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은 정직하고 실체적이다.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존재'를 기록하며 조물주가 승인한 숨탄것의 계수에 하나를 더 보탠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 변화다. 태어난 생명은 결국 죽지만, 죽음을 알아야 생을 더 현명하게 판단하는 안목이 생기고, 지혜로운 안목은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는 추진력이 된다. 이런 이유로 그 긍정적인 원동력은 죽음까지 관여하게 된다. 낙천적인 성향이 늘그막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도 生놀이의 영역을 순응력으로 나름 넓혀본다.
인간은 생장하면서 죽어가는 존재다. 살아가는 동안 생생히 기뻐하고 고뇌해야 한다. 사랑, 이별, 절망으로 침전물이 고이지만 만경의 인생도 넘어가는 해처럼 장엄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노후를 위해 버킷 리스트를 계획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신체적 건강과 경제적 여유로움과 정신적 풍요로움도 갖추어야 한다. 황혼을 평안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람은 각자 본성대로 산다. 늘그막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생각은 무엇일까? 편견을 깨고 더 성숙한 자기를 찾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와 다른 삶을 비교하면서 놓치거나 빼앗긴 삶을 반추하면 곧추서는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시간이 육체에 주름살과 거칠어진 살결로 늙음을 주듯이 심상과 심정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늙음은 시간이 쌓은 육체의 훈장이다. 정신도 어떤 훈장을 달 수 있을 만큼 무르익어가고 있는가. 육체를 씻듯이 심상을 닦고 육체를 단장하듯이 심정을 가다듬어야 한다. 육체가 변화한 만큼 심사를 변화시킬 줄도 알아야 일생이 제대로 성숙한다. 일생 중 우리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호시절이 얼마나 되겠는가로 읊조리는 이런저런 핑계는 무의미하게 사는 지름길이 된다. 노년의 삶을 슬기롭게 받아들여야 세상을 보는 눈과 폭넓은 정신을 지닐 수 있다. 비관론자로 늙어가는 사람은 비겁하다.
자연이 생명을 다스린다. 생명을 얻은 것은 모두 죽는다. 돋아나고, 생장하고, 결실을 거두고 사라진다. 돋아난 떡잎 위에, 말라가는 시든 잎에 해와 달이 어슬렁거려야 삼라만상이 순조로울 수 있듯이 사람도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쇠하고, 사라져 가는 것이 순리다. 존재했던 것이 사라지는 게 생이요 천지자연의 이치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큰 도서관이셨던 어르신들이 떠나가셨다.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김동길 선생님. 지식과 사랑을 전도하셨던 이어령 선생님. 국민과 애환을 함께하셨던 송해 선생님. 나이가 들어도 품위를 잃지 않고 古典과도 같은 가르침으로 희망을 안겨주었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었던 성인들이시다. 우리들의 정신 기둥이었던 어르신 세 분이 한 해에 다 가시니 애통하기 그지없다. 선각자의 삶에 예우는 당연한 일일 터.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노화의 숲속 길이고 쇠락의 인생길이다.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늘어나, 인류 문명사에 경험하지 못한 장수 시대를 맞고 있다. 100세 시대, 후반기 인생이다. 노인들의 빈곤과 사회적 고립인 회색 쇼크는 고령사회의 한 면을 보여준다. 한국인 평균수명은 83세로 늘었지만 건강한 수명은 65세에 불과하다. 우울한 장수시대, 불안한 백세시대. 고령화의 그림자가 점점 짙게 드리우고 있다.
인생은 클라이맥스를 높이 둘수록 소신껏 살기가 어렵다. 정점만 고집한다면 최고만 갈망하는 헛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정점을 넘어선 내리막길에서는 누구든지 상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영원하리라 여겼던 권력도 누렸던 영화도 낙화처럼 쓸쓸히 과거 속에 묻힌다. 삶의 중심을 최대치에 두지 말고 몇 칸 아래에 둔다면 여생은 탐욕에 흔들리지 않고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여유롭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주관 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삶은 사람답게 사는 인생이다. 노년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로 자기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걸음은 몸 전체의 노화 징표다. 발이 멈추면 몸도 멈춘다. 몸이 멈추면 마음도 정신도 멈춘다. 건널목에선 신호등이 멈춤과 출발로 사람을 지배한다. 파란불이 켜지면 대기했던 사람들이 길을 건너간다. 그들 모습에서 개개인의 실체가 드러난다. 성별, 나이, 직업, 기분, 몸기운, 신체 구조가 걷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걸음걸이가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 모습은 정상인과 환자의 경계선이기도 하고 치료와 휴식이 엇갈리는 분기점도 된다. 신호등이 파란 불을 깜박일 때는 더 뚜렷하다. 순간적인 판단력, 순발력, 행동력이 따라줘야 건널목 건너기가 성공한다. 그중에 제일은 질주하는 두 다리다. 인생살이도 양다리로 버텨내기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는 길 가시덩굴로 막고, 찾아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백발가>
나이가 들어가니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시조다. 세월이 씌워 준 하얀 모자 쓰고지고.
'햇'은 때가 일러 풋내나는, 신출내기를 대신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주어진 것을 미루려고 애교를 부리는 단어다. 햇과일, 햇곡식, 햇감자의 햇은 몸체가 덜 여물었다는 뜻이다. 나는 근래에 내 자식이 아닌 남에게서 '어머니' 소리를 간혹 듣는다. 이 강렬한 명칭은, 목을 꺾는 동백꽃에서 내 모습과 마주치고,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내 가슴이 조각조각 난다. 나목 같은 몸뚱어리가 빨아들인 물길로 숨통을 틔우고 햇빛을 보채 잎사귀를 달아내는 상상도 한다. 햇노인의 전조증상에 내 심장이 팔딱거린다.
나도 이제 햇노인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노년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황당한 현실이다. 사람들은 늙는다는 사실을 비통하게 여기며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서글퍼한다. 무의미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늙으면 행복할 수가 없다고 스스로 단정하는 일은 여생을 더 힘들게 하고, 낮아진 자존감은 비관론자로 변하기 쉽다. 노력 없이 얻는 게 노년이 아니라며 자신감으로 당당히 맞서야 한다. 지혜롭게 자신을 성숙시켜 익어가는 노후를 맞이해야 한다.
햇노인이 된 친구들과 가을 보내기 여행을 갔다. 만약 안 갔더라면 하늘이 내 바지 색깔과 같고, 구름이 뜨개질한 흰조개 무늬 같고, 황금빛 들판 속에 다랭이논은 메뚜기들의 연애 장소가 되고, 무덤가 쑥부쟁이가 그리움이 되는 인생살이의 진수를 놓칠 뻔했다. 연화산 옥천사 입구, 거미줄에 매달린 단풍잎은 뱅글뱅글 도는 바람개비가 되어 서늘한 바람을 따라가고 있다. 유독 하늘이 망망하고 내 가슴도 흥건히 물든다. 가을 말미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