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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徐載弼, 1864~1951)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남 동복군 문전면 가천리(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의 서광효(徐光孝)와 이기대(李箕大)의 다섯째 딸 성주(星州) 이씨 사이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가는 충남 은진군 구자곡면(현 논산시 연무읍 일대)이다.
호는 송재(松齋)이고 미국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다.
. 어렸을 때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곱살 때에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2년 3월에 실시된 별시문과 병과에 세번째로 합격하여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국방 근대화의 시급함을 절감하고
김옥균의 권고를 받아들여, 1883년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동료 14명과 함께 1년간 현대 군사 훈련을 교육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여,
국왕으로부터의 승낙을 받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어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에 의해 성립된 신정부의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後營領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일본이 망명객들을 냉대하자,
도착한 지 4개월 뒤인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 서재필의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 자살하고, 동생 서재창(徐載昌)은 참형되었으며,
두 살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였다.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고등학교(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는데,
1889년 6월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자가 될 정도로 성적이 특출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889년 9월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Lafayette)대학에 진학했으나 학비를 조달하기가 어려워
워싱턴시로 가서 낮에는 육군의학도서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컬럼비아의과대학야간부(Columbia Medical College: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3년 6월 2등으로 졸업한 뒤, 학교의 병리학 강사가 되었다.
다음해 6월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 암스트롱(Amstrong, G. B.)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무렵 학생들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행위가 심하자,
이에 분개하여 모교의 강사직을 사임하고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한편, 1884년 갑신정변이 이어난뒤 10년 후에
1894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대개혁이 단행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갑신정변을 일으킨 급진개화파들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그리고 1895년 5월 박정양내각(朴定陽內閣)은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갑자기 귀국할 수 없었다.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 내부대신이었던 박영효가 고종 폐위 음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미국에 들려 또다시 귀국을 종용하자, 사업을 정리하고 1895년 12월말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후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국민의 계몽이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민의 여론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고 신문 발간사업을 추진하였다. 정부로부터 4,400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을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 신문으로
순 한글로 간행되어 폐간될 때까지 국민을 계몽하고
우리나라의 개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신문』의 창간에 성공하자 뒤를 이어 개화독립세력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창립 후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소임을 다 하였다.
독립협회의 창설과 함께
종래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제의하였다.
그런데 국민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속에 1897년 11월 국민의 성금으로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이 건립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하였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를 비판하고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자,
이를 꺼려한 수구파 정부와 국제 열강들은 합의해 다시 미국으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3·1운동 봉기 때까지
다시 병원을 개업, 의료사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전재산을 정리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고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해 우리나라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전세계에 규탄하였다.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해 재미교포들을 결속시키고
미국인친우들을 모아서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구미위원회 사무실을 설치하고 영자 독립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를 간행하여
우리나라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과 외교 활동에 온 정력을 쏟았다.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가 개최되자 우리나라의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일본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해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폭로, 규탄하며, 독립운동에의 지원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가재(家財)가 완전히 파산되어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다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강사로 나가는 한편, 여러 병원의 고용 의사로 종사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정장관 하지(Hodge, G. R.)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군정청 최고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수립이 선포되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
서재필은 귀국한 뒤 서대문 언저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 집 바로 뒤에 영은문이 있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이 문을 바라보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자리에 프랑스의 개선문 같은 조선 독립의 상징물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독립문은 자금이 모자라 개선문의 규모로 짓지 못했다.
설계도는 스위스 사람,
공사는 교회를 지은 경험이 있는 목수를 동원했으나 개선문과 같이 대리석을 쓰지도 못했고 규모도 축소
한편 그는 미국의 입장에서 〈독립신문〉의 논조를 펴나갔다. 그런데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펴면서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용해 친러정권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시키려 했다. 그는 미국의 정책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3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고관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건방지게 굴어서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는 역적의 낙인을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갑신정변의 4주역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 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 ・ 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학부 졸업
맨뒷줄 왼쪽 세 번째 서재필
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그의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정 ・ 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 ・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독립신문』(국문 제1호, 영문 제2호)
6~7세경 자식이 없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간 후 충남 대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살았다. 7~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金聲根)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는 역적의 낙인을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갑신정변의 4주역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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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 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 ・ 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학부 졸업
맨뒷줄 왼쪽 세 번째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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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그의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정 ・ 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 ・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독립신문』(국문 제1호, 영문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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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경 자식이 없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간 후 충남 대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살았다. 7~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金聲根)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는 역적의 낙인을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갑신정변의 4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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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 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 ・ 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학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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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그의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정 ・ 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 ・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독립신문』(국문 제1호, 영문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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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경 자식이 없던 7촌 아저씨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간 후 충남 대덕군(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서 살았다. 7~8세경 서울로 상경하여 외숙부 김성근(金聲根)의 사숙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丙科) 3등에 급제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부터 개화에 눈뜬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며 개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의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1883년 5월 일본으로 유학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뒤 도쿄(東京)의 도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신식 군사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일본에서 함께 군사교육을 받은 사관 생도들과 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884년 10월 새로 조련국이 설치될 때 사관장에 임명되었으나, 국내에 주둔한 청군(淸軍)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그해 12월 4일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이 급진적인 내정개혁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사관 생도들을 이끌고 경호책임자로 참여하였다.
탈중화(脫中華)하여 근대적인 자주 독립국가를 꿈꾼 갑신정변은 청군을 앞세운 수구 세력의 무력 공격으로 3일 천하로 끝났다.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조선정부로부터는 역적의 낙인을 찍혔다. 이번 일로 부모와 처는 음독자살하였으며, 두 살 된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었다. 바로 밑 동생 재창(載昌)은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막내 재우(載雨)는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갑신정변의 4주역
왼쪽부터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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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명 후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된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행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샌프란시스코의 미국인 교회에 다닐 때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리에서 탄광업을 경영하는 홀렌백(J. W. Hollenback)을 만났다. 그의 호의로 윌크스베리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교생활을 통해 민권에 기반에 둔 민주주의를 배우고 익혔다.
졸업 후 미국 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관련 책을 번역 ・ 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8년 가을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M.D.를 획득하였다. 사서로 일할 때인 1890년 6월 19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의사 면허를 받고 워싱턴DC의 시내에 개업했으나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운영이 쉽지 않았다.
콜롬비안대학교(현 조지워싱턴대학교) 의학부 졸업
맨뒷줄 왼쪽 세 번째 서재필
1894년 7월 수립된 갑오정권(甲午政權)이 들어선 후 그의 ‘역적’ 죄명을 벗게 해 주고 동시에 귀국을 요청하자,
1895년 12월 26일 근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공식 직함은 중추원 고문직이었으나 정치활동보다 민중을 위한 계몽활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정 ・ 관계의 개혁파 인사들과 외국사절,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며 활동기반을 다졌고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민중들의 의식을 일깨워 한국의 정치 ・ 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 한문으로 무장된 유교 지식인층 보다 한문에 문외한 일반 민중층을 상대로
‘조선 민중의 이익’과 ‘조선 민중을 위한 조선’의 신문으로 만들어 자주자강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다.
『독립신문』(국문 제1호, 영문 제2호)
민간 신문의 발간은 조선사회에 처음으로 정부와 민중간의 원활한 정보전달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었고
민중들에게 근대 민권의식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독립신문』을 계기로
이후 조선사회에 『매일신문』 ・ 『제국신문』 ・ 『경성신문』 ・ 『대한황성신문』 등
각종 근대적인 신문 발간으로 확산시켜 당시 군주중심의 폐쇄적인 유교사회에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정신을 배양하고 여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토론문화와 대중강연을 도입하였다.
1896년 11월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학생 자치기관인 협성회를 조직해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가르쳤다.
1896년 7월 2일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 ・ 사회단체인 독립협회(1896.7~1898.12)를 결성하고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등과 함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당초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설하기 위한 사무를 관장할 목적에서 관료들의 사교모임으로 시작했으나
매주 일요일 오후 3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또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활동범위를 확장시켰다.
이에 독립협회는 점차 계몽단체이자 정치적인 결사체로 발전하였다.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에 대한 반대를 위해 1898년 3월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주권수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여론을 결집시켜 정부에 총의를 전달하는 방식은 자유와 민권을 신장시키는 획기적인 활동이었다.
이밖에 민중들의 호응을 받아 서대문 밖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고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이 헐린 앞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조선의 자주독립정신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자유로운민권신장을 위한 활동은 서재필 추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여론을 결집해 민감한 정치 현안까지 정부를 압박해 나가자 이권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와 정부 내 수구파의 반발이 커진 것이다.
이들은 민중계몽운동의 배후자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조선정부를 상대로 추방공작을 전개해
마침내 1898년 5월 14일 한국을 떠나야 하였다.
지난 3년여의 계몽활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사회에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운동이었고, 자주독립사상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사상을 심어 준활동이었다.
독립협회활동의 영향은 남궁억, 정순만,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이승만,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등
수많은 개화 지식인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민족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다시 미국에 건너간 후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이런 가운데 1905년 7월 러일강화회의를 대비해 미주 한인을 대표한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九)가 필라델피아에 왔을 때 외교문제를 협의하였고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할 청원서를 보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여운홍(呂運弘), 안창호(安昌浩) 등 국내외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한국독립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1918년 12월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50만 달러의 예산으로 영문잡지를 발간할 것을 제의하였다.
영문잡지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지배 실상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그만한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운데다다른 시급한 시국현안 등을 이유로 무산되었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4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공식 명칭은 ‘대한인국민회총대표회’)를 개최하였다.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동안 150여 명이 참가한 이 회의에는 한국인 외에 톰킨스(F. W. Tomkins) 목사와 밀러(H. A. Miller) 교수 등 유력한 미국인들도 연사로 참여하였다. 모든 회의를 주재한 후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방향을 담은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을 작성해 대외에 공표하였다.
이 때 작성된 결의문과 호소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 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이다.
1919년 6월부터 1922년 7월까지 월간으로 발간한 이 영문잡지는 초기 1,000부에서 2,000부까지 증간해 미국의 주요 공공기관과 도서관, 각종 정치 ・ 사회 ・ 종교 단체 등지에 배포하였다. 활발한 선전활동 때문에 일본 정보당국은 『한국평론』을 해외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 간행물 중 가장 유력한 반일 선전물로 간주하고 예의 주시하였다.
한국통신부는 『한국평론』 발행 외에 『한국의 어린 순교자들(Little Martyrs of Korea)』, 『한국의 진상(The Truth About Korea)』, 『한국의 부흥(The Renaissance of Korea)』 등 다양한 영문 책자를 발행하였다. 또 개인적으로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과 언론을 통한 기고 활동도 전개하였는데,3년여 동안 펼쳤던 그의 강연 횟수는 300회 이상이었고 미국인 청중의 수는 10만여 명이나 되었다.
한국통신부를 통한 선전활동과 강연 그리고 기고활동을 통해 미국사회에 전하고 싶었던 주요 내용은 첫째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을 갖고 한국인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 둘째 한국의 독립은 장차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 셋째 한반도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일본은 원래 신의가 없는 나라이고 지금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하고 있는 동화정책은 민족말살을 위한 것이므로 이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의 독립밖에 없다는 점, 넷째 오랫동안 유구한 문화 민족으로 누려온 한국인은 지금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드시 극복할 능력을 갖춘 민족이라는 점 등을 강조하였다.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별도로 톰킨스와 함께 1919년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로 압박받고 있는 한국인들을 돕기 위해 친한 미국인 중심으로 결성한 것으로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 21개가 결성되었다. 그 외 런던과 파리에도 각 1개씩 결성되어 한국친우회는 구미 지역에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순이 주미공사관 설립문제로 1921년 5월 구미위원부 위원장에서 사임하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영국 ・ 프랑스 ・ 일본 ・ 중국 등 9개국 열강들과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워싱턴회의(1921. 11. 12~1922.2. 6)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외교활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7월 15일 뉴욕 한인들이 워싱턴회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임에서 임초(林超)를 수전위원으로 임명하고 미국 각지를 순행하며 모금활동에 나서서 3개월 동안 21,219달러를 모금하였다. 모금 성적은 당초 목표액인 1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미주 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성과였다. 또 모금활동을 통해 분열되고 있던 당시 미주 한인사회를 독립의 열기로 다시금 일치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대비하여 1921년 9월 29일자로 단장 이승만, 부단장 서재필, 서기 정한경, 법률고문 돌프(Fred A. Dolph)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워싱턴회의에 대한 참가권이 없는 한국대표단은 10월 1일 미국대표에게 회의 참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0월 중순에는 한국대표단의 이름으로 미국 대통령 하딩에게 한국을 피침략국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이 세계 평화를 위한 토대가 될 것임을 주장하고 대회 참가를 공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적극적인 방해공작과 식민지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등으로 한국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워싱턴회의는 한국문제에 대한 아무런 논의나 관심도 없이 폐회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실망을 주었으나 대외선전활동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미국 언론을 상대로 한 활동 결과 60여 곳의 신문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한민보』 1922년 2월 23일 전체 한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은 당장에는 다소 실망하겠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이번 회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기회를 세운 줄 생각하노라” 하고 이번 국제회의 활동이 결코 무위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워싱턴회의 외교활동으로 얻은 소득에 대해 첫째, 한국대표단의 민첩한 활동으로 미국 정부 대표 등 9개국 열강 대표들에게 한국문제를 이해시킨 점, 둘째, 비록 공식적으로 한국 독립문제가 거론되지 않았으나 비밀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체 한인들의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한 점, 셋째, 워싱턴회의를 통해 영일동맹의 폐기와 중국의 권리인정 등은 장차 한국 독립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 등은 큰 소득으로 보았다.
그밖에 당시 내부 분열로 침체되고 있던 미주 한인사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킨 점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했던 국내외 많은 한인들에게 이번 외교활동은 적지 않은 실망감을 주었고 대미 외교 위주의 독립운동 방략에 큰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워싱턴회의가 끝난 직후인 1922년 2월 본업인 사업에 전념할 것임을 밝힌 후 그 해 7월 『한국평론』 마지막 호를 간행한 후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다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전면에 나선 때는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하면서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에 있는 세계 YMCA 주관으로 설립된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가 추진한 비정치적인 민간대회다.
이 대회는 태평양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각국 대표가 개인자격으로 각 국가의 현실문제를 자유로운 토론과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구명하고 우의를 증진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1925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7.1~14)에는 미국과 하와이 ・ 필리핀 ・ 일본 ・ 조선 ・ 중국 ・ 캐나다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등지에 파견된 140여 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대회 의장은 스탠포드 총장 윌버(Ray Lyman Wilbur)이고 사무총장은 데이비스(J. Merle Davis)였다.
회의는 호놀룰루의 교외의 푸나호우(Punahou)학교에서 개막되었다. 한국대표단은 국내와 미주 대표로 구성되었다. 먼저 국내에는 신흥우YMCA(총무, 단장) ・ 송진우(동아일보사 사장) ・ 유억겸(연희전문학교 교수) ・ 김양수(『조선일보』 기자) ・ 김종철(보성전문학교 교수)이 참석했다.
서재필은 미주 한인을 대표해 참석하였고 한국대표단의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한국대표단은 조선에 대한 민족자결의 원칙, 경제문제, 교육문제, 조선 ・ 만주에 대한 인종적 감정 해소문제 등 4가지 문제로 회의에 임했다. 일본대표단의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대회 참가 대표들에게 한국의 주권문제를 상기시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렸다. 아울러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하와이 한인들에게 한국 독립을 위해 상호 단결할 것을 호소하였다.
서재필과 안창호(로스앤젤레스, 1925)
번창하던 문구 및 인쇄사업은 1924년경 완전히 파산하였다. 이렇게 되자 유일한의 도움을 받아 이희경 ・ 정한경과 함께 1925년 4월
유일한회사(New Ilhan Company) 필라델피아지사를 설립하였다.
유일한이 설립한 유일한회사는 디트로이트에 본부를 둔 회사로 한국 물품을 수입하고
미국의 약품과 화장품 등을 국내로 수출하는 무역회사였다.
필라델피아지사는 사장 서재필, 부사장 정한경, 전무 이희경으로 구성되었고
필라델피아 시내 부동산신탁빌딩(Real Estate Trust Building) 1092호에 사무소를 두었다.
필라델피아지사는 1927년까지 필라델피아의 상공록에 회사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1926년경 사업을 접었다.
무역업이라는 새로운 사업이 그의 적성과 맞지 않았던 데다
사업을 총괄하던 유일한이 1926년 귀국하면서 사업을 계속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또 개인적으로 의사로서 새 출발할 결심한 때문이었다.
1926년 9월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특별학생으로 입학해
다시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의사 인턴생활 때 여러병원을 거치며
고된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 1927년 11월 한인 최초로
병리학 전문의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사업과 독립운동 그리고 새로운 의사로서의 삶을 사는 분주하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국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미국 내 『신한민보』를 비롯한
여러 한인 신문과 잡지에 수많은 글을 발표하며 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대표적인 기고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고국동포에게」(1922. 9. 14),
「개인주의와 협동주의」(1924. 2. 26~28), 「회고 갑신정변」(1935. 1. 1~2)
『조선일보』의 「고국을 바라보고: 구하라, 과학적으로」(1925. 1. 13~14),
잡지 『산업』 1930년 5월호의 「조선경제발전에 대한 관견」,
미주 한인 주간신문인 『신한민보』에 기고한 「Random Thought」(1937. 3. 4~1938. 6. 30)와 「My Days in Korea」(1938. 7. 7~1940. 4. 4) 등이 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국내외 한인들에게 단합된 힘을 호소하였고
강인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을 대비한 실력을 양성할 것을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