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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자화상(Self portrait)’, 1951년, 캔버스에 유채, 14.8x10.8cm. 위 사진은 아래 사진의 부분도
한국전쟁 당시에 그린 ‘자화상’은 황금빛 들녘을 가로지르는 붉은 길을 따라 세련된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온 신사를 앞세우고 있다. 발끝을 쫓아온 강아지도 있고, 머리 위로 새들도 날아다니지만 그는 외롭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 칭송받는 이 황금들판은 전쟁통에 피폐해진 현실을 떨치고자 작가가 택한 반어적 풍경이다. 다가올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작가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은 포탄이 넘나드는 하늘에 ‘우리 네 식구’를 닮은 까치를 그려넣어 다 같이 만날 날을 기약했다. 장욱진은 전쟁의 아픔과 불안과 혼란을 모조리 그림 안으로 숨겨 넣었다. 피폐하고 궁핍한 전쟁통에 예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법, 희망을 담았다.
배경도 그렇거니와 한껏 차려입은 주인공의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멋쟁이들의 필수품인 우산과 모자가 양손에 들렸다. 멋 부리고 나선 팔자걸음의 그가 배우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이 호기로운 모습은 어쩌면 희극배우의 연기일지 모른다.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화가는 해학적으로 표현했고 멋을 부려 두려움을 지웠다. 동시에 양복 차림은 토속적인 농촌 배경에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즉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근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시대정신이 투영된 성찰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다. 시대를 견뎌낸 젊은 화가의 고뇌가 처절하게 빛난다.
1950년 6월 25일 비극이 시작된 그날
1951년 전쟁 중에 그린 '자화상'. 부산에 피난 갔다가 충남 연기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그린 것이다. 멋진 연미복 차림에 콧수염이 있는 사내가 황금들판의 외길을 걷는다. 전쟁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이 사람을 자화상이라 불렀다. 일종의 정신승리랄까. "자연 속에 나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고독은 외롭지 않다." 그가 이 작품을 말하며 한 이야기다.
✺ KBS1 <예썰의 전당> [36회] <나의 길을 가련다 – 장욱진 화백>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는 단순한 그림을 추구하며 독보적인 ‘그림 외길’을 걸었던 화가, ’장욱진‘ 1917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격동의 한국사를 겪은 장욱진. 하지만 그는 혼탁한 세상사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그림 외길’을 걸었다. 또한 평생 “나는 심플하다”를 외치며 최소한의 크기, 최소한의 표현으로 단순한 그림을 그려냈다. 예썰 박사들과 함께 ‘심플함’으로 한국적 추상화의 새 길을 열었던 거장, 장욱진에 얽힌 흥미로운 예썰을 풀어보자!
최불암 선생님도 장욱진 화가의 작품을 모델로 연기에 많은 응용을 하였다고 증언하고 계신다.
장욱진, '얼굴', 1957년 - 넘치는 것은 덜어낸는 심풀함
○ 일제의 억압의 시대, 자유를 꿈꾸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 문일석(文一石) 작사, 손목인(孫牧人) 작곡의 민요풍 가요이다.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인 이난영(李蘭影)이 19세 때 부른 노래로 1935년 9월에 오케 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싱글곡이다. 노래 가사의 내용 때문에 금지곡으로 지정 되었다.
◇ 목포의 눈물(노래 이난영)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음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 삼 석 三
◦ 백 잣나무 栢
◦ 연 연못 淵
◦ 원 원할 願
◦ 안 편안할 安
◦ 풍 바람 風
"비워내기, 단순하게 살기. 말은 쉽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것 아닐까요. 우리는 항상 무엇이든 가득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죠. 이럴 때 장욱진 화백의 극단적인 단순화는 참 오묘하게 다가옵니다. 복잡다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면 장욱진미술관에 가보시길 권합니다. 잠시의 여정이 삶에 들숨 같은 쉼표로 다가올 겁니다."
- 정우철의 <미술관 읽는 시간> 중에서
장욱진, ‘나무와 새(Tree and Bird)’, 1957년, 캔버스에 유채, 34x24cm.
"나는 심플하다.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적어도 교만은 겸손보다는 덜 위험하다. 죄를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소탈은 쓸데없는 예의나 격식이 없어서 좋다."
-장욱진, 1974년의 메모 '새벽의 세계' 중에서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해 내세우는 나의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 번 이 말을 큰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다."
- 장욱진의 말 중에서
장욱진, ‘가로수(Roadside Tree)’, 1957년, 캔버스에 유채, 34x40cm. - 단순함이 가져다 주는 평화
장욱진, ‘모기장(Mosquito Net)’, 1955, 캔버스에 유채, 21.6x27.5cm.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올라와 닥친 가난. 욱진 가족은 명륜동 부근 전셋집만 20여 차례 옮겨 다니며 생계를 위해 애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내는 혜화동에 서점(동양서림)을 차리고, 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대우교수로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천성은 교육자가 아닌 그림을 가지고 노는 '그림쟁이'였다. 게다가 서울은 예전과 달리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들로 가득 찬 바쁘고 시끄러운 도시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의 천성은 문명이 아닌 자연에 있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천성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부조화에 따른 고통의 크기만큼 늘어만 가는 것은 주량이었다.
"나는 심플하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
1960년, 교수 생활 6년 만에 욱진은 교수직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야말로 취화선의 삶을 살기로 한다. 재물, 성공, 명성, 명예 등 모든 속세의 욕망을 비우기로 한다. 오직 그림과 술만을 취하는 '심플'한 신선의 삶을 살기로 한다. 그런 욱진의 이상향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 바로 <모기장>이다.
역시나 크게 그릴 욕심 없는 A4 한 장보다 작은 그림. 남에게 "잘 그렸다"는 말을 들으려는 욕심이 없는 그림. 투박한 화면을 가득 채운 심플한 단칸방 집. 재산이라고는 달랑 밥그릇 하나, 요강과 등잔, 그리고 모기장뿐이다. 그 심플한 살림살이를 장난치듯 공간에 새겨두고 벌러덩 누운 아이. 그 아이의 쭉 뻗은 다리는 너무나 편안해 보인다. "난 무심(無心)해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누워 있는 지금을 흠뻑 즐겨요."라고 말하는 듯한 아이의 얼굴은 <독>에서 보았던 까치의 그것을 닮았다. 행복은 채운 곳이 아닌 비운 곳에 있다고 말하는 아이, 모두 비워 심플하다. 그리고 이런 욱진의 깨달음이 담긴 그림 속에서 삼국시대 이후 한민족의 정신세계 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붓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그 천자가 게송으로 붓다께 물었다.
아련야의 비구는
비고 한적한 곳에 머물며
고요히 청정한 행을 닦고
한 자리에서만 먹는데도
무슨 인연 때문에
얼굴색이 특히 선명합니까
붓다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지나간 것에 근심이 없고
오지 않은 것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에 얻은 것을 따르고
바르게 알며 새김에 매어 지니고
먹는 것도 새김에 매기에
얼굴색이 늘 곱고 윤나네
-<잡아함경(雜阿含輕)> 제36권 제995 아련야(阿練若)
- 방구석 미술관2 (조원재, 블랙피쉬), p. 194~197
장욱진, ‘소녀’, 1939년, 판지에 유채, 3×014.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동경제국대학교에 입학 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한 작품으로, 모델은 고향 마을에 살던 산지기의 딸이였다. 고향의 향수가 느껴지는 이 소녀의 초상화를 그는 전쟁 중에도 지니고 다닐 만큼 소중히 여겼다. 자유를 향한 목마름이 묻어난 작품이다.
장욱진, ‘나룻배’, 1951년, 15x30cm, Oil on Canvas, 이건희 컬렉션.
✵ 예썰 하나.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천진난만함, 화가 장욱진의 순수한 예술 세계! 장욱진이 ‘나는 심플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처럼, 그의 작품에도 이러한 철학이 잘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나무와 새’라는 작품은 30cm 남짓한 크기의 캔버스에 나무, 새, 아이 등의 소박한 소재를 단순하게 그려놓은 것이 특징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그린 것처럼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이 묻어나는 장욱진의 작품들. 그의 그림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있을까?
장욱진, ‘공기놀이’, 1938년, 65.5x80.5cm, 국립현대미술관. - 억압의 시대를 버터내며 느꼈던...
장욱진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들이 쉬는 시간 동안 공기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투박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향토색론과 맞닿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얼굴을 단순화해 묘사하며 단순화하고 세부묘사를 과감히 색략한 것도 눈에 띈다. 이 그림은 조선일보에저 주최한 ‘제 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사장상을 받은 작품이다. 장욱진이 처음 전람회에서 상을 받은 작품이며 동시에 이름이 처음으로 크게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거금인 100원의 상금을 받았는데, 이 돈으로 가족에게 선물을 주며 그림을 그리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장욱진, ‘독(Jar)’, 1978년, 캔버스에 유채, 30x24cm. 경매 시작가 6억5천만원
작가가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 독립하였으나, 좌우 이데올로기에 갇혀 혼란스러운 시대에도 '예술가는 표현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과 같이 신사실파 활동을 했다. 위 작품은 민족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로 승화시키려했던 바로 작가정신이 구현된 것이다.
‘독이 나인가. 내가 까치인가.’
장욱진, ‘식탁’, 1963년, 회벽에 유채, 56x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모든 탐욕을 훌훌 벗고 오직 예술만을 추구하는 외골수 화가, 무욕(無慾)의 경지에 있는 욱진을 그대로 투영한 작품이 <식탁>이다.
캔버스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 시멘트 벽면에 그린 것이다. 무언가를 배불리 먹고 싶다는 욕심조차 없었던 화가 욱진은 부엌 벽에 <식탁> 한 상을 그려 놓았다. 수저, 칼, 포크 등의 단촐한 식기를 둔, 과일과 마실 것이 소박하게 차려진 식탁. 광어 한 마리가 어느새 화가 뱃속으로 들어와 뼈만 깔끔하게 남아 있다. 화가는 이를 배불리 먹은 것으로 치고 만족한다. '여기서 무엇을 더 뺄 수 있을까?', '여기서 무엇을 더 고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제된 그림. 더불어 아이가 장난친 듯 보이지만 너무나 참신하고 치밀하게 짜인 구성은 보고만 있어도 풍성함이 느껴진다. 그만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와 구성 감각이 돋보이는 무욕(無慾)의 시멘트 벽화이다. 심플한 정신, 심플한 삶을 실천한 화가의 그림은 이토록 아이가 낙서한 듯 심플하다.
"탐욕에 물들어 집착하면 마음을 가려 장애하기 때문에 자신을 해치기도 하고 다시 남을 해치기도 하며 다시 양쪽을 해치기도 해서 (중략) 늘 근심과 괴로움을 품고 느낍니다."
- <잡아함경> 제35권 제973 전타
그림에서 '탐욕을 불태워 고통을 소멸시키라'는 붓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인간을 근심과 괴로움에 빠지게 하는 근원, 욕망을 탐하는 것. 욱진은 속세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을 모두 활활 불태운 채 무욕의 삶을 살고자 평생 그림을 그리며 수행했다.
- 방구석 미술관2 (조원재, 블랙피쉬), p. 205~207
장욱진, ‘술독’, 1973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강변풍경’, 1987년, 캔버스에 유채, 21.3x45cm. - 도시를 벗어나 찾은 자연
“저 멀리 노을이 지고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적막한 자연과
쓸쓸함을 누릴 수 있게 마련해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1976
장욱진, ‘하햔집’, 1969년, 캔버스에 유채. 남양주 덕소에 살던 시절(1943~1974) 뾰족지붕 한옥을 형상화했다.
장욱진, ‘아이가 있는 마을’, 1973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한솔문화재단.
장욱진, ‘앞뜰. 마당’, 196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언덕 위의 가족’, 196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월조月鳥’, 196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 예썰 둘. 그림에 몰두하기 위해 자연으로 간 장욱진, 그가 ‘그림’으로 한 끼를 때우는 방법은? 심플한 건 그의 작품만이 아니었다. 장욱진은 자기 작품처럼 삶도 ‘심플함’을 추구했다. 삶에서도 거추장스러운 것은 덜어내야 중요한 것만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결국 1960년, 장욱진은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욕심, 명예를 모두 벗어던지고 순수한 자연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을 택한다. 이후 자연에서 끊임없이 비워내며 심플한 삶과 일맥상통한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이런 심플한 삶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식탁’이다. 부엌 벽에 한상차림을 그린 장욱진은 그림을 다 그리고 “이걸로 식사 한 끼를 때우자”라고 말했다고. 작품만큼이나 심플했던 장욱진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장욱진, ‘진진묘(眞眞妙·아내 이순경 여사의 법명)’, 1970년, 41x32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진진묘(眞眞妙·아내 이순경 여사의 법명)’, 1970년, 41x32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금동 연가7년명 여래입상(金銅 延嘉七年銘 如來立像, 국보 제11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비교 작품)
1970년 그린 '진진묘'는 새벽에 예불 드리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진진묘는 이순경의 법명이었다. 서울옥션 경매에서 5억6천만원에 낙찰된 그 그림이다. 1974년 '세대' 잡지 6월호에 그의 글 <덕소화실에서 사는 나의 고백>이 실려 있다.
○ 불상 손의 의미
“시무외施無畏” 두려워하지 말라.
“여원인與願印” 소원을 들어 주겠다.
"창조된 생명이 분만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리는 일만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갈파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말처럼 꾸준하게 추구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고통스러워하며 또 배우는, 그러면서도 그 괴로움에 지치지 않고 그 괴로움에 오히려 감사하는데서 예술가의 생활은 충만하리라 믿어진다."
진진묘(眞眞妙)는 무슨 뜻일까. 법명으로 받은 것이니 굳이 뜻을 밝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묘(妙)는 택멸(擇滅) 혹은 열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3계(욕계,색계,무색계)를 벗어났기에 온갖 근심이 없는 것(眾患無)을 의미한다. 중환무의 수행이 바로 묘(妙)이기도 하다. 묘는 선(善)을 뜻하기도 한다. 묘행의 반대는 악행이다. 밝은 달과 같이 환한 깨달음을 묘월삼매(妙月三昧)라고 한다.
어렵게 풀 것 있는가. 참,참,묘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이나 진리라고 부른다면, 그 부처님의 진리는 참으로 묘하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수행을 하면서, 문득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들을 의미한다면, '참으로 묘하고 참으로 묘하다'라는 의미도 짚인다. 저토록 깊은 불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아내가, 장욱진에게도 참으로 참으로 묘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장욱진 화백의 1973년작 '진진묘'. 일반적으로 알려진 1970년작 '진진묘'와는 전혀다른 화풍이다. 장 화백 장녀 장경수씨는 새벽마다 아버지는 수행하듯 그림을 그리시고 어머니는 기도를 하셨다며 기도하는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라고 말했다, -장욱진미술문화재단.
통도사 암자 앞에서 만난 스님이 “뭐 하는 사람이오?” 묻자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며 선문답을 주고받다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받은 일화에도 등장하듯 장욱진은 까치를 즐겨 그렸다.
까치 혹은 참새로도 보이는 줄지어 나는 4마리 새를 두고 부부와 두 아이, 혹은 네 명의 딸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지만 꼭 누구를 몇이나 그린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화가는 식구가 다 모여 같은 곳을 보며 한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했다.
네 가족이 들어앉자 어깨 돌리기도 힘들 만큼 꽉 차버린 작은 집 주변이 온통 붉은 것으로 보아 해질녘 노을을 같이 바라보는 모양이다. 동글동글한 식구들 얼굴이 태양처럼 붉다. 하얀 옷을 입은 아내 옆으로 좀 큰 아이는 아들, 빨간 원피스 차림의 작은 아이는 딸인 성 싶다. 뒤로 나앉은 콧수염 난 아빠는 장욱진이 분명하다.
장욱진, ‘가족(A family Portrait)’, 1973년, 캔버스에 유채, 17.9x25.8cm, 현대화랑.
장욱진, ‘가족’, 1978년, 명륜동 시절(1979), 캔버스에 유채, 17.5×14cm
장욱진 화백의 가족사진.
장욱진, ‘가족’, 1979년, 캔버스에 유채, 1953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장욱진, ‘팔상도(부처님의 탄생부터 열반까지 묘사한 작품)’, 1976년,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 '사찰(A Temple)', 1977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 예썰 셋. “장욱진과 살면 아내도 OO이 된다?”, 화가 남편이 그림으로 그린 ‘아내’의 모습은? 고집스러우리만큼 ‘심플함’을 추구하며 그림 외길을 걸었던 장욱진. 그가 이처럼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라는 든든한 길동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욱진의 아내 이순경은 그림만 그리는 장욱진 대신해 생계를 꾸려나갔고, 마음을 다해 남편의 신념을 지지했다. 장욱진은 그런 아내를 존경했고, 그 마음을 담아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아내를 화폭에 담았다는데. 모두를 놀라게 한 그림 속 아내의 모습은 어땠을까?
장욱진 화백(1919-1990)과 부인 이순경 여사(1920~2022, 역사학자 이병도의 장녀),
1970년대 경기도 덕소 화실에서.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 이순경 부부, 관어당에서/ 장욱진 화백 화실/ 장욱진 화백, 용인 가옥에서.
✵ 장욱진(張旭鎭, 1917-1990) 서양화가는 본관은 결성(結城). 충청남도 연기 출생.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일본 동경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 입학, 유화를 전공하고 1944년에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졸업 직후의 작품인 「마을」과 「독」(1949년)은 한국인의 삶의 본색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정서를, 농촌의 여인상과 쌀독 같은 대상을 특이하게 단순화시켜 주제로 삼은 내용이다.
일찍부터 이러한 특징은 그 뒤로 더욱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그래서 동심적 상상력과 순수한 표현 감정이 내재된 시골 생활과 그 자연환경을 주제로 하는 일관된 작업으로 추구되었다. 작품들은 거의가 작은 화면에 지극히 밀도 있는 선묘(線描: 선으로만 그림) 윤곽과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독특한 색채 표현의 이야기 그림으로 형상화되었다.
마치 아동화 같고 동화책의 그림 같기도 하면서 표현의 세련성과 조형적 구성의 치밀성으로 독특한 화풍을 보여 주고 있다. 구체적인 주제 요소로는 시골 환경의 초가집·기와집·남녀노소·강아지·소·새·산·나무·해와 달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을 자유롭게 또는 동심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 장욱진 예술의 전형을 성립시켰다.
한편, 그러한 시골의 삶의 이야기와 동심적인 자연애의 그림 외에 붉은 벽돌 구조의 양옥과 도시 일각 그리고 자동차 또는 자전거가 나타나 있는 화면도 그렸다.
작가의 어릴 적 체험과 어떤 추억이 주제가 된 듯한 작례(作例)로는 「자동차 있는 풍경」(1953년)·「자전거 있는 풍경」(1955년) 등이 있다. 다른 시골 풍정의 작품에는 「모기장」(1956년)·「까치」(1958년)·「나무가 있는 풍경」(1965년)·「하얀 집」(1969년)·「두 아이」(1973년) 등이 있다.
1947년에서 1952년까지 그는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비사실주의 지향의 현대적 창작 이념으로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전 활동을 하였다. 국전 추천 작가·초대 작가·심사 위원 및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이 강하여 기인적인 면모와 일화도 많이 남긴 예술가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서울 근교의 시골로 거처를 옮기며 제작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 신문·잡지의 청탁으로 예술적 사색과 자연 찬미의 짧은 글도 많이 썼으며, 1976년 그것들을 묶은 수상집 『강가의 아틀리에』가 출판되었다. 1986년 중앙일보사 제정 중앙예술대상을 수상하였다.
장 화백의 결혼은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맏딸로 서울에서 출생한 이순경 여사(1920~2022)와 일본 유학 중이던 장 화백과 1941년 결혼했다. 그림에만 매달린 가난한 화가의 아내로서 서울 혜화동에 서점 ‘동양서림’을 차려 운영하는 등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이순경 여사는 장 화백의 작품 ‘진진묘(眞眞妙)’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진진묘’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이 여사의의 법명이다. 평생 그림에만 매달린 자신,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장 화백은 불경을 외거나 새벽 기도를 하는 모습의 ‘진진묘’ 작품 3점으로 담아냈다. 작품 전시회 날짜를 결혼기념일이나 이 여사의 생일 전후로 정하기도 했다.
여사는 장 화백의 마지막 화실이 있던 경기 용인시 마북동에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장 화백의 예술세계를 알리는 데 힘써왔다. 백수(白壽)를 맞은 2019년에는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한 글들을 엮어 회고록이자 에세이집 <진진묘>를 펴내기도 했다.
장욱진 화백의 명륜동 시기(1975~1980), 사진 강운구: 현대화랑 제공
장욱진, '과거, 현재 미래는 마음속에만 있다(Triple world mind only)',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마음이 멀어질 때 선자리도 멀어진다(Mind afar earth remote)',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선 아님이 있는 가(What is not zen)',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번뇌가 바로 지혜이다(Trouble is wisdom)',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나날이 좋은날(Each day good day)',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천둥과 같은 침묵(Thunderous silence)', 1995년, 목판화, 36x2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놀이 지고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장욱진의 말 중에서
장욱진, ‘자동차가 있는 풍경’, 39.2x33.0cm.
장욱진, ‘자전거가 있는 풍경, 1955년.
장욱진, ‘툇마루’, 1974년, 16.5x21.8cm, Oil on Canvas.
장욱진, '가족', 1976년, 캔버스에 유화물감, 13.7×17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나는 나로서 족하니 남과 비교하지 마라. 비교하면 갈등과 열등의식이 생기고 자아가 망가진다. 그림이란 자아의 순수한 발현이어야 하는데, 비교하다 보면 절충이 돼 나 자신은 사라지고 만다. 남을 인정할 것은 다 인정하고 자기는 자기로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고 나를 지켜라. 자유에로의 길이 거기 있다."
- 장욱진의 말 중에서
장욱진, ‘무제’, 1975년, 갱지에 매직, 36.2x24.2cm, 개인 소장.
장욱진, ‘나무 위의 아이’,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4x25.8cm, 현대화랑.
장욱진, ‘닭과 아이(A Cock and a Child)’, 캔버스에 유채, 41x32cm, 1990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평상(A Wooden Bed)’, 캔버스에 유채, 22x15.5cm, 1974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쌍수(雙樹), 쌍희(雙喜)’, 1982년, 한지에 수묵, 68.3x35.2cm.
장욱진, ‘두 얼굴’, 1959년, 캔버스에 유채, 35x28cm, 개인소장.
장욱진, ‘산(A mountain)’, 1986년, 캔버스에 유채, 38x22.5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산마을(Mountain Village)’, 1989년, 캔버스에 유채, 37.7x37.7cm.
장욱진, ‘무제(Untitled)’, 1988년, 캔버스에 유채, 45.7x35.5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장욱진, ‘야조도(새와 나무)’, 1961년, 캔버스에 유채.
[나의 길을 가련다 – 장욱진] 단순한 그림을 추구하며 독보적인 그림 외길을 걸었던 화가 장욱진. 그는 1917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격동의 한국사를 겪었지만 혼탁한 세상사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그림 외길을 걸었다. 또한 평생 “나는 심플하다”를 외치며 최소한의 크기, 최소한의 표현으로 단순한 그림을 그려냈다. 심플함으로 한국적 추상화의 새 길을 열었던 거장, 장욱진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었다.
장욱진, ‘구름 새 집’, 1973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장욱진, ‘무제’, 1977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호도(虎圖)’, 1975년.
장욱진, ‘까치’, 195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장욱진의 법명 비공(非空)은 1977년 여름, 통도사 극락암에 가서 하루를 묵었다. 암자에 있던 경봉스님이 물었다. "뭐하는 사람이신고?" "까치 그리는 사람입니다." 경봉이 그림을 들여다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입산했으면 일찌기 도(道)꾼이 됐을 사람이로고." "스님, 그림 그리는 일도 같은 길입니다." 팔십을 넘겼던 경봉은 장욱진을 웃으며 지긋이 바라보았다. "쾌(快)하도다! 이때 경봉이 장욱진에게 비공(非空)이란 법명을 건넨다.
張非空居士鵲鵲 장비공거사작작
無我無人觀自在 무아무인관자재
非空非色見如來 비공비색견여래
장 비공거사가 까치되어 짖는구나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그 스스로 있음을 보노라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니 여래를 보는 듯
까치를 잘 그린다고 '작작鵲鵲'이라 했으니, 경봉의 위트에 장욱진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마다 작작 까치를 넣어서 짖으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장욱진, ‘누워있는 사람’, 1979년, 판화.
장욱진, ‘부엌과 방’, 1973년, 22x27.5cm,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 ‘붉은 소’, 1950년, 캔버스에 유채.
장욱진, ‘황톳길’, 1989년, 캔버스에 유채, 46x46cm, 현대화랑.
장욱진, '산속의 집', 1983년, oil on canvas, 27.3×19cm
장욱진, ‘밤과 노인The Night and an Oid man’, 1990, 캔버스에 유채, 41x32cm, 현대화랑.
자신을 그린 듯한 마지막 작품 '밤과 노인' 작품은 어디 숨 좀 쉴 곳 없나 하고 찾아나서던 때에 용인 구성면 마북리의 집을 발견했다. 1986년 봄에 용인으로 이사를 갔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3평쯤 되는 작업실. 그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그림을 끝없이 그렸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회화에 있어서 회화성은 30호 이내여야 한다.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진다. 또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 한 면을 지배하지 못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세대' 1974년 6월호)
1990년 12월27일. 72세. 그가 그해에 그린 '밤과 노인'은 맑은 밤의 허공을 산책하는 듯한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마북리에서 그는, 어느 달밤 자신의 아름다운 유체이탈(幽體離脫, llang: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 분리되는 일.)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놓았다. 불세출의 천재화가는 떠나고, 그림이 남아 마치 영상처럼 한 시대의 광휘와 열광을 증거한다.
"나는 그림을 그린 죄밖에 없다. 나는 가족을 사랑했다. 다만 그것을 미술작품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렇게도 표현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림 그리는 죄와 술 먹은 죄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은 없다. 그림과 술과 나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세대' 1974년 6월호)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 쓴 이 서액(書額)이 장욱진 고택 양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 장욱진의 필체로 씌어져 걸려 있었다. 이도 아내에 대한 마음이 묻어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일제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 세상 일들이
꿈같고 물무늬 같아서
이슬처럼 사라지고 번갯불처럼 흩어지는 것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와 같음을 살피는 것.
장욱진이, 금강경의 사구게인 응작여시관을 쓴 것은 아내 이순경의 금강경 모임을 지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응작여시관은 그 모임의 스승이었던 백성욱 박사가 일생을 통해 전한 금강경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꿈같고 물무늬같고 이슬같고 번갯불 같은 것, 그중에 '잠깐' 아닌 것이 있는가. 이와 같은 실상을 잘 살피는 것.
장욱진, ‘가족’, 1955년, 일본 오사카 근교 한 소장가의 아틀리에에서 발견,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장욱진, '가족도 (A family Portrait)', 1972년, , 캔버스에 유채, 7.5x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1955년 '가족'작이 일본인에게 팔린 뒤 화가가 아쉬운 마음에 이 그림을 다시 그렸다고 전해진다
장욱진이 1955년에 그린 작품이 약 60년 만에 일본에서 발견돼 한국으로 돌아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장욱진의 작품 ‘가족’을 일본 오사카 한 소장가의 아틀리에 낡은 벽장에서 발견해 미술관 소장품으로 수집했다고 2023년 8월 16일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장욱진이 그린 가족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생 가족 도상을 그린 장욱진 가족도의 전범(典範)이 되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덧붙였다.
‘가족’은 1964년 서울 반도화랑에서 열린 장욱진 개인전에서 판매된 뒤 행방이 불분명했다. 장욱진이 생애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매한 작품으로, 작품 대금으로 막내딸에게 바이올린을 사준 일화도 전한다. 그의 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이 작품을 기억하고 있었다.
배원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장욱진 회고전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당시 작품을 소장했던 시오자와 사다오(1911∼2003)의 아들 부부를 수소문했고, 오사카 근교에 있던 소장가의 아틀리에 벽장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작품을 발견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가의 아들 부부를 설득해 고국으로 작품이 돌아올 수 있게 됐다. ‘가족’은 보존 처리 과정을 마친 뒤 9월 14일부터 열리는 ‘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4. 네 번째 고백 :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
장욱진, ‘시골 풍경’, 1986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이 고미술의 도상 및 함의에 대한 인식이 깊을 뿐 아니라 옛 그림의 형식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하늘에 뜬 붉은 해, 가지만 뻗어 있는 나무, 그 위에 앉은 새의 조합은 고구려 고분 벽화인 각저총의 씨름 장면에서 발견되는 소재들이다. 동양 고전에서는 동쪽 바다의 해가 뜨는 곳에 신성한 나무인 부상수(扶桑樹)가 자란다고 한다. 또한 장욱진은 '張旭鎭'이라고 새긴 주문방인(朱文方印, 양각으로 새겨 글씨 부분이 붉게 나오는 네모난 도장)의 인장을 찍었다. 이 도장은 전각의 명인인 청사(晴斯) 안광석(安光碩, 1917~2004)이 새긴 것이다. 장욱진은 청사의 도장을 받고 찍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 그림을 빠르게 완성해 찍었다고 전한다.
장욱진, ‘차 달리는 아이’, 1981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둥근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주변 소품을 그려 넣었다.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둥근 나무 위에 집과 인물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구를 보는 듯하다. 나무 아래에서 차를 끓이고 있는 소년은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고사인물도에 자주 등장하는 전다(煎茶)의 동자를 연상시킨다. 윤필로 나무, 길, 집 등을 옅게 그리되 윤곽선을 생략했으며, 대신 유분 많은 채색이 번질 때 생기는 얼룩을 그대로 활용하여 각 사물의 형태를 완성했다.
장욱진, 풍경,1987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배경과 바닥을 다 생략하고 대상만을 간략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동양화의 기법적 특징을 유화에 적용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서양화지만 동양화의 몰골기법 즉, 대상을 선으로 묘사하고 채색을 가하는 방식이 아닌 붓질 만으로 형태를 묘사하여 보다 내밀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장욱진, ‘달맞이’, 1981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화면 양쪽으로 겹쳐진 언덕 위로 둥근달이 아련하게 떠 있고, 언덕 위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이 자연 속으로 환원된 듯 자유롭게 뛰놀고 있다. 언덕에 거꾸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 두 명은 실제 동산에 누워 달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사이로 동산을 오르는 강아지 한 마리가 화면에 재미를 더한다.
장욱진, ‘가족과 나무’, 1983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나무는 마치 먹으로 그린 듯 일필휘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짙은 녹색으로 그려져 나무의 강렬한 생명력이 유난히 강조된 그림이다. 나무 아래에는 초막에서 신발을 벗고 낮잠을 즐기는 이와 차를 다리는 동자가 묘사되어 한가로운 이상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장욱진, ‘무제’, 1984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한솔문화재단.
장욱진, ‘초당草堂’, 1975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낚시’, 1981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깊은 산골 풍경을 엷은 유화 물감으로 흐릿하게 포착한 산수화이다. 강물과 언덕의 지평선을 지그재그로 구획하며 뒤편의 둥근 산세를 겹치게 그려 넣어 산수의 깊이를 부여했다. 낚시를 하거나 언덕을 산책하는 전경 인물상과 지평선에 걸쳐진 후경 인물상의 크기를 다르게 해 원근감을 나타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과 멀리서 바라보는 시점을 혼용하여 공간감을 표현했다.
동아시아 전통회화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경물의 경계가 겹치도록 하여 삼단 구도를 이루며 수직 상승하는 산수화의 구도가 유사하다. 화면 곳곳에는 묽은 물감이 뭉쳐서 그대로 남아 얼룩이 남아있고, 캔버스 바탕의 올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은 동양화의 담채 기법과도 닮아 있다.
장욱진, ‘정자’, 1981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정자에 앉아 있는 장욱진에게 화가의 부인이 강아지와 함께 찾아오는 듯한 정겨운 장면이다. 하늘의 광활함과 시원한 해가 녹색으로 한 붓에 그려짐으로써 드넓은 자연 속의 한가로운 일상을 묘사하고 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란 사실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어선 장욱진의 독자적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장욱진, ‘누워 있는 아이’, 1974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화가가 덕소 화실에 걸어 놓고 감상하던 그림이다. 유화임에도 수묵 담채적 표현이 돋보이며, 대칭을 이루는 나무, 새, 집, 해, 아이, 개, 언덕 위의 희미한 능선이 조화를 이룬다. 왼편 나무 위의 새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누군가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새가 앉아 있는 나무가 휘어져 있어 그 기다림의 무게가 느껴진다. 아이는 태평스럽게 누워 있고 아이 옆의 강아지도 동요함이 없다. 언덕에 누워 자연과 일상의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은 관조의 미학을 담아내고 있으며,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을 느끼는 듯하다.
장욱진, ‘새’, 19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세 그루 나무’, 1982년, 종이에 유화 물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장욱진, ‘황톳길’, 198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1951년 <자화상>에서 보았던 황톳길이 다시금 등장한 작품으로 산을 가로질러 길을 낸 작품은 한국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붉은 길 혹은 땅의 요소는 장욱진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 중 하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황톳길이 더욱 선명하게, 또한 직선으로 뻗어있어 더욱 주목된다. 황톳길은 뒤편 산꼭대기의 천상(天上)의 마을로 가는 통로처럼 표현되어 그 길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장욱진, ‘닭과 아이’, 1990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민화의 특성으로 꼽히는 단순성, 해학성, 상징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화면의 정가운데 위치한 수탉은 이 그림의 주인공답게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동일한 굵기의 노란 윤곽선과 주황, 초록, 하양의 채색이 다양하게 배합되어 매우 장식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수탉의 모습은 윤곽선 없이 단색으로 깨끗하게 선염된 나무, 집과 대비된다. 여기에 상단에 달과 함께 배치된 인물이 하늘을 날며 하강하는 모습은 그림의 해학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장욱진, ‘풍경’, 19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전형적인 문인 산수화의 소재와 모티브를 취한 작품이다. 나무와 집, 학의 배치를 모두 사선 방향으로 설정한 구도가 재치 있다. 까치와 학의 다리가 수직으로 뻗어 있고, 산이 수평적으로 놓여 사선으로 그려진 사물들의 동세에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
최종태, ‘장욱진 초상’, 1990년, 종이에 파스텔, 개인 소장.
오수환, ‘장욱진 선생님’, 197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김정, ‘무제’, 1975년, 종이에 연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나무와 가족’, 1982년, 종이에 유화 물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장욱진, ‘나무와 산’, 1983년, 종이에 유화 물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옅은 바탕에 바람 속에 있는 듯한 나무와 그 곁의 검둥개, 나무 위 새 한 마리, 세 개의 산봉우리와 붉은 해를 그렸다. 작은 태양과 산의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지만 마치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그림처럼 느껴진다. 장욱진은 1980년부터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나무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특히 붓질의 빠른 속도와 즉흥성으로 인해 나무의 생동감이 두드러져 인상적이다. 불교 주제의 그림은 아니지만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듯 빠르게 몇 개의 선으로 그려 내는 선종 화풍이 감지된다.
장욱진, ‘나무’, 1983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집', 1984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간결한 화면 구성에서도 마치 캔버스에 먹의 농담을 조절하듯 가운데 나무의 표현을 진한 먹빛으로 강하게 그려내어 화면의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집의 묘사 역시 여타 다른 채색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집안 인물들의 포즈를 다양하게 그려 넣음으로써 이야깃 거리를 던져주며 시선을 머무르게 한다.
장욱진, ‘집’, 1989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있는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화면 하단의 대문에는 여인과 강아지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돌담이 있다. 담벼락의 곡선과 상단 양옆에 그려진 나무가 연결되어 둥근 원을 형성한다. 집 안쪽에는 팔작지붕, 맞배지붕의 건물 세 채가, 마당 한가운데에는 마주 보고 서 있는 닭 두 마리가 보인다. 장욱진은 검은색 물감과 테레핀유를 넉넉하게 섞은 다음 윤필의 빠른 붓놀림으로 담벼락, 건물, 나무의 형상을 그려 냈다. 동양의 모필 끝에 먹을 묻혀 휘호할 때 나타나는 농담, 태세, 비수를 활용했다.
장욱진, ‘호도虎圖’, 1975년, 종이에 유화 물감,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호랑이가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는 민담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1975년부터 장욱진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자신의 그림 속 호랑이를 가리키며 "옛날 호랑이는 아이를 재웠어."라고 말했다는 일화처럼, 장욱진은 민담으로부터 호랑이에 대한 모티브를 얻어 사람과 자연의 존재론적 동등성과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지향했다. 호랑이를 맹수가 아닌 인간과 함께 있는 친밀한 대상으로 묘사하는데, 이를 통해 인간과 동물(자연)의 융화와 공존을 소망하는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
장욱진, ‘호랑이와 아이’, 19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화면 옆에서 평면적인 나무 도상이 불쑥 튀어나오고, 그 아래로는 호랑이와 아이를 매우 크게, 클로즈업 시켜 그렸다. 구도가 특이할 뿐 아니라 호랑이와 아이의 표현 역시 매우 평면적이면서도 구불구불한 형태를 띠고 있다. 호랑이의 발톱이 유난히 날카로워 아이를 위협하는 듯하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순박하다.
장욱진, ‘도인’, 19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화면 가운데 두 노인이 앉아 있다. 왼쪽 노인은 다리를 모으고, 오른쪽 노인은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어 화면에 재미를 자아낸다. 화면 하단의 나무와 새는 한 쌍의 범주로 표현되어 상반된 속성이 대칭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 자연 정물들의 조화로움과 균형을 말하는 음양론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유화 물감을 칠하고 테레빈유로 지우는 과정을 통해 얇게 물들인 듯한 배경과 화면 상단에 멀리 보이는 문은 관념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장욱진, ‘산’, 1981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 '강', 1982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언덕, 상, 절벽, 나무를 다양한 시점으로 포착한 산수풍경화이다. 양옆 절벽과 그 위 정자와 소나무는 붓 자국 없이 두껍게 바른 진채(眞彩)로, 언덕과 배 위에 탄 어부는 번짐이 풍부한 선염(渲染)으로, 원경의 산은 옅은 호분과 가벼운 윤곽선으로 구사했다. 마치 한 폭의 문인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 작품의 실제 주제는 흐릿한 선과 채색으로 표현된 작품의 정중앙에 위치한 인물들이다. 비스듬한 배 한 척과 그 위에서 노를 젓거나 앉아 있는 인물상을 그려 넣어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이 넓은 강임을 암시한다.
장욱진, ‘풍경’, 197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명륜동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중앙에 둥근 나무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에 팔작지붕의 누정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상단에는 원경의 산세가 두 개의 단층으로 분리되어 길게 펼쳐지고, 그 위로 새들이 띠를 이루며 날고 있다. 장욱진은 산세를 그릴 때 붉은 기운이 감도는 고동색을 진하고 편편하게 바른 다음, 초록색의 가로줄로 구불구불한 산줄기를 표현했다. 이러한 율동감 넘치는 산등성이 표현은 고구려의 무용총에 그려진 수렵도 벽화와의 관련성이 엿보인다.
장욱진, ‘산수’, 1986년, 종이에 수채 물감,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산수', 1987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하단 언덕의 집과 정원, 중간의 나무 세 그루, 상단의 안개 낀 산 등 다양한 경물을 삼단으로 배치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구도나 소품들은 문인들이 향유하던 분재, 수석, 학을 소재로 삼았는데, 단순한 문인화의 제재라기보다. 오랜 기간 한반도에 전승된 기억과 추억의 '고전물'에 가깝다. 이것은 국립 박물관에 근무하는 동안 가까이하며 수용한 고미술의 모티브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면서 한국성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장욱진, ‘수안보 풍경’, 1986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장욱진은 1986년 초 잠시 넷째 딸이 살고 있는 부산의 해운대에서 머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탁 트인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벽지의 작은 화실을 떠올린 듯, 제목은 '수안보 풍경'으로 붙였으나 화폭에 담겨진 것은 해운대 앞바다의 풍경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동양화 모필의 '일필휘지'를 응용한 푸른 물결과 오륙도를 연상시키는 큰 섬은 장욱진의 다른 강 그림에서 보기 드문 요소들이다.
장욱진, ‘강 풍경’, 1988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강가의 정경을 물고기 두 마리와 배 한 척으로 표현한 해학적인 작품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강물은 여백을 주고 산과 강의 경계가 없는 공간으로 처리했다. 화면 가장자리를 황토색으로 구획하여 마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강가를 포착한 것 같은 시각적인 효과를 첨가했다. 두꺼운 윤곽선과 패턴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물고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유영하고 있어 그림에 활력을 부여한다. 반면 나머지 경물에는 번짐을 활용한 몰골법을 구사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장욱진, '풍경' 1984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유화임에도 마치 먹그림처럼 은은히 번지는 먹으로 나무를 표현했고, 그 위에 까치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능선이 넓게 이어진 거대한 산처럼 표현했다. 마치 까마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비유한 명말 청초 팔대산인(八大山人, 1624~1703)의 <팔팔조도,叭叭鳥圖>)처럼 장욱진은 거칠지만 자유롭게 사는 자신을 깊은 산속 까치로 표현한 듯 싶다. 나무 아래로 검둥개와 여인이 서 있는데, 쪽 진 머리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여인의 모습은 1980년대 종종 그린 여인 단독상의 도상과 닮아 있다.
장욱진, ‘풍경’, 1983년, 캔버스에 유화 물감, 개인 소장,
예썰의 전당 시사교양 프로는 하나의 예술 작품에는 예술가의 삶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상과 사회상이 담겨 있고, 그 때문에 예술가 개인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서 역사적, 미학적, 나아가 의학, 과학, 심리학, 경제학적 접근까지 다양한 감상법이 존재한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썰'을 푸는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박사들이 모여 예술 작품을 둘러싼 창의적인 감상법을 공유한다. 그리고 어제의 예술이 품은 '썰'을 통해 오늘의 시청자들에게 통찰과 위로를 전해주고자 한다.
출연: 김구라, 김지윤, 양정무, 조은아, 재재, 심용환
연출: 서재호, 김선희, 황지현, 박정연, 김용태, 노현우, 안효준, 장예솔
극본: 이주희, 정세영, 이미령, 김선영, 곽청흔, 김혜인, 이승후, 김솔빈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36회] 나의 길을 가련다 – 장욱진(2023년 1월 22일 22:30 방송)/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장욱진 미술문화재단/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
행복한 설 명절 보내세요 ❤️
이난영 가수의 목포의 눈물 잘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