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 정부를 보며 2022.06.17
화제를 뿌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2003년 노무현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된 46세의 강금실 변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화려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즐긴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은 정권의 마스코트처럼 밝아 보였습니다. 17개월 근무하고 퇴임할 때는 “너무 즐거워서 죄송하다”며 “개혁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할 때 가능한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가로막는 서로의 오해와 불신을 허물어 가는 작업”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강 장관은 공수처 설치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검찰을 존중했나 봅니다.
국민이 희망을 잃고 노쇠감을 주던 나라에 비교적 젊은 대통령과 49세의 법무부 장관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 대통령실 입구의 기자들과 서서 문답하는 풍경이나, 한 장관이 출근하다가 기자들과 마주쳐, 가방을 땅 위에 내려놓고 진지하게 답변하는 모습은 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선진국 표준의 개방적인 정치 코드입니다. 검수완박에 대해 한 장관은 “할 일 제대로 하는 검찰을 두려워할 사람은 오직 범죄자뿐”이라고 말해 적폐가 많아 국가기강 확립이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에겐 통쾌함을 주었을 것입니다. 성급한 갤럽 여론조사는 한 장관을 차기 인물로 등장시켰습니다. 윤 정부가 비협조적인 거대 야당을 설득해 국정 능력을 보여준다면 신임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최근 국정원장에서 물러난 박지원 씨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그런 식으로 문답하다가 큰 실수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나 한 장관은 써준 걸 읽는 게 아니라 대체로 머리로 가다듬어 정제된 내용을 표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한 장관은 생각과 말이 일치해 복잡한 사안의 설명을 그냥 글로 바꿔도 될 스타일입니다.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아리송한 구시대 잣대의 정치 궤변과 판이하죠. 이런 표현은 A4지에 의존한 듯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비교하게 됩니다. 차범근 선수를 면담하는데도 A4지가 등장했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A4지를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생각과 말을 일치시키기 어려워 A4지를 들여다봤나 봅니다.
아주 선하게 생긴 그의 정치 행태가 아주 강퍅했던 것을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을 자신의 임기 초에 집어넣고 국민의 공감대를 핑계로 임기 말에 풀어준 것이 대표적이죠. 이낙연 전 총리가 건의할 때라도 들어줬어야 좋았을 텐데 주변의 강경 세력에 휘둘린 게 아닌가 합니다.
5월 9일의 그의 퇴임사를 읽어봤습니다. 소득 주도 성장의 경제건, 자칭 ‘남측 대통령’으로 본 남북관계건 안보건, 찬양 일색이었고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촛불과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말하면서 못다 이룬 일은 차기 정부가 이어 나가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임기 말인 작년 10월 데이터리서치 여론조사에서 "문 정부가 가장 잘한 일"을 묻자 '없다'는 응답이 37.4퍼센트로 1위였습니다. 일자리 상황판을 놓고 쇼하며 세금 주는 일자리만 늘렸을 뿐 3년간 주 40시간 일하는 양질의 일자리 195만 개가 증발했답니다. 한국전력은 탈원전으로 올해 최대 30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고, 30퍼센트를 넘던 외국인 지분은 10퍼센트대로 추락했습니다. 탈원전으로 원가의 앙등을 무시하고 5년간 전기료를 눌러놓고, 대학이 남아도는 판에 돈 먹는 블랙홀인 한전공대를 나주의 허허벌판 골프장 터에 세웠죠. 이럴 바에 한전 상장을 폐지하라는 주장도 나옵니다. 탈원전 반대 기관장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든 혐의로 백운규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수사받고 있습니다. 윗선 수사로 이어지면 ‘판도라’라는 영화를 보고 탈원전을 결심했다는 문 전 대통령은 심한 압박감을 갖겠죠.
북한이 곧 비핵화한다고 세계를 기만한 평화 쇼. 서울의 아파트 가격 폭등으로 6억 원 이하가 거의 실종되고 월세 비중이 전세를 추월했습니다. 무료로 관사에 사는 사람들은 월세보다 전세가 왜 좋은지 알까요? 공개된 청와대 관저를 텔레비전으로 보았습니다. 13평 아파트를 돌아보며 국민들에겐 “4인 가족이 충분히 살겠네” 하면서 자신은 청와대 이전 공약을 어기고 프랑스 베르사유 궁궐의 축소판 같은 데서 단둘이 살았습니다. 많은 신문이 문재인 정부의 임기 말에 정권의 과오를 속속들이 지적했습니다. 최근 탈원전 반대 시민단체는 문 전 대통령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방법이 거칠지만 5년 실정에 대한 분노가 양산 사저 주변에서 표출되는 게 아닌가요. ‘문재인 적폐 청산’ 구호가 들렸습니다. 주민들은 소음에 시달리고 있죠. 반문명적이라고 시위를 비판한 문 전 대통령은 3개 단체의 4명을 명예훼손과 살인 및 방화 협박 등의 혐의를 적용해 고소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출근길에 사저 시위 질문을 받고 “대통령 집무실(주변)도 시위가 허가되는 판이니까 다 법에 따라 되지 않겠느냐”라는 원칙론을 펼쳤습니다. 자제하라고 말하길 기대했는데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는지 좌익은 윤 대통령 사저 아파트 앞에서 시위를 개시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과오의 시인에 실기했습니다. 써준 걸 읽었는지, 2019년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는 북한 노동상 등을 역임한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라고 보는 운동권적 언명까지 나왔죠. 그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지만 너무 나갔습니다. 이렇게 민심에서 멀어진 것은 월 1회 기자회견 약속을 어기고 연 1회쯤으로 장식화한 탓에 국정 책임자로서의 긴장감을 잃은 원인이 크다고 봅니다. 회견을 유심히 들었더니 질문 수준도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죠. 어떤 기자들은 “제가 보라색 옷을 입은 것이 신의 한 수인가요?”, "저랑 눈 마주친 것 맞죠, 대통령님", “100일 회견 때도 질문드리고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돼서 영광입니다”라는 등 괜찮은 질문을 뭉개는 동업자들 같은 말도 나왔습니다.
누적한 민생고와 국가 정체성 혼란, 움직이면 터는 부동산 세금 약탈로 세수가 연간 수십조 원이나 계획보다 증가하고 돈 뿌리는 재미에 흠뻑 취한 동안 정권교체는 이를 가는 국민의 마음속에서 착착 진행되었죠. 그게 0.73% 차가 아니라는 것을 6·1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궤멸적 압승으로 증명했습니다. 불만을 표출하는 일부 시민의 욕설과 굉음에 분통이 터지겠지만 자신이 극렬 문빠를 비호했던 말에 빗대 전임 대통령에게 ‘양념’이라고 비유하는 지적이 나옵니다. 촛불 시위는 박근혜 현직 대통령의 수급(首級) 모형을 막대기에 꽂고 머리통을 공처럼 굴렸습니다. 2017년 10월부터 넉 달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저 앞에서는 "쥐XX 나와라"며 구속을 촉구하는 쌍욕 시위를 벌였죠. 그때 민주당 측은 자제를 촉구하는 대신에 격려 방문도 했습니다. 친구의 부인 권양숙 여사는 김건희 여사에게 ”정상의 자리는 채찍질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이 참으셔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 전 대통령은 편히 쉬지도, 잊히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시한부 권력을 절제하며 남이 써주는 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 노력했다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친구 노무현은 정이 넘쳤고 토론을 좋아했고 명랑해 나는 지금도 자살이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가 하지 말라던 정치를 한 문재인의 집권 5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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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영환
한국일보, 서울경제 근무. 동유럽 민주화 혁명기에 파리특파원. 과학부, 뉴미디어부, 인터넷부 부장등 역임. 우리사회의 개량이 글쓰기의 큰 목표. 편역서 '순교자의 꽃들.현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