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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제14계 차시환혼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9 15.02.28 13: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병법삼십육계] 14계 차시환혼(借屍還魂)... 

 

 

有用者 不可借, 不能用者 求借. 借不能用者而用之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쓸모가 있는 것은 빌릴 수 없고, 쓸모가 없는 것은 빌려 구할 수 있다. 쓸모없는 것을 빌려 그것을 써야 하니 내가 어리고 어리석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리고 어리석은 자가 나를 찾는 것이다.

 

출전은 원나라때의 잡극을 모아놓은 <원곡선> 가운데 <벽도화>의 한 대목이다.

 

眞人云 誰想有這一場奇怪的事 那徐壁桃已着저 借屍還魂去了

진인이 말하기를, 누가 이런 기괴한 일, 서벽화가 그녀에게 붙어 시신을 빌려 다시 환생하는 것을 생각했겠는가 하였다.

 

차시환혼(借屍還魂)이란 말 그대로 시체를 빌려 혼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옛날 중국에 태상노군의 제자로 이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잘 생긴데다 재주도 뛰어나서 태상노군으로부터 불로장생의 술법까지 배웠는데, 어느 날 스승인 태상노군이 있는 선계로 가 노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자에게 말했다.

 

"내 잠시 선계에 다녀오려 하니 내 혼이 떠나 있는 동안 내 육신을 잘 지키도록 해라. 만일 칠일이 넘어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미 신선이 되어 있다는 뜻이니 육신을 화장시켜라."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이현이 선계로 떠나고 육일째 되는 날 제자의 노모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제자에게 전해졌다. 이현의 명을 따르자면 하루를 더 이현의 육신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노모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는 천하에 없을 불효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고민하고 있는 제자에게 함께 이현의 시신을 지키던 하인이 이렇게 조언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겠습니까? 더구나 스승이 이미 육일째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벌써 신선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설사 신선이 되지 않았더라도 벌써 육일을 혼이 떠나 있으니 장부도 썩어 다시 살아나기 힘들 것입니다. 차라리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혼란하던 제자는 마침내 그 조언에 따라 이현의 몸을 화장시키기로 결심했다.

 

결국 제자에 의해 돌아올 육신이 불에 타 재가 되어 버림으로써 이현은 칠일째가 되어 선계에서 돌아오고도 그 혼이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다가는 완전히 죽은 목숨이 되어 버릴 것이고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죽어 거적이 덮여진 거지의 몸을 빌어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빌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선덕여왕 14, 즉 서기 647년 신라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난다. 상대등 비담이 주도한 반란은 여자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데 대한 해묵은 불만에,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 오고 있다고 하는 위기감, ()귀족들의 반란을 억누르기 위해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신진세력을 중용하는데 따른 반발, 여기에 당나라의 태종이 여자가 어찌 왕이 될 수 있느냐며 신라의 사신을 앞에 두고 선덕여왕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다수 귀족의 동조 아래 일어난 반란이었다.

 

당연히 반란군의 기세는 김유신의 진압군마저 한동안 어쩌지 못할 정도로 자못 당당했다. 더구나 반란이 일어난 지 8일만에 선덕여왕이 죽고, 심지어 김유신군이 주둔중이던 월성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심상치 않은 징조마저 보였으니 반란군의 기세는 더욱 올라가고 김유신군의 사기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버렸다. 자칫 이대로 간다면 제아무리 진압군이라도 도리어 반란군에 패퇴하여 모든 것이 끝나버릴 가능성마저 있었다. 방법이 필요했다. 당장의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결국 그날 밤 비담군이나 김유신군 모두 월성으로부터 하늘로 날아오르는 유성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며칠 전 월성으로 떨어졌던 그 유성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시커먼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유성이 떨어지면서 가지고 온 재앙들을 다시금 하늘로 되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는 땅으로 떨어져야 할 유성이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으니 이것은 보통 심상치 않은 조짐이 아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비담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김유신군의 사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러한 기세의 반전을 김유신은 놓치지 않았다. 무어니무어니 해도 김유신은 삼국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유신은 바로 공격을 명령했고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비담군은 잔뜩 기세가 오른 김유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비담의 반란은 진압되고 비담과 그에 가담한 30여 귀족들이 제거됨으로써 진덕여왕과 김유신과 김춘추 등의 신진세력은 더욱 강력하게 신라를 지배하게 된다.

 

물론 그날 하늘로 올라간 유성은 실제 유성이 아니었다. 연에 횃불을 달아 하늘로 띄워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횃불을 연에 실어 띄워 올리면서 사람들을 풀어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무중생유다. 그저 불덩이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것이 마치 어떤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띄움으로써 자칫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을 결정적으로 반전시킨 것이다. 연에 매단 횃불로써 유성을 삼고 유성에 대한 병사들의 미신을 이용하여 상황을 뒤집었으니 시체를 빌어 혼을 되돌린 예라 할 것이다.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콘스탄티노플에 자리한 동로마제국만이 유일한 로마제국으로 남게 되었다. 당연히 서로마제국의 황제 지배를 받던 로마의 교회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문제는 당시 동로마제국이 로마 교회가 자리하고 있던 로마시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재위 시절 동로마제국은 상당부분 로마제국의 영토를 되찾고 최대판도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까지 그 세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토는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아닌데 로마 교회만 콘스탄티노플에 속해 동로마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로마의 총대주교가 동로마제국 황제에 의해 납치되어 굶어죽는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로마교회는 그러한 현실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 여기에는 기독교 교리문제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

 

그러나 문제는 당장 로마교회에는 동로마제국을 상대할 무력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동로마제국 황제는 커녕 당장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족이나 롬바르드족조차 어떻게 할 힘이 로마교회에는 없었다. 어느새 동고트족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반도를 분할하여 지배하게 된 롬바르드족 때문에라도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로마교회를 포위하듯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롬바르드족에 대해서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힘이 필요했다. 로마 교회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그런데 마침 그 무렵 알프스산맥 너머 옛 갈리아의 영토에서는 피핀에 의해 메로빙거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서고 있었다. 물론 어차피 원시적인 봉건사회에서 힘이 있어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피핀은 그 이상의 것을 원했다. 프랑크 영토 안에서 각 봉건영주들과 교회의 충성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그리고 로마교회는 가톨릭을 믿고 있던 프랑크 왕국에서 얼마든지 신의 이름을 빌어 그의 지위와 권리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었다.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피핀은 프랑크왕국의 힘으로써 로마 교회를 보호하고, 로마 교회는 피핀의 찬탈을 교회의 이름으로 공인해 주고. 피핀은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 로마 일대를 로마 교회의 영토로서 선물하였다. 이른바 교황령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피핀의 아들 사를마뉴가 프랑크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로마교회는 그에게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서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줌으로써 동로마제국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그를 올리게 되니 비로소 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새로운 로마제국 황제의 보호 아래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로마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독립하고, 카롤링거 왕조는 찬탈의 명분을 확보하고 동로마제국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손에 넣었다. 의도했던 것은 콘스탄티노플로부터의 독립과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 확보, 그러나 그것을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었다. 그럴 때 그러한 충분한 힘을 갖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그 목표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돌아갈 몸이 없는 혼이 다른 사람의 시체를 빌어 다시 살아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전국시대 말 오와리를 지배하고 있던 오다씨는 원래 시바씨의 가신으로 있던 오다씨에서도 방계로 그 가신으로 있던 한미한 가문이었다. 그러던 것을 오다 노부히데에 이르러 시바씨를 누르고 오와리를 지배하고 있던 본가 오다씨를 쓰러뜨리고 새로이 오와리를 지배하는 다이묘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원래 쇼군이라는 자체가 세이이다이쇼군의 준말로 쿄토를 중심으로 동쪽을 정벌할 때 내려지는 관직이었다가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전구년후삼년의 역을 토벌하면서 동국무사들에게 떠받들려지면서 이후 오로지 겐지에게만 허락되던 것이었다. 따라서 쇼군이 될 수 있는 것은 겐지 뿐이었다. 가마쿠라 바쿠후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야 말할 것도 없이 겐지의 토료였고, 무로마치 바쿠후를 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시카가씨도 원래는 겐지의 일파였다. 에도 바쿠후를 열게 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명목상으로는 겐지의 일파임을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다시 말해 겐지도 아니고 다이묘도 아닌 오다씨로서는 쇼군은 커녕 죠라쿠조차 처음부터 허락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힘은 충분했다. 미노와 오와리는 그 생산이 풍부했고, 라쿠시는 사람과 물자를 오와리로 몰려들게 함으로써 오다 노부나가의 재정을 확충시켜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재정은 병농일치의 농민병이 아닌 전문전투집단으로서의 상비군을 가능하게 했다. 병력도 충분했고 나가야리며 뎃포며 신무기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으며 사이토와 이마가와 등과 싸우면서 단련된 무사들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명분만 주어진다면 에치젠으로 들어가 아사쿠라와 롯가쿠를 쓰러뜨리고 미요시를 쫓아버린 뒤 쿄토를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할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명분이 필요했다. 그로 하여금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모든 이들이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할 명분이. 그때 그가 나타났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원래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쇼군 요시테루의 이복동생으로서 쇼군의 자리가 요시테루에게 돌아가자 출가하여 중이 되어 있다가 요시테루가 미요시에 의해 살해당하자 환속하여 요시테루를 대신하여 쇼군의 자리를 이어받고 바쿠후를 재건하려 유력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던 터였다. 처음에는 아사쿠라를 찾아갔는데 아사쿠라의 당주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그닥 성의를 보이지 않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매개로 당시 한창 미노와 오와리를 중심으로 세를 키우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를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쇼군이다. 비록 미요시가 요시테루를 죽이고 허수아비 쇼군을 따로 세워두고는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요시아키 역시 요시테루의 동생으로서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었고, 따라서 요시아키를 다음 쇼군으로서 앞세울수만 있다면 노부나가로서도 얼마든지 쿄토로 올라가 텐노를 만나고 쇼군을 보좌하여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노부나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노로 가자면 먼저 오우미의 아사이와 긴키의 롯가쿠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아사이와는 이미 이치히메를 통해 혼인동맹을 맺은 바 있었고, 아사이를 움직일 수 있는 아사쿠라는 요시아키에 의해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터였다. 더구나 롯가쿠는 여러 차례 아사이를 공격한 바 있어서 아사이는 물론 아사쿠라와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칸논지의 롯가쿠를 쓰러뜨리고 나면 쿄토의 미요시를 쫓아내고 요시아키를 쇼군의 자리에 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무런 힘도 세력도 없는 요시아키 따위 허수아비로 만들어 두고 그 권위를 빌어 쿄토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일찌기 히라테 마사히데가 쿄토의 텐노에게 막대한 돈을 기부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오다가의 한계를 본 때문이었다. 죠라쿠도 허락되지 않고, 쇼군도 될 수 없고, 그렇다면 무사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면 쿠게에라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무사의 우두머리인 쇼군의 자리나 그 보좌역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텐노를 다시 천하의 중심에 두고 그를 보좌하면 될 일이다. 마침 그때까지도 전국의 일본에는 남북조시대 고다이고 텐노를 지지하여 아시카가씨와 싸웠던 무사들의 후예가 적잖이 남아 있던 참이었다. 그들의 지지만 이끌어내도 쇼군 못지않을 터였다. 단지 당장은 무사로서, 그리고 다이묘로서 무사들의 우두머리인 쇼군의 권위가 필요했지만.

 

처음에는 쇼군을 세우고, 그 다음에는 텐노를 내세우고, 그것을 이어받아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애써 쿠게의 하나인 토요토미씨의 양자로 들어가 쇼군이 아닌 쿠게의 하나, 다이코로써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히데요시든 노부나가든 쇼군이나 텐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의 야심, 자신의 포부가 더 중요했다. 단지 그것을 펼치기에 현실이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기에 쇼군 요사이키와 조정을 이용했을 뿐이다.

 

 

사실 소현세자는 보수적인 서인들에게 있어서도 그리 달가운 대상은 아니었다. 청에 볼모로 가 있는 동안 그가 보고 듣고 배우고 온 문물들을 완고한 서인들의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00년도 훨씬 지난 정조 때에도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하물며 병자호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당시에 있어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죽고 난 다음에는 달랐다.

 

어차피 죽은 소현세자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그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오랑캐의 문물을 다시 조선에 퍼뜨릴 리는 만무할 터였다. 소현세자 자신은 물론 처며 자식들이며 처가까지 철저히 제거되고 몰락했고 보면 그것이 다른 후환을 만들 여지도 없었다. 그 대신 그것을 이용해 소현세자를 죽였을 지도 모르는 - 아니 거의 확실한 - 인조를 압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효종까지 흔들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서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터였다.

 

실제 인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송시열을 비롯한 유림들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가족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인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도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가족들에 대해 압박을 가함으로써 효종의 정통성에 흠집을 냈다. 현종에 이르러서는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통해 과연 왕이란 사대부인가 사대부 이상의 존재인가 하는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아마 그냥 말로 하려 했다면 꽤나 난감했을 것이다. 왕이란 사대부와 같다, 왕이란 사대부와 다르다, 왕의 권위를 흔들고 왕의 정통성을 흠집내고, 죽어나가도 수천수만의 목숨이 죽어나갈 위험한 말과 행동들이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이고 효종의 형이다. 적장자고 세자이며 그 가족까지 무참히 목숨을 잃었으니 그 죽음에 대한 의혹만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함부로 내칠 수도 없고 무턱대고 그에 반발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불리함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어 의지를 부여하는, 그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계책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소현세자야 말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에게 있어 왕의 권위와 겨루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부여하여 이루기 위해 필요한 훌륭한 도구 - 즉 시체였던 것이다. 차시환혼의 또 하나의 유형이다.

 

 

하긴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어딘가 영업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보험이든 정수기든 아무튼 사람들과 계약을 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수입으로 하는 영업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 가장 먼저 무얼 할까? 가족부터 찾아가지? 친구를 찾아간다. 그리고 더 이상 연락할 가족과 친구가 없으면 그 다음에는 더 먼 친척과 더 먼 친구와 심지어 그저 이름만 아는 사람들까지 찾아가 인연을 내세운다. 그저 중학교 다니면서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찾아가 친한 척 하며 물건을 사줄 것을 요구한다.

 

예전 코미디 가운데 그런 게 있었다. 혼자가 된 늙은 어머니가 자식 부부와 이야기를 하다가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아이구 영감~!"

 

하며 과장되게 우는 내용의 코미디였다. 이때도 죽은 아버지를 끌어들임으로써 늙은 어머니는 더욱 자신을 불쌍하게 만들고, 세상에 불효자식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구나 죽은 아버지까지 끌어들이며 섧게 울고 있으면 어쩐지 자기 자신이 나쁜 놈이 된 듯 여겨지기 마련이다. 어머니 혼자서라면 크게 문제가 아닐 것이 죽은 아버지를 끌어들여 몇 배나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이것도 차시환혼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차시환혼의 혼이란 "의지". 시체란 그 의지를 담기 위한 "수단"이다. 원래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스스로 담아 구현하기 힘들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러한 수단을 스스로 갖지 못하면 의지는 구현될 수 없게 된다. 구현되지 못한 의지는 허깨비며 망령이다. 따라서 의지가 있다면 그 의지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담기 위한 수단을 다른 곳에서 빌려서라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하자면 자신이 갖고 있는 수단은 살아있는 몸이며 빌려온 수단은 자신의 것이 아니니 시체인 것이다. 그 시체로써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 차시환혼인 것이고.

 

예를 들어 불과 20여 년 전 특정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오고 여당이 되었을 때 정작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세 개의 야당이었다. 그러자 그 여당은 공작을 통해 다른 두 개의 야당을 끌어들여 거대여당을 만듦으로써 도리어 상황을 역전시키게 된다. 10여 년 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힘들 것 같자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다른 후보자를 끌어들여 정책적인 연대를 함으로써 그 지지층을 흡수해 선거에서 이기고 있기도 했다. 정치라는 것이 특정 정파, 혹은 정치인의 정치적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행위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결국 정치에 있어 보다 수월하게 자신의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이 경우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적 의지가 혼, 그를 위해 끌어들인 다른 정당과 다른 정치인이 시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시체를 빌어 의지를 담는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앞서 이현의 고사에서도 이현이 얻은 시체는 절름발이에 애꾸였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멀쩡하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 불편하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실제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원수를 갚고자 청군을 끌어들였다 명을 멸망시킨 역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고, 구한말 조선의 개화파들은 일본을 끌어들여 근대화를 이루려 하다가 도리어 나라를 빼앗기는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따라서 시체를 고르려 할 때도 항상 살피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이 시체의 몸이 나에게 맞을 것이냐? 탈이 나거나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냐? 오히려 이로 인해 나 자신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냐? 시체를 보고 나를 본다. 나를 보고 시체를 본다. 그렇게 면밀히 따지고 계산한 뒤에야 그 시체를 빌어야 할 것이다. 시체를 빌리더라도 그에 맞게 자신의 의지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인간의 말이나 행동은 결국 의지의 발현이다. 먼저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구체화하기 위한 수단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기도 하고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의지만큼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그 의지를 담기에 부족하면 빌려야 하고 없어도 빌려야 한다. 빌릴 수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 시체가 없으면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것이 아니더라도 내 것처럼 나의 의지로써 쓰는 것, 그것이 병법삼십육계의 열네번째 차시환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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