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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필립.”
“뭔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물어봐.
‘하하. 미안한데요, 필립. 나 잠시 당신이 마족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 이제 탁 터놓고 이야기 해 봐요. 당신은 사이보그? 아님 안드로이드?’ 라고.
“네가 필립이냐?”
어째 물어 볼 수도 없고, 안 물어보자니 답답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있었다. 훤칠
한 키에, 단단한 팔 근육을 자랑하듯 입은 반팔. 그 뒤에 몇 명 덩치가 꽤 큰 남자들도 있었다. 인간이 아냐. 도대체 뭘 먹
고 저렇게 자란 거래? 용건이 뭔지, 어떻게 필립의 이름을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거인 같은 남자들의 몸을 보며 입을 쩍 벌
려 놀라고 있는 나였다.
그러나 필립은 나와 다르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거인 같은 남자들은 필립에겐 잠시동안 눈길을 줄 거리도 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
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둘러쌓고 그를 노려보고 있어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필립이 조용히 대답했다.
“인간 따위에게 나의 이름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이 자식?”
가장 앞서 있는 남자가 장난 섞인 웃음을 흘리며 필립의 멱살을 잡았다. 팔을 굽히니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이는 그의 팔 근육. 오
메, 기 죽어. 같은 남자인데도 왜 나와 저렇게 틀린 걸까. 남들 잘 시간에 체육관에서 아령이랑 놀고 있었을까. 도대체 뭘 먹
은 걸까. 이 남자도, 뒤의 남자들도. 이런 근육맨들과 섞여 좋은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덕분에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들을 불
러오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남자들이 들고 있는 수상한 물건들에 난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그 몸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왜 무기를 들고 오는 건
데? 야구 방망이에, 쇠 방망이에. 어디 선가 많이 본 장면에, 이 이야기가 대화로 시작해 대화로 끝나지는 않을 거란 불안한 느낌
에 난 몸을 떨었다.
“다시 한번 내 몸에 손을 데면 네 놈의 더러운 팔을 베어버리겠다.”
뒤의 인간은 오메, 기 죽어-하며 움츠리고 있는데, 필립은 빠른 손 놀림으로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벌써 지루해진 모양이었다. 뒤
에 서 있는 나에게 필립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필립의 목소리에선 저 덩치들을 상대하는 게 굉장히 귀찮다는 필립의 감정이 드러
나 있었다.
남자의 손을 굉장히 쉽게 내려친 필립을 보고, 놀람과, 두려움으로 눈이 휘둥그래진 남자들. 그러나 곧, 자신들에겐 필립이 당해
낼 수 없는 숫자만큼의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억지로 웃어보이는 남자들. 앞장 선 남자가 필립이 친 손등을 슬쩍 문지르며 옆
에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더럽다고 했다.”
친절하게도 재방송까지 해 주는 필립을 보며 나는 기도를 시작했다.
신이시여.
참 취미도 고약하십니다.
그놈의 뱅글바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구요!
저, 정말로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매년 크리스마스 때 마다 꼬박꼬박 선물을 받을 정도로, 착한 어린이라구요!
산타 할아버지가 사실은 저희 부모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환상을 깨지 않도록 일부러 모른 척 해 주는 착한 아들이라구요!
그런데 왜!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살아 돌아가게만 해 주세요.
아멘.
“더러워?-”
남자가 작게 욕을 내뱉었다.
“-더러운 건 오히려 네 놈이잖아! 남의 여친이나 홀리지 않나. 네 놈이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립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였다. 나는 그가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 차마 생각도 하지 못해, 필립
에게 피하란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필립은 능숙한 몸짓으로 남자의 주먹을 쉽게 피했
다. 그러나 필립이 피하는 곳에는 이미 남자의 다른 손이 달려오고 있었다.
안돼!
나는 눈을 감았다.
“으억-”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필립이 맞는 순간은 도무지 보지를 못하겠어, 그를 도와줄 생각보다
는 날 보호할 생각이 앞서 있었다. 그리고 곧 귀에 들린 건, 누군가가 맞는 둔탁한 소리와, 한 남자의 고통의 신음 소리였다. 그
러나 그 목소리는 필립의 것이 아니었다.
살짝 실눈을 뜨고 보니-
“죽여버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땅에 배를 잡고 쓰러져 있는, 앞장서있던 남자. 괴로운 듯 콜록콜록 기침을 하던 남자는, 곧 일어나 앉으면서 괴로운 듯, 그리고 화가 난 듯 필립을 가리키며 외쳤다.
순간이었다. 남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내 두 배는 되어보이는 남자들에게 둘러 쌓인 필립. 어떻게 피할 시간도, 대항할 시간도, 틈도 없이 남자들에게 가려진 필립이었다.
“피, …필립!!”
꽤 큰 키의 필립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필립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필립에게서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
다. 남자들의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서로를 보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듯 웃는 덩치 큰 남자들을 보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
만, 도무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발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악! 아, 안돼!! 안돼!! 필립! 이봐요! 그만해요!! 뭐 하는 거에요? 그만두라 구요!!”
필립은 내 부름에 대답하지도, 고통에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퍽, 퍽, 둔탁한 소리가 귀에서 울리고,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
었다. 필립. 필립이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안돼. 안돼. 가서 도와줘야 해. 움직여. 움직여. 제발. …제발 움직여줘, 다리야.
모리, 이 자식. 월요일에 보면 죽여버릴 거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게 다 네 놈이 그 딴 소리를 해서잖아! 정말 남자친구가 와서 시비를 걸 줄 누가 알았냐구!
다리야, 다리야- 움직여라, 움직여!
그 순간이었다.
“세계의 어둠이여-”
분명 필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고는 하지만, 그게 필립의 소리를 듣지도 못할 정도로 크지 않아, 왜 필립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
는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내 생각이 옳았다. 필립의 작은 중얼거림이 시작되자, 발소리에도 똑똑히 들리는 그의 조용
한 목소리였다.
그치만 이건 안돼!
“으아악! 그건 더 안돼! 필립!! 여기선 안돼요!! 그만둬!!”
“으억-”
“필립!!”
순간 나의 말을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 게 분명하다. 마법을 쓰면 안 된다고 예전에도 그랬었다. 그땐 마왕 핑계를 대어
서 다행이 필립이 마법을 쓰지 못하도록 막았었고, 이번에도 그것이 기억 난 듯 주문따위를 외우다 말고 잠시 멈춘 필립이었다. 그리
고 아주 잠깐, 남자들이 움직이며 그 틈으로 보인 필립의 얼굴. 땅에 쓰러져 남자들의 발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던 필립의 얼굴
은 이미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를 제지한 날 째려보며 결국 뒤통수를 발에 맞아버린 필립이었다.
그렇게 다시 그를 둘러싼 남자들 가운데로 모습을 감춘 필립이었다.
“피, …필립-”
그 순간, 내가 무슨 생각으로 나보다 몸집도 큰 녀석들에게 덤벼들었는지 모르겠다. 가장 밖에 있는, 그것도 가장 몸집이 커 보이
는 남자에게 뛰어들어 뒤에서부터 그의 목을 안아 그에게 매달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있는 힘껏 그의 등을 때려봤지만, 편안한 안마정
도로 생각하는 남자. 때린다고 해서 떨어지지도 않아 난 무조건 남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 이 자식들- 그, 그만둬!! 그만두라구!!”
남자가 드디어 필립에게서 떨어져 나를 등에 반 업은 채로 뒤로 돌아섰다. 그가 돌아서자 그의 목에 매달려 있는 나 역시 뱅글 돌아
갔고, 덩치 큰 남자는 욕을 내뱉으며 나의 손을 그의 목에서 떼어보려고 나의 손목을 잡아 반대쪽으로 당겼다.
그러나 난 손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떨어져 주면 다시 필립을 때릴거잖아! 이를 악물고 있으려니 남자가 다시 한번 짜증 섞인 욕을 내뱉었다.
“뭐야, 이 자식!”
으앗- 때리지마!
난 아픈 거 싫어.
난 아픈 게 싫어.
“여럿이서 한 사람을 그렇게 때리는 게 어디 있어!! 비겁해!! 그만하라구!!”
“뭐야, 이 자식! 이거 놔!!”
한 사람이 여럿에게 덤비는 건 너무 무모해. 그만해. 그만하라구!
“싫어!! 이 덩치만 큰 바보들아!! 경찰 부를 거다! 그만두란 말야!”
너야말로 그만해!
내 몸의 세포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난 아픈 건 싫어. 고통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아픈 건 죽는 것보다
도 싫어. 무서워. 뇌는 그만 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냐구. 그러다가 너만 다칠 거야.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될거라구.
눈을 감으면, 그 날의 일들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는 것만 같았다. 지난 날의 고통과 함께, 누가 때렸는지도 모르고 살을 뚫
던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해 지른 귀를 뚫던 비명. 큰 몸집에, 큰 주먹. 왼쪽 팔 뼈에 금이 가는 순간. 차마 말로 전하지 못
할, 왼팔에 전해진 지옥 같은 아픔. 야구 방망이의 단단함, 고통을 참지 못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할퀴려 했던 손톱 끝의 아
픔.
차라리 죽어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름이 돋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시던 일 계속하세요’ 라고 말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어차피 나 싫다
는 필립에게, 내가 도움을 준다 해서 그가 기뻐할 리가 없잖아.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해도, 감사해 하지 않을 거라면 내
가 이 짓을 왜 하는 거야? 바보. 얼간이. 그러니까 어서 놓으란 말이야. 지나가다가 멋모르고 말려든 행인1 행세를 하고는 그
냥 지나가면, 다칠 일 없잖아.
그렇지만 도무지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덩치 큰 남자의 목을 잡은 나의 손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을 쉬기 힘들어 나
의 손등을 할퀴고 있는 남자.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손톱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아픔에도 불구하고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씨, 이 새끼가 정말-”
“으악!”
자꾸 뒤에서 알짱 거리며 매달려있는 내가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온갖 힘을 써서 나의 손을 떼어 날 뒤로 내팽개친 남자는 작은 기침
을 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땅에 내던져져 땅과 진하게 박치기를 한 엉덩이의 아픔아 가셔라, 엉덩이를 문지르며 겨우 일어나니, 어
느새 남자가 복수를 위해 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신경질을 확 내면서 달려오는 남자의 주먹이 언제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그저 아
픔에 비명을 지르고 나니 어느새 난 땅에 누워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 필립에게서 떨어져 날 때린 남자를 제외하고, 다른 남학생들이 쓰러졌다.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진 알 수 없었
다. 계속 신나 필립을 발로 차고 있던 남학생들이 소리없이 동시에 쓰러지며, 그 가운데에선 눈을 번뜩이고 있는 필립의 모습이 드러
났다. 아주 잠깐, 그의 오른손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는 걸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필립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내 앞에서 ‘
별것도 아닌 게 귀찮게 하고 있어’ 라고 중얼거리며, 한 주먹에 땅에 누워있는 날 비웃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인간에게 손을 대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
“뭐? 이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무래도 날 한번에 때려눕힌 게 자신감을 향상시켜준 모양이었다. 피식 웃으며 필립에게 주먹을 쥐고 달려가는 남자. 나는 그를 막
을 수 없었다. 아직 뺨에서 가시지 않은 아프도록 얼얼한 주먹의 느낌에 한쪽 뺨을 뜯어버릴 듯 잡으며 갑작스러운 반격의 충격에
서 헤어 나오려 아직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그 더러운 손으로 마왕님의 소유에 손대지 말아라.”
그러나 필립은 나의 도움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볼수도 없었던 남자의 주먹을 익숙한 몸짓으로 피한 필립은, 남자
가 다시 한번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두꺼운 남자의 손목을 둘러싼 필립의 긴 손가락을 멍청하게 쳐
다보던 남자의 얼굴이 곧 새하얀 백지 창처럼 창백해졌다.
“알겠나?”
겨우 손목을 잡힌 것 가지고 두려워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곧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필립의 다른 한 손은, 남자
의 팔꿈치 뒤에 있었다. 손 끝을 모아, 언제라도 그의 팔꿈치를 찔러버릴 것 같은-, 반대 방향으로 팔을 꺾을 것 같은 필립의 손
가락 끝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순간, 내 뺨의 고통따윈 잊게 할 만큼의 살기에 소름이 돋았다.
“알겠냐고 물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필립의 눈이 짜증과 분노로 번뜩였다.
필립의 손가락의 끝만 계속 지켜보고 있는 남자는 감히 필립과 눈을 마주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망적으로 필립의 뒤에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지만,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셋 셀 동안 대답하지 않으면 네 놈의 팔 뿐만이 아니라 온 몸을 산산조각 내겠다. 하나,…”
공포에 질린 남자는 늦기 전에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네게 볼일은 없다.”
“컥-”
필립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필립의 재빠른 주먹이 남자의 가슴에 꽂혔다. 남자의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거인 같은 남자는 땅으로 쓰러졌다.
잠시동안 필립의 발 소리가 들렸다. 점점 더 가까워 지고 있는 필립의 발 소리에 이제 끝난 건가- 조금은 안심해 버렸다. 그러
자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정말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어. 나 죽은 건가? 안 죽었겠지? 필립도 안 죽었겠지? 다 괜찮은 거
겠지? 내 팔, 내 팔은 부러졌어? 또 부러지면 안 좋은데. 아아 피곤해.
그리고 곧 내 앞에서 필립의 발 소리가 멈추었다.
“인간, 죽었나?”
“…죽지 않았어요.”
“그래. 납치당하지 않게 보호하라 그랬지만, 다치지 말게 하라는 소리는 없었다. 네가 사신에게 납치만 당하지 않았으면 되었으니. 일어나라. 나는 너의 손을 잡아줄 생각이 없다.”
마왕의 바보 같은 말에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마왕이 ‘납치당하지 않게 보호하라’ 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내 말은 듣지도 않았을 거고, 마법으로 모두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어구, 알았어요….”
잠시나마 당신이 날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게 어디냐, 라고 생각하며 난 일어나 앉았다. 땅
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맞을 때는 몰랐지만, 맞고 난 후에야 오는 아픔들에 얼굴을 찌푸리
며 난 작은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경찰에 신고해버릴 거다.
겨우 여자친구에게 차였다고, 다른 사람에게 살기를 품을 필요는 없잖아. 어느 학교에 누구인지 꼭 알아내서 신고할거다. 거기에다
가 친구의 여자친구를 ‘빼앗은’ 놈에게 복수하겠다고 따라와 준 녀석들은 또 뭐야? 한심해 죽겠어. 미친 놈들 같으니라구. 모든 것
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구.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중얼중얼 온갖 불평불만을 중얼거리니, 필립이 날 미친 놈 보듯 내려다 보았다.
“뭘 봐요? 혼자 말하는 사람 첨 봐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이잖아. 사실 누군가가 필립에게 반했다는 것은 분명 필립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립
은 누군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한다면 대놓고 싫어하는데다가, 도대체 누가 반해서 고백하라고 강요하기라도 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
만… 이 갑작스러운 습격의 타깃이었던 필립은 멀쩡하고 어째 가장 피해본건 나라는 생각에 필립이 얄밉게 보였다.
일어나 앉아, 필립 뒤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 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안심과 함께 다시 고개를 떨구는 순간, 맹
점 안에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잘못 본 것 같지가 않아 재빨리 고개를 드니-
“이 자식!!”
“필립!! 뒤에-”
-푸욱
눈 깜빡 할 새였다. 정말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사라의 전 남자친구가 어디에 숨겨놓은 건지, 칼 같은 뾰죽한 것을 들고 필립쪽으
로 달려오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친구들을 모른척하고,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남자를 보고 기겁해 남자를 가리키자, 아무것도 모
르고 뒤를 돌았다.
“피, 필립!!!”
필립의 살에 들어가는 칼의 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려와 귀에 박혔다. 푸욱, 소리를 내어 필립의 배를 찌른 칼. 나는 그 순
간 얼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건지, 놀란 건지, 아무 말도, 소리도 내지 못하는 필립을 대신
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은 공포가 날 엄습했다.
그러나 필립은, 언제나처럼, 이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남자의 뺨을 때린 필립. 의외로 남자는 쉽게 떨어져 나갔고, 덕분에 손잡이가 비어있
어 칼의 손잡이를 잡은 필립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도와줄 틈도, 놀랄 틈도 주지 않고, 필립은 그의 배에 박혀 있는 칼을 뽑았
다.
“…피-”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먼지가 묻은 교복을 탁탁 털며 배를 움켜쥔 필립. 한 손에 쥐어진 칼을 보고 얼굴을 더 일그러뜨린 필립은 주
위를 둘러보더니, 가게 옆에 있는 휴지통에 칼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 쓰러져있는 남자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필립.
“이 자식- 괴, …괴물이다! 으, 으아악- 놔, 놔!! 이거 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필립은 그저 남자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칼을 뽑아 버린 필립
을 보고 단단히 겁을 먹은 남자는 공중에 손을 휘두르며 누군가를 뿌리치려는 시늉을 한다. 공포에 질려 헛손질을 하는 남자의 멱살
을 잡는 필립. 남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거리를 울렸다. 남자의 필사적인 손짓이 필립의 손등을 할퀴었다. 필립이 손을 들었다.
“피, 필립! 그 사람을 놔줘요! 놔줘!!”
“…쳇.”
아직 뺨이 얼얼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필립이 저 남자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재
빨리 일어나 필립의 팔을 잡아 그를 멈추었다. 필립이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았지만, 곧 남자의 멱살을 놔주었다. 남자가 뒤로 기
어 필립에게서 벗어나더니, 곧 일어나 반대쪽으로 뛰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쯤에야 비로소 난 필립의 손을 놔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니, 내가 한 건 필립의 이름을 부른 것 밖엔 없었다.
그렇지만- 이제 끝났다.
지키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도, 구해주지도 못했지만…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내가 죽도록 한심하고 미웠지만…
끝이야.
끝났어.
이제 괜찮아.
그러나 곧, 배를 잡고 잠시 작게 신음하던 필립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주저앉았다.
“필립!! 필립, 괜, 괜찮아요? 마, 맞아. 칼이… 칼-, 배, 배가-”
아냐. 끝이 아니야.
필립. …필립이 찔렸어.
안돼.
“필립, 필립! 괜찮아요?”
“소란 피우지 말아라. 시끄럽다.”
“그치만… 그치만…. 집- 집! 집으로 가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필립이 날 싫어하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필립의 몸에 손을 대는 것
도, 심지어는 스치는 것도 싫어할 필립의 손을 잡아 그가 일어날 수 있도록 끌어당겼다. 끌어당기니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털며 일
어나는 필립은 온갖 오만상을 지으며 불만을 표했다.
“뭐 하는 건가, 인간.”
필립이 싫다는 듯 나의 손을 억지로 떼었다. 그러나 난 당황해 필립의 다른 손목을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필립이 싫다는 듯 나
의 손을 뿌리치려고 별 수확 없는 시도를 해본다. 평소라면 쉽게 뿌리칠 수 있을 나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지친 필립을 보
며 난 비명을 지르듯 소릴 질렀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집! 집에 가요!! 어서 가자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마왕님을 기다려야 한다.”
필립이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았다. 마왕의 의지가 아닌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듯, 필립은 일어날 생각도 없어보였다.
“지금 이 상태로 기다리고 있다간 영원히 마왕 못 볼거라구요! 그러니까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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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 뵐게요~
-히로몬