑기 시작하였으니, 쌍기는 중국의 수재(秀才 여기서는 선비를 지칭)로 상선(商船)편에 우리나라에 와,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정4품벼슬)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그 법은 자못 당 나라 제도를 본뜬 것으로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으로써 인재를 뽑고, 아울러 명경(明經)과 의업(醫業)ㆍ복업(卜業) 등으로도 뽑았다. 이른바 시는 십운배율(十韻排律) 같은 것이고, 부는 팔차부(八叉賦) 같은 것이다. 당 나라 제도에 부(賦)는 관운(官韻)이 있어, 그 문체가 변려문(騈儷文)과 같았고, 송(宋) 나라 초기에도 이것으로 인재를 뽑았는데, 그 문체와 격조가 가장 비루하였다. 일찍이 고려 시대의 사(詞)ㆍ부(賦)를 보니, 이 역시 이러한 문체였다. 우리 왕조 중고(中古) 때에도 사륙부(四六賦)가 숭상되었는데 이는 대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다.
명경도 역시 당 나라 제도인 첩송(帖誦)의 법을 답습한 것으로, 이것이 전하여 오늘날의 실학(實學)의 폐단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의학(醫學)은 곧 오늘날의 양의사(兩醫司 전의감(典醫監)ㆍ내의원(內醫院))에서 시행하는 시험이니, 이 또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다.
고려 왕조가 숭상한 것은 시(詩)와 부(賦)였다. 까닭에 제도상으로는 삼례(三禮 《의례(儀禮)》ㆍ《주례(周禮)》ㆍ《예기(禮記)》)ㆍ삼전(三傳 《좌전(左傳)》ㆍ《공양전(公羊傳)》ㆍ《곡량전(穀梁傳)》) 등으로도 선비를 시험하여 뽑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는 시행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해서 끝내 시와 부를 가지고 중요한 과목으로 삼았다.
대체로 역대(歷代) 왕조들의 제도 가운데서도 당 나라는 육조(六朝) 시대의 풍조를 이어받아 화려한 글을 가장 존중하였기 때문에 그 풍속이 매우 허망했다. 그런데 고려가 또한 이 같은 당 나라 말기의 풍조를 사모하여, 그 풍속이 들뜨고 사치하여 실속이 없었다. 의종(毅宗) 때 이르러서는 오로지 시구(詩句)를 주고받는 일에만 힘쓰다가 끝내 정중부(鄭仲夫) 등의 화란(禍亂)을 빚고 말았으니, 고려는 이로 인하여 융성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 습속이 당(唐)을 특히 사모해서 당 나라가 멸망한 지 이미 오랬는데도, 지금에 이르도록 중국 사람을 당인(唐人)이라 부르고 중국 물건을 당물(唐物)이라 일컬으며, 부엌데기나 시골 계집까지도 당사발[唐沙碗]이니 당종자(唐種子)니 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고려가 당 나라 제도를 사모하고 숭상한 데서 입에 밴 까닭이라 하겠다.
과목(科目)의 입법(立法)이 혼잡하고 터무니없는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그 가운데서도 오천(五賤)과 불충 불효한 자, 악공(樂工)ㆍ조례(皁隷)ㆍ공장(工匠)ㆍ상인(商人) 등 잡류(雜類)의 자손들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잡류 자신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을지 몰라도 어찌 그 자손들까지 영구히 금고(禁錮)할 이치가 있겠는가.
학교(學校)
고려의 학교는 오늘날과 다름이 없었으니, 이른바 태학(太學)과 사문학(四門學)은 대략 당 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이나 지방을 물론하고, 선비를 선발하는 제도는 애당초 없었다. 이른바 공거(貢擧 인재를 선발함)라는 제도는 계수관(界首官)으로 하여금 오언 육운(五言六韻) 1수(首)를 시험하여 합격한 사람을 보내 과거에 응시케 한 것으로 오늘날의 초시(初試)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뒤에 사운(四韻) 1백 수(首)를 외면 합격이 되도록 바뀌었고, 또 그 뒤에는 천자(千字) 가운데 1백자를 쓸 줄 알면 합격이 되도록 바뀌었다. 법제(法制)가 이같이 가소로웠던 것이다.
전제(田制)
고려는 전제(田制) 역시 당 나라 제도를 모방하였다. 문무 관리와 부병(府兵)ㆍ한인(閑人)에게 전토(田土)를 주었고 또 땔감을 마련할 땅도 주었는데, 이를 전시과(田柴科)라 일컬었다. 그런데 이 제도는 시행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없는 폐단을 자아냈으니, 전토를 받은 사람이 사망(死亡) 또는 체직(遞職)된 집에서도 받은 전토를 자기들의 소유인 듯이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사전(私田)이라 칭하면서 자손에게 물려 준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 가운데 더욱 터무니없었던 것은 관리나 군졸들의 계급을 무시하고 인품의 선악(善惡)에 따라 전토 지급량에 차등을 둔 것이다. 법제의 제정이 이와 같았으니, 그 뒤끝에 생기는 폐해를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문】: 고려의 구분전(口分田)ㆍ영업전(永業田)의 제도는 당 나라 제도를 그대로 습용(襲用)한 것이다. 그런데 정전제(井田制) 이후로 토지 제도가 좋기로는 당 나라 초기의 제도를 으뜸으로 치고 있는데 어째서 이 제도를 배척하는가.
【답】: 당 나라는 영휘(永徽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 이후로부터 구분전이 세력 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는 바 되어 끝내 그 제도를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까닭에, 정자(程子)ㆍ주자(朱子)도 토지 제도를 논술할 때 일찍이 당 나라 제도를 취하지 않았으니, 이 법제를 가지고는 영구히 준행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토지 제도는 그나마도 당 나라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터무니없는 제도를 거기에다가 섞었다. 임금은 3백 60처의 어분전(御分田 내장전(內庄田)으로 장(莊) 또는 처(處)라 했다)을 설치하여 자신을 봉양하는 전토로 삼았는데, 이들 전토는 곧 사패(賜牌)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밖에 관리들은 그 관작(官爵)이 오르고 내리는 데 따라 수시로 직전(職田)을 번갈아 받았는데, 이들이 사망하여 그 전토를 국가에 반납할 때, 그 아내가 수절하면 그녀에게 약간의 전토를 떼어주고 그 아들이 집안을 이으면 그에게도 약간의 전토를 떼어주었다. 이러한 제도는 아래로 군졸에 이르기까지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관청의 구실아치들과 공장(工匠)ㆍ진부(津夫)ㆍ역자(驛子 역리ㆍ역졸) 등 잡인들에까지도 모두 전토를 주고 거두고 하였으니, 그 번거롭고 난잡한 것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었겠는가. 갑(甲)에게서 빼앗아 을(乙)에게 주고 저에게서 줄여서 이에게 보태니, 전토의 경계(境界)를 바르게 하고 그 소유자를 가려서 기록할 때에 문서가 번다하여 관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므로 전토의 소송이 산처럼 쌓이고 남의 땅을 훔치는 일이 무궁하여, 중세(中世) 이후로는 백성들이 한 치의 전토를 갖지 못하고, 온 나라의 전토가 모두 사대부(士大夫)에게 귀속되고 말았다.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을 비롯한 대족(大族)들이 모두 처형되어도, 그 고질화된 폐해는 이미 극도에 달하여 끝내 바로잡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드디어 공사전(公私田)의 모든 토지 문서가 불 속으로 던져져 이 불은 여러 날 동안 꺼지지 않았고, 고려도 이에 따라 멸망하니, 법제의 제정이 과연 훌륭했다면 그것이 미친 폐해가 어찌 이렇듯 극심하기에 이르렀겠는가.
【문】: 그렇다면 오늘날의 토지 제도는 고려 때보다 좋은가.
【답】: 오늘날도 전토(田土)를 모두 사대부가 차지하고 있으니, 언제 한 번인들 백성이 전토를 지닌 적이 있었는가. 겸병(兼幷)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백성이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경작 전토가 숫자상으로는 1백만 결(結)을 넘지만 실결(實結)은 겨우 그 절반에 불과하니, 이 또한 고려에서 물려받은 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문】: 어떤 일이 폐단인가.
【답】: 입안(立案)과 사패(賜牌)는 모두 고려의 나쁜 정사(政事)였는데 이것이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심하니, 전토의 결수(結數)가 어찌 날로 줄어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외방(外方)에 급복(給復)하는 제도도 고려 때의 전토를 받는 뜻에 따른 것인데, 실제로 미치는 혜택은 적고 토지 제도만 문란케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문】: 외방(外方)에 급복하는 제도가 있기는 해도, 이 전토에서는 공부(貢賦)를 모두 계산해 받고 있다. 단지 소속 지방 관아의 잡역가미(雜役價米)만을 면제해 줄 뿐이니, 실결(實結)이 이로써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답】: 인리복호(人吏復戶)의 경우를 들어보더라도, 그것이 어찌 실제로 혜택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한갓 명색에 지나지 않는 무실(無實)한 것일 뿐이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바르게 고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써 전정(田政)을 정돈하겠는가.
병제(兵制)
【문】: 고려의 6위(衛) 38영(領)의 제도는 실로 부병제(府兵制)를 본뜬 것으로, 훌륭한 제도였다고 하겠다.
【답】: 부병은 오로지 전토의 지급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토지 제도가 곧 문란해지자, 군사들도 모두 흩어져서 헛되이 이름만 남게 되었는데, 어찌 훌륭한 제도였다 하겠는가. 당 나라는 부병제가 어그러지고 변경(邊境)의 군진(軍鎭)이 세력을 떨치면서 안녹산(安祿山)ㆍ사사명(史思明)의 무리가 잇달아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는 부병제가 어그러져 별초(別抄)가 치성하게 되자 최충헌(崔忠獻)의 무리가 잇달아 서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군제(軍制)가 좋지 못했던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는 것이다.
【문】: 요(遼) 나라나 금(金) 나라의 위력(威力)으로도 끝내 고려를 정복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고려의 병력은 강성했다고 하겠다.
【답】: 무릇 법제를 논할 때는 마땅히 그 대체(大體)가 좋고 나쁜 것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한때의 승전(勝戰)만을 내세우고 법제의 잘못된 점은 따지지 않는가. 토지 제도가 좋지 못하면 부병이 끝내 유지될 이치가 없는 것이니, 이것이 크게 잘못된 점이다. 고려가 간혹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어도 끝내 요ㆍ금 나라에 신하로 칭하지 않았는가.
【문】: 오늘날의 병제의 폐해는 고려 제도의 폐단에서 근원하지는 않았다.
【답】: 병제도 역시 고려의 잘못된 제도를 이어받고 있다. 다만 법제가 약간 다를 뿐이다. 우리 왕조 초기의 오위(五衛)는 대개 고려의 부병과 각 익군(翼軍)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지만, 고려에서는 전토를 지급할 수 있어서 부병이 되었고, 우리 왕조에서는 지급할 전토가 없어서 부득이 양민(良民)을 급보(給保)하게 된 것이다. 전토를 지급한 데서 생긴 폐해가 공전(公田)이 하나도 없게 된 뒤에야 그쳤으니, 보(保)를 지급한 데서 생기는 폐해도 장차 양민이 하나도 없게 된 뒤에야 그칠 것이다.
관제(官制)
고려는 바다 밖에 치우쳐 있는 작은 나라였다. 그런데 그 국력(國力)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제도를 걸핏하면 당 나라 것대로 모방하여 필요없는 관원(官員)이 매우 많았고 명호(名號)만 많아서 대성(臺省)ㆍ부원(部院)ㆍ경감(卿監)과 같은 관직을 설치하기는 했어도 한갓 이름만의 관직일 뿐이었다. 임무를 분담하여 책임 있게 일을 이루어야 할 실제적인 제도는 도리어 없고 중국 제도의 허울만 본뜬 데 불과했던 것이다. 특히 전각(殿閣 집현전(集賢殿)ㆍ보문각(寶文閣)ㆍ청연각(淸讌閣) 등)의 문관직이 극도로 많았는데, 모두 헛되고 요긴하지 않은 것이었다. 도평의사(都評議司)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것은 본래 국정을 의논하는 자리인데 이에 참여하는 재추(宰樞 삼성(三省)과 중추원(中樞院)의 대신)가 70~80명에 달하여 육부(六部)는 헛되이 설치된 기관으로 되고 말았고, 모든 업무가 분산되어 계통이 없이 되었으니, 그 폐단은 오늘날의 비당(備堂)을 임명하는 제도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각종의 도감(都監)과 권설 아문(權設衙門)을 설치하는 제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답습되며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전주(銓注)
관리를 기용하는 법제도 매우 엉성하였다. 원래 처음으로 입사(入仕)하는 데 관한 규제(規制 )가 없어서, 직무를 맡길 만한 사람의 성명을 이부(吏部)가 권점(圈點)하여 입권(入卷)하였으니, 이를 점권(點卷)이라 하였다. 까닭에 관직을 구하는 사람은 모두 이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그리고 개국(開國) 이후의 모든 공신의 자손에게는 친가나 외가(外家)의 현손(玄孫)의 현손까지도 모두 초입사(初入仕)를 허락하였으니, 공신의 자손은 혹시 등용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외가의 현손의 현손에게까지 음사(蔭仕)를 허락할 이치가 있는가. 심히 가소로운 일인 것이다.
한편, 고과(考課)의 제도를 보더라도, 단지 아전(衙前)들이 하는 일 같은 것에 능숙한지 못한지를 살피는 정도였고, 또 고공(考功)의 방법이라는 것도 1년 동안의 실제의 근무 일수(勤務日數)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을 연종 도력(年終都歷)이라 하여, 두 차례의 도목(都目 도목정(都目政) 즉 정기 인사 이동)에 제출하는 유일한 자료로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밝고 흐린 것을 살피고 어질고 간사한 것을 분별하는 데 충족한 것이 되었겠는가.
이 밖에 또한 관직을 제한하는 제도도 있었다. 공장(工匠)이나 상인(商人)의 내외(內外 친가(親家)와 외가(外家)) 자손에게는 청요(淸要)나 이민(理民)의 직(도백(道伯)과 수령(守令))을 주지 않고, 오직 교위(校尉)와 같은 유외 잡직(流外雜職)을 주어 8~9품(品)에서 관계(官階)를 그치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록 그 조상이 삼한 공신(三韓功臣 고려의 후삼국(後三國) 통일에 녹공된 공신)이었다 하더라도, 고조부(高祖父) 이하의 내ㆍ외 조상들 가운데 혹 상공업에 종사한 사람이 있으면 그 자손을 모두 금고(禁錮)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자고 이래로 없던 법제였다. 공장이나 상인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내ㆍ외의 자손을 금고하기까지 하랴.
문벌(門閥)
고려의 정치는 대체로 당 나라 제도를 숭상하는 가운데 베풀어졌으나 정치를 행하는 근본을 알지 못하여, 그 폐해가 문벌(門閥)로 사람을 기용하는 데 이르고 말았다.
【문】: 어째서 그러한가.
【답】: 삼국 이전에는 원래 사민(四民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구별이 없어, 모든 사람의 생활이란 오직 농사를 짓는 일뿐이었다. 그런데 고려가 나라를 세우고 의방(依倣)할 바 없는 가운데서 정치를 베풀고 있을 때, 당 나라 말기를 당하여 중국 인사(人士)들이 우리나라로 많이 오니, 이에 고려의 정치는 대개 당 나라 말엽의 제도를 모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중국의 문물을 간절하게 사모한 나머지 모든 문물을 하루아침에 중국과 같이 변혁코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둔하여 속히 이루어질 이치가 없었으므로 부득이 선비를 높여 쓰고, 잡기(雜技)를 싫어하고 천대함으로써 그 고무(鼓舞)하는 토대를 삼으니, 드디어 공상(工商)을 금고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나라의 풍속이 오로지 문물만 숭상하고, 잡기 익히기를 싫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오랑캐의 풍습이 가시지 않고 예의(禮義)가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 고치려고 한 데서 자녀(恣女)의 자손을 또한 금고하게 되었으니, 자녀란 곧 개가(改嫁)한 여인을 말한다. 이리하여 원래 그 본의(本意)는 문벌을 숭상하려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지만, 그 폐해가 자연 문벌을 이루는 데로 돌아갔던 것이다.
【문】: 해외(海外)의 나라로서 진실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아 정치하고자 하면, 권장하고 징계하는 일들을 이처럼 한 뒤에야 예의가 흥성하고 문물이 볼 만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고려의 입법(立法)이 잘못된 바를 알지 못하겠다.
【답】: 이른바 예의라는 것이 어찌 자손을 금고함으로써 다스려지는 것이며 또 문물이라는 것이 어찌 시(詩)ㆍ부(賦)나 화려한 글로 이루어지는 것이랴. 대개, 중국 제왕(帝王)의 정치는 요(堯)ㆍ순(舜)이 몸소 가르치고 마음으로 전한 것이다. 천리(天理)에서 구하여 어긋남이 없고 인정(人情)에 바탕하여 어지럽지 않아서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이 모두 하늘이 편 질서에 합동하게끔 행하였으니 이것이 예의(禮義)인 것이며, 호령(號令)ㆍ기강(紀綱)ㆍ정사(政事)ㆍ전칙(典則)이 한결같이 천리(天理)에 마땅하게 마련되고 인위적인 사정(私情)이 섞이지 않아, 그 찬연히 빛나는 모습이 기록 전승될 만하였으니, 이것이 문물(文物)인 것이다. 이 어찌 편방(偏邦)의 비천한 습속으로써 쇠퇴한 시대의 평범한 임금들이 아는 척하고 모방할 수 있는 것이며, 또 모방한다고 한들 일조일석에 이룰 수 있는 것이랴. 이러한 까닭에 중국은 성현(聖賢)의 은택(恩澤)이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쌓아 온 정치가 또한 없어지지 않아서, 일찍이 패술(霸術)과 공리(功利)가 섞이고 황로(黃老)와 불씨(佛氏)가 어지럽히며 융족(戎族)과 갈족(羯族), 호족(胡族)과 이족(夷族)들이 번갈아 침입하여 난폭한 정치로 더러운 풍속을 물들여 놓기는 했어도, 그 큰 강령[大綱領]ㆍ큰 근본[大根本]ㆍ큰 제도[大制度]ㆍ큰 습속[大習俗]이 끝내 혼란되지도 않고 마멸(磨滅)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성현이 개창(開創)하고 이어간 정치가 없었을 뿐 아니라, 유자(儒者)의 경술(經術)이 정치를 도운 일도 없었다. 이미 기본(基本)이 되는 정치가 없었고 이를 배운 바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갓 화려한 글을 지어 읊조리는 습속이 곧 문물인 줄 알았고, 억지로 제속(制束)하고 윽박질러 구종(苟從)케 하는 풍속이 곧 예의인 줄 알아서 무엇보다도 먼저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네 글자를 취하여 분란(紛亂)을 벌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직업을 잃게 되고 사업들이 모두 그 실속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 어찌 겉으로 분식(粉飾)한 의문(儀文)과 허황하고 실속 없는 명호(名號)만을 들어서 입법(立法)이 잘 되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랴.
【문】: 고려의 제도는 당 나라 사람에 의하여 많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하여 사민(四民)의 하나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입법(立法)할 당초에 이처럼 편벽되게 하였는가.
【답】: 이른바 당 나라 사람들이란 거의 중국 연해(沿海) 지방에 살던 곤궁한 수재(秀才)들로, 병란(兵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어찌 대단한 견식(見識)을 지녔겠는가.
【문】: 그렇다면 고려에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높이 대우했는가.
【답】: 비유하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궁벽한 시골 사람이 내지(內地)의 손님을 보고서 문득 서울의 이름 있는 양반으로 여기어 귀히 대접하는 것과 같으니, 어느 사이에 그 마음속의 학식을 살펴 판단하겠는가. 이른바 당 나라 수재들은 중국 문물ㆍ제도의 찌꺼기를 대략 기억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성균관(成均館) 하인들이 글줄이나 얻어들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기회를 만나 법제를 제정하는 일에 참여케 된 것이니, 저들이 어찌 사민(四民)이 한결같은 것이어서 하나라도 버려서는 나라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조세(租稅)
【문】: 고려에서는 상등전(上等田) 1결(結)에서 2석(石) 12두(斗) 2승(升) 5홉(合) 5작(勺)을, 중등전(中等田) 1결에서 2석 11두 2승 5홉을, 하등전(下等田) 1결에서 1석 11두 2승 5홉을 각각 전세(田稅)로 징수했으니 전세의 부과가 오늘날 징수하는 바에 비하여 매우 가벼웠다고 하겠다.
【답】: 고려 시대의 1결은 오늘날의 1결과 같지 않다. 전토 측량의 보수(步數)를 살펴보면, 전토 2결이 사방 33보(步)였고, 10결이 사방 1백 4보 3분(分)이었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이른바 1결의 전토는 오늘날에 비하여 매우 작았으니, 어찌 전세가 가벼웠다고 하랴. 그리고 고려는 전토 16결을 내려준 사람을 족정(足丁)이라 하여, 그로 하여금 조부(租賦)와 국역(國役)을 담당하게 하고 이 밖에 공사 천구(公私賤口)ㆍ공상(工商 공장(工匠)과 상인(商人))ㆍ매복(賣卜 점쟁이)ㆍ맹인(盲人)ㆍ무격(巫覡)ㆍ창기(娼妓)ㆍ승니(僧尼) 등과 그 자손에게는 모두 전토를 주지 않았다. 법제의 마련이 터무니없고 공평치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조부(租賦)를 담당하고 역역(力役)을 제공하는 사람으로만 보더라도, 그 수효가 또한 많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부역(賦役)
【문】: 고려가 인구의 다과(多寡)로 가호(家戶)의 등급을 나누어 부역을 담당케 한 것은 매우 좋은 제도라고 본다. 오늘날의 호포(戶布)에 관한 논의도 대개 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답】: 부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均)’이란 한 자뿐이다. 그런데 백성들의 빈부(貧富)가 식구의 다소(多少)와 관계되는 것이 아닐진대, 식구의 수효에 따라 부역을 담당케 한다면, 어찌 하나같이 고르게 될 이치가 있는가.
【문】: 그러기에 고려의 호역(戶役)은 9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답】: 비록 8백 등급으로 나누었다 해도 끝내 균등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고려는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민호(民戶)로부터 때를 가리지 않고 징수하는 일이 무한하여 백성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지방의 별역(別役 법정(法定)의 부역)이 오히려 이 폐단을 되밟으며 개선(改善)되지 못하고 있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노비(奴婢)
【문】: 정인지(鄭麟趾)가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면서 ‘우리나라가 노비를 둔 것은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니 예의(禮義)의 행함이 이에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말은 어떠한가.
【답】: 저들이 무슨 예의를 알았겠는가. 선유(先儒)들이 이미 노비에 대하여 정론(定論)한 것이 있으니, 어찌 이를 버리고 정인지의 말을 믿을 수 있으랴. 고려에서는 방량(放良)된 노비가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본 주인을 업수이 여기리라 하여, 만약 노비가 본 주인을 욕되게 하거나 그의 친척들과 다투면 그를 다시 노비로 환속(還屬)시켜 부리도록 하였고, 또 노비로 환속된 사람이 억울함을 소송하면 그 얼굴에 노비를 표시하는 문양을 새겨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는 실로 잔인하고도 터무니없는 정사(政事)인 것이다. 그런데도 정인지가 이러한 제도를 채택할 만하다고 칭송하였다니, 무식(無識)하기 이를 데 없다. 또 고려에서는 관리를 등용할 때 그 조상 8대의 호적을 살펴 천인(賤人)에 관계되지 않았어야만 기용하였다. 만약 부모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천인이면 본인이 주인의 허락으로 양인(良人)이 되었어도 그의 자손들은 다시 천인으로 환원시켰고, 또 그 본 주인에게 후사(後嗣)가 없을 경우에는 그의 종문(宗門)에 환속시켰다. 천하에 어찌 이렇게도 악독한 법이 있겠는가. 노비가 비록 천하다고는 해도 이 역시 사람인데 양인으로 허락한 뒤에 도로 천인을 삼는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내외(內外) 8대 조상들이 천역을 범하지 않았어야만 관리로 등용할 이치가 또한 어디에 있는가. 고려가 비록 서얼(庶孼)을 금고(禁錮)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서얼이 금고당하게 된 것은 실로 이에서 근원한 것이니, 어찌 민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문】: 어째서 고려에서 근원하였다고 하는가.
【답】: 서얼의 내외 8대 조상들이 어찌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범하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문】: 우리나라 노비의 법은 기자(箕子)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 명분(名分)이 엄연한데, 어찌 가당치 않은 것이 있으랴.
【답】: 《한서(漢書)》에는 ‘기자가 팔조(八條)의 법금을 베풀었는데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사람은 그 노비로 삼게 하니, 이 노비가 속(贖)바치고 양인(良人)이 되어도 사람들이 그를 수치롭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 어디에 이미 양인으로 풀어준 사람을 다시 천인으로 환속시키고, 또 그 자손을 금고(禁錮)한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대저, 고려 법제에는 자손을 금고하는 규정이 매우 많다. 전토를 다시 측량, 등록할 때에 10부(負) 이상을 빠뜨린 사람에게도 그 자손을 금고하도록 규정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정법(政法)이랴. 《상서(尙書)》에 ‘형벌은 자손에게 미치지 않는다.’ 했고, 전(傳)에 ‘죄가 처자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라고 했듯이, 옛 임금들의 정치는 매우 충후(忠厚)하기가 이와 같았다. 그런데 고려는 죄없는 공장과 상인의 자손을 영구히 금고했을 뿐 아니라, 천인에 이르러서는 편협하게도 잔혹(殘酷)한 법규를 적용하여 양인(良人)이 되지 못하게까지 하였으니, 이 까닭으로 하여 그 쌓여온 폐해가 오늘에 이르러 더욱 혹독하게 된 것이다. 심히 개탄할 일이 아니랴.
【문】: 지금은 일단 양민이 된 노비를 다시 환속시키는 일이 없고, 또 조상 8대 가운데서 천인(賤人)에 범한 일이 있다 하여 관리로 등용치 않는 법규도 없다. 어째서 그 폐해가 오늘날 더욱 혹독하다고 하는가.
【답】: 《속전(續典)》노비조(奴婢條)에는 ‘할아비나 아비의 비첩(婢妾)에서 태어난 아이는 본시 동기(同氣)이니, 오로지 노비로 부려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었다가 명종(明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의논이 사촌 형제인 경우는 부려서 안 되겠지만, 오촌ㆍ육촌 형제에 이르면 친족 관계가 약간 멀어서 부린다고 해도 안 될 것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오촌 이상의 비첩 자녀(子女)는 부리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여, 교명(敎命)을 받아 이같이 시행하게 되었다. 슬프다, 오촌이나 육촌 형제들은 모두 증조부(曾祖父)를 같이하는 친족인데, 이들을 노비로 칭하여 강제로 부리게 하였으니, 만일 그 증조부가 살아서 이 모양을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이 때문에 친족간에 싸우는 무리들이 줄지어 일어나 아름다운 기풍을 해치고 좋은 습속을 더럽혀서 사람의 도리가 메말라 버렸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무심히 바라볼 뿐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이 역시 한심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또 노비가 비록 그 주인이 있다 하지만 이들도 이 나라의 백성임이 사실인데, 국가가 이들을 제쳐놓아도 될 백성으로 여겨 한 가지 역(役)도 부과하지 않고 한 푼의 세금도 징수하지 않은 채, 오로지 그 상전이 하는 대로 맡겨서 감히 간섭하려 하지 않으니, 오늘날의 양역(良役 양민(良民)이 지는 모든 역)의 폐해는 실로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 또한 어찌 정령(政令)이라 하랴.
【문】: 그러면 이제 곧 사천(私賤)에게서 그 신역(身役)을 징수하여도 좋다는 것인가.
【답】: 국가는 모든 백성을 하나같이 여기고 고르게 아껴야 한다. 어찌 사천에게서는 징수해서 안 되고 양민(良民)에게만 부담시킬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날의 규제(規制)로써는 한 푼의 돈일지라도 사천에게서 징수해서는 안 되게 되었다.
【문】: 징수해서 안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 고려는 일찍이 선비가 공상(工商)에 종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그 자손을 금고하였다. 여기서, 이른바 선비들이 달리 생계(生計)를 유지할 길이 없게 되어 전토를 과수(科授)하여 세업(世業)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러나 곧 그 폐해는 끝이 없게 되었다. 선비들이 공전(公田)을 마구 차지하고 백성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경기(京畿) 한 도의 전토만을 사대부에게 분급(分給)함으로써 함부로 탈취하는 폐해를 없애고자 했지만, 사족들의 전토 점탈의 습속은 갈수록 심하여만 갔다. 이에서 임(林)ㆍ염(廉)ㆍ지(池)ㆍ기(奇) 등의 벌족(閥族)들을 거의 살육(殺戮)하고 그 토지 문서를 불태우니, 백성은 이로써 약간 소생하게 되었으나 고려는 이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다. 고려는 세전(世傳)의 노비에 있어서도 사재(私財)ㆍ사민(私民)으로 삼도록 했었다. 대개 이러하지 않으면 사족들이 달리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집안을 보존키 어려웠던 까닭이다.
그런데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전토가 사족들에게 과수(科授)되지 않았는데도 문벌(門閥)은 고려 때보다 더욱 숭상되어, 비록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러도 공상을 익히지 않게 되었으니, 선비들이 무엇으로써 생계를 보존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고려의 제도를 좇아 노비를 집안 대대로 전하면서 스스로 부리고 스스로 신공(身貢)을 거두고 국가가 이를 도외시(度外視)하며 이들의 일에 일체 간여하지 않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도 양반(兩班)의 생활이 갈수록 더욱 군색해져서 공선(貢饍)에 기상(寄上)하는 일과 같은 나쁜 습속들이 날로 심해지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가난한 사족들이 노비에게서 받아내는 것이 적다고들 불평하고 있으니, 국가가 어찌 사천에게서 또 다시 그 신역(身役)을 거둘 수 있겠는가.
【문】: 고려 말기에 백성들은 한 치의 땅도 지니지 못했었다. 그래서 사족들의 사전(私田) 점거의 폐해를 막으려 하자, 거실세족(巨室世族)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사족이 일정한 세업(世業)이 없으면 반드시 공상(工商) 잡기(雜技)로 흘러들 것이니, 사전(私田) 점거의 폐해라 해도 금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 말은 어떠한가.
【답】: 고려 말기의 대족(大族)들은 수천여 결(結)의 전토를 점거하여 한 해에도 그 세(稅 소작료(小作料)를 뜻함)를 8~9차례나 거두었고, 심지어는 부자 형제가 전토를 다투어 서로 원수를 이루기도 했다. 그 폐해가 이에 이르렀는데 어찌 막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고 양반 자손들이 하도 많아서 온 나라의 전토를 다하여 그 조세(租稅)를 먹게 하고, 온 나라의 백성을 다하여 그 신공(身貢)을 거두게 한다 해도, 결코 이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국가가 이들 모두에게 녹(祿)을 줄 수 없었고 그 가족을 모두 먹일 수 없었는데도,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 있게만 하고 공상의 잡기를 못하게 하였으니, 저들 사족이 무엇으로 생계를 도모하겠는가. 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비들의 생계(生計)는 더욱더 군박(窘迫)하여져서 힘써 농사를 지으려 하면 몸이 땀에 젖고 발이 흙투성이가 되어 일반 백성에 끼어들고 마니 양반의 체면을 보존할 수가 없고, 공상에 종사코자 하면 당장에 상놈이 되어 버리고 마니, 죽는 한이 있어도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족들이 모두 다 군자(君子)만이 아닐진대, 그들이 어찌 곤궁해서 저지르게 되는 비행(非行)의 걱정을 면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도(世道)가 날로 무너져 가는 것도 그 근원이 실로 이에 있는 것이다.
【문】: 고려 때의 양반은 이른바 사족들이니, 이들이 공상(工商)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제법 식견(識見)이 있는 이론이다. 양반은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천업(賤業)을 익히지 않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니, 이제 만약 선비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공상(工商)에 종사하게 한다면, 털끝만한 이익을 따지느라 마음가짐이 흐려지고 풍속이 더러워져서 그 자손들이 이에 귀가 젖고 눈이 물들어 모두 장사치와 같이 되어서 사부(士夫)의 기풍은 전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설사 글을 배워서 과거를 거쳐 벼슬을 한다 해도, 이익을 도모하는 습관이 이미 고황(膏肓)에 배어 반드시 사대부다운 기풍이 없을 것이니, 이로 말미암은 세도(世道)의 우려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답】: 오늘날의 양반들이 말로는 공상(工商)을 익히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제 비루한 행동은 장사치나 공장(工匠)들보다도 더한 것이 많다. 글은 몰라도 세력이 있으면 남의 글을 빌려서 과거에 오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음사(蔭仕)를 바라고, 방납(防納)을 청탁하여 구걸을 일삼기도 한다. 또 이러하지도 않으면, 빚을 놓아 이식을 키우고,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송사를 즐겨서 살아가기도 하고, 주현(州縣)의 수령이 되어서 백성의 재물을 착취, 전택(田宅)을 요구하며, 노비를 널리 차지함으로써 가업(家業)을 이루는 계책을 삼기도 한다. 이 모두가 도리에 어긋나는 무상(無狀)한 일이 아닌 것이 없다. 하지만 양반의 생계를 도모하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어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또 그것이 과연 마음가짐에 해로움이 없고 풍속에 도움이 되겠는가.
공상(工商)은 참으로 말업(末業)이라 하겠으나 원래부터 바르지 않고 비루한 일은 아니다. 자신이 재주와 덕행이 없어 조정에서 녹(祿)을 받지도 못하고, 남에게서 받아먹지도 못할 것을 안 까닭에 몸소 수고하여, 있고 없는 것을 유통시키고 교역(交易)을 이룩함으로써 남에게 의뢰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는 일인 것이다. 예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이 백성이 한가지로 이리하여 온 것인데, 무엇이 천하고 무엇이 더러워서 여기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자손이 영리에 젖어든다고 한 것은 더욱 말이 되지도 않으니, 이른바 공상(工商)의 자손이라 해서 태 속에서부터 모리(牟利)의 창자를 따로 갖추고 태어났겠는가. 아이가 태어남에 그 자질(資質)이 유망해 보이고 자라감에 그 재품(才品)이 성취할 만하여, 스승을 맞아 시(詩)ㆍ서(書)를 배우고 학교에 나아가 예(禮)ㆍ악(樂)을 익힌다면, 배우고 보고 듣고 행하는 바가 모두 선비의 일이 아닌 것이 없으리니, 그 어디에 이익을 꾀하는 습속이 있겠는가.
이제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좀 장성하면 반드시 본경(本經 유교의 경전(經典))을 가지고 본학(本學 소속 군현(郡縣)에 설치되어 있는 학당)에서 그 재주를 시험하는 까닭에 글을 쓸 줄 알게만 되면 항상 동지 선비들과 더불어 책을 읽고 재주를 닦기만 할 뿐이므로 원래 다른 기예(技藝)를 익힐 만한 틈이 없으니, 우리나라 아이들이 한가로이 방랑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리고 이와 같이 착실히 배워도 그 자질이 우둔하여 끝내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뒤에는 반드시 공부를 포기하고 농(農)ㆍ상(商)ㆍ공(工)의 세 가지 일에 종사한다. 대개 15세 이전에 벌써 자기가 나아갈 바를 결정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사람이 없어서 사민(四民)의 일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 모습을 능히 지키는 것이라 하겠다. 어찌 우리나라 선비들처럼 게으르고 공부 않는 사람들이 문인(文人)도 아니고 무인(武人)도 아닌 채, 놀고 먹으면서 안주(安住)할 곳이 없으면서도, 오히려 사대부(士大夫)라는 세 글자로 우뚝이 높은 체하는 판탕(板蕩)ㆍ허망(虛妄)한 것과 같으랴.
【문】: 그대가 논술한 고려 정치의 폐해는 자못 그 핵심을 찌른 것 같다. 하지만 법이 오래되면 폐해가 생기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 시대의 제도 가운데서 몇 가지 옳지 못한 것을 드러내어 이로써 그 대체(大體)가 좋지 않았다고 입증하고 있으니, 어찌 마땅한 것이라 하겠는가.
【답】: 이른바 법이 오래되면 폐해가 생긴다는 말은 입법(立法)이 잘못된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끝에 폐단으로 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제도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입법(立法)할 당초에 천리(天理)를 따르고 성제(聖制)를 지켜서 대공지정(大公至正)한 정치를 이룩하지 못하고, 한갓 당 나라 말기의 법제를 취하여 여기에 우리나라 풍속을 참작해서 하나의 버금가는 제도를 억지로 만들어 냈던 것이나, 당 나라 제도의 이면(裏面)에 있는 정의(精義)가 세밀(細密)한 작용의 미묘한 면에는 어둡고 그저 겉모양만을 본뜨고 치레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까닭에 겉모습으로 보면 제도와 규모가 넓고 크지 아니한 것이 없고, 의문(儀文)과 전장(典章)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지만, 그 속인즉 정사(政事)가 실속 없고 다스리는 법규가 난잡해서 도리어 한단(邯鄲)의 걸음을 이루어 효빈(效顰)으로 돌아가는 헛된 결과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정치가 근본이 없었던 데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과연 법이 오래되면 폐해가 생긴다는 것과 흡사하기나 한 것이겠는가. 그리고 내가 몇 가지를 뽑아 논술한 것이 매우 적막하기는 해도 10개 조목이 모두 군국(軍國)의 대정(大政)이 아닌 것이 없으니, 참으로 이들에서 법제의 제정이 잘못되었다면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어찌 과격하게 하자를 드러내려고 한 것이라 하겠는가.
[주D-001]그 법은 …… 뽑았다 : 당시의 과거는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 등으로 뽑는 제술업(製述業), 유교 경전(經典)으로 뽑는 명경업(明經業), 기술직을 뽑는 잡업(雜業)의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D-002]십운배율(十韻排律) : 10운(韻)으로 된 배율(排律)ㆍ오언(五言) 또는 칠언(七言)으로 된 시 8구(句)를 율시라 하고, 10구(句) 이상이 되면 배율(排律) 또는 장률(長律)이라 한다. 당(唐) 나라 때에 6운(韻) 12구의 배율로 인재를 선발하여 6운 12구가 배율의 정격(正格)이 되었으나 많게는 1백 운 내지 1백 50운까지 지었다.
[주D-003]팔차부(八叉賦) : 여덟 번 깍지를 끼는 사이에 부(賦)를 짓는 것. 당(唐) 나라 시인 온정균(溫庭筠)이 시부(詩賦)에 능하여 시험장에 들어가 관운(官韻)에 따라 부를 지을 때, 여덟 번 깍지를 끼는 사이에 8운(韻)을 지었다고 한다. 즉 정해진 시간에 즉석에서 관운에 따라 부를 짓는 것을 말한다. 《全唐詩話》
[주D-004]관운(官韻) : 시ㆍ부를 지을 때 운자(韻字: 글귀의 음률적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글귀 끝에 쓰는 글자)를 한정하여 일정한 곳에 같은 운(韻)을 달게 하는 것으로, 당(唐) 중엽 때부터 행하여졌다. 중국에서는 이를 위하여 정부에서 운서(韻書)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또한 관운이라고도 한다. 명(明)의 《홍무정운(洪武正韻)》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주D-005]변려문(騈儷文) : 변려체(騈儷體)의 글. 변려체란 중국 남북조시대에 주로 유행되었던 문장체의 한 가지로서,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배합하여 짓는 글을 말한다. 4ㆍ6자의 조화 있는 배합으로 말미암아 글이 매우 기교롭고 아름다웠다.
[주D-006]첩송(帖誦)의 법 : 과거(科擧)의 경서(經書) 시험의 경우 경서 중의 문제가 되는 문구의 수미(首尾)에 종이를 바르고 응시자에게 그 전문(全文)을 답하게 하는 일.
[주D-007]실학(實學) : 여기서 사용된 ‘실학’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학풍인 실학과는 다른 뜻이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유가(儒家) 경서(經書)를 무비판적(無批判的)으로 암기하고 받아들이는 비철학적 학풍을 뜻하는 것 같다.
[주D-008]오천(五賤) : 고려 시대에 천인(賤人)으로 여겼던 다섯 가지 부류의 사람을 말하는데, 어떤 직종(職種)에 종사하였던 사람들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주D-009]계수관(界首官) : 고려 시대에 주현(州縣)을 통제하던 상급 기구인 경(京)ㆍ목(牧)ㆍ도호부(都護府) 또는 그 관장(官長)을 말한다. 고려 전기에는 수많은 주ㆍ현에 외관(外官)을 파견하기는 하였으나, 이들 모두를 중앙 정부가 직접 통제하기가 곤란하여 경(京)ㆍ목(牧)ㆍ도호부(都護府)들을 중앙 정부와 직결시키고, 이들의 관장으로 하여금 관할 지주부군(知州府郡) 및 현령(縣令)과 방어사(防禦使)들을 영속(領屬)하게 하였는데, 이들 수령관(首領官), 즉 경ㆍ목ㆍ도호부의 관장들을 계수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수령관이 주재하는 주목(主牧) 자체를 계수관이라 부르게도 되었다. 계수관은 관할 주ㆍ현의 행정 전반을 직접 지휘ㆍ감독하지는 않고, 다만 중앙 정부와의 중계적 기능만을 담당ㆍ수행하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체로 상표진하(上表陳賀)ㆍ향공선상(鄕貢選上)ㆍ외관추옥(外官推獄)ㆍ습사감독(習射監督) 등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 중엽부터 도제(道制) 즉 안찰사(按察使) 제도가 발달하자 주목(主牧)의 기능은 점차 쇠퇴하여, 계수관은 안찰사와 주ㆍ현과의 중계 역할을 수행하는 위치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계수관의 지위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어, 경상도(慶尙道)의 경우 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안동(安東) 등 4부목(府牧)이 계수관으로 존재했었다.
[주D-010]부병(府兵) :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병제(兵制)인 부병제(府兵制) 하의 농민병을 말한다. 부병제는 중국 서위(西魏)에서 시작하여 당(唐) 나라 때 완성된 것으로, 국가가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자[丁]에게 구분전(口分田)과 영업전(永業田)을 주고 그 대신 조(租)ㆍ용(庸)ㆍ조(調)를 부담시킨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면서 이의 적용을 받는 농민은 교대로 징집되어 현역병(現役兵)으로 근무케 한 병농 일치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병제를 부병제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의 견해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와 식화지(食貨志)에 각기 당의 병제(兵制)와 전제(田制)를 모방하였다고 기록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제가 균전제가 아닌 전시과(田柴科)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주D-011]한인(閑人) : 한인과 이들에게 지급된 것으로 보이는 한인전(閑人田)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보이지 않아, 그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고려 시대 지배계층의 하부층을 이루는 미사한거(未仕閑居)한 사람들이, 제18과의 전시(田柴)를 받았고, 이로 인하여 군액(軍額) 보충 때, 군사로 징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품 이하의 관리가 퇴직하였을 때, 그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지급된 전토가 한인전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한인이란 이같은 사람을 일컬었다는 견해도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주D-012]사전(私田) : 여기서는 공전(公田)에 대칭되는 개념으로서의 사전이 아니고 ‘조상 전래의 개인 소유 전토’라는 뜻이다.
[주D-013]관리나 군졸들의 …… 차등을 둔 것 : 고려 경종(景宗) 원년에 제정된 전시과(田柴科), 즉 시정 전시과(始定田柴科)에 대한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고려 전시과 체제가 완성된 문종(文宗) 30년의 전시과[更定田柴科]나, 이에 앞서 시정 전시과를 일차적으로 개정한 목종(穆宗) 원년의 전시과[改定田柴科]에서는 이같은 기록이나 분급(分給) 기준을 볼 수 없다.
[주D-014]구분전(口分田) : 고려 시대에 6품 이하의 관리와 군인의 유족(遺族) 중, 가업(家業)을 이을 남자(아들)가 없는 유족에게 주었던 전토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수신전(守信田) 및 휼양전(恤養田)과 비슷하며, 당(唐) 나라의 구분전과는 그 성격이 매우 틀린다. 당의 구분전은 정(丁)이 조ㆍ용ㆍ조의 의무를 지는 동안 국가로부터 분급받았던 80무(畝)의 전토, 또 남편이 없는 여자와 심한 병자나 불구자들이 분급받았던 전토를 뜻하였다.
[주D-015]영업전(永業田) : 고려 시대에 부병(府兵)에게 분급된 군인전(軍人田)을 뜻하는 것으로, 그 병역을 자손에게 물려가는 한, 전토도 전승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부병제의 시행 자체가 의심되고 있는만큼, 군인전으로서의 영업전이 존재하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양반(兩班) 영업전으로 일컬어지는 5품 이상의 관료에게 분급된 공음전(功蔭田)이 모역(謀逆)과 같은 큰 죄를 범하지 않는 한, 자자손손에게 세습되었으므로 실제로는 이를 지칭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주D-016]정전제(井田制) : 중국 주(周) 나라 때에 시행되었다고 전하여 오는 토지 제도. 1리(里) 사방의 토지를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하고, 주위의 8구역은 사전(私田)으로 해서, 사전은 농가 8호에게 1구역씩을 맡겨 경식(耕食)하게 하고, 공전은 이들 8호로 하여금 공동 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주D-017]사패(賜牌) : 일반적으로 국왕이 노비나 토지를 특별히 하사(下賜)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국왕이 일정한 특혜를 주면서 황무지의 개간을 허가하는 증서(證書)를 뜻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원(元) 나라 지배 아래서 고려 왕실이 급격히 확장시켜 갔던 직할 수조지(直轄收租地), 즉 장(莊)ㆍ처(處)의 일부를 궁가(宮家)ㆍ공신(功臣)ㆍ사원(寺院) 등에 국왕이 특별히 하사한 것을 말한다.
[주D-018]그 아내가 …… 떼어 주었다 : 수절(守節)의 경우는 구분전(口分田)을 뜻하고, 아들의 경우는 공음전(功蔭田)이나 한인전(閑人田)을 뜻한다. 하지만, 후자(後者)의 경우는 분명하지 않다. 구분전은 고려 시대에 6품 이하의 관리와 군인의 유족(遺族) 중, 가업(家業)을 이을 남자(아들)가 없는 유족에게 주었던 전토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수신전(守信田) 및 휼양전(恤養田)과 비슷하며, 당(唐) 나라의 구분전과는 그 성격이 매우 틀린다. 당의 구분전은 정(丁)이 조ㆍ용ㆍ조의 의무를 지는 동안 국가로부터 분급받았던 80무(畝)의 전토, 또 남편이 없는 여자와 심한 병자나 불구자들이 분급받았던 전토를 뜻하였다. 한인전은 구체적인 자료가 보이지 않아, 그 정체를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고려 시대 지배계층의 하부층을 이루는 미사한거(未仕閑居)한 사람들이, 제18과의 전시(田柴 : 한인전)를 받았고, 이로 인하여 군액(軍額) 보충 때, 군사로 징발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6품 이하의 관리가 퇴직하였을 때, 그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지급된 전토가 한인전이었을 것이다.
[주D-019]공사전(公私田)의 …… 던져져 : 1389~1391년에 조준(趙浚) 등에 의하여 감행된 사전 개혁(私田改革) 즉 과전법의 제정을 뜻한다.
[주D-020]실결(實結) : 전세(田稅)를 징수하는 전토, 또는 그 결수(結數)를 말한다. [원장부(元帳付 양안(量案)에 등록된 총 전결(田結)의 수)-유래진전(流來陳田 오래 전부터 경작되지 않는 전토)의 결수=시기결수(時起結數 당년에 경작된 전결의 수)]-[각종 면세전(免稅田)+급재전(給災田 당년에 수재나 한재로 피해를 입은 전토)의 결수]=실결. 그러나 조선 후기에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에서 대동미의 수세(收稅) 실결은 원장부-[유래진전+각종 면부전(免賦田)+급재전+아록 공수전(衙祿公須田)]이 된다.
[주D-021]입안(立案) : 관청에서 사실을 증명하여 발급하는 공문서를 말한다. 소송의 판결문, 매매 및 상속의 증명서, 각종의 인허(認許) 문서 등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D-022]급복(給復) : 조선 시대에 특정의 국역(國役)을 지는 소위 정역호(定役戶 내관(內官)ㆍ의녀(醫女)ㆍ진상사격군(進上沙格軍)ㆍ조군(漕軍)ㆍ어부(漁夫)ㆍ진부(津夫)ㆍ수부(水夫)ㆍ역리(驛吏)ㆍ역졸(驛卒)ㆍ일수(日守)ㆍ영리(營吏)ㆍ인리(人吏)ㆍ목자(牧子)ㆍ봉군(烽軍) 등등)와, 충신ㆍ효자ㆍ열녀로 표창된 가호(家戶), 그리고 능(陵)ㆍ원(園)을 비롯한 몇몇 전(殿)ㆍ묘(墓) 등을 수직(守直)하는 군사에게 주는 특전의 하나로 이들이 경작하는 일정한 전토에서는 전세(田稅)만 받고 대동미(大同米)와 잡역(雜役)을 면제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이들이 면제될 수량의 전토를 갖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에 상당하는 대동미를 지급하였다. 급복의 특전을 받은 가호를 복호(復戶)라 하였다.
[주D-023]인리복호(人吏復戶) : 지방 관아 소속의 향리들에게 향역(鄕役)의 한 가지 대가(代價)로 전토 8결(結)씩을 급복한 것을 말한다. 인리팔결(人吏八結)이라고도 한다.
[주D-024]6위(衛) 38영(領) : 《고려사》 병지(兵志)에 따르면 고려의 중앙군(中央軍)인 경군(京軍)은 2군(軍)과 6위(衛)로 편성되었는데, 그 산하에는 1천 명의 군사로 조직되는 영(領)이 45개 있었다. 여기서는 2군의 영(領) 등을 제외한 것 같다.
[주D-025]별초(別抄) : 고려 최씨 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의 사병(私兵)과 같은 구실을 담당한 무인정권 시기의 국가 상비군(常備軍)을 말하는 것으로, 좌별초(左別抄)ㆍ우별초(右別抄)ㆍ신의군(神義軍)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국가 재정으로 유지되었고, 또 6위가 담당했던 경찰ㆍ전투와 같은 공적 임무를 수행했다고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최씨의 신변 호위를 목적으로 창설된 도방(都房)의 군사와 다름없었다. 별초가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崔瑀) 집권기에 생겨나서 무인 정권이 몰락하고 몽고(蒙古)에 항복하자 항몽(抗蒙) 운동을 일으키다 실패한 뒤 폐지되었다.
[주D-026]급보(給保) : 실역(實役)을 지는 정병(正兵) 등 각종 국역(國役) 부담자에게 임무 수행에 필요되는 경비의 조달을 위하여 일정한 보조인(補助人), 즉 보인(保人 봉족(奉足) 또는 보ㆍ자보(資保)로도 칭함)을 딸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16세로부터 60세까지의 건강한 남자[丁]에게 국역을 부과하였는데, 일반 양인(良人)의 경우에는 군역(軍役)이 그 실제였다. 그러나 군역을 지는 양인 모두를 현역병으로 징발하기에는 너무나 그 수가 많았고, 또 보인의 수는 《경국대전》에는 2정 1보로 확정시켰으나 시대에 따라, 또는 병종(兵種)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징발된 현역병이 근무하는 동안에 필요로 되는 경비를 국가에서 지급할 수도 없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인원만을 현역병으로 징발하고, 나머지 정(丁)에게는 징발된 현역병의 근무 경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주D-027]대성(臺省)ㆍ부원(部院)ㆍ경감(卿監)과 같은 관직 : 대성은 어사대(御史臺)와 삼성(三省 중서성(中書省)ㆍ문하성(門下省)ㆍ상서성(尙書省))의 관직을, 부원은 육부(六部)와 중추원(中樞院) 및 한림원(翰林院) 등의 관직을, 경감은 예빈성(禮賓省)ㆍ태복시(太僕寺)ㆍ비서성(祕書省)ㆍ군기감(軍器監) 등등의 고위 관직을 각각 뜻한다. 다시 말하면 고려 시대의 중요한 중앙 관서의 고위 관직 전체를 지적한 말이라 하겠다.
[주D-028]비당(備堂) : 비변사(備邊司)의 당상(堂上)을 줄인 말. 비변사는 조선 중종(中宗) 5년(1510)에 국방 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문무 대신(大臣 2품 이상의 관료)의 임시 회의 기구로 설립되었으나, 을묘왜변(乙卯倭變, 1554)을 겪으면서 정식 1품아문(一品衙門)으로 발족되었고(1555), 뒤이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르면서 그 기구와 기능이 크게 확대되어 실질적인 최고 정책 의결 기구로 위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의 주요 고위 관리는 거의 모두가 이 관청의 도제조(都提調)ㆍ제조(提調)ㆍ부제조(副提調)ㆍ낭청(郞廳)을 겸하였다.
[주D-029]권점(圈點)하여 입권(入卷) : 조선 시대에 문무 관원을 신규 또는 이동 임명할 때, 한 관직에 여러 사람의 후보자를 적어 놓고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선임관(選任官 판서ㆍ참판ㆍ참의ㆍ정랑ㆍ좌랑)들이 각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후보자 밑에 동그라미를 표하는 것을 권점(圈點)이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후보자 3명을 골라 국왕에게 최종 선택을 청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이것을 입권(入卷)이라 표현한 것 같다. 국왕이 3명 중 1명의 후보자 위에 붉은 먹물로 점을 찍어 내려 보내면, 당하관(堂下官)의 경우에는 서경(署經)을 거쳐 직첩(職牒)을 발급받게 되어 있다.
[주D-030]음사(蔭仕) : 부(父)ㆍ조(祖) 등 직계 조상의 공로에 힘입어 그 자손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고려 성종(成宗) 때 처음으로 제도화되어 5품 이상의 관원의 자ㆍ손 중 1인에 한하여 허락하게 하였으나, 뒷날에는 그 범위가 확대되어 반사(頒赦)ㆍ훈공(勳功)ㆍ인년치사(引年致仕)ㆍ태조공신(太祖功臣) 등등의 경우에도 내려지게 되었고, 제(弟)ㆍ양자(養子)ㆍ생질(甥姪)ㆍ외손(外孫)ㆍ여서(女壻) 등에게도 허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高宗) 때에는 3품 이상의 관원,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2품 이상의 대신 자손에 한하도록 다시 제한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과거 제일주의로 관료제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음관(蔭官)도 대체로 과거에 응시하여 문ㆍ무반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D-031]고과(考課) : 관리의 공과(功過)와 근태(勤怠)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심사하여 인사 이동 때 참고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고적(考績) 또는 고공(考功)이라고도 하였다. 고과 제도는 일찍부터 발달하여 고려 초기에는 사적(司績)에서, 중기부터는 성종(成宗) 14년(995)에 설치된 고공사(考功司)에서 담당하였는데, 현종(顯宗) 원년(1010)에 연종도력제도(年終都歷制度 각 관청의 장관과 지방의 도백(道伯)이 관하 관원의 1년간의 근무 일수와 휴가 일수를 적어 고공사(考功司)에 보고하는 제도)가 확립되기까지는 사고(四考)제도, 즉 1년에 4차례 심사하여 인사 이동의 자료를 삼는 방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시행되었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조(吏曹)에서 고과의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초기에는 각 관청의 관장과 도백(道伯)의 보고를 바탕으로 하여 태조(太祖) 원년에 제정된 수령전최법(守令殿最法)을 중심한 고과법, 즉 선(善)ㆍ최(最)ㆍ악(惡)ㆍ전(殿)에 따라 4등급으로 평가하였고, 뒤이어 고공법(考功法)ㆍ고적출척법(考績黜陟法)ㆍ고과전제법(考課銓除法) 등의 부수 법규가 마련됨에 따라 이들 법규를 아울러 적용,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경국대전》의 제정에서 이들이 종합, 일원화(一元化)되어 조선 말기에까지 미치게 되니,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았다. 즉, ① 중앙 관서의 제조(提調)나 당상관(堂上官)은 그 관서 소속 관원의 근무 상태와 휴무 내용을 기록, 평가하였다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이조에 보고하고, 이조에서는 이들 보고를 종합하여 매 연말에 국왕에게 보고한다. 단, 사송(詞訟) 업무를 담당하는 형조(刑曹)ㆍ한성부(漢城府)ㆍ개성부(開城府)ㆍ장례원(掌隷院)의 당하관(堂下官)들은 매 계절 마지막 달에 그 동안의 결송(決訟) 사건수를 보고하도록 한다. ② 각도 관찰사는 관하 수령 및 관원들의 근무 상태를 7사(事), 즉 농상성(農桑盛 농사와 누에치기의 번성)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사송간(詞訟簡)ㆍ간활식(姦猾息) 등을 중심으로 심사, 평가하여 매 연말에 국왕에게 보고한다. ③ 이조에서는 중앙 관서의 서리(書吏)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그 근만(勤慢)ㆍ간위(奸僞)를 심사, 평가한다. ④ 1년에 병가(病暇) 일수가 30일이 넘는 관리와 10악(十惡 《대명률》에 규정된 10종의 대죄) 이외의 죄를 5회 이상 범한 관리는 파면한다.
[주D-032]고공(考功) : 관리의 공과(功過)와 근태(勤怠)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심사하여 인사 이동 때 참고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고과(考課) 또는 고적(考績)이라고도 하였다.
[주D-033]청요(淸要) : 청환(淸宦)의 요직(要職). 학식이 높고 가문(家門)이 훌륭한 사람으로만 임명하는 중요한 관직을 말하는데, 청반(淸班) 또는 청환(淸宦)ㆍ청직(淸職)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경우, 홍문관(弘文館)ㆍ예문관(藝文館)ㆍ규장각(奎章閣)ㆍ사헌부ㆍ사간원ㆍ승정원 등의 관직과 이(吏)ㆍ병(兵)의 전관(銓官) 및 선전관(宣傳官), 그리고 지방관으로는 각도(各道)의 도사(都事)가 이에 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어떻게 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들 관직은 대체로 직위가 낮더라도 국왕의 측근에서 소위 세도(世道)를 이끄는 핵심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청렴ㆍ강직하고 인망(人望)이 높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으로 선임(選任)하였다.
[주D-034]유외 잡직(流外雜職) : 문무반(文武班) 18품례 안에 들지 못하는 품외(品外)의 잡직(雜職), 즉 조선 시대의 경우로는 액정서(掖庭署)의 모든 관직과 공조(工曹)의 공조(工造) 이하의 관직, 교서관(校書館)의 사준(司準) 이하, 사옹원(司饔院)의 재부(宰夫) 이하, 상의원(尙衣院)의 공제(工製) 이하, 사복시(司僕寺)의 마의(馬醫) 이하, 군기시(軍器寺)의 공제(工製) 이하, 장악원(掌樂院)의 악사(樂師) 이하, 장원서(掌苑署)의 신화(愼花) 이하,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 이하의 관직들, 그리고 금군(禁軍)의 정(正)ㆍ영(領)과 각영(各營)의 기총(旗摠) 이하 대정(隊正)까지의 군직들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는 어떤 관직을 뜻하였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주D-035]패술(霸術)과 공리(功利)가 섞이고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여러 제후(諸侯)와 술사(術士)와 장수(將帥)들이 중원(中原)을 차지하고자 온갖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쓰면서 공리(功利)를 다투었던 사실을 뜻한다. 패술(霸術)이란 권모술수로써 공리만을 오로지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데, 왕도(王道)에 대칭(對稱)하여 패도(霸道)라고도 한다.
[주D-036]융족(戎族)과 …… 물들여 놓기는 : 중국 진(晉) 나라 말기에 북방 이민족(異民族)들이 중원(中原)에 침입하여 북위(北魏)ㆍ북제(北齊)ㆍ북주(北周) 등 여러 나라를 세우고 2세기 동안이나 중원을 지배하였던 사실을 뜻한다. 소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북조(北朝) 왕조들이 한족(漢族)을 지배하면서 베푼 정치를 말하는 것이 되겠다.
[주D-037]상등전(上等田) …… 전세(田稅) : 고려 시대의 조세(租稅) 제도는 성종(成宗) 11년(992)에 확립되었는데, 그 수량(결당(結當) 수조액(收租額))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두 가지로 나타난다. 즉, 공전(公田)의 경우, (표 생략) 으로 규정된 것이 그것인데, 이 수량이 수확량의 4분의 1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보면, ㄱ)보다는 ㄴ)이 올바른 기록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서》의 저자가 ㄱ)의 수조액을 인용한 것은, 그것도 논상등전의 경우 11말을 12말로 잘못 인용하고 있지만, 《고려사》에 ㄱ)이 본문으로 나타나고 ㄴ)이 이의 주석 격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서 말미암았으리라 여겨진다. 그리고 고려 시대의 전품(田品)은 조선 시대와는 달리 휴경(休耕) 여부에 따라 상ㆍ중ㆍ하등으로 구별되었다. 문종 8년(1054)에 제정된 바에 따르면, 상등전은 해마다 경작 가능한 토지[不易之田], 중등전은 한 해 걸러 경작 가능한 토지[一易之田], 하등전은 두 해 걸러 경작 가능한 토지[再易之田]를 각각 가리켰다.
[주D-038]고려 시대의 1결은 …… 매우 작았으니 : 토지 면적의 단위로서의 결(結)은 원래 벼의 수확량을 말하는 것으로서, 벼 1만 줌(한 줌[一握]이 1파(把), 10파가 1속(束), 10속이 1부(負), 1백 부가 1결(結)이 되므로 1결은 1만 파가 됨)을 뜻하는데, 이에서 그 의미가 전변(轉變)되어 벼 1만 줌을 생산할 수 있는 전토의 면적을 1결로 일컫게 되었고 또 나아가서는 조세의 부과 단위로도 표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같은 결부법(結負法)을 사용하여 수조(收租)하고 양전(量田)할 경우, 전토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1결의 면적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 당연하므로, 전품(田品)의 책정과 이에 따른 면적의 대소(大小) 내지는 수조(收租)의 다과(多寡)가 계산ㆍ규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로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결부법을 사용하였으므로, 농경(農耕)의 발달 여하에 따라 전품의 책정과 결부의 산정(算定)이 수시로 변경되어 왔다. 고려 시대에는 당초 전품을 3등급으로 나누고 전품에 따라 수조액을 가감(加減)하였으며 1결의 면적은 사방 33보(步 6척, 1척은 10푼, 1푼은 6촌임)로 고정하였었다. (《우서》에 2결이 33보로 기록된 것은 저자의 착오라 보겠다) 그러다가 농경 기술의 발달로 휴경전이 거의 없어진 고려말에 이르자, 전품에 따라 측량척(測量尺)을 달리하는 수등이척제(隨等異尺制)의 시행을 보게 되었고(공양왕 원년), 이것은 다시 조선 세종 25년(1443)에 보척(步尺)을 주척(周尺 1척이 0.231m로 환산되고 있다)으로 줄이면서 전품을 6급으로 세분하는 수등이척의 전분 6등제로 개정을 보게 되었다. 즉 동세이적(同稅異積)의 원칙에 입각하여 전품 6등의 측량척을 주척을 기준으로 따로 만들고, 이로써 사방 한 자를 각 등전 1파(把)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각 등전의 1결 면적을 산출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생략)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이모작이 거의 일반화되고 영농 기술도 발달하게 되자, 효종 4년(1650)부터는 동적이세(同積異稅)의 원칙으로 돌아가 1등전척 하나만으로 전토를 측량하고 전품에 따라 차등수세(差等收稅)하는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동일한 면적의 1결에서 1등전일 경우에는 1결의 전세를 징수하고, 2등전일 경우에는 85부(負)의 전세를 징수하여, 6등전일 경우에는 25부의 전세를 징수하게끔 개정된 것이었다. 동세이적의 경우, 1등전과 6등전의 면적이 대체로 1 : 4의 비율이었고 보면, 동적이세의 경우도 수조 비율이 1 : 4여서, 측량상의 편의만이 도모된 데 지나지 않는 개정으로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각종 영농기술 및 설비의 발달에 따른 전품의 상향 조정으로 수조결수(收租結數)의 증대가 아울러 도모된 개정 조치였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약 40마지기의 농토, 또는 나흘갈이[牛四日耕]의 농토를 대체로 1결이라 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주D-039]전토 16결을 …… 족정(足丁) : 《고려사》 병지(兵志)에 따르면, 16결이 아니고 17결을 1족정으로 삼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고려 시대의 족정(足丁)에 대해서는 이와 관계되는 반정(半丁)과 함께 아직도 정설(定說)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정(丁)의 연령상의 구분으로 보는 설. 고려 시대의 정은 16세부터 역을 지는데, 군역(軍役)은 20세부터 60세까지 지기 때문에 이를 족정이라 하고, 16세부터 19세까지는 반정(半丁)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경우, 17결의 전토는 군역을 지는 20세에 지급받았다고 보고 있다.
② 가호(家戶)의 인정(人丁) 수로 보는 설. 고려 시대에는 3정(丁)의 가호를 기준호(基準戶)로 하여 1정을 입역(入役)케 하였다는 이해 아래, 3정족호(三丁足戶)를 족정이라 하고, 3정 이하의 가호를 반정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정의 가호에서는 2호에 1정씩을 입역시켰을 것이며, 족정에게 17결의 토지가 지급된 데 반하여 반정에게는 7~8결의 토지가 지급되었다고 보고 있다.
③ 전토의 보유량에 따른 정호(丁戶)의 구분으로 보는 설. 고려 시대에는 입역의 기준이 되는 17결의 토지를 보유하는 가호를 족정으로, 그 반수 정도의 토지, 즉 구분전(口分田)을 보유하는 가호를 반정이라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우서》의 저자는 족정을 ② 내지는 ③에 가깝게 이해하고 있다.
[주D-040]호포(戶布) : 매 가호(家戶)에 일정한 액수의 포(布)를 부과, 징수하는 일종의 가호세(家戶稅 호별세(戶別稅))를 말한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에 군포(軍布)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거론되었던 호포제(戶布制)와 호전제(戶錢制)의 실시에 대한 논의를 뜻하는데, 이때는 양반이 상민과 같이 군포에 대신 내는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하여, 끝내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로써도 군정(軍政)의 폐단이 가시지 않자, 고종(高宗)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결단으로 호포법이 실시되어, 반상(班常)을 가리지 않고 모든 가호에서 전 2냥(兩)씩을 납세하게 되었다.
[주D-041]《속전(續典)》 : 《경국대전》 반포 이후부터 명종(明宗) 이전에 편찬된 법전을 말하므로 《대전속록(大典續錄)》을 뜻한다고 보겠는데, 《대전속록》에는 본문에 소개된 바와 같은 규정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의 《속전》이 어느 법전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주D-042]세업(世業) : 대대로 물려오는 가업(家業), 또는 토지와 같은 한 집안의 경제적 기반을 말한다.
[주D-043]임(林)ㆍ염(廉)ㆍ지(池)ㆍ기(寄) :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ㆍ지윤(池奫)ㆍ기철(寄轍)과 그 일당을 말한다.
[주D-044]공선(貢饍)에 기상(寄上) : 지방 군현(郡縣)에서 상납하는 공물(貢物) 및 진상물(進上物)을 서울에서 대신 납품하여 주고 그 물품의 값을 실제보다 많이 해당 군현에 청구, 수납하여 차액(差額)을 착복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른바 방납(防納) 행위를 말하는 것이 되겠다.
[주D-045]세도(世道) : 여기서 말하는 세도는 조선 말기의 변태적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의 ‘세도(勢道)’와는 그 뜻이 전혀 틀린다. 이 글의 ‘세도(世道)’는 조선 중엽에 사림(士林) 정치가 성숙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조선 시대 특유의 용어로서, 치세(治世)의 대도(大道)와 세상의 도의(道義), 즉 사림 정치가 지향하는 통치 원리와 교화 원리를 아울러 뜻하는 것이다. 환언하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며, 이단(異端)을 깨고, 정학(正學)을 북돋우는 일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일을 도맡아 추진하도록 국왕으로부터 전권(全權)을 위임받은 대신(大臣)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
[주D-046]한단(邯鄲)의 …… 헛된 결과 : 한단의 걸음[邯鄲之步]이란 자기의 본분을 버리고 맹목적으로 남의 행위를 본뜨기만 하면 두 가지 모두를 잃고 실패한다는 뜻으로,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나오는 고사로, 옛날 연(燕) 나라 소년이 조(趙) 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본받다가 충분히 배우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와보니 한단의 걸음걸이도 안 되고 원래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리고 효빈(效顰)이란 남의 행위를 함부로 흉내내어 결점까지도 장점인 줄 알고 본뜬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나오는 고사로,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불쾌하여 얼굴을 찡그렸더니 어떤 못생긴 여자가 미인은 찡그려야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도 찡그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자기의 본분ㆍ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남의 흉내만을 내서, 이것도 저것도 되지 못한 채 남의 결점까지 본뜨게 되고 말았다는 뜻이 된다.
제1권 본조 정치의 폐단을 논함
고려의 정사(政事)는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그 쌓여 온 폐해가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왕조 개국 당초에 나라 일을 맡았던 정도전(鄭道傳)ㆍ조준(趙浚)과 같은 재상들이 또한 안타깝게도 큰 식견(識見)을 지니지 못하여, 고려 말엽의 폐정(弊政)을 대략 바로잡은 바 있기는 하여도 전토(田土)와 백성을 추쇄(推刷)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준 일로 곧 큰 혜택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였고, 전제(田制)를 어설프게나마 마련하여 국가 용도에 지급한 일로 곧 일대 사업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고, 과거(科擧)ㆍ관제(官制)ㆍ의문(儀文)ㆍ전례(典禮)등도 당 나라 제도를 본따서 소략하게 이루어 놓기는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습속대로 그 비루한 것들을 답습하여 간략하게 꾸몄는데 오직 억견(臆見)으로써만 만들었기 때문에 강목(綱目)이 어설프고 규제(規制)가 몹시 소략하였다. 그리하여 그릇되고 어긋나는 것들이 무수히 뛰쳐나와 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 오래도록 지속, 준행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제 그동안 쌓여온 정치의 폐단을 들어보면, 급복(給復)ㆍ급보(給保)의 법과 면세(免稅)ㆍ절수(折受)의 규정이 그러하니, 이는 구제하기 어려운 폐해의 근원을 앞서 열어놓았고, 각 관서 소속 관원들이 사만(仕滿)하면 거관(去官)하는 제도가 그러하니, 이는 모순됨이 가소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오위(五衛)의 제도는 전혀 세밀하지 못하고 족친위(族親衛) 등 여러 위(衛)들도 당 나라의 단문친(袒免親)의 제도를 모방하였지만, 유생(儒生)도 아니고 군사(軍士)도 아닌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를 각각 설치한 것 역시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며, 명경과(明經科)의 설치는 헛되이 첩괄(帖括)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어서 무식함을 징계하지 못하는 폐해를 낳고 있다. 음로(蔭路)는 대가(代加)ㆍ상가(賞加)ㆍ원종(原從)ㆍ노직(老職)과 같은 것들이 난잡하기가 비할 데 없으니, 송 나라의 교은(郊恩)보다도 심하며, 도적을 잡거나 호랑이를 잡거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호(救護)한 사람, 납속(納粟)한 사람과 같은 무리들이 금옥(金玉 금관자ㆍ옥관자를 단 사람 즉 고관을 말한다)도 낭자하게 거리를 가득히 달리고 있다.
그리고 산관(散官)의 경우를 보더라도 군함(軍銜)의 체아직(遞兒職)이 명기(名器)를 난잡하게 하는 길을 크게 열어놓아서, 사과(司果 오위(五衛)에 속하는 정6품)ㆍ호군(護軍 오위에 속하는 정4품)들이 온 나라에 가득 차고 있다. 서얼(庶孼)의 금고(禁錮)는 예전에 없었던 법규인데, 서선(徐選)ㆍ강희맹(姜希孟)등의 단 한마디 말로 법령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굳게 막고 있다. 그런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하고 규정하였으면, 마땅히 한결같이 시행하여야 할 것인데도, 장리의 자손이 관리로 나아가는 데 장애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삼의사(三醫司)와 잡직(雜職)이 난잡하기가 이를 데 없고, 관제(官制)가 엄밀 명확하지 못하여 문관과 무관의 길을 달리하는 뜻이 전혀 없으니 의인(醫人)이 수령(守令)으로 임명되는가 하면 백도(白徒 군사(軍事)에 소양이 없는 병정(兵丁))ㆍ천한(賤漢 무식한 천인(賤人))이 당가선(堂嘉善 당상(堂上)인 정3품과 종2품 가선의 약칭이다)을 빙자하여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거쳐 바로 목사(牧使)나 군수(郡守)에 임명되기까지 한다.
재해(災害)를 입은 전토를 실지 답사하는 일은 반드시 세 차례 거듭해야 그 허실(虛實)을 알 수 있는 것인데, 경차관(敬差官)이 한 차례 슬쩍 들러가고 마니, 현지를 답사하여 그 손실(損實 농사의 풍흉의 정도를 뜻함)을 결정하는 일의 실효(實效)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9등급(等級)으로 연분(年分)하는 일도 난잡해져서 시행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그리고 육조(六朝)의 직제를 설치하기는 했어도, 그 실적(實績)을 맡기지 않고 있어서 길사(吉事)나 흉사(凶事)가 있기만 하면 별도로 도감(都監)을 설치하니, 관(官)은 그 직분을 잃고 일은 통요(統要)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사민(四民)의 업도 전문화(專門化)되고 분업화(分業化)되지도 않아서, 유생(儒生)에 대해서도 전혀 교양하는 방법이 없게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재행이 어떠한지는 따지지 않고 마구 모아 하루 동안에 시험을 보여 그 합격 여부를 가리고 있으니, 이는 입거(入擧)나 공거(貢擧)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이에 유생을 가칭(假稱)하는 무리들이 온 누리에 가득하게 되어, 동서재(東西齋)를 세우고 선비의 품격을 분별하며, 향전(鄕戰)이나 당론(黨論)을 만들어 세도(世道)를 병들게 하고 있다.
호적(戶籍)이 불분명하여 국민의 수효가 늘고 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강과 바다와 들과 숲과 늪들이 모두 각 궁방(宮房 국왕(國王) 친척들의 집)에 빼앗기게 되어 그 폐해가 봉건(封建 영토(領土)를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함)보다도 더욱 심해졌다. 또 염분(鹽盆)ㆍ어전(漁箭)ㆍ철야(鐵冶 철광(鐵鑛) 또는 제철소(製鐵所)) 등과 모든 공장(工匠) 등속도 이를 각사(各司)에 나누어 주어 각사가 이를 스스로 팔아서 용도(用度)에 충당하게 하고 있으니, 그 구차하고도 경솔한 방법이 놀라울 뿐 아니라, 국가의 체모에도 꼴이 아니라 하겠다.
양과 선종(兩科禪宗)은 그 입법(立法) 자체가 매우 근거가 없는 데다가 도첩(度牒)의 제도마저 유명무실해져, 백성들이 마음대로 삭발하도록 하고 있다. 서리(書吏 아전의 하나)를 각 관청에 배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형세이기는 하나, 이서(吏胥)의 전횡(專橫)이 나라를 크게 좀먹고 있다. 그리고 고과(考課)가 무실(無實)하여 모든 관원이 직무에 게으르고, 개정(開政 도목정(都目政)을 말한다)이 빈번하여 관리의 이동이 무상하니 정률(正律)을 존중하지 않고 한갓 전례(前例)에 따라 사건을 판결하고 있다.
종친(宗親)이나 외척(外戚)이 총관(摠管)에 임용되어 왔기 때문에, 사세가 불편하여 오위(五衛)를 혁파하게 되자,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고 병사(兵事)를 주장하게 되는 큰 폐해를 낳았고, 오위(五衛)의 상번(上番)이 폐지되고 쌀이나 포(布)로 대납(代納)하는 제도가 만들어지니, 군대가 군대를 이루지 못하고 백성도 그 폐해를 입고 있다. 각사(各司)는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는데도 도제조(都提調) 이하의 직책을 두어 사체(事體)를 전도시켜 놓았으니, 한 자루를 둘이서 잡고 있는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그리고 진관(鎭管)은 그 권위가 가벼워 관할 지역 안의 여러 군현(郡縣)을 족히 진압하지 못하고 있고, 병사(兵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맡을 일이 없어 한갓 세초(歲抄)를 마감하는 것으로 직무를 삼고 있으며 감사(監司 관찰사(觀察使))가 오로지 모든 일을 관리하고 있으니, 정신이 두루 미치지 못하여 많은 일들이 너더분하고 또 명목상 수륙절도사(水陸節度使 수사(水使)와 병사(兵使))의 일을 겸한다고는 하지만 그 권한이 전일하지 못하여 책임있게 성취하는 일이 없다.
상고(商賈 상인(商人))에게는 세금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각사(各司)ㆍ영문(營門)이 사사로이 취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국가에 도움되는 바가 없고 둔감(屯監)ㆍ권관(權管)은 이름만 설치되어 있을 뿐, 실제로는 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리고 중추부(中樞府)는 공연히 설치된 것으로 직책이 없으니 원임(原任) 이하 노직(老職)의 지사(知事)ㆍ동첨추(同僉樞 동지사(同知事)와 첨지사(僉知事))들이 모두들 팔짱을 끼고 한가로이 앉아만 있다. 그리고 납속(納贖 형벌 대신에 바치는 물전(物錢))한 물자는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하니, 관청의 실제 용도에는 쓰이지 않고 헛되게도 하리(下吏)들이 훔쳐먹도록 하고 있다. 유배(流配) 이하의 형벌을 받은 사람은 마땅히 그 역(役 노역(勞役))을 져야만 하는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를 남에게 맡기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사로이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무릇 이러한 일들이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위에 열거한 것은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다.
[주D-001]급복(給復)ㆍ급보(給保)의 법 : 급복은 조선 시대에 특정의 국역(國役)을 지는 소위 정역호(定役戶 : 내관(內官)ㆍ의녀(醫女)ㆍ진상사격군(進上沙格軍)ㆍ조군(漕軍)ㆍ어부(漁夫)ㆍ진부(津夫)ㆍ수부(水夫)ㆍ역리(驛吏)ㆍ역졸(驛卒)ㆍ일수(日守)ㆍ영리(營吏)ㆍ인리(人吏)ㆍ목자(牧子)ㆍ봉군(烽軍) 등등)와, 충신ㆍ효자ㆍ열녀로 표창된 가호(家戶), 그리고 능(陵)ㆍ원(園)을 비롯한 몇몇 전(殿)ㆍ묘(墓) 등을 수직(守直)하는 군사에게 주는 특전의 하나로 이들이 경작하는 일정한 전토에서는 전세(田稅)만 받고 대동미(大同米)와 잡역(雜役)을 면제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이들이 면제될 수량의 전토를 갖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에 상당하는 대동미를 지급하였다. 급복의 특전을 받은 가호를 복호(復戶)라 하였다. 급보는 실역(實役)을 지는 정병(正兵) 등 각종 국역(國役) 부담자에게 임무 수행에 필요한 경비의 조달을 위하여 일정한 보조인(補助人), 즉 보인(保人 : 봉족(奉足) 또는 보ㆍ자보(資保)로도 칭함)을 딸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16세로부터 60세까지의 건강한 남자[丁]에게 국역을 부과하였는데, 일반 양인(良人)의 경우에는 군역(軍役)이 그 실제였다. 그러나 군역을 지는 양인 모두를 현역병으로 징발하기에는 너무나 그 수가 많았고, 또 보인의 수는 《경국대전》에는 2정 1보로 확정시켰으나 시대에 따라, 또는 병종(兵種)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징발된 현역병이 근무하는 동안에 필요한 경비를 국가에서 지급할 수도 없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인원만을 현역병으로 징발하고, 나머지 정(丁)에게는 징발된 현역병의 근무 경비를 부담하게 하였다.
[주D-002]면세(免稅)ㆍ절수(折受)의 규정 : 국가에서 전세(田稅)를 면제하여 주는 규정과 어떤 개인이나 기관이 국왕으로부터 특별히 전토나 전토에서의 수세(收稅)를 떼어 받는 규정을 말한다. 그런데 전자(前者)는 《경국대전》등 법전에 구체적으로 규정된 바 있으므로 그에 따랐지만, 후자(後者)는 주로 사패(賜牌)에 의하였으므로 구체적인 규정이 없었다.
[주D-003]사만(仕滿)하면 거관(去官)하는 제도 : 한 관직에서 정해진 임기를 근무하고도 다른 관직으로 발령받지 못하거나 승급되지 못하면, 관직에서 일단 물러나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경국대전》 이전(吏典)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특별한 기술과 경험과 자격을 필요로 하는 특정의 관직, 즉 구임과(久任窠 임기의 제한이 없는 관직)를 제외하고는 모든 관직에 일정한 복무 기일[仕滿]을 설정하여 이 기일을 채우면 다른 관직으로 이동 또는 승진하게 하였는데, 이때 참하관(參下官 정7품 이하의 관원)으로서 이동ㆍ승진되지 못하는 관원은 자동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규정된 임기는 다음과 같았다.
① 경관(京官)은 6품 이상은 900일, 7품 이하는 400일
② 외관(外官)은 관찰사ㆍ도사는 360일, 수령은 1900일(단, 당상관이거나 가족을 임지로 데려오지 않은 경우에는 900일)
③ 훈도(訓導)는 900일
외관의 임기는 사만이라 하지 않고 보통 과만(瓜滿) 또는 과기(瓜期)ㆍ과한(瓜限)이라고 하는 것이 통례였다.
[주D-004]족친위(族親衛) : 조선 전기 오위(五衛) 중 하나인 호분위(虎賁衛)에 속한 부대(部隊)의 하나로,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 즉 종성(宗姓)의 단문(袒免) 이상의 친족과 이성(異姓)으로 왕대비(王大妃)ㆍ대왕대비(大王大妃)의 시마(媤麻) 이상의 친족, 왕비(王妃)의 소공(小功) 이상의 친족, 세자빈(世子嬪)의 대공(大功) 이상의 친족들로서 배속, 구성되었다.
[주D-005]단문친(袒免親) : 단문친은 무복친(無服親), 즉 종고조부(從高祖父)ㆍ고대고(高大姑)ㆍ재종증조부(再從曾祖父)ㆍ재종고대고(再從高大姑)ㆍ삼종조부(三從祖父)ㆍ삼종대고(三從大姑)ㆍ삼종백숙부(三從伯叔父)ㆍ삼종고(三從姑)ㆍ삼종형제자매(三從兄弟姉妹) 등을 말한다.
[주D-006]첩괄(帖括) : 중국 당(唐) 나라 과거시험에는 경서(經書) 중에서 한 줄의 어구(語句)만을 보여준 다음에 다시 그 어구 중에서 몇 자만을 보여주고는 이를 가지고 해당 경서의 내용 전체를 기술하게 하는 첩경(帖經)이라는 종목이 있었는데, 이 종목에 응시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시험관이 매우 어려운 어구를 점차 출제하게 되자, 응시자들이 이러한 어구들을 기억하기 좋도록 어려운 어구만을 뽑아 모아 노래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07]원종(原從) : 원종공신을 말하는데, 공신(功臣) 중 각 등급(等級)의 주장이 되는 공신 이외의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었다.
[주D-008]노직(老職) : 노인직(老人職). 경로(敬老)의 한 가지 표현으로서 국왕이 노인에게 양반 품계(品階)를 내리거나 높여주는 것을 말한다. 《경국대전》 이전(吏典)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는 80세가 넘으면 양인(良人)이나 천인(賤人)을 물론하고 품계를 하사하며, 이미 품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한 급을 높여 주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뒷날에는 1백 세가 넘으면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를 내리도록 추가로 규정하였다.
[주D-009]교은(郊恩) : 송(宋) 나라 때에 천자가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에 천하의 죄인을 특사(特赦)하던 제도를 말한다. 교사(郊赦).
[주D-010]체아직(遞兒職) : 현직을 떠난 문ㆍ무관에게 계속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설정된 관직으로서 담당하는 직무가 없는 것이었다. 중추부(中樞府)와 오위(五衛)의 서반(西班)ㆍ군직(軍職)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노인직(老人職)이나 납속(納粟) 등의 상급직(賞給職)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러한 뜻 이외에, 어떤 관청의 일이 바쁠 때 다른 관청에서 파견하는 정원 이외의 관원을 뜻하기도 하였다.
[주D-011]잡직(雜職) : 조선 시대에는 액정서(掖庭署)의 모든 관직과 공조(工曹)의 공조(工造) 이하의 관직, 교서관(校書館)의 사준(司準) 이하, 사옹원(司饔院)의 재부(宰夫) 이하, 상의원(尙衣院)의 공제(工製) 이하, 사복시(司僕寺)의 마의(馬醫) 이하, 군기시(軍器寺)의 공제(工製) 이하, 장악원(掌樂院)의 악사(樂師) 이하, 장원서(掌苑署)의 신화(愼花) 이하,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 이하의 관직들, 그리고 금군(禁軍)의 정(正)ㆍ영(領)과 각영(各營)의 기총(旗摠) 이하 대정(隊正)까지의 군직들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는 어떤 관직을 뜻하였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주D-012]경차관(敬差官) : 특별한 업무의 수행을 위하여 국왕이 지방에 파견하는 특사(特使)를 말한다. 조선 초기에는 양전(量田)이나 답험(踏驗) 이외에도 외교(外交)ㆍ군사(軍士)ㆍ지방 행정 등에 관계되는 특별한 업무를 위해서, 또 민정(民情) 전반을 살피기 위해서 수다히 파견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세액(稅額)이 점차 정액화(定額化)되고, 또 암행어사 제도가 발달되어 경차관의 파견은 매우 적었다.
[주D-013]연분(年分) : 조선 세종(世宗) 때 제정된 연분 9등법을 뜻하는 것으로, 매년 농사의 작황(作況)에 따라 지역별로 수조율(收租率)을 조정,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경국대전》 호전(戶典)에 의하면, 9등급에 따른 1결당 부과액은 다음과 같았다. (표 생략)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3분의 1을 감하고 제주도에서는 2분의 1을 감한다.
[주D-014]동서재(東西齋) : 조선 시대에 성균관(成均館)이나 향교(鄕校)의 명륜당(明倫堂) 앞 동쪽과 서쪽에 위치하는 두 건물. 즉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말한다. 이곳에서는 주로 학생이 기거하면서 공부하였는데, 향교의 경우, 동재에는 양반의 자제가, 서재에는 향리(鄕吏)나 평민의 자제가 기거하였다고 한다.
[주D-015]향전(鄕戰) : 지방에서 일정한 날에 한 마을 사람과 다른 마을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벌이는 싸움놀이, 즉 석전(石戰)ㆍ줄다리기ㆍ차전(車戰) 등을 말하기도 하고, 또 각 고을의 유력한 사람들이 주로 고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이는 싸움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後者)의 뜻인데, 지방에 따라 그 양상이 각기 달랐으나, 대체로 유림(儒林)과 향임(鄕任)간의 대립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향안(鄕案)을 에워싼 싸움, 향임(鄕任)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조선 후기에 주요 폐단의 하나로 꼽혔다.
[주D-016]양과 선종(兩科禪宗) : 조선 초기에 한동안 실시되었던 승려(僧侶)의 과거 시험인 승과(僧科)의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선(禪宗選)을 말한다. 고려 시대에 성행하였던 승과의 제도를 이어받아 3년마다 열렸는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시험이 어려웠고, 인원도 각 과에서 30명씩만을 선발하였다. 승과에 합격하면,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교종ㆍ선종의 구별이 없이 대선(大選)의 법계(法階)를 주었고, 그 다음 승진부터는 두 종파를 구별하여 교종은 중덕(中德)ㆍ대덕(大德)ㆍ대사(大師)ㆍ도대사(都大師)의 순으로, 선종은 중덕ㆍ선사(禪師)ㆍ대선사ㆍ도대선사[判禪宗師]의 순으로 발령하였다.
[주D-017]도첩(度牒)의 제도 : 고려ㆍ조선 시대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관청으로부터 출가 허가장(出家許可狀), 즉 도첩(度牒)을 받도록 규제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국가에 대하여 신역(身役)의 의무를 지고 있는 국민들이 함부로 승려가 될 경우, 부역 인구가 크게 줄어들 우려가 있기 때문에 취하여진 조치로,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에 시작해서 당(唐) 나라 때 제도화된 바 있다. 조선 시대에는 초기로부터 억불책(抑佛策)과 양역(良役) 확보책의 하나로 도첩 제도를 강화하여, 양반 자제는 포(布) 1백 필, 평민은 포 1백 50필, 천인은 포 2백 필을 각각 납부하여야만 도첩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제되어 있었으나, 세조(世祖)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호불책(護佛策)으로 한동안 정포(正布) 20필에 도첩을 발급하게 하는 폐단이 생기자, 문정왕후 사후(死後)에는 도첩의 발급을 전면 중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불법적인 입산(入山)이 성행하게 되었으나, 정부에서는 호적(戶籍) 제도의 강화와 승려에 대한 부역의 증가 등으로 예방하고자 하였을 뿐, 도첩 제도의 부활이나 강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주D-018]총관(摠管) : 조선 시대 오위(五衛)의 지휘 기관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최고위 관원을 총칭(總稱)하는 것으로, 도총관(都摠管 정2품)ㆍ부총관(副摠管 종2품) 10명을 가리킨다. 이들 총관은 국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척족(戚族) 중에서 겸임(兼任)되는 것이 관례였다.
[주D-019]도제조(都提調) : 1품(品)의 최고위 관원이 다른 기관의 업무를 지휘ㆍ감독할 때 붙이는 직명(職名)이다. 도제조가 수관(首官)인 아문은 비변사(備邊司)ㆍ승문원(承文院)ㆍ봉상시(奉常寺)ㆍ종부시(宗簿寺)ㆍ사옹원(司饔院)ㆍ내의원(內醫院)ㆍ군기시(軍器寺)ㆍ군자감(軍資監)ㆍ사역원(司譯阮)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ㆍ전함사(典艦司)ㆍ종묘서(宗廟署)ㆍ사직서(社稷署)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D-020]진관(鎭管) : 조선 시대에 각 도(道)의 주진(主鎭)인 병영(兵營)ㆍ수영(水營)ㆍ방어영(防禦營) 산하에 설치되어 있는 지방군의 최하 단위 조직인 제진(諸鎭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군수(郡守)ㆍ현령(縣令)ㆍ만호(萬戶)ㆍ도위(都尉)ㆍ현감(縣監)의 주재영(駐在營)) 몇 개의 군사(軍事) 업무를 관할하는 상급 단위 조직인 거진(巨鎭 절제사(節制使)ㆍ첨절제사(僉節制使)=부윤(府尹)ㆍ목사(牧使)ㆍ도호부사(都護府使)의 주재영)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행정구역 단위로 지방군을 편성하여 수령에게 지휘 책임을 맡겼었다.
[주D-021]세초(歲抄) : 조선 시대에 각 도의 병사ㆍ수사가 관하 군병(軍兵)을 매년 6월과 12월에 검열, 정비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병을 가려내고, 그 자리에 새 군병을 징발, 충원하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었는데, 이와는 달리, 이조ㆍ병조에서 매년 범죄한 관리를 추려내어 국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세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주D-022]둔감(屯監)ㆍ권관(權管) : 둔감은 조선 시대에 평안ㆍ함경도 국경 일대에 설치된 둔전(屯田) 독관을, 권관은 작은 진보(鎭堡)의 수비장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산성(山城)과 같은 내지(內地)의 요충을 지키는 수비장은 별장(別將)이라 하였다.
첫댓글 흥미로운 책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근 차근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