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해 연중 제25주일
마태오 20,1-16
다 갚을 수도 없고, 갚았다고 믿어서도 안 되는 한 데나리온의 가치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은 포도밭 일꾼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고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다섯 시에도
일꾼들을 불러 모읍니다.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는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이 자신들은 더 많이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하자 투덜댑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종이 되어 이웃의 발을 씻어주는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오늘 하루 종일 일한 종들처럼 자신들이 주인에게 더 해 주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받는 한 데나리온은 지옥이 가지 않고 천국에 이르게 만드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일만 탈렌트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일만 탈렌트의 가치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죽옷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할 수 없고 그러면 주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많은 것을 드린다고 착각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체 성혈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주는 빛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처지가 연꽃의 씨에 불과함을 알면 됩니다. 연꽃 씨는 물 밑 진흙 속에 묻혀있습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신을 깨고 나올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태양의 따사로움이 그 씨앗에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때
연꽃이 어떻게 태양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배우 박철민 씨가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한없이 오열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왜 슬플까요? 더는 어머니가 자신이 보답해드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안타까운 게 아닐까요? 그는 어머니의 음식을 맛보고도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저세상에 계신 어머니의 은혜에 더는 보답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슬픈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만한 일꾼들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한 데나리온보다 더 일을 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한 데나리온의 값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가치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자녀라 믿게 해 준 하느님 피의 값입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데나리온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지옥에 다녀오게 된 것이 자신을 가장 많이 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지옥에서 건져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만 한 명이라도 지옥에 가지 않게
하도록 수천 번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언제나 그 한 데나리온에 보답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이것을 겸손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 갚을 수도 없지만, 이미 다 갚았다고 믿으면 더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제로 불러주신 분께 감사하기 위해 성인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 산초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이익도 없지만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알돈자가 그에게 왜 얻는 것도 없는데
그런 이상한 노인을 쫓아다니냐고 할 때 산초는 노래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받은 한 데나리온 때문에, 곧 우리가 받은 정체성 때문에
그 피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영원히 찬미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 나의 털을 몽땅 뽑는대도 괜찮아. 묻지 말아요. 이유가 뭔지.
그런 건 눈을 씻고 잘 봐도 없다오. 발가락을 썰어서 꼬치구일 한데도 꼬집고 할퀴고 물리고 뜯겨도
하늘에 외치리. 나는 주인님이 그냥 좋아 ~~~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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