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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제10계 소리장도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7 15.02.27 1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병법삼십육계] 10계 소리장도(笑裏藏刀)... 

 

 

信而安之陰以圖之備而後動勿使有變剛中柔外也

상대에게 믿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속으로 일을 도모하라.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일을 꾸밈으로써 변화를 허락지 않는다. 안으로는 강하되 밖으로는 부드러워야 한다.

 

<구당서><이의부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義府貌狀溫恭 與人語 必喜怡微笑 而偏忌陰敵 旣處權要 欲人附己 微悟意者 輒加傾陷 故時人言 義府 笑中有刀

의부는 외모가 온순하고 공손하여 다른 사람과 말을 할 적에 반드시 기뻐하며 희열하고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성정이) 편협하여 (한편으로) 적을 투기하고 음해하였다. 마침내 요직에 올라서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여 은밀하게 자기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바로 곤경에 처하게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은 말하기를 "의부의 웃음 속에는 비수가 숨어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아마도 가장 오래 된 소리장도와 관련된 출전이 아닐까 한다.

 

 

북송 때 조위라는 이가 조위의 지사가 되었을 때 명령이 분명하고 말과 행동이 엄숙하니 특히 국경 너머 서하에서 그를 무척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위가 손님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을 때였다. 기병 하나가 달려 들어와 바둑을 두고 있던 조위에게 몇 천 명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하로 넘어갔음을 알려왔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 천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닌데 그만한 병력이 서하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장차 돌아올 후환을 생각하며 모든 병사와 군졸들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도리어 조위는 웃음마저 지으며 사실을 알리러 온 기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명령이니 너희들은 이 일을 입밖에 내지 말라."

 

딱 오해하기 좋은 말, 그리고 그대로 그 말이 서하로 전해지자 서하에서는 항복해온 북송의 병사들이 자칫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 버리게 되었다.

 

 

서주가 관중을 버리고 낙양으로 천도한 이래 주를 대신하여 관중을 지배하게 된 진은 춘추전국의 여러 군웅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서쪽으로 치우쳐 있던 까닭에 오랑캐로 업수임을 당해 항상 동쪽의 중원으로의 진출을 염원처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국시대 주왕실이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일곱 개의 강국이 남아 서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가운데 항상 호시탐탐 동쪽으로 중원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마저 품게 되었다.

 

그런데 진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황하의 효산이라고 하는 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때마침 진나라에 와 있던 공손앙 -상앙, 공손상앙등으로 일컬어지는 법가의 유명한 인물- 으로 하여금 효산을 차지하고 있던 위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는 비록 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공손앙이 공격하던 위의 오성은 위의 명장이며 이후 초의 재상까지 된 오자병법의 저자 오기가 쌓은 성으로서 험난한 지세를 이용하여 난공불락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공손앙이라 해도 당장 힘으로 공격해 무너뜨리기에는 절대 불가능할 것으로만 보였다. 힘이 아닌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일이 풀리려는지 마침 오성을 지키고 있던 것은 과거 공손앙과 친분이 있던 공자앙이라는 이였다. 공손앙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공자앙에게 바로 편지를 보냈다.

 

"비록 우리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주인을 위하고는 있으나 지난날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 볼 때 차라리 서로 싸우기보다는 두 나라로 하여금 군사를 파하고 서로 평화조약을 맺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구절절 지난날의 깊은 정이 담겨 있는 글이며 문장이었다. 더구나 편지와 더불어 진심을 보이겠노라 선봉의 병사마저 물리고 있었으니 공자앙으로서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자앙이 공손앙의 제안에 응하는 편지를 보냈을 때 공손앙은 회담하기로 한 장소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무장하지 않은, 공자앙이 이끌고 온 300여 병력보다도 적은 수로만 먼저 기다리고 있었으니 공자앙은 다시 한 번 감복하여 공손앙을 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공손앙이 공자앙을 더욱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자 공자앙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끝이었다.

 

공자앙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자 공손앙은 신호를 보내 매복해 두었던 병사들로 하여금 공자앙의 일행을 포위하도록 시켰고 공손앙의 옆에서 마음을 놓고 있던 공자앙과 그 수행원들은 꼼짝없이 공손앙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자앙을 앞세우고 오성의 문을 열도록 함으로써 싸움 한 번 하지 않고도 위의 요충지인 오성은 물론 위로 하여금 황하의 서쪽을 모조리 토해내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이 한 번의 싸움 없는 싸움으로써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을 얻게 된 것이다.

 

 

당태종의 후궁이던 무측천은 당태종이 죽자 강제로 감업사로 들어가 출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미 태자시절부터 정을 통하고 있던 고종 이치가 그녀를 잊지 못하고 감업사를 찾게 되자 마침내 그의 아이를 배게 됨으로써 황제의 아이를 가진 여자로써 당당히 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그리 내세울만한 집안출신도 아니었던데다가 당태종의 후궁으로서 출가까지 하게 되었던 몸이었고 보니 궁으로 들어와도 믿을 것은 고종의 사랑 뿐, 그야말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자칫 고종의 사랑을 잃게 되면 말 그대로 끈 떨어진 연이 되어 다시 감업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천성이 화려하고 분방했던 무측천으로서는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자기만의 확실한 자리가 필요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아니 오히려 주도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자리가 필요했다. 무측천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일이 풀리려는지 무측천을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고종이 황후에게 도움을 청하고 황후가 그것을 승낙해 주는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던 황후로서는 이미 왕자를 낳은 소숙비에 비해 그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황제가 무측천의 일을 황제의 뜻대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마음의 빚을 지우고, 무측천으로 하여금 소숙비를 공격하는 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궁으로 들어오자마자 재물을 풀어 그 같은 사실을 알아낸 무측천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 황후의 편에 서서 소숙비를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명분은 후궁인 소숙비보다 정비인 황후에게 있었고, 황후에게는 소생이 없으니 앞날을 생각하더라도 이미 고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자신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일단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자 무측천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먼저 황제로부터 받은 물건들을 아낌없이 궁녀며 환관들에게 뿌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옷차림을 검소히 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겸손하며 예의가 바르니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히 그녀에게 쏠리게 되었다. 궁녀든 환관이든 궁 안의 사람이라면 모조리 그를 흠모하며 따랐고, 따라서 어느새 궁의 구석구석에는 그녀의 이목들이 깔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치 그 모든 것이 황후를 위한 것인 양 황후의 앞에서는 그녀의 입안의 혀처럼 굴었으니 황후의 신임 역시 날이 갈수록 두터웠다. 그리고 결국 황후와 소숙비가 본격적으로 맞붙은 태자책봉문제에 있어 황후가 지지하던 진왕 충이 태자로 책봉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그 신임은 무측천이 낳은 아이가 그녀의 옷에 오줌을 쌌어도 화를 내지 않을 정도로 흔들림 없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무측천의 지위가 올라가고 그 세력이 커지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고 세력이 커지는 것인 양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것은 황후의 절대적인 착각이었다. 소숙비가 마침내 황후와 무측천의 공격에 고종의 총애를 잃고 유폐되자 황후로서는 천하를 얻은 것만 같았겠지만 그 순간에도 무측천의 칼날은 황후를 노리고 있었다. 심지어 무측천이 황후를 향해 돌린 칼날에는 자신의 딸마저 있었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딸을 스스로 목졸라 죽임으로써 그 죄를 황후에게 뒤집어씌우려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숙비와 황후와의 지리한 권력다툼을 알게 모르게 듣고 보아 온 고종이었다. 소숙비와 황후가 얼마나 독하게 서로를 공격했는가 하는 것을 주위로부터 - 혹은 무측천의 사주로 들어 알고 있던 고종이고, 또 궁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측천의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더 이상 황후의 결백을 믿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황후는 소숙비를 몰아내고 숙원을 이루자마자 무측천에 의해 실각하게 되니 그 황후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 것이 무측천 자신이었다.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가운데 하나인 측천무후가 바로 그녀다.

 

뒷날 고종이 죽고 무측천 - 측천무후가 권력을 쥐게 되자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어진 무측천은 이미 권력을 잃고 유폐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있던 소숙비와 황후에게 끔찍한 보복을 가한다. 그녀와 더불어 여걸로 알려진 한고조 유방의 비 여치가 그러했듯 소숙비와 황후의 사지를 잘라 술통에 넣어 죽여 버린 것이다. 소숙비야 그렇다 치더라도 황후로서는 무측천에 온갖 성의를 다했는데 결국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경계하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청말() 광서연간 캉유웨이와 량치챠오 등 개화파는 광서제의 지지 아래 변법자강이라 하여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그러했듯 뜻만 높았지 어떠한 세력기반이 없던 그들인지라 보수파들의 반발에 대항할 수단이 없었다. 변법은 지지부진하고, 심지어 보수파의 거두인 영록이 광서제를 폐하려 한다는 소문까지 도는 지경에 이르니 캉유웨이 등 유신파로서도 실질적인 무력을 소유할 필요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위안스카이였다.

 

위안스카이는 원래 영록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러나 유신파가 광서제의 신임을 얻고 있고, 만의 하나 유신파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유신파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될 터이니 돌아가는 형세를 보아 유신파에 붙는 것도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캉유웨이의 추천으로 직접 황제인 광서제와도 대면할 기회를 얻었으니. 하지만 그는 교활하게도 캉유웨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면서도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만의 하나를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광서제는 생각 이상으로 무능하고 무기력했으며, 유신파는 뜻만 높았지 무력했다. 차라리 자희태후 - 서태후의 편에 서는 것이 앞날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시 이때도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속내를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유신파가 득세하고 있는데 굳이 유신파에 등을 돌리기보다는 유신파와 계속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그 깊숙한 기밀을 입수한 다음 그것으로서 더 비싼 값에 자희태후에게 자신을 팔아먹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왔다. 1898 9 18일 유신파의 한 사람인 담사동이 비장한 표정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가 털어놓은 내용은 위안스카이가 바라던 바로 그것이었다. 날을 잡아 거사를 일으켜 영록 등 보수파를 몰아내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더욱 강력하게 변법을 추진하자. 위안스카이는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고 오히려 비분강개하여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웃으며 그 말에 동의하는 척 보이던 위안스카이는 담사동이 돌아가자마자 바로 영록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희태후를 유신파가 유폐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청왕조에 있어 마지막 근대화의 기회였을 무술변법은 위안스카이의 단 한 번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자희태후에 의해 유신파 전원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완전히 무산되게 되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이후 군부의 실력자로서 승승장구하다가 광서제를 이은 선통제를 폐위시키기에 이르니, 비록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좌절되었지만 그 한 번의 배신의 댓가로 온갖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누렸다 할 수 있겠다.

 

 

일제강점기 구일본제국은 조선의 지식인들에 대해 "민족개조론" "자치론"으로 접근하여 회유했었다. 민족개조론이란 지금의 조선인은 한참 자질이 부족하니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우치자는 것이고 -브나로드 운동 역시 그런 차원에서 총독부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측면이 있었다- 자치론이란 조선인이 스스로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을 때 자치를 시켜주겠다고 하는 약속이었다. 실제 여기에 넘어간 자들이 많았는데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등등, 하여튼 당시 조선의 인물이라 할만한 이들은 죄다 여기에 넘어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일신의 영화를 추구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듣기에 얼마나 좋은가? 민족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자치를 얻어낸다, 일본제국주의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선민족을 위해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다. 명분으로서 이보다 훌륭한 것은 없었다. 일제강점기 말 독립운동을 하던 지식인 가운데서까지 친일파가 양산되었던 것은 그러한 명분과 현실에 힘입은 바 컸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본은 그러한 자칭 민족개조론자들의 바람에 응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한 마디로 헛꿈 꾸었다 할 수 있겠다. 그 헛꿈을 위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총알받이로 보내고 성노예로 보내고...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요체는 한 마디로 표리부동이다. 겉과 속이 다르게 하는 것이다. 기쁠 때는 울고 슬플 때는 웃고 화날 때는 친한 척하고 기분이 좋을 때는 화를 내고, 그러다 보면 상대는 이쪽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게 된다. 그러면 그 오해하는 틈을 타 상대가 전혀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할 수 있다. 성동격서가 겉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상대를 속이는 것이라면 소리장도는 작은 변화로서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소리장도는 따로 예를 들기도 애매한 것이 원래 역사상 정치인이나 외교관들이 가장 즐겨 써 온 것이 소리장도였다. 근세 유럽에서는 기호학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당시 치열하던 국제외교전 아래에서 서로 교환하던 서신이나 문서 등에 표기된 어휘나 단어들에 대해 그 내밀한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예를 들어 유감이라 하면 그 유감이 무슨 뜻인가? 통석의 념이라 할 때 그 통석은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일까? 전략적동맹관계라는 건 실질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때 상대가 이쪽의 정치인의 어깨를 팔로 감싼 것은 어떤 의도에서 한 행동이었을까? 힘으로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니 다른 수단으로 상대를 이쪽이 의도한 바에 따라 움직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상대의 힘을 줄이고 이쪽의 힘을 늘리는 외교이고, 외교에서 필요한 것은 가장 첨예한 고도의 언어다. 말로 하는 언어만이 아닌 행위로 보여주는 언어까지 포함한 언어의 격전장이 당시 유럽의 외교무대였다. 그러한 환경에서 나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상대로 하여금 이쪽의 의도를 오해하도록 만드는 언어기술은 발달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구축하는 학문 역시 그에 따라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과거 외교문서상의 그러한 모호성과 자의성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던 것을 거울삼아 외교문서에 있어 그 명확성을 첫째 조건으로 들고 있다. 일단 한 눈에 봐서 읽히는 뜻이 그 의도하는 본래 뜻이며 모든 것은 그것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언어라는 것은 여전히 많은 부분 모호하고, 문서로 확정하기 전이라면 그 말과 행동은 더욱 다양하고 은밀한 의도들로 인해 한층 모호해진다. 그래서 현대의 외교전에 있어서도 그 모호함 속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것을 얻어낸다고 하는 기본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하긴 어디 외교에 있어서 뿐이겠는가? 계약을 맺을 때도 마찬가지다. 들을 때야 얼마나 좋고 황홀한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만 듣고 있자만 무슨 자선사업이라도 하러 나온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계약을 맺고 나면 내용은 전혀 달라진다. 듣지 못했던 이야기, 혹은 흘려들을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렇게 모호하게 지나친 것들이 상대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니까. 계약한 나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헐어가며. 일단 사기이기는 한데 그것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하면 기술이니.

 

그러고 보면 선거야 말로 소리장도의 가장 구체적인 예가 되겠다. 선거에 나온 후보치고 유권자를 위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며, 일 잘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당선되고 나면 "어디 국회의원에게 감히!"라는 말이 당당히 나온다. 그리 굽신거리며 한 표 달라고 하고서는 당선되고 나면 당선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십분 활용하여 도리어 유권자를 억누르고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던가? 알면서도 매번 당하는 자체가 그러라고 아예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란 그대로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웃는다면 분명 웃는 의도가 있다. 만일 웃어야 할 때가 아닌데 웃고 있다면 그 뒤에 다른 음험한 생각이 있는 것이다. 결코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닌데 고개를 숙이고 있다면 그것은 뒤로 이를 갈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다는 뜻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가 친한 척 한다면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하기 위함일 터이고. 참 세상살이 각박하다고 하지만 그만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라면 더욱 사람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서 한 번 더 보고 더 듣고 더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나 하나 손해 보는 거야 그저 나 하나 잘못 판단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이 사기를 당해 직장을 잃고 재산을 잃으면 그 가족은 거리로 나앉게 된다. 회사 사장이 섣불리 사람을 믿고 일을 처리하다 사기를 당해 손실을 입으면 그 손실은 결국 그 직원과 주주와 사회 전체에 미치게 된다. 하물며 한 나라를 책임진 입장에야. 한 나라의 외교를, 한 나라의 국방을, 한 나라의 모든 실무를 책임진 입장에서야. 그래서 누군가의 속임수에 넘어가 손해를 입게 되면 그 피해는 또 얼마일 것이며 누구에게 돌아갈까?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하고, 신중하지 못해 넘어갔다면 그 자체가 자질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불신이라 할 수 있는데, 워낙 세상살이가 그렇다. 누구나 이익을 구하려 하고,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이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자신을 감추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그렇게 서로서로 가면을 쓴 채 속고 속인다. 아수라가 18층 지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인간의 세상에 아수라는 존재한다. 바로 그 아수라로의 길이자 그 아수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소리장도인 것이다. 병법삼십육계의 열 번째 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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