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체육 시간, 달리기를 하다 그만 넘어지는 바람에 콧구멍에 모래가 들어간 것 같다며 투덜대고 있던 유노 씨가 마왕님에
게 온갖 애교를 부리며 콧구멍 좀 보아달라고 하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거실로 들어서자 한 남자가 소파 위에 편안히 누워 책을 읽
고 있었다.
“어? …이 집 주인인가?”
필립과 유노 씨 이후엔 내 집에 허락 없이 들어와 있는 사람을 봐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도둑’이 아니다. 특히 집 주인을 보
고도 당황하지 않는 저 성격이라던가… 삐뚤어진 안경을 쓰고 남의 집 소파 위가 마치 제 집 침대인 마냥 누워 껌을 질겅질겅 씹으
며 책을 읽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 오히려 도둑이 오면 차라리 반갑기라도 할까.
차라리 도둑이라면 제 일하고 도망이라도 가지, 눌러 붙지는 않을 거라는 도둑의 직업상, 어쩐지 도둑이 더 반가울 것 같아 난 일단 얼굴을 찌푸리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요….”
“마왕니믄?”
“예?”
주인이 왔건 오지 않았건 소파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남자. 열심히 씹고 있는 껌 덕분에 발음도 이상한 남자는 소파에 편안히 누워 집에 들어온 주인을 맞이할 생각도, 이 상황을 설명할 생각도 없이, 그저 책만 읽고 있다.
…도둑이 아닌 건 확실해 보이니 기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내 집에 들어오니 주인이냐고 물어보니, 그래, 내가 주인이다, 라고 답까지 해 주었는데도 무시당해 슬퍼해야 하는 걸까.
아아, 신이시여.
전 아직 배울 것이 많습니다.
…가 아니라-
이 어린양을 버리지 말아주세요!
이제껏 해온 죄의 벌은 컴퓨터 하나로 충분하지 않았습니까?
“마왕님 마리다.”
껌이 씹히는 소리가 몇 걸음 떨어져 있는데도 들릴 정도로, 입을 쩍 벌리고 쩝쩝 껌을 씹는 남자. 뭐라고 말하는 지 대충은 알아들
으니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껌 씹는 소리는 조금이지만 신경 쓰인다. 저걸 어느 순간 어디에다가 뱉어버릴지 누가 알아.
“마왕은-”
“음? 크리스. 여긴 무슨 일인가?”
내 집에서 주인 취급 좀 해 달라는 것도 이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큰일인가 보다.
이젠 수상한 사람이 우리집 소파에 누워 날 반겨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마왕의 부하 떨거지에 속해 있는 사람 중 한명
이 분명하다. 또 마계에서 온 녀석이라는 생각에, 놀랍다거나, 반갑다거나, 두렵다거나, 라는 느낌보단, 그저 싫다는데도 굳이 잡지
를 우편함에 쑤셔넣는 사람들처럼 귀찮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몰려오는 짜증에 어서 마왕과 함께 내쫓아야지 라는 생
각 밖엔 들지 않았다. 난 어서 마왕을 들여 보내 재회 시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마왕은 내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를 밀치
고 집안으로 들어와 남자를 반긴 후였다.
그리고 필립도 덩달아 날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하기야.
저 사람들에게 허락 받고 집에 들어와 달라는 것도 저 사람들에겐 먹히지 않았지.
“아, 이거 참. 마왕님 아니심까. 이거, 요런 모스브로 찾아 뵈 죄송함미다.”
마왕의 반가워 하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충대충 일어나 대충대충 고개를 숙여 대충대충 반가워 하며 대충대충 인사하는 남자.
“별로 자네에게 격식 같은걸 기대하고 있진 않았네.”
빙그레 웃으며 괜찮다 하는 마왕은 분명 악의가 없었겠지만… 그것보다 왕의 위엄은 어디로 간 거야? 격식 같은걸 기대하고 있지 않았
다니. 그건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친구에게 던지는 말이라구. 절대로 부하에게 절대 충성과 절대 예의를 받아야 할 왕이 할 말
은 아니라구!
저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아.
“그나저나, 무슨 책을 읽고 있는가? 요즘 인간계에선 빨간 책이란 게 유행이라네, 크리스.”
왜 하는 짓 마다 한심하게 보이는 걸까, 저 사람, 정말 왕으로써 있을 자격이나 있는 걸까, 사실 인간계에 온 게 지구를 정복하
러 왔느니 뭐가 아니라, 사실 백성들이 이런 마왕을 견디지 못해 내쫓아 어쩔 수 없이 인간계로 추방당한 거 아냐?
여러 가지 의심과 함께 마계의 어두운 미래에 대한 걱정이 머리를 꽉꽉 채우는 도중, 크리스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마왕에게 다가와 책을 건넸다.
“빨간책요? 나중에 구해서 읽어보죠, 뭐. 그런데, 마왕님. 이 책에서 마왕님은 용사의 검에 찔려 돌아가신 다는데요? 어쩌죠?”
‘크리스’라 불린 남자는 그리 키가 크지는 않은 남자였다. 아니, 나와 비교해 크나 작나 할만한 신장이었지만, 아무래도 키가 큰 마왕과 필립의 바로 옆에 있다 보니 순간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노 만큼이나 바보 같은 책이군. 어디서 구한 책인가?”
대놓고 욕을 먹어도 불평 한마디 없는 유노 씨였다.
크리스가 낀 안경은 얇은 검정 색의 테두리에 얇은 렌즈 덕에 가벼워 보이는 동그란 안경이었다. 그러나 렌즈는 뿌옇게 먼지와 지문따
위로 꽤 많이 더러워져 있어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에 그의 안경은 살짝 금이 간 렌즈도 모자라 오른쪽 안경 다리
는 하얀 색 얇은 천으로 묶어 불안정적이게 겨우 안경과 이어져 있었다.
부스스한 오렌지 색 머리는 마치 만화에서 나오는 폭탄을 맞은 등장인물의 머리처럼 요란하게도 헝클어져 있었고, 지금까지 마계에
서 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계’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후줄근한 어두운 녹색 칠부 소매에 밝은 갈색의 헐렁한 바지 옷차림
을 하고 있었다.
…그래.
방학하고 몇 주일동안 집에서 뒹군 학생의 게으른 기운이 온 몸에서 퍼져 나오는 모습이다.
옷 갈아입기도 귀찮아, 반찬 흘린 자국이 많은 윗도리에, 그냥 아무거나 집어 입은 게 분명한 바지. 머리는 매일 감으나 손질하기 귀찮아 그냥 자다가 일어나 나오니 요 모양.
어차피 밖에 나가진 않을 거니 이대로 있자-
-라는 모습.
인간에게 있어 베일에 쌓인 판타지 이계는 무슨. 분명 토, 일요일의 나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너무나도 인간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크리스가 반가워진다.
“서점에서요.”
“서점은 무엇인가?”
그러나 난 타인과 이야기 할 때,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 하는 버릇은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마왕과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발음이 아주 조금 좋아진 건 사실이다. 모습은 아직 일없어 집에서 빈둥거리는 백수나 다름없지만.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머리에 뿌연 안경에 얼굴이 많이 가려져 있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얼굴인진 자세히 모르겠지만, 가려지지 않
은 부분들이 보여주는, 바깥엔 단 한번도 나가본 적 없는 것 같은 뽀얀 피부에,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마 내 나이 또래인 것 같다.
“서적을 돈을 주고 사는 곳 이에요.”
“신기하군. …그렇지만, 인간들은 마왕은 칼에 찔려 죽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마왕의 눈이 잠시 반짝였지만, 곧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한다.
반짝 거리는 눈으로 아주 잠시 날 돌아본 마왕은- 분명 나에게 데리고 가 달라고 할 생각이 분명해 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마왕의 눈빛을 보지 못한 척을 했다.
엇, 그나 저나 마왕은 칼에 찔려 죽지 않는다니, …그렇지만 온라인 상의 마왕(보스)는 칼뿐이 아니라 화살이나, 창이나, 심지어는 마법소녀의 주먹에도 깨갱하며 죽어, 보스를 깨야만 주는 보물까지의 길도 알려주는데?
마왕을 보고 있으면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인간들의 마계에 대한 환상은 정말 많이 빗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장 먼저 의심이 가는 건 ‘마왕’ 이라는 직업의 위엄.
“…저, 마왕님요, …그건 마족들도 모른다구요. 마왕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이상, 그리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에요.”
“흠. 그렇다면 아마도 난 칼에 찔려 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
크리스가 다시 한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나중에 실험해 보죠, 뭐.”
…뭘?!
“그런데, …필립, 인사 한마디도 안 하기냐?”
크리스가 폭탄 같은 머리에서 손을 떼어 손톱 위를 훅 불며 섭섭하다는 듯 필립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만 그의 뿌연 안경에 그
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뭘 어디에다가 분거야? 대신 청소기를 밀어줄 것이 아니면 머리
의 잔 때는 남기고 가지 말라구!
난 마왕 일행이 듣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필립을 반가워 하던 유노 씨를 대하던 필립의 반응이 생각났다. 마왕님 말고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
는 필립에게 굳이 말을 거는 크리스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생긴 건 온화해 보일진 몰라도, 눈빛은 방금 사람 몇 명은 때려 눕히
고 온 필립이다. 나 같으면 무서워 말도 걸지도 않았을 거다. …그것보다, 마계에서 마왕의 부하니 뭐니 하면서 서로 알고 지냈
을 텐데, 그렇다면 필립이 인사를 해도 반가워 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마계에서 온 사람들은 분명 뼈 속까지 바보인 게 틀림없다.
그러나-
“안녕하셨습니까, 크리스 님.”
마왕 뒤에서 말 없이 서 있던 필립은 망설임 없이 곧 고개를 숙여 크리스에게 인사했다.
…엥?
“음? 뭔가, 인간. 표정이 똥 씹은 표정이다.”
왕이면서 그런 표현은 자제하면 안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며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뭐랄까. 필립이…”
필립이 인사할 줄은 몰랐거든요. 라고 말하자면 바보가 될게 틀림없다. ‘역시 자네는 바보군. 보통 사람들은 인사를 받으면 인사
를 되돌려 준다네.’ –라는 대답을 들을 게 분명하다. …그래. 아마 필립도 그 ‘보통사람’에 해당되는 게 틀림없다. 단지… 유
노 씨만 특별한 케이스인 게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나도 그 ‘특별’ 반에 들어가 있지만.
…그렇지만, 어쩐지 필립의 깍듯한 모습은 마왕에게만 보여 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개를 숙인 필립 앞에 있는 사람이 마왕이 아니라는 사실이 굉장히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필립이 인사를 하는 게 이상한 건가?”
“…예.”
어떻게 안 걸까, 바보는 마왕급으로 바보인 주제에, 가끔 내 마음을 영화 줄거리 이야기 하듯 자세하게도 알고 있는 마왕이 신기했다. 말꼬리를 흐린 체 끝나지 않은 내 질문을 대신 끝내주자, 난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죠. 필립은 마왕님께 밖에 고개 숙이는 법이 없으니까.”
크리스가 작게 하품을 하며 끼어 들었다.
크리스의 말투는 전혀 비꼬는 것도, 잘난 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크리스.
“예? …그렇지만… 필립이 방금 크리스 씨에게…”
마왕과 크리스가 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마왕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크리스는 필립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