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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제12계 순수견양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4 15.02.27 10: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병법삼십육계] 12계 순수견양(順手牽羊)... 

 

 

微隙在所必勝 微利在所必得 小陰小陽

적의 작은 틈에도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곳이 있으며, 적의 작은 이익이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 소음이 곧 소양이다.

 

 

후한말 한중은 오두미도의 교주 ‘장로’가 지배하고 있었다. 황건기의를 일으킨 태평도의 일파로서 오지라 할 수 있는 한중에 자리를 잡고 3대를 이어 오면서 단단히 세력을 굳히고 있던 장로는 이미 촉의 유장을 크게 위협할 정도로 성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천하를 두고 다투는 조조나 유비, 손권 앞에 장로는 고작 익주에서도 절반에 불과한 한중이나 차지하고 큰소리치는 골목대장에 불과했다. 특히 아홉개 주를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던 조조 앞에 수레를 막아서는 사마귀조차도 되지 못했다. 조조가 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들어오자 그동안 키워 놓은 세력으로 몇 차례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던 장로는, 그러나 조조군에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닫자 마침내 한중을 들어 조조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그때는 유비가 유장을 몰아내고 촉을 차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조조의 모사 가운데 유엽이 나서서 조조에게 건의했다.

 

"지금 촉은 유장을 몰아내고 유비가 새로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그에게 기꺼이 승복하고 있지 않으니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안정합니다. 이때 군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가면 손쉽게 유비군을 몰아내고 촉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암우한 유장이라 할지라도 유언으로부터 벌써 2대를 다스리고 있었던데다가, 유비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으로 군사로써 유장을 공격해 그 자리를 빼앗은 침략자였다. 아무리 대세가 흘러가는대로 쫓는 것이 난세라고는 하지만 2대에 걸친 지배가 이방인의 침략에 한 순간에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장의 자리를 빼앗자 유비도 유장을 촉으로부터 멀리 내쫓아 촉 안의 다른 세력과 연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조조가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하게 된다면 아직 온전히 촉의 백성과 유지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유비로서는 형주에서 이끌고 온 자신의 세력만으로 이를 상대해야 했을 것이고, 자칫 유장의 유신들이나 백성들이 조조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안과 밖에서 공격당해 그대로 지리멸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조조로서도 그렇게 속편한 상황만은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수십 년을 하북을 지배해 왔던 원소의 세력은 한 순간에 뿌리 뽑힐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고, 강동에서는 손권이 호시탐탐 강북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한왕실을 위한다며 조조 자신을 죽이려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는 한의 신하들과 양양에 버티고 앉아 조조의 빈틈을 노리는 관우의 존재도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싸움이 일찍 쉽게 끝난다면 모를까 자칫 싸움이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조조가 허도를 비워두고 있는 틈을 타 이들 조조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이 뒤를 공격하여 그를 곤란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망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역시 조조로서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조조는 촉을 공격하는 것이 타당함을 알면서도 군을 돌려 허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만에 하나 유비가 촉을 나와 한중을 공격하는 것을 대비해 하후연에게 한중을 지키도록 명령하고서. 그저 싸워서 이기는 것만을 생각하면 되는 입장에서가 아닌 싸움 그 이상의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치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옳았다.

 

그러나 판단이 옳았어도 그 댓가는 정말 뼈아팠다. 촉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 유비가 한중으로 공격해 들어오자 조조의 가장 큰 공신이자 형제와도 같이 가까웠던 하후연을 정군산에서 잃었을 뿐 아니라, 기세를 탄 유비군에 의해 조조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서서도 끝내 한중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유비군의 한중공략은 가맹관 싸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당시 유비군도 한중을 공격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아직 촉에 대한 지배를 확실히 굳히지 못하고 있었고, 세력에 있어서도 조조군과 겨루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장합이 한호와 더불어 가맹관을 공격하는 것을 황충이 엄안과 함께 막아내는 것으로 아예 쫓아버리게 되자 유비는 그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싸움은 기세다. 한 번 기세를 타면 소수로서도 다수를 몰아낼 수 있는 것이고, 거꾸로 기세를 잃으면 다수로서도 소수에게 쫓길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전장을 전전해 온 유비는 그것을 알았고, 따라서 조조와의 힘의 우열이 분명한 상황에 겨우 찾아온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유비는 군을 일으켜 한중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첫싸움에서 승리한 황충을 선봉으로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가맹관을 넘어 한중으로 진군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세를 잃은 장합군은 패주를 거듭했고, 패주하는 장합을 돕다가 도리어 정군산에서 하후연마저 기세를 타고 밀려드는 황충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중을 지키는 대장인 하후연이 죽고 나니 대세는 이미 결정지어졌다. 조조가 다시 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어도 대세가 그렇게 결정 나 버린 다음에는 어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싸움에 참가하고서 드물게 한중에서 패하여 포기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조조는 유비가 아직 촉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한중을 차지한 기세를 살리지 못해 유비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유비는 가맹관에서의 한 번 싸움의 승리를 기회삼아 그 기세를 살림으로써 하후연을 죽이고 한중을 아예 자기 손아귀에 쥐게 되었다. 기회를 보고서도 그것을 살리느냐, 아니면 그것을 그대로 흘려보내느냐 하는, 순수견양의 실패와 성공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긴 그러고 보면 삼국지를 읽자면 허구헌날 나오는 것이 순수견양이다.

 

하북의 유, , , 청의 네 개 주를 차지하고 있던 원소에 비해 동탁과 이각에 의해 황폐화된 옹주와 겨우 유비를 몰아내고 차지하게 된 서주를 제외한 연주와 예주 두 개 주에서만 확실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조는 세력에서 한참 불리했었다. 그것은 관도의 싸움에서 원소군을 대패시키고 원소마저 패사시킨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단결한 원씨형제와 그 가신들의 힘은 조조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조조는 다음기회를 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확실히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니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조조가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 단결하던 원담과 원상의 형제는 조조가 더 이상 군사행동을 보이지 않자 바로 원소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반목하여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상에게 원담이 패하게 되자 원담은 살기 위해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조조가 노리던 바로 그 기회였다.

 

단결하고 있을 때야 하북의 네 개 주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던 원씨의 세력이 무서웠지만 이렇게 반목하여 분열하고 나면 조조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조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그 머리랄 수 있는 원상이나 원담 모두 조조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싸움은 싱거웠다. 나름 재주를 자랑하던 원상은 조조와 원담군에 크게 패해 유주의 원희에게로 도망쳐 버렸고, 원상이 도망쳐버린 업성은 심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조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사세삼공의 명문이자 공손찬을 쓰러뜨리고 하북에 웅거하며 천하를 호령하던 원소의 기반이 마침내 조조의 손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것도 원씨 일족의 처자들마저 함께. 이것으로 사실상 원씨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조는 방심하지 않았다. 수십 년 하북을 지배해 온 원씨의 영향력은 깊고도 깊었다. 비록 당장은 원상이 패해 멀리 유주로 쫓겨가 있지만 잠시라도 틈을 보인다면 하북의 곳곳에서 원씨를 그리워하여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원씨를 멸망시키려 한다면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야 했다.

 

조조는 군을 이끌고 원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원희가 자사로 있던 유주로, 유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오환의 땅으로 쫓겨 들어가자 이번에는 오환을 공격하여 무찌르며, 마침내 요동의 공손강에 의해 원씨 형제가 죽임을 당할 때까지 조조는 멈추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원상과 원희가 그렇게 죽고, 원담마저 조조에게 대항을 뜻을 품었다 역시 죽임을 당하니 당장 하북이 조조에게 마음으로 복종해 오지 않더라도 더 이상 원씨가 일어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적벽에서 조조가 주유에게 패해 하북으로 돌아가자 유표의 죽음을 틈타 막 얻은 형주는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 있었다. 조조가 임명했거나 유표에 의해 임명되어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 형주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는 있지만 조조의 세력이 확고히 뿌리를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에 그 지배에는 허술함이 많았다. 문제는 그 허술함을 누가 노리고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명분은 동오에게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유비가 한 일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패잔병 소탕 정도? 반면 동오는 싸움의 주력을 맡아 조조를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동오가 형주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비도 동오가 남군을 공격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조가 하북으로 돌아갔어도 남군을 지키고 있던 것은 조조가 신임하던 조인과 악진 등의 역전의 명장들이었다. 결국 남군을 공략하는 과정에 태사자가 죽고 주유가 부상을 당하는 등 동오의 피해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주력이 하북으로 돌아간 남군성의 조조군과 완강한 방어로 피해가 누적되어가는 동오군, 유비의 기회는 바로 그 사이에 있었다. 마침내 남군을 지키던 조조군이 한계에 달해 있을 때 유비는 은근슬쩍 남군성으로 들어가 남군을 차지했다. 그리고 남군에서 입수한 병부를 가지고 양양과 강릉 등 다른 고을을 연이어 공략해 차지했다. 양양과 강릉을 차지하고서는 다시 군을 보내 무릉, 계양, 장사, 영릉의 네 개 군까지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형주의 아홉 개 군 가운데 일곱개 군을 유비의 지배 아래 놓게 되었다.

 

그야말로 얌체같은 짓이었지만 적벽에서의 싸움에, 다시 남군에서의 싸움으로 피로와 피해가 누적된 동오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유비군은 여전히 건재한 채였고, 만에 하나 동오와 유비가 싸운다면 다시금 조조가 밀고 내려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자기들이 차지했어야 했을 땅이 얄밉도록 교활한 유비의 손에 차례차례 떨어지는 것을 그래서 동오는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조가 하북으로 돌아가는 그 틈과 동오와 남군의 조조군이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그 사이를 비집고 기회를 노려 한 번에 쓸어 담듯 거두어들인, 남의 양을 슬쩍 몰고가 버리는(順手牽羊) 유비의 계책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원래 이성계는 고려에서도 멀리 변방의, 고려의 영토라기도 애매한 쌍성부의 토호로서 고려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살던 입장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조정에는 그의 세력기반이 없었다. 비록 여러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군권은 오로지 최영과 그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구세력에 있었고, 조정의 실권 역시 이인임과 그 일파들에게 독점되어 있었다. 이성계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근거지인 쌍성부에서 이끌고 온 사병과 신진사대부들의 지지 뿐이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군을 이끌고 나가 싸워 적을 무찌르는 것 말고는 당시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최영의 요동정벌은 그에게 기회가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고려의 군사력의 전부랄 수 있는 5만이, 최영이 우왕에게 잡혀 평양성에 머무는 바람에 사실상 그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던데다, 요동정벌 계획이 갖는 무모함이 명분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화도에서 장마로 고립되어 있던 원정군 병사와 장수들에게 압록강을 건너 강대한 명군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공포였기에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고 하는 회군의 계획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질적인 힘도 그에게 있겠다, 명분도 그쪽에 있겠다, 이미 싸움은 하기도 전에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고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면서 평양의 우왕과 최영에게로 진격했다. 우왕과 최영이 개경으로 도망치자 이번에는 개경까지 쫓아갔다. 물론 이때도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며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작금의 상황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어차피 고려의 거의 모든 군사는 이성계의 지휘 아래 있었다. 명분도 요동정벌이라는 무모한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니 역시 이성계의 쿠데타군에 있었다. 반면 우왕과 최영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우왕이 평양에서 벌인 일만도 적지 않았다. 기왕에 우열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 그것을 확실히 보여줌으로써 대세를 확정지으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실제 결과도 그렇게 났다.

 

사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에도 고려왕실을 뒤엎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이미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 정황이 있는데, 예를 들어 사실상 볼모로 잡혀 있던 둘째아들 방과가 평양에서 탈출하거나 다섯째 방원이 자신의 계모와 이복동생들과 함께 쌍성부로 탈출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이라며 참요가 도는 것도 그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즉 요동정벌이라고 하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무모한 계획을 하나의 계기삼아 그것으로써 이제까지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 것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싸움 역시 순수견양을 담고 있었다. 사실 한산해전을 비롯한 몇 개 큰 싸움을 제외하고 이순신이 치른 전투를 보면 대개 그 규모가 무척 작았다. 특히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하는 일본 수군의 규모가 조선수군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작았는데, 그러니 이순신은 끊임없이 전선을 출동시켜 이들 소규모 함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 이런 몇 척 안 되는 적선을 부순다고 무슨 큰 이익이 있어서? 그러나 이익은 있었다. 바로 적을 무찔렀다고 하는 이익이다.

 

임진년 초전에서의 패배는 조선군의 장수와 병사들을 충격과 공황에 빠뜨려 버렸다. 싸우기만 하면 지니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함께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이 깊은 곳에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조선수군도 마찬가지였다. 육전에서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수군역시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리가 필요했다. 그러한 패배주의를 날려버릴 승리가. 작은 것이라도 그러한 승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실제 조선수군이 바다를 누비며 작은 선단이나마 꾸준히 부수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그러한 승리에 대한 경험은 누적되어 조선수군의 자신감이 되어 주었다. 조선수군의 승전보는 또한 육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조선군에도 흥분되는 기쁜 소식이었고. 뿐만 아니라 일본군 입장에서도 연이은 패전은 그들을 바다에서 위축되게 만들었다. 마침내 한산도 앞바다에서 무려 70여 척에 이르는 대선단이 괴멸되어 버렸을 때는 일본군은 더 이상 바다에서 이순신을 상대해 싸울 의욕을 잃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순신의 작은 승리들은 조선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조선수군만 보면 도망가게 되어 버린 일본수군 앞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그 길목만 가로막으면 되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그것으로써 일본수군은 완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고, 완벽한 제해권 아래 육전에서도 보급이 끊긴 일본군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작은 승리로써 큰 승리를 일군다, 그래서 순수견양이다.

 

 

순수견양을 잘 쓴 지휘관 가운데 하나로 롬멜을 꼽을 수 있다. 롬멜은 2차 세계대전 초반 프랑스 전역에서 펼쳐진 독일군의 낫질작전에서 아르덴느 숲을 통과하여 뫼즈강을 도하하는 주공의 임무를 맡았던 A집단군의 7사단 사단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워낙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예상치 못한 진격이라 뫼즈강가의 프랑스군은 제대로 독일군의 공세에 대처하지 못했다. 각지의 병력이 분산되어 독일군을 막으러 오다 차례로 분쇄되었고, 사실상 도하를 마친 독일군 앞에 그들을 막을 적이란 없었다. 이때 롬멜의 무모함이 빛을 발했다.

 

사실 롬멜은 지장이라기보다는 맹장에 가까운데, 뫼즈강 도하 이후에도 롬멜은 적의 방어가 예상한 이상으로 한참 취약하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스스로 전차에 올라 프랑스군을 돌파해 버렸다. 돌파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대로 후방을 가로질러 버렸다. 솜강 하구에 도착할 때까지 -그때 롬멜의 휘하에는 전차 3대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전차를 멈추지 않았고 그로써 롬멜에 의해 종단되고 포위되어 버린 프랑스군 10개 사단이 사실상 괴멸되었다. 승기가 보였을 때 신중하여 때를 놓치기보다는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것이 롬멜의 스타일이었고, 그것이 프랑스 전역에서의 유령사단이라고까지 불리웠던 7사단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도 롬멜의 스타일은 여전했다. 일단 승세가 보이면 공격한다. 공격해서 돌파구가 보이면 분쇄하여 종단해 버린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달린다. 적을 완전히 분쇄하고 완전히 포위할 때까지. 그래서 북아프리카에 처음 도착하는 순간 전차 한 대 없이 퀴벨바겐에 판자떼기 올려붙여 만든 가짜 전차를 가지고도 영국군을 멀리 토부룩 동쪽으로 쫓아 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후의 몇 차례 전투에서도 같은 양상이었다. 밀어붙일 때는 화끈하게, 몰릴 때도 화끈하게, 사막이라는 지형도 있기는 했지만 롬멜 특유의 무모하기까지 한 지휘의 결과였다.

 

 

순수견양이란 한 마디로 대세라 할 수 있다. 흐름을 타는 것이다. 물론 그 흐름은 내가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치 슬쩍 양을 몰아가듯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아닌 그것을 관철하여 멈춤없이 결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정치에서도 어느 나라의 어느 정당의 경우, 재보선 등에서의 승리로써 자신들이 지지를 받고 승리를 한 양 꾸미는 데에 능했다. 고작 반 년 임기의 선거에 20%의 투표율이 나와도 이긴 건 이긴 거다. 그리고 이겼다는 것은 자신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며 상대정당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언론의 도움까지 얻어 그런 식으로 몰아가다 보면 결국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을 믿는 사람도 나오고, 특히 상대정당의 경우는 그것이 압박이 되어 자칫 내부의 균열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긴 흔히 선거에서 말하는 바람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지지율이 높다. 사람들이 그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밀고 가는 거다. 쓸데없이 잔재주 부리는 것 없이 이미 높은 지지율을 이용해 그것을 대세로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거다. 나는 이만큼 지지를 받고 있다. 나는 이만큼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의식의 틈을 이용하는 거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좋겠지, 혹은 기왕이면 당선될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좋겠지, 그러는 가운데 지지율 높은 후보에 대한 정보만이 들어오고, 투표는 자연히 대세의 흐름을 따르게 된다.

 

아마 싸움에서 이러한 원리를 가장 잘 이용한 것이 소련의 종심전투교리일 것이다. 넓은 접촉면을 가지고 적과 접촉하면서 돌파구가 생성되면 그곳으로 2, 3차 제대를 투입하여 돌파구를 넓히고 적을 종단하여 추격한다. 종말점은 없다. 적이 완전히 분쇄될 때까지, 적 후방의 핵심에 도달할 때까지, 그냥 내달리는 거다. 돌파구를 내고 종단한 기세 그대로 적의 후방으로 내달려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돌파구를 내고 그곳으로 주력을 밀어넣어 돌파구를 확대하고 최종적으로 목적을 이룰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순수견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본다면야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그 약점을 헤집고 넓혀 이용하려 한다면 욕 먹는다. 아마 이익이 있어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런 사람을 믿고 친분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에 임해서는, 특히 중요한 이해가 걸린 싸움에 있어서는 상처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헤집고 소금을 뿌리고 불로 지져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할 수 있다면 독을 뿌리거나 파상풍균이라도 묻혀주면 좋다. 원래 싸움이라는 것이 싸움에 걸린 것이 클수록 더럽고 치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잔인하고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인 때문이다.

 

순수견양이란 그런 것이다.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하고. 야비하고. 틈을 노린다. 틈이 없으면 만든다. 일단 틈이 보이면 그것을 헤집어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라마지않던 바인가. 그러나 그런 상황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그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것을 이용하기란 또한 쉽지 않다. 그래서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결단해야 한다. 그 결의를. 그 집요함을. 그 철저함을. 그 대담함을. 그것이 순수견양, 병법삼십육계의 열두번째 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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