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과 행정-
로마의 잔재 속에서 프랑크 왕국은 거대한 헤게모니를 창조하는데 성공했다. 남부 피레네 산맥에 닿는 아키텐부터 아우스트라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헤게모니가 그들의 영역이었으니 거대하다고 할만 했다. 이는 그저 영역의 통합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지역들의 교류의 장을 만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유럽에서는 로마가 멸망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들로 인해서 많은 양의 교역 기능과 규모가 줄어들거나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교역의 완전한 쇠락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로마의 멸망이 모든 것의 파멸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전히 수많은 도시들이 존재했고 그 도시들에 잔존한 갈로-로망 귀족들과 새로히 입주한 프랑크 귀족들의 수요-공급, 그리고 새로운 재화의 유통 방식으로 로마 시대와는 다른 교역망이 프랑크 왕국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교역수입과 도시수입은 프랑크 군주들에게 큰 수입원이었다. 그저 모든 중세 초의 군주들이 토지에 의존하며 농촌 생활을 영유하는 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오히려 6세기 프랑크 귀족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입지가 좋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것을 원했다. 물론 농촌이나 빌라에서 생활하기를 원한 이들도 있지만, 왕들이나 공들이나 주백(왕의 관리)은 7~8세기까지 도시에서 거주하고 그곳에서 농촌을 관리했다.
위에서 언급한 수입원들은 그저 걷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주들에게는 세금을 걷을 세리와 그 세금을 관리해줄 행정관과 서기가 필요했었다. 실제로 간접적인 기록들에서 왕실에는 로마의 그것과 유사한 행정 관직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속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중세 초의 프랑크 왕국은 까막눈의 무식한 군주들이 무자비하게 통치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짜여진 체제 속에서 세금을 거두고 관리하는 통치를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 행정은 기록이 적지만 간접적으로 도시마다 '주백'이라는 왕의 가신을 파견했다. 이는 로마의 '코메스(총독)'와 유사한 것이었다. 주백은 원칙적으로 왕이 임명하고 비세습적인 직책이었다. 물론 대체로 반-세습화가 이뤄지고 지역화가 되긴 하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주백과 왕실 관료들은 사실 지방 도시나 영지를 통치할 힘이 없었다. 물론 군사력이나 여러 방면에서 강압적인 통치는 가능하지만 이는 비효율적이고 불만도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도시의 실질적 지배자인 '주교'와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 주교들은 대체로 도시의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이었다. 주교는 곧 도시를 관리하는 시장이었으며 공동체의 리더였다. 사적인 대가문에서 나왔음에도 이들은 공동체의 질세를 유지하고 지속적으로 공공 봉사를 행했다. 귀족들은 이런 주교들을 배출하는 원천이었고 그렇기에 실질적인 도시의 지배자였다. 이런 이들에게 왕실 관료들은 여러 이권의 보장과 자치를 허용하는 대가로 통치의 협조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는 중세 초의 프랑크 왕국의 통치 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저 폭력으로 일궈낸 왕국이 아님을 시사한다.
-새로운 유통 방식:선물/약탈-
선물과 약탈은 말그대로 그것이다. 당시 메로빙 시대의 재화 유통 방식의 근간은 상업을 통한 부의 유동이 있지만 그것보다 큰 것은 바로 지배층들의 부의 분산과 강탈이었다. 지배층들은 그렇게나 교역을 통한 돈벌이에 관심을 가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스스로 그 상업에 종사하기보단 상인들에게서 호의를 얻어내서 그들을 뜯는 것이 메로빙 군주들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군주들은 여러 차례로 상인부터 주교나 가신들에게 막대한 금을 선물하므로써 그들에게 '빚'을 지게 했다. 이는 곧 그들을 붙잡는 가장 좋은 수단이면서 군주가 매우 자비로운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는 중세나 근대나 지금까지도 보이는 정치 스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행위는 선물 말고도 자선 행위나 후원 등이 존재했다. 다 엇비슷한 뜻이며 이를 통해서 주교나 귀족이나 왕과 같은 지배자들이 하위게층의 호의를 얻음으로써 통치의 효율을 강화 시켰다.
약탈은 정기적인 수취라고 볼 수도 있다. 경쟁자부터 반역자나 반항하는 귀족이나 세력 그리고 대외적으로 대립하는 국가와 전쟁을 수행하고 승리하여 재화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이는 작게는 귀족들 간의 사적 전쟁이었고 크게는 왕들의 국가 간의 거대한 전쟁이었다. 이를 통해서 수많은 잉여 생산물이 강탈되었고 이는 다시 군주들의 자비로움에 의해서 분배되었다.
군주로부터 분배 받은 이들은 그저 이것을 모아두는 것이 아니라 도시나 농촌의 장터에서 사용했다. 필요한 것이나 사치품을 사드리는 것이었다. 이렇다보니 도시나 장터는 상시로 열려있었고 엘리트층의 교역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보았듯이 프랑크 왕국의 유통 체제의 기반은 여러 상업 활동과 이를 뒷받침 해주는 생산 그리고 그 생산을 어찌 분배해주냐의 특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다보니 고중세의 교역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국제 교역-
위에서 언급했듯이, 프랑크 왕국의 교역은 상당한 규모로 활성화 되어있었다. 흥미롭다면 지리적으로 상당히 이점이 크다는 것이다. 네우스트라시아와 그 일대는 막 형성되던 북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는 앵글로색슨인들의 무역거점과 스칸다나비아의 여러 교역소들의 증가해가는 교역이 존재했다.
남부 프로방스와 그 일대는 지중해 무역의 일원이었다. 서부 지중해 무역망은 로마의 멸망 이후 상당히 붕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활성화 된 것도 사실이다. 프로방스의 값싼 모직물이 수많은 곳에서 사용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밖에도 많은 곳에서 프랑크 왕국과의 교역이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있다. 심지어는 아랍의 대상(무려 낙타를 대동하는 상인들)들이 파리까지 교역을 위해서 오갔으니 말이다. 일례로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연대기에서 시라아의 에우세비우스라는 상인이 파리의 주교위를 돈으로 차지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서술 한다. 이는 그저 설화가 아니다. 실제로 프랑크의 많은 외국인 상인들의 공동체가 여러 국제 도시들, 나르본 마르세유 리용 오를레앙 보르도 파리 부르쥬 등등, 에 존재했었다. 그들은 도시내에서 독자적인 그들만의 구역을 형성하고 마치 코리아타운처럼 그들의 수장, 콘술을 선정하고 그 곳에서의 교역을 주도했다. 유대인들이 그중에서 대표적인 예다.

{선물과 후원으로 정치와 상업을 촉진 시킨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테우데베르트 1세}
첫댓글 일개 행상인의 입장에서는 들어가는 도시마다 세금 잔득 걷으면 꾀나 빡칠 듯 합니다;;
그렇게 도시마다 다양한 보호비를 내고도 이득을 봤으니 상업이 발전했겠죠?
메로빙거나 카롤링 시기에도 화폐주조권이 각 영주들에게 있었다면.... 상인들 꾀나 머리 좀 굴려야 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