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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41~53절/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8장 30절부터 자기를 믿는다는 유대인들과 긴 논쟁을 벌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이 논쟁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벌이는 케케묵은 논쟁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과 벌이는 논쟁이지만,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말씀을 주목할 때, 우리는 이 논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과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지적인 논쟁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논쟁을 지적인 수준에서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문의 논쟁을 단지 지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해이고 너무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라고 말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며, 예수님의 판단이기 때문에 옳습니다.(44절)
이쯤 되면 우리는 이 논쟁의 본질이 더 이상 지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지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냐? 영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냐?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수준에 대한 착각과 혼동만큼 오늘날의 교회에서 혼동하는 일이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분별을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영적분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것을 무슨 성령의 은사라고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은사이기 이전에, 모든 그리스도의 사람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게 되는 하나의 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훈련과 영적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오늘날 이런 영적분별이 너무나도 잃어버려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영적성숙, 그리고 영적훈련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영적으로 빈곤한 교회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영적인 문제를 지적인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문제들이 무엇일까요? 지적인 수준에서 문제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시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얻고 그 능력과 지혜로 풀어가게 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 중의 어떤 한 형제나 자매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할 때 그 어려움이 어떤 어려움인가 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복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 지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영적인 문제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에게 적용해보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문제들은 생각으로 풀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문제인지, 내가 어떻게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진단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분별을 요하는 많은 문제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나의 신앙생활 속에서 인간적이고, 지적인 문제로 이해되고 그렇게 접근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어떤 문제는 그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한 진단이 없다면 올바른 해결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1. 명제들본문의 논쟁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명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른 상황에서 말씀하셨던 것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앞으로 말씀하시게 될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요한일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특유한 서술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신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나선형 계단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그러나 단순한 반복만이 아니라, 조금씩 상승하는 그러면서 강조점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도 예수님의 말씀의 강조점들을 이해하면서 요한복음을 읽어가다 보면 점점 그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실 것입니다.1).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43).먼저 43절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명제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잘못 읽으면 이 말씀은 마치 지적인 이해의 문제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기서 하시는 말씀은 소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귀가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 2장 14절에서 바울 사도가 이것은 정확하게 말씀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 말씀을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지적인 이해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2)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믿는다(45~46).45~46절에서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은 앞의 말씀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들은 그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미워해서 죽이고 싶어 할 정도까지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진리를 깨닫는 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복잡한 설명은 하지 말라. 나는 믿기만 하겠다.”라는 태도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고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4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함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리를 이해할 의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입니다.3) 하나님께 속한 자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47).47절에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세 번째 명제가 나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논쟁 가운데서 매우 결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의 더 깊은 원인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신 것에 대한 다른 표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죄인의 구원을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합니다. 흑암의 권세는 마귀의 세력을 표현한 것입니다.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경이 가르치는 이 주장,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옳다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으며, 그래서 믿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그의 말씀대로 행한다(51, 55).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자주 발견하는 네 번째 명제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듣는다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 단어는 기본적으로 듣고 행한다는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십니까? 예라고 대답하신다면, 그 의미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깨달은 것을 순종한다는 것입니다.5)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사랑한다(42).이제 우리는 한 가지 남은 명제로 갑니다. 예수님은 만일 하나님께서 저들의 아버지셨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42절에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2. 예수님의 분석: 이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다.이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마귀에게서 난자라고 하셨고(44),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52). 예수님께서 너무나 공격적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논쟁의 성격,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을 위해서였고, 또한 본문을 읽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논쟁은 지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라고 말씀하시며 너희 속에 진리가 없기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진리를 듣지 못하고 거짓에 속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3. 마귀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라.지금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심각하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인들에게 ‘귀신들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림’이라고 말할 때 마가복음 5장 1~20절에 나오는 거라 사인의 지방에서 본 귀신들린 사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의 용례에서는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가 정산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미치게 한다든지 밤낮을 무덤에 거한다든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몸을 헤치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렇게 미친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정상적이고 지적이며, 논쟁적인 방식으로도 마귀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오해의 핵심은 지적인 영역은 영적인 특별히 마귀적인 영역이 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과학자와 같은 지식인은 귀신과 무관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다 마귀에게 속한 것이고, 그 아비 마귀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지적인 방식일 수 있고, 교양 있는 방식일 수 있으며, 매우 정상적으로 보이고 인격적인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고 보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매우 정상적인 유대인들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예수님이 보신 것처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마귀의 자식으로 판단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제는 논리나 지적인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입니다. 마귀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은 어떤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지정의를 소유한 존재입니다. 그는 지식이 있어서 생각하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적으로 행동합니다. 따라서 마귀는 모든 사람의 지, 정, 의의 수준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귀는 하와와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인을 부추겨 형제를 살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 우리의 삶에 이르기까지 마귀가 해온 일은 사람을 죽이고 진리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또 물으셨습니다. 44절에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아버지인 마귀의 욕망이 그 자식들에게 본성과 본능으로 작용을 하게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경의 원리를 상기하게 합니다. 자식은 아버지의 본성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마귀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들이 그들의 아비 마귀의 본성(욕심)을 그대로 닮아서 행하려고 한다고 지적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죄인의 심령에 심겨지는 것이 중생이요, 거듭남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지적한 것은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나는 욕심이 많아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것이 사람의 기질과 성격 차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거듭나기 전에, 회심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절대주권자가 되시기 전에는 우리는 다 그 가운데서 욕심을 따라 살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바로 그 아비였던 마귀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그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절)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를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를 만들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나 되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행하기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나님은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듭난 자들은 새로운 본성, 하나님 아버지의 본성을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이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도 죽어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죽는다는 것이 분명하신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고, 그분의 선하심을 따라서 살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려는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계신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이며,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도 단지 개성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마귀에 대한 예수님의 또 하나의 지적은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준다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을 상기하게 합니다. 마귀는 진리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있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의 실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한다.”는 말씀은 마귀가 거짓을 말함으로써 자기본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논쟁을 하는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태도가 바로 그들의 아비 마귀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진리만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식임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 복음의 진리를 듣기를, 묵상하기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싫증을 내거나 지겨워하지 않습니다. 찬송가 205장의 가사가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주 예수 크신 사랑 늘 말해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저 뵈지 않는 천국 주 예수 계신 곳/ 나 밝히 알아듣게 또 들려주시오/ 평생에 듣던 말씀 평생에 듣던 말씀/ 주 예수 크신 사랑 또 들여주시오.”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보여주는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를 사랑합니다. 마귀의 자녀는 진리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음의 진리로 만족할 줄을 압니다. 그러나 마귀의 자녀는 복음의 진리는 기본이고 다른 것, 새로운 것, 기적을 달라고 요구합니다.4. 적용: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우리가 싸우는 많은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지적인 수준에서, 인간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영적인 본질을 가지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고 영적인 것들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영적으로만 분별해야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논쟁 속에서 명확하게 하시는 진리의 명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 말씀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 단순한 명제들을 간단하게 넘겨버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단지 내 힘으로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들이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리십시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들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흔들었고, 이것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좀 불안해지기 시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도움을 청하십시오. 내가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복음의 진리를 내게 깨닫게 해달라고, 느끼게 해달라고, 경험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없이는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복된 은혜가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 모두와 그리고 우리들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될 수많은 사람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